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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틀리 왕국 16대 군주 იესე | 예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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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예세 |
조지아어 | იესე | |
라틴어 | Jesse | |
가족 |
레반(아버지) 티나틴 아발리슈빌리(어머니) 시비몬(형제) 테이무라즈(형제) 알렉산드레(형제) 카이호스로(이복형제) 바크탕 6세(이복 형제) 마리암(첫째 아내) 엘레네(둘째 아내) 알렉산드레(장남) 아르칠리(차남) 다비트(삼남) 니콜로스(사남) 이오안(오남) 테이무라즈(육남) 레반(칠남) 호레산(장녀) 아나스타샤(차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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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680/1681년 ~ 1727년 | |
재위 기간 |
1714년 ~ 1716년(1차 재위) 1724년 ~ 1727년(2차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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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틀리 왕국 16대 군주.2. 생애
카르틀리 왕국 12대 국왕 바크탕 5세의 삼남이자 13대 국왕 기오르기 11세의 동생인 레반과 티나틴 아발리슈빌리의 아들이다. 형제로 시비몬, 테이무라즈, 알렉산드레가 있었고, 이복 형제로 카이호스로, 바크탕 6세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알리 쿨리 칸(Ali-Qouli-Khan)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이란 행정부에서 경력을 쌓았고, 기오르기 11세의 지휘 아래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을 토벌하는 조지아군에 배속되었다. 1708년부터 1709년까지 케르만 지사를 맡았고, 1711년부터 1714년까지 포병대 지휘관을 맡았다.1711년 이복 형제인 카이호스로가 전사하면서 카르틀리 왕위가 비었다. 사실 바크탕 6세가 카이호스로를 대신하고 카르틀리에서 통치를 행사하고 있었으니 왕위를 이어받는 게 순리였지만, 사파비 제국은 바크탕 6세의 개종 거부를 빌미삼아 왕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3년간 뜸을 들이다 1714년 3월에 그를 카르틀리의 왕으로 선임했다. 이후 2년간 통치를 행사하면서 다비트 2세 이맘 쿨리 칸과 동맹을 맺었으나 다른 귀족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결국 1716년 6월 마침내 무슬림이 되기로 한 바크탕 6세로 교체되었다. 그는 카헤티로 도망치려 했지만 바크탕 6세의 아들 바카르 1세에게 붙잡혔다.
그 후 기독교로 개종한 뒤 석방되어 1719년부터 1723년까지 무크라니 공국을 다스렸다. 1723년 콘스탄틴 2세 마흐무드 쿨리 칸이 이란군과 함께 바크탕 6세를 몰아내고자 진군하면서 왕국이 두 패로 갈라졌을 때, 그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뒤 수니파 이슬람 교인으로 개종하고 무스타파 파샤라는 이름을 취했다. 이후 오스만군이 조지아 동부를 휩쓸면서 카르틀리 왕위에 복귀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유명무실했고, 실제로는 오스만군 지휘관이 실권을 행사했다. 오스만 제국은 1727년 그가 사망하자 카르틀리 왕국을 폐지하고 아할치헤 파샤 이샤크 1세 자켈리를 카르틀리 총독으로 내세웠다.
그는 생전에 2번 결혼했다. 1712년 에라스티 카플란니쉬빌리 오르벨리아니 공작의 딸 마리암과 처음 결혼했다. 마리암은 본래 친척인 카이호스로 아미레지비 공작의 부인이었으나, 그는 이를 신경쓰지 않고 그녀와 강제로 취했다. 마리암은 1765년경 손자 디미트리와 함께 러시아로 망명하여 아스트라한에 도착했지만, 예세의 합법적인 아내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기서 그대로 머무르라는 명령을 받았다. 예세는 1715년경 헤라클리오스 1세의 장녀 엘레네와 결혼했다. 엘레네는 남편이 사망한 뒤 엘리자베트라는 이름으로 수녀가 되어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두 부인과 한 명 이상의 첩에게서 여러 자식을 봤다. 그 중 장남인 알렉산드레는 카르틀리 총독을 역임했으며 카르틀리군 중위로 복무했다. 그러나 1744년 카르틀리 왕이 된 테이무라즈 2세가 잠재적인 정적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해임했다. 이에 이복 형제이며 솜히티와 사바라티아노의 통치자인 아르칠리(압둘라 벡)에게 귀순했다. 1747년 테이무라즈 2세가 이란으로 떠나자, 그는 아르칠리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다케스탄 용병대를 모집한 뒤 수도 트빌리시를 한때 장악했다. 그러나 카르틀리 왕위를 놓고 아르칠리와 격렬하게 대립하다가 테이무라즈 2세의 아들이며 카헤티 왕인 헤라클리오스 2세의 반격으로 무너졌다. 이후 무크라니 공국으로 피신한 뒤 계속 항전했지만, 헤라클리오스 2세의 공세에 눌린 무크라니 공국이 귀순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1750년 조지아 정교회로 개종한 알렉산드레는 크베모에서 영주로 지냈으나 테이무라즈 2세의 의심을 사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받자 1759년 러시아로 망명했다. 이후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아스트라한 수비대 장교로 활동하다가 1761년 포드폴코브니크 방면군 조지아 편대에 합류해 여생을 러시아 군인으로서 보냈다. 이 인물의 손자가 바로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맹활약한 표트르 바그라티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