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2 11:58:13

홍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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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의 부마
영안위(永安尉) 문의공(文懿公)
홍주원
洪柱元
출생 1606년( 선조 39)
사망 1672년( 현종 13)
본관 풍산 홍씨
부모 부 - 홍영(洪霙)
모 - 연안 이씨
아내 정명공주
자녀
슬하 7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홍태망(洪台望)요절
차남 - 홍만용(洪萬容)
3남 - 홍만형(洪萬衡)
4남 - 홍만희(洪萬熙)
5남 - 홍태량(洪台亮)요절
6남 - 홍태육(洪台六)요절
7남 - 홍만회(洪萬懷)
장녀 - 홍태임(洪台妊)
건중(建中)
무하(無何)
봉호 영안위(永安尉)
시호 문의(文懿)
1. 개요2. 생애
2.1. 부마가 되다2.2. 혜택2.3. 말년
3. 여담4. 가족 관계
4.1. 본가( 풍산 홍씨)4.2. 처가( 조선 왕실)4.3. 배우자 / 후손
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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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문신(文臣). 선조 인목왕후의 딸 정명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2. 생애

2.1. 부마가 되다

당시 정명공주는 오랜 유폐 생활로 혼기를 놓친 21세의 노처녀라서, 비슷한 또래의 남편감을 찾을 수 없어 연하를 구했다고 한다.[1]

그것도 이미 홍주원에게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강제로 파혼시키고 결혼한 것이다.[2] 사실 그 시대는 신분이 높을수록 혼인 연령이 빨랐기 때문에 공주와 동년배의 양반 남성들은 거의 유부남이었다. 아직 혼인하지 않은 남자는 본인에게 혼인하기 어려운 하자가 있다든지, 아니면 홍주원처럼 약혼은 했는데 어떤 사정으로 혼인을 미루고 있는 경우밖에 없었다. 공주를 하자있는 남자와 혼인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미 혼담이 정해진 남자들이라도 전부 부마 단자를 내게 해서 부마를 구한 것이라 한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사이의 금슬은 나름 괜찮았는지 홍주원과 정명공주 사이에서는 7남 1녀가 태어났다.

2.2. 혜택

홍주원으로서는 멀쩡한 혼처를 물리고 하게 된 어거지 결혼이었으나, 그 덕분에 그 자신은 물론 홍씨 가문도 많은 혜택을 받았다.

하마타면 독신으로 늙어죽었을 딸을 시집보내게 된 것이 너무 기뻤던 인목왕후는 어렵게 얻은 어린 사위를 무척 예뻐했던 모양으로, 사위에게 왕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까지 내려 비판받기도 하였다. 인조는 자신의 즉위 대의 명분인 인목왕후를 우대하여 정명공주의 혼례를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우 호화롭게 치러주었으며, 그 뒤에도 상당한 땅과 재산을 하사하였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우의정 신흠, 서평부원군 한준겸(韓浚謙) 등과 함께 소성대비 인열왕후를 호종하였고, 그 공로로 품계가 승진하였다.

이후 소성대비가 병을 앓게 되자 인조는 홍주원의 부친 홍영을 예조 참판에 제수하였고, 소성대비의 건강에 차도가 없자 홍주원의 품계까지 높이면서 소성대비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일제강점기까지 소작 분쟁이 이어진 암태도도 정명공주가 받은 땅이다.

그러나 소성대비 사후 정명공주의 처소에서 흉측한 백서가 발견되었고, 이에 연루된 정명공주의 궁녀들이 줄줄이 체포되어 수차례의 형문은 물론이고 압슬, 낙형까지 당하다 죽기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홍주원으로서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2.3. 말년

사건이 흐지부지 넘어가면서 정명공주와 홍주원은 조용히 눈에 띄지않게 살아갔다.

67세까지 당시로서는 천수를 누리다가[4] 현종 14년인 1672년에 사망했다.

3. 여담

  • 실록을 보면 집을 짓는다는 핑계로 이곳 저곳에서 돌과 나무를 차출해 와 도로에 마구 쌓아두고, 종들을 시켜 남의 집 담장 돌까지 도둑질하고 양반가 부녀자들을 능욕하는 등, 홍주원의 가문에서 저지른 만행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보다 못한 사헌부는 논의도 하지 않고 정명공주의 종들을 잡아 가두었는데 백성들이 통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실록에서는 홍주원이 나이가 어리고 교만하며 제멋대로인 것을 비판한 기록이 있다. 인조실록 그러나 이런 비판을 받고도 홍주원은 조금도 반성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 관련된 인조실록의 기록을 비추어보았을 때 물론 1문단에서처럼 공주의 집을 수리하고 건축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기록에 의한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비단 이 일을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결정으로 인해 일어난 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위의 기록들에 분명 상으로 나오는 인조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옥의 수리를 명령하고, 심지어는 홍주원이 가옥의 수리를 거부하였다가 가옥의 수리는 홍주원(영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서 인조가 불허한 기록이 있다. #
  • 그러나 인목왕후가 승하하면서 보호막이 사라지고 저주 사건의 범인이라고 의심받으면서 정명공주를 모시던 궁녀들까지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기까지 하자, 크게 위기감을 느꼈는지 처신을 조심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정명공주와 홍주원의 후손들인 풍산 홍씨는 해를 입지 않고 조선 최대 명문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 정명공주가 홍주원과 결혼하면서 하사받은 하의도·상태도·하태도는 4대손까지 수조권이 주어진 땅이었으나, 후손들이 4대 이후에도 소유권을 행사하면서 경종 때 농민들이 개간한 땅을 무단으로 빼앗는 바람에 소작 쟁의가 일어났다. 구한말에 하의3도가 국유지가 된 후에도 풍산 홍씨인 홍우록이 소유권을 행사하려 시도했고[5], 제1공화국 때 유상매수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국유지를 제외한 토지가 주민들에게 분배될 때까지 쟁의가 계속되었다.

4. 가족 관계

4.1. 본가( 풍산 홍씨)

4.2. 처가( 조선 왕실)

4.3. 배우자 / 후손

5. 대중매체

파일:홍주원화정.jpg
2015년 MBC 월화 드라마 《화정》
배우: 서강준

[1] 물론 요즘 기준으로 따지자면 21세에 결혼한 건 오히려 조혼이지만 과거에는 10대 중반이 적령기였으며, 특히 왕녀들은 그보다 더 빠른 10대 초반에 결혼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혼기를 놓쳐 19세에 결혼한 정명공주의 어머니 인목왕후만 해도 당시 기준으로는 노처녀였다. [2] 당시 홍주원은 조모의 3년상을 치르느라 결혼을 미루고 있었다. [3] 홍주원의 부친 홍영이 간택에 대해 집안의 뜻을 굽히지 않자 귀양까지 가는 등, 잡음이 생기기도 하였다. [4] 부인 정명공주 역시 83세까지 살면서 조선의 왕녀들 중에서 가장 장수했다. [5] 이 시도가 실패하자 홍우록은 다른 조선인 지주에게 소유권을 양도했고, 다시 일본인에게 넘어가면서 하의3도 소작쟁의는 옆동네 암태도의 암태도 소작쟁의처럼 항일운동도 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