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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틀리 왕국 10대 군주 სიმონ | 시몬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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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시몬 2세 |
조지아어 | სიმონ | |
라틴어 | Simon II | |
가족 |
바그라트 7세(아버지) 안나(어머니) 파리얀 베굼(누이) 파티마 술탄 베굼(아내) 이자이 샤리프 베굼(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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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610년 ~ 1630년 | |
재위 기간 | 1619년 ~ 16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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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틀리 왕국 10대 군주.2. 생애
카르틀리 왕국 8대 군주 바그라트 7세와 카헤티 왕 알렉산드레 2세의 딸 안나의 아들이다. 누이로 파리얀 베굼이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이슬람교 신자가 되었으며, 세마윤 칸으로 개명했다. 1619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사파비 제국의 샤한샤 아바스 1세에 의해 카르틀리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는 9살에 불과했기에, 카르틀리 주둔 이란군 총사령관이며 역시 이슬람교로 개종한 조지아 귀족 기오르기 사카제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백성들이 복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의 정부는 이란군이 보호하는 트빌리시와 하류 카르틀리 일대만 통제했다.카르틀리의 기독교 귀족들은 이슬람 신자인 사카제를 섭정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1623년부터 1624년에 무크란의 바그라트 2세를 섭정으로 내세웠으며, 1624년부터 1625년까지는 테무라즈 이에르가 섭정으로 추대되었다. 이런 상황에 압박감을 느낀데다, 조지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이란으로 강제 이송시키는 아바스 1세에게 반감을 품은 기오르기 사카제는 1625년부터 이란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마르코피 전투에서 이란군을 격파했다. 그는 트빌리시를 탈출하고 아그자칼라 요새로 피신했다. 이후 반란군은 카르틀리의 왕좌를 카헤티 왕이며 당시 이메레티 왕국에 망명가 있었던 테이무라즈 1세에게 넘겼다.
1625년 7월 1일 조지아군이 마라브다 전투에서 이란군에게 패배한 뒤, 아바스 1세는 그를 트빌리시로 옮겨서 통치를 재개하게 했다. 그러나 반란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고, 이란군의 기세는 갈수록 꺾였다. 1630년 아르가비 공작 주라브 1세 시다모니가 잠들어 있던 그를 암살했다. 그 후 조지아인들은 테이무라즈 1세를 카르틀리 왕으로 다시 추대했다.
그는 아바스 1세의 손녀인 데리얀 술탄 베굼과 결혼하여 딸 이자이 샤리프 베굼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