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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비의 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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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첫 번째 원정(222년~223년)3. 두 번째 원정(224년)4. 세 번째 원정(225년)5. 조비의 남방 정벌의 평가와 영향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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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릉대전 이후 위나라 황제 조비 오나라에 대한 공세. 모두 세 번의 원정이 있었고, 세 번 다 실패함에 따라 삼국의 정세가 고착화 되었다.

2. 첫 번째 원정(222년~223년)

오나라가 촉한의 공격을 물리쳤을 무렵, 위나라의 황제 조비 신비 환계를 오나라에 보내 오왕 손권의 세자인 손등을 인질로 보내라고 최후 통첩을 했지만 애초부터 손권은 진심으로 항복할 생각이 없었던만큼 이를 깔끔하게 거부한다.

손권은 이미 이전부터 사실상 독립 세력이었고, 조조-조비에게의 신종 역시도 촉을 상대로 형주를 탈환하여 독립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대전략의 일환이었다. 처음부터 독립을 목표로 삼던 오는 형주 원정 당시에도 위의 간섭을 막기 위해 사신을 보냈고, 이릉대전에서 위가 보낸 지원 제안 역시 거부하며 위나라가 자국의 세력권에 간섭하는 일을 일관되게 회피해 왔다. 이런 복잡한 외교적 줄타기 끝에 촉과의 형주 문제를 위국의 간섭 없이 이릉대전으로 정리해내는데 성공한 손권의 입장에서는, 볼모를 보냄으로서 완전히 오를 신하국으로 종속시키려는 조비의 요구를 따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222년 9월, 조비는 조휴, 장료, 장패에게 동구로 나아가게 하고 조인에게는 유수로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 문빙에게는 강릉으로 진격을 명한다. 손권은 조비군이 남하하자 여범, 전종, 서성 등에게 다섯 군대를 인솔하여 수군을 이용해 조휴 등을 막도록 하고, 제갈근, 반장, 양찬에게는 남군을 구하도록 했으며, 주환을 유수의 도독으로 임명하여 조인을 막도록 했다.

사실 손권 역시도 유비와의 싸움으로 병사들은 지쳐있었고 당시 양, 월 땅의 이민족의 대다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 이민족은 또 다시 때는 이때다 하면서 날뛰던 상황으로 내부적으로 환난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손권은 조비에게 편지를 보내며 과장된 겸허함으로 마지막까지 조비의 원정을 외교적으로 무마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조비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조비는 원정의 책임을 대신들에게 돌리면서도 손등을 볼모로 보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와 촉의 형주 줄다리기가 마무리되고 오가 남방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할 순간이었으므로, 즉위 초반인 조비로써는 오의 신하국 지위를 확실히 굳힐 필요가 있었다.

외교적 해결이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자 손권은 더이상 독립의 뜻을 숨기지 않았다. 손권은 아예 스스로 연호까지 정하며 사실상의 독립 선포를 했고, 이에 위군은 남하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손권은 적벽대전부터 몇 차례나 조조를 막아서 왔던 장강이라는 든든한 장벽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번 조비의 원정은 단순히 장강 방어선만으로 무마하기 어려울 만큼 대대적인 원정이었다.

위는 조휴를 필두로 하여 20여개 군으로 유수구를 강하게 압박하였는데, 이 병력은 조인의 7군이 3만이었다는 사실에서 역산해보면 약 9만으로서 단일 거점에 가해진 압력으로서는 삼국지 최대규모에 속한다. 오의 수도에 접한 유수구의 지리적 특성상 손권은 수도 앞마당에 가해진 9만 대군의 압박을 방어하기 위해 주력 상당수를 유수구에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 대가로 막 차지한 형주의 주요 거점들은 위의 대군에 직접적으로 노출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손권은 이런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고 장강에서 적이 된 조비를 맞아 싸운다. 이때 조휴 등이 여범을 상대로는 선전했으나 계속된 대치를 뚫지 못하고[1] 강릉에서 주연이 고립된 채로 6개월 동안 전염병에 시달리면서 분투하였으며 유수구에서는 대사마 조인이 주환에게 깨지고 하제 등의 원군이 도착하자 결국 실패하고 만다. (222년)

겨울 10월, 손권은 유비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유비는 태중대부 종위(宗瑋)를 보내 답례했다. 단, 오-촉 외교관계의 완전한 복원은 유비 사후에서야 이뤄진다.

11월 여범의 군사는 태풍을 만나는 등 고생하지만 전종 서성의 활약, 그리고 하제 돈지랄을 보고 겁먹은 조휴군은 결국 퇴각한다. 강릉과 유수에서는 계속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12월, 손권은 유비에게 화친을 청한 이후 유비가 보낸 편지를 보고 정천을 보내 유비와의 우호를 회복하지만, 조비와도 의연하게 편지를 왕래하는 능구렁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다음해(223년) 정월에도 위나라의 강릉에 대한 공격은 계속됐고 조비군이 강릉의 모래톱을 점거했으나, 손권이 강하산에 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3월 달에는 주환 조인, 왕쌍, 상조 등을 격파. 강릉 쪽도 주연의 신출난 활약으로 적을 물리친다. 상조와 조태(조인의 아들)는 주환에게 격파되었다. 결국 3월 8일 조비는 완성에서 궁으로 돌아왔다. 그 달 19일, (작년 11월에 대사마로 승진한) 조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달 역병이 크게 유행했다는 기사를 보아 퇴각에는 장강 유역의 전염병이 얼마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4월, 손권은 주위 사람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하지만 이를 거절한다. 한편, 촉한에서는 소열제 유비가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풍희를 보내 이를 위로한다.

3. 두 번째 원정(224년)

224년 7월, 손권이 위와의 교류를 끊자 조비는 손권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신비는 조비에게 " 님 아버지도 못한 일인데다가 그때보다 군사는 더 적어졌는데 어떻게 이기려고? 열심히 개간이나 해."라고 말하자 조비는 저 호로 같은 놈들을 자손들에게 남겨주어야 되냐고 답문했다. 이에 신비는 문왕 주나라 무왕에게 넘겼음을 상기시키지만 조비는 듣지 않고 8월에 수군을 만드는데, 어좌선을 건조하는 와중에 제갈탄은 죽을 뻔하고 두기가 어좌선을 건조하다가 죽는 등 조짐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비는 사마의를 남겨 허창을 지키게 하고 서선, 유엽, 조휴, 조엄, 위진 등을 이끌고 채하, 영수를 거쳐서 회하에 배를 띄워 수춘까지 간 다음 9월달에 광릉에 도착한다.

하지만 조비가 도착해서 본 광경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곳에는 울타리가 있는데 성벽은 수백 리나 뻗쳐져 있고, 배로 장강의 물이 가득 차 있으니 위가 비록 무장한 기병을 일천 군을 갖고 있다고 하여도 쓸데가 없어보였다. 조비는 대강을 바라보며 "저곳은 인물이 있으므로 도모할 수가 없겠구나."며 탄식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서성의 계략이었는데, 그는 예전부터 계획을 세워 건업을 따라 울타리를 쌓고, 부락을 지으며, 울타리 위에는 임시 누각을 설치하며, 강에는 배를 띄워놓았다. 즉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놓은 것. 여러 장수들이 소용 없는 일이라고 했고 건강실록에 따르면 심지어 손권도 그렇게 여겼지만 서성은 듣지 않고 완고하게 세웠는데 효과가 있었던 것. 사실 웃기거나 멍청한 짓은 아니고 위성계(僞城計)라고 엄연히 있는 병법으로, 실행해서 성공까지 한 건 서성이 뛰어났던 거다. 간보의 진기에 따르면 조비가 광릉에 있으니 오나라 사람들이 크게 놀라 마침내 강을 임하여 가짜 성을 만들었는데 석두에서 강승에 이르기까지 수레를 나무기둥으로 삼고 옷가지를 삿자리로 삼고서 채식을 가하니 하루저녁에 완성되었다. 위나라 사람들이 강의 서쪽에서 바라보고 심히 두려워하니 마침내 퇴군하였다.[2]

그후 조비는 용주에 탔으나 이번에는 폭풍을 만나서 표류하다가 거의 전복되어 물에 빠질 뻔하고 서선은 이곳에서 파도를 타며 앞으로 나아가는 기행까지 보여준다. 이게 정말 위험했던게 포훈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황초 6년(225) 가을에 문제는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크게 논의하도록 했는데, 포훈이 정면을 향하고 간언했다.

왕의 군대가 자주 정벌하러 나갔지만 승리하지 못한 것은 모두 오와 촉 두나라가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자하고 있고, 산과 물의 험난함에 기대어 있어 공격하여 얻기 어려운 지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오를 정벌한 때 용주가 표류하여 오나라 군사가 있는 남쪽 해안에 떨어져 있었으며, 폐하의 옥체는 위험에 처했고, 신하들은 간담이 부서질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종묘는 거의 기울어 엎어지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백대의 교훈이 될 것입니다.
포훈전

이는 조비가 탄 배가 표류하다가 오나라 쪽 물가에 떨어졌다는 얘기로 자칫하면 대 위나라의 황제가 자기가 폐한 오왕 손권의 포로가 될 뻔했던 것이다. 포훈의 표현대로 정말 위나라 종묘사직이 날아갈 뻔했다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은 셈이다.

그럼에도 조비는 뜻을 굽히지 않고 사구에서 형주, 양주의 군사로 진격하게 하며 신하들을 불러 손권이 항복하러 오지 않겠냐며 설레발을 치는데 이때 주위에 유엽을 제외한 신하들은 당연히 예스맨 중, 물론 손권은 오지 않았다. 이에 조비는 유엽의 계책이 맞았다면서 내가 촉, 오을 멸망시킬 수 있도록 염두에 두었다면, 단지 그들의 사정을 아는 데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때 조휴가 항복한 적을 잡아 손권이 이미 유수구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며 보고한다. 여기서는 위진이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과연 이 내용은 지키는 장수가 지어낸 것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 겨울이 다가온 10월, 조비는 장강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도모할 수 없겠다는 탄식을 하며 조엄을 정동군사로 남기고 쓸쓸히 퇴각한다.

여기서 손권이 한 일은? 서성의 위성계와 장강을 믿고 궁 안에서 편히 지내고 있던 것. 그리고 이 계책은 성공해서 조비는 3개월 만에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군사를 되돌린다.

4. 세 번째 원정(225년)

225년 윤3월 24일, 조비는 지난해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오나라를 칠 계획을 세운다. 이때는 포훈이라는 자가 반대하지만[3] 포훈은 이미 여러모로 조비에게 미움을 산 사람이라 곧바로 좌천된다. 8월 달에 수군을 가지고 초에서부터 내려와서 와수를 돌아 회하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장제는 표문을 올려 물길이 통행하기 어렵다고 말했고, 또 삼주론을 올려 조비를 풍자했지만 조비는 듣지 않고 출병한다.

10월달이 되어서야 또 다시 광릉에 도착한 조비는 그곳에서 관병을 하는데 무장한 병력은 10여만 명이었고 정기도 수백 리에 이어졌기에 장강을 건너기로 뜻을 굳히지만 오나라 병사들은 강을 굳게 지키고 있었고 강변은 얼어붙은 상황이었다. 그것 때문에 아예 강에 배를 띄우는 것조차 불가능하고 강 중앙에서는 파도까지 심하니 조비는 하늘이 남북을 갈라놨다며 탄식하며 돌아오려고 하나 이때 손소가 보낸 고수가 500명을 이끌고 조비를 요격한다. 크게 놀란 조비는 도망치고 고수는 부차와 우개를 빼앗아 돌아온다.

조비는 퇴각하려고 했으나 과연 장제의 말대로 강의 사정으로 인해 수량 때문에 제대로 된 퇴각도 못하고 군용 배 수천 척이 모두 멈춰 나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군사들을 모두 남겨 둔전을 하게 하지만 장제가 이것이 위험하다고 하니 황제는 이번에는 장제의 말을 따라 퇴각한다. 중간에 물이 없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자 배를 한데 모아두고 호수의 물을 막았다가 터트리는 방법으로 조비는 겨우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위왕 승계 직후의 열병까지 생각하면 거의 매년마다 원정에 실패했던 것이다. 기주의 기근 등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진행했던 마지막 원정에서도 실패하여 돌아온 조비는 226년 정월 허창에 도착하려 할 때 허창성의 남문이 이유없이 무너지자 불길하게 여기고 낙양으로 들어갔다.

5. 조비의 남방 정벌의 평가와 영향

조비의 남정은 이 시대에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대규모 원정으로서, 조비의 즉위 이래 5년간 일관되게 계속되었다. 촉은 이릉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큰 타격을 입어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 상태였고, 이런 상태에서 오나라가 적극적으로 북벌을 시도하여 위국의 주적으로 발돋움하였기 때문이다. 〈문제기〉를 보면 초반의 내정 수습책을 제외하고는 계속 남방 정벌 이야기만 묘사된다.

조비의 원정이 단순히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조비의 실책이라 판단하는 시각이 있으나, 조비의 원정은 군사적으로 대체로 합리적인 전략 하에 실시되었다. 특히 첫째 남정에서 이런 부분이 두드러지는데, 조비는 군대의 수적 우위를 발판삼아 오의 심장부를 정면에 겨냥하는 위치인 유수구에 오의 주력을 붙잡아둔 상태에서, 조진, 하후상, 장합 등 당대 군부의 거물들을 동원하여 무방비하게 노출된 형주를 타격할 수 있었고, 이러한 과감한 병력투사를 통해 형주에서는 오군에 비해 수군에서조차 우위에 설 수 있었으며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비록 실패하였지만 조비가 실시한 공격루트들은 모두 위진 후대의 군주들이 답습하는 선례가 되었다.

오의 입장에서 보면 위군의 남정 방어는 적벽과 이릉대전에서 이어지는 독립 레이스의 마무리였다. 적벽 이후 남형주의 최중요 거점인 남군을 촉에게 넘겨준 오는 합비 방면에서의 진출이 실패하며 독립 그 자체가 가능한지 시험대에 올랐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칭신이라는 과감한 카드로 위의 신뢰를 이끌어낸 손권은 형주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칭신이 진심인지 가늠해보던 위나라를 상대로 마지막 승부를 치러야 했고, 이것이 곧 조비의 첫째 남정이었다. 손오는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위험한 고비를 몇 차례나 넘겼으나, 양주와 형주 전선을 아우르는 이 대규모 방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독립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유비가 벌인 이릉대전이 작전 단계에서부터 꽤나 무리점이 많고 내부적인 지지도 받지 못한 원정이라는 점, 실제로도 형주 초입에 머무른 점을 보면, 오의 독립 레이스에서 가장 중요했던 전투는 적벽과 더불어 남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228년 석정 전투의 대승으로 위신을 더욱 올린 오나라는 황제국의 위치까지 오른다.

촉한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당시 유비의 죽음과 이릉대전의 대패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촉한이었으나, 조비가 남정으로 오나라와 치고박고 싸우며 정신없는 틈을 타 촉한은 명재상 제갈량의 내정 개혁과 남만 정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상처를 수습하고 예전의 국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고, 곧바로 위나라에 대한 공세에 나서게 된다.

적벽 이후 국경선을 굳힌 위나라, 한중전을 치루며 익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한 촉나라에 이어 조비의 남정을 오나라가 성공적으로 방어해냄으로써, 삼국의 형세는 고착화되고 비로소 진정한 삼국시대가 시작된다고 평할 수 있다.

6. 기타

삼국전투기에서는 224년과 225년의 원정실패가 단 두 컷으로 간단히 묘사[4]되며, 조비의 치명적 실패 역시 그려지지 않는다. 222년과 달리 225년은 실제로 교전이 없었기 때문에 그릴 것이 강이 얼고 한탄하는 조비밖에 없긴하지만 224년의 경우 서성의 위병계와 이에 속은 조비가 생략되었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중국 드라마 신삼국에서는 조비가 남정을 반대하는 사마의를 윽박질러가며 무리하게 남정을 강행한 이유를 만들어냈다. 사실 조비는 어릴 때부터 지병을 앓고 있었으며,[5] 자신이 살아있을 때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싶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무리라는 걸 알았지만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행동이라고 그려냈다.

게임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의 사마의전(중)에서 동구 전투, 광릉 전투가 묘사되고 있다.

[1] 조휴에 의해 장패가 서릉을 습격했으나, 전종과 서성은 윤로의 목을 베는 등 전황은 일진 일퇴였다. [2] 이때 손권이 조달에게 계산해보라고 하니 말하길 "조비가 갑니다. 그러나 오나라는 경자년에 쇠할 것입니다." 손권이 말하길 "얼마 남았는가?" 하니 조달이 손가락을 굽히면서 계산하여 말하길 "58년입니다."라고 말했다. 손권이 말하길 "금일의 걱정은 멀리 미칠 겨를이 없으니 이는 자손들의 일이다."하였다. [3] 상소문의 전문은 포훈 참고. [4] 작가가 참고했다는 삼국지 인물사전 자체가 조비의 남정을 크게 묘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지나친 외정을 자제시켰다'는 구절을 삽입하는 등 역사의 고증 측면에서 논란이 많은 책이다. [5] 조조가 알았으면 후계자를 바꿨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라 아버지에게도 숨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