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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틀리 왕국 2대 군주 დავით | 다비트 1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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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다비트 10세 |
조지아어 | დავით | |
라틴어 | David X | |
가족 |
콘스탄틴 2세(아버지) 타마르(어머니) 기오르기 9세(남동생) 바그라트(남동생) 디미트리오스(남동생) 알렉산드레(남동생) 멜키제데크 2세(남동생) 타르가모스(남동생) 굴샤르(누이) 아스타다르(누이) 미라인굴(첫째 아내) 타마르 자켈리(둘째 아내) 루아르사브 1세(장남) 아다나제(차남) 라마즈(삼남) 디미트리오스(사남) 베잔(오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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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482년 ~ 1526년 | |
재위 기간 | 1505년 ~ 15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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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틀리 왕국 2대 군주.2. 생애
카르틀리 왕국 초대 군주 콘스탄틴 2세와 조지아 귀족 여인 타마르의 장남이다. 형제로 기오르기 9세, 바그라트, 디미트리오스, 알렉산드레, 멜키제데크 2세, 타르가모스가 있었고, 누이로 굴샤르, 아스타다르가 있었다. 1505년 4월 27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카르틀리 왕위에 올랐다. 1509년 이메레티 왕 알렉산드레 2세가 카르틀리 북서부를 침공했다. 그는 이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했다. 왕실 평의회에서 침략자에 대해 단호히 맞서 싸우자는 의견이 대두되자, 그는 "문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문제를 만난다."라고 응답했다. 그 덕분에, 알렉산드레 2세는 순조롭게 공세를 벌여 카르틀리의 북서 지역 전체를 공략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이메레티를 침공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 바람에, 알렉산드레 2세는 서둘러 군대를 철수시키고 그가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는 걸 용인했다.1511년, 적절한 외교 정책을 구사하며 평화를 추구하던 카헤티 왕국의 알렉산드레 1세가 장남 기오르기 2세에게 피살당했다. 기오르기 2세는 민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군공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하고 카르틀리를 침공했다. 그는 아테니 요새로 후퇴했고, 기오르기 2세는 고리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이때 중앙 권력에 반대하는 일부 귀족들이 기오르기 2세의 편에 섰다. 이에 그는 왕국의 행정 및 군사 시스템을 개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국을 군 총독이 이끄는 4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각 지역은 사드로초(სადროშო)로 불렸다. 첫번째 사드로초인 메치나베는 카르틀리 하류 일대에 해당했다. 두번째는 메마르지베네로, 지난날 이메레티 왕국에게 빼앗겼다가 도로 되찾았던 카르틀리 북서 지역을 관장했다. 세번째는 메마르츠케네로, 메치나베와 므트바리 사이에 위치했다. 네번째는 무크라니로, 아르그비와 크사니 공국을 다스렸다. 무크라니는 공식적으로는 왕실의 직할지였지만 실제로는 그의 형제인 바그라트 왕자가 통치했다.
1512년, 기오르기 2세가 또다시 왕국을 침략해 무크라니의 주요 요새인 치키스지리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1513년, 므츠헤타 인근으로 진군했지만 바그라트의 군대에게 매복 공격을 받고 생포된 뒤 므트베리 요새에 투옥된 후 얼마 안가 옥사했다. 그는 기오르기 2세를 사로잡은 여세를 몰아 카헤티 왕국으로 진격해 병합에 성공했지만, 기오르기 2세의 아들 레반을 붙잡지 못했다. 1514년 8월, 그는 레반 왕자가 피신한 마그라니 요새를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이때 사파비 제국의 이스마일 1세가 파견한 이란군이 카르틀리 왕국을 침공했다.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여 이들과 맞붙어 악전고투를 벌인 끝에 1518년경 겨우 격퇴했다. 그러나 레반은 이때를 틈타 마가로에서 귀족들을 소집하고 자신을 카헤티의 왕으로 선포했다.
1520년, 그는 레반을 물리치기 위해 카헤티로 진군했지만 키지키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현실을 인정한 그는 레반을 인정하고, 그 대신 레반과 군사 동맹을 맺어 외적의 침략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이후 사파비 제국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연간 300필의 비단을 공물로 바쳤지만, 이스마일 1세는 그가 비밀리에 자신에게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고 키질바쉬에서 대군을 이끌고 카르틀리 왕국 내에 거주하는 투르코만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카르틀리를 침공했다. 이스마일 1세의 군대는 카르틀리의 많은 지역을 공략하고 아그자칼라 요새에 자리를 잡은 뒤 그에게 자기가 확보한 영역을 이란의 영토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스마일 1세의 요구를 거부하고 카헤티 왕 레반, 삼츠헤 공작 쿠바르쿠바레 5세와 북캅카스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대항했다. 1520년 텔레티 전투에서 이란군과 맞붙었다. 조지아군은 열세한 전력으로도 선전했으나 끝내 패퇴했고, 그는 수도 트빌리시로 후퇴했다. 이스마일 1세는 트빌리시로 진군해 공성전을 벌인 끝에 일부 수비대를 회유하는 전술로 공략에 성공했다. 트빌리시는 며칠간 심각한 약탈에 시달려야 했고, 그는 가까스로 도시를 탈출해 카르틀리 남부 지역으로 피신했다. 이스마일 1세는 수비대를 남겨둔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전력을 끌어모으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다비트 10세는 1524년 이스마일 1세가 사망한 뒤 사파비 제국이 내란에 휩싸인 틈을 타 반격에 착수했다. 아그자칼라 요새를 탈환한 뒤 대다수의 이란인과 투르코만인 이주자들을 학살했다. 내전에 휘말린 이란은 새로운 병력을 보낼 수 없었고, 카르틀리는 이란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즉위 후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고 이란의 침략에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걸 막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던 그는 1525년 퇴위하고 동생 기오르기 9세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მიერ, შენ მე შემოსილმან შემოსილმან პორფირითა და გუირგუინითა და და აწ აწ აწ ღირსქმნულმან სახესა მონაზონობისა დავით ბაგრატუნიანმან ბაგრატუნიანმან ბაგრატუნიანმან ნებითა ღმრთისათა ქართველთამან ქართველთამან მონაზონმან დამიანე დამიანე დამიანე დამიანე დამიანე.
나, 다비트 바그라토니는 보라색 망토와 왕관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 데미안이라는 이름을 취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한다.
다비트 10세의 퇴위 선언서.
나, 다비트 바그라토니는 보라색 망토와 왕관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 데미안이라는 이름을 취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한다.
다비트 10세의 퇴위 선언서.
그렇게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1년 후인 1526년에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2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은 다비트 바라타슈빌리 공작의 딸 미라인굴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쿠바르쿠바레 2세 자켈리의 딸 타마르 자켈리였다. 그는 5명의 아들과 세 딸을 낳았다고 전해지나, 세 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장남 루아르사브 1세는 훗날 카르틀리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