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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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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주 이씨 종문.svg 전주 이씨 임해군파의 종주
1대 임해군 이진 2대 양녕군 이경 3대 익풍군 이속
조선 선조의 손자
양녕군 | 陽寧君
봉호 양녕군(陽寧君)[1]
본관 전주(全州)
이름 경(儆)
양부 임해군 이진(臨海君 李珒)
양모 군부인 양천 허씨(陽川 許氏)
생부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
생모 군부인 창녕 조씨(昌寧 曺氏)
부인 현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자녀 1남 1녀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생몰
기간
음력 1616년 4월 30일 ~ 1641년 8월 18일
양력 1616년 6월 13일 ~ 1641년 9월 22일
1. 개요2. 생애3. 사망4. 가족과 후손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왕족. 선조의 서9남 경창군의 차남이자 선조의 서장남 임해군 양자이다. 세종대왕의 큰형 양녕대군 봉호의 한국어 발음이 같지만, 한자는 다르다. 양녕대군은 '사양할 양(讓)', 양녕군은 '볕 양(陽)'을 쓴다.

2. 생애

1616년(광해군 8년) 6월 13일[2]에 태어났다.

정확한 때는 모르나, 큰아버지 임해군 양자로 입적했다. 양녕군 탄생 당시에 임해군은 이미 죄인으로 죽은 상황이었으므로, 인조반정 이후 임해군이 복권받은 후에 출계한 듯 하다. 많은 왕족들 중에서도 양녕군이 입적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인조 경창군 집안이 서로 가까워서인 듯 하다. 1610년(광해군 2년)에 열린 경창군의 혼례를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맡아 주관했고, 반대로 인조반정 후 치른 소현세자(당시 원자)의 관례를 경창군이 주관했을 정도로 두 집안이 돈독하게 지낸 사례가 여럿 있다.

그런데 임해군 선조의 맏아들이기 때문에, 임해군의 양자로 간 양녕군은 졸지에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아졌다. 그리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1632년(인조 10년)에 역모 사건에 엮이고 말았다. 왕족 회은군 이덕인(懷恩君 李德仁)[3]이 고변한 이 역모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회은군 이덕인이 고변하여 국청이 열리다
'동네에 임해군의 종 아내가 때로 출입하는데, 하루는 와서 말하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다.」고 하기에, 내가 자세한 것을 묻자, 답하기를 「경창군이 우리 궁(宮)의 양자(養子)를 위하여 계해년 일( 인조반정) 을 도모하려고 술사(術士)를 조치하여 거사(擧事) 시기를 선택하였는데, 대비( 인목왕후)께서도 이일을 알고 있다고 한다. 임해군의 부인이 항상 지극히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내 생전에 이 따위 일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다.’ 하였습니다.
《인조실록》 27권, 1632년(인조 10년) 10월 16일 경진 두 번째 기사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런 고변을 듣고도 인조는 이 사건을 확대하려 하지 않고 조용히 묻으려 했다는 것.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로는 ‘폐모살제[4]’라는 인조 즉위 명분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이 사건이 커져서 사촌동생 양녕군이나 숙부 경창군이 화를 입는다면 인조는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과 다를 바 없어진다. 폐모살제에 찬동한 죄로 인조반정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공격받고 1628년(인조 6년) 북인이 꾀한 역모에 엮인 숙부 인성군을 어떻게든 살려주려 노력하다 실패한 인조에게 스스로 이 사건을 키운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두 번째로는 소성대왕대비(인목왕후)가 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점이다.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세워진 인조 정권에서 대왕대비의 위치는 인조의 왕통을 보증하는 캐스팅 보트였다. 만약 인목왕후가 인조를 제거하려는 모반 사건에 엮였다면, 그것은 인조의 왕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된다. 인목왕후의 사위, 그러니까 정명공주의 남편 홍주원의 삼촌 홍집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임해군과 홍집은 본래 옆집 이웃이었다.) 대왕대비가 열심히 부인해줬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하필 대왕대비가 죽은 직후에 저 사건이 터졌다. 그러니 대왕대비가 부정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해결은 요원했다.

인조 입장에서 이 역모는 설사 사실이라도 부정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대왕대비가 자신의 왕위 계승을 부정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인조는 고변 접수 일주일 만에 사건을 사실무근으로 결론짓고 종결시켰다. 그러나 그 뒤로도 사건의 여파는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며, 이는 엉뚱하게도 광해군이 지었던 인경궁의 훼철이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자세한 내용은 인경궁 문서의 2.4 단락 참조. 여튼 저 때 양녕군을 어떻게 처분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양녕군 본인은 별 탈 없이 넘어간 듯 하다.

3. 사망

이후 조용히 살다가 1641년(인조 19년)에 9월 22일[5]에 사망했다. 향년 26세.[6]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에 있다. 양아버지 임해군 묘와는 약 1.6 ~ 1.8km 정도 떨어져있다.

4. 가족과 후손

남양 홍씨 홍여익(洪汝翼)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1남을 두었고, 측실 사이에서 딸 1명을 낳았다. 서녀는 연안 이씨 이정창(李鼎昌)과 혼인했다.

장남이자 독자는 익풍군 이속(益豐君 李涑)이고 익풍군은 적자 임원군 이표(林原君 李杓)와 서자 임흥부수 이기(林川副守 李機)를 낳았다. 임원군과 임흥부수는 각각 아들을 3명, 2명을 두었으나, 이들도 아들이 1명 내지 2명인데다, 이들의 자손들마저도 대부분 아들을 1명 내지 2명 낳아서[7] 현재 남아있는 양녕군의 후손들 수는 굉장히 적다.

[1] 봉호는 경기도 양천현(陽川縣. 현재 서울특별시 강서구 양천구 일대)에서 유래했다. [2] 음력 4월 30일. [3] 성종 서자 계성군의 증손자로. 양녕군과 인조에겐 9촌 숙부인 종친이다. [4] 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 여기서는 광해군 인목왕후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죽게 만든 것을 의미한다. [5] 음력 8월 18일. [6]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7] 오죽하면 임원군의 아들 대 이후로 아들 3명 이상 낳은 경우를 찾으려면 헌종, 철종 시기까지 가야 하고, 임흥부수 계열에서는 고종 때까지도 독자 아니면 2남을 유지했다. 출처: 《선원속보 - 선조대왕자손록 권1: 임해군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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