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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틀리 왕국 14대 군주 카헤티 왕국 10대 군주 ერეკლე | 헤라클리오스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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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헤라클리오스 1세 |
조지아어 | ერეკლე I | |
라틴어 | Heraclius I | |
이란어 | ارگلی خان | |
가족 |
테이무라즈 1세(할아버지) 다비트(아버지) 엘레네(어머니) 아나(아내) 다비트 2세(장남) 테이무라즈 2세(차남) 엘레네(장녀) 케테반(차녀) 마리암(삼녀) 콘스탄틴 2세(사생아) 케테반-베굼(사생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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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642년 ~ 1709년 | |
재위 기간 |
1675년 ~ 1676년(카헤티 국왕 1차 재위) 1688년 ~ 1703년(카르틀리 국왕 재위) 1703년 ~ 1709년(카헤티 국왕 2차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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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헤티 왕국 10대 군주, 카르틀리 왕국 14대 군주.2. 생애
카헤티 왕국 8대 군주 테이무라즈 1세의 삼남 다비트와 조지아의 귀족 집안인 디아사미제 가문의 여식인 엘레네의 유일한 아들이다. 1648년 아버지가 로스톰을 앞세워 카헤티 왕국으로 쳐들어온 페르시아군에 맞서 항전하다가 마가로 전투에서 전사한 뒤, 할아버지와 함께 이메레티로 망명했다. 1653년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스크바에 보내져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궁정에서 니콜라이 다비도비치(Nikolai Davydovich)라는 이름으로 지냈다. 1661년 귀국한 그는 카헤티의 국왕으로 즉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투셰티 지역으로 이동하여 카헤티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적절한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다.이 무렵, 카르틀리 왕 바크탕 5세는 카헤티의 실질적인 통치자 잘랄 아르그비를 주살하고 카헤티 왕국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그는 헤라클리오스까지 몰아내기 위해 파아타 무크라바톤의 카르틀리군을 파견했다. 우리아투바니 전투에서 패배한 헤라클리오스는 토르그 요새로 도주했다. 1663년 바크탕 5세는 헤라클리오스와 어머니 엘레네가 있는 토르그 요새를 포위했다. 이후 협상 끝에 다시는 카헤티 왕위를 노리지 않는 조건으로 요새에서 빠져나가는 걸 용인받고 투셰티로 이동했고, 바크탕 5세는 카헤티 전체를 자신에게 종속시킨 뒤 카르틀리 왕국으로 돌아갔다.
1664년, 바크탕 5세는 사파비 제국 샤 아바스 2세의 허가를 받고 아들 아르칠리를 카헤티 왕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카헤티인들은 아르칠리의 지배를 받는 걸 거부하고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헤라클리오스는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카헤티로 잠입해 카르틀리군과 맞서 싸웠다. 바크탕 5세는 아들을 돕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고, 헤라클리오스는 투셰티로 일시 후퇴했다. 그러다가 바크탕 5세가 군대를 분산시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아스크바리에서 바크탕 5세의 군대를 기습 공격했지만 패배하고 투셰티로 후퇴했다. 바크탕 5세는 카헤티 귀족들에게 아르칠리를 왕으로 떠받들겠다고 맹세하도록 강요한 뒤 카르틀리로 돌아갔다. 1664년 헤라클리오스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러시아로 이동한 뒤 10년간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1674년 러시아에서 카헤티로 이동한 그는 투셰티에 도착하여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당시 바크탕 5세와 적대 관계에 있던 페르시아의 고위 관료인 샤아크 알리 칸은 사파비 왕조의 새 군주 솔레이만 1세에게 헤라클리오스를 카헤티의 새 왕으로 옹립하라고 조언했다. 솔레이만 1세는 그 말에 따라 아르칠리를 몰아내고 헤라클리오스를 새 왕으로 세웠다. 1675년 솔레이만 1세의 초대를 받은 그는 즉시 페르시아 궁정으로 향한 뒤 솔레이만 1세로부터 그때까지 신앙으로 삼고 있던 조지아 정교회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헤라클리오스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거듭된 강요에 못이겨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이후 나자알리 칸( ნაზარალი-ხანი)으로 개명한 그는 이스파한에서 14년간 억류되었고, 카헤티 일대는 페르시아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1688년, 솔레이만 1세는 카르틀리 왕국의 기오르기 11세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한 뒤 헤라클리오스를 새 왕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란 분견대와 함께 트빌리시에 입성하여 즉위식을 거행했다. 기오르기 11세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라차로 후퇴한 뒤 뒤이어 밍그렐리아 공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헤라클리오스는 카르틀리 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에, 트빌리시에 주둔한 대규모 페르시아 수비대에 의존해야 했다. 1691년, 기오르기 11세가 카르틀리로 돌아와서 그와 맞섰다. 많은 카르틀리 귀족들이 기오르기 11세를 따랐고, 헤라클리오스는 트빌리시에서 고립된 채 근근히 버텼다.
기오르기 11세는 트빌리시 마저 공략하려고 맹공격을 퍼부었으나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협상을 제안했다. 기오르기 11세는 카르틀리를 갖고 헤라클리오스는 카헤티를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이 제안을 고려했지만, 사파비 제국이 원군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자 협상을 중단했다. 기오르기 11세는 카르틀리 서부로 후퇴했고, 그는 티아네티 전역을 장악했다. 이후 양자는 3년간 장기전을 벌였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1695년, 사파비 제국은 새 카헤티 총독 칼바니 칸의 지휘 하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헤라클리오스를 도왔다. 이에 카르틀리 인들이 승산이 없다고 보고 흩어지자, 기오르기 11세는 이메레티로 망명했다가 1696년 패배를 인정하고 이스파한으로 이동해 사파비 제국의 새 군주 술탄 호세인에게 귀순했다.
그리하여 카르틀리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으나, 그의 통치는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러시아와 이란에서 보냈기 때문에 조지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게다가 지역 주민들을 약탈하고 노예로 팔아넘기는 페르시아인들의 악행을 눈감아줬고,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해 사욕을 챙기는 데 열중했다. 반면 이란으로 간 기오르기 11세는 페르시아 샤한샤 술탄 호세인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다. 1703년, 호세인은 기오르기 11세를 카르틀리 왕으로 복위시키고 헤라클리오스를 카헤티 왕으로 이전시켰다. 그러나 헤라클리오스는 이스파한으로 이송된 뒤 페르시아 궁정에서 여생을 보냈고, 실제 통치는 총독들이 맡았다. 1709년 사망했고, 아들 다비트 2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1677년 셰르마잔 촐로카슈빌리 공작의 딸 아나와 결혼하여 두 아들 다비트 2세, 테이무라즈 2세와 세 딸 엘레네, 케테반, 마리암을 낳았다. 다비트 2세와 테이무라즈 2세 모두 카헤티 왕이 되었고, 엘레네는 카르틀리 왕 예세와 결혼했다. 마리암은 예세르 촐로카슈빌리 공작과 결혼했다가 남편과 사별한 뒤 마클린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수녀가 되어 조지아어 찬송가와 종교 서적을 여러 권 집필했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후궁들 사이에서 몇 명의 친자녀들을 낳았는데, 그 중 콘스탄틴 2세는 훗날 카헤티의 왕이 되었으며, 케테반-베굼은 카르틀리의 압둘라 벡 왕자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