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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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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혁3. 운영4. 권한5. 폐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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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에게 수 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守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를 제수하니, 경은 이처럼 총애하여 내리는 작위를 공경히 받들어 그대의 직무를 신중히 처리할지어다.

풍속을 살펴 다스리는 관찰사의 직임은 오로지 백성을 위무하기만 하는 수령의 직임과는 진실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잘못하는 사람을 내치고 잘하는 사람을 올려 주는 관찰사의 권한은 한갓 문서대로만 받들어 행하는 고을의 수령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갑진(1724) 10월 19일 충청 감사 송인명(宋寅明)에게 내린 교서
관찰사(觀察使)는 조선 시대부터 구한말까지 팔도의 행정사무를 맡았던 조선의 종2품 관직으로 현대의 도지사와 유사하다. 사료나 사극 등을 보면 감사(監司)라고도 하다 보니 그 명칭도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 도신(道臣), 도백[道伯], 방백(方伯), 영문선생(營門先生), 영감[營監]이라고도 한다.

2. 연혁

고려 지방 행정 중 한 도를 감찰하는 안찰사(按察使)를 내려보낸 것이 원조다. 안찰사는 상주하는 관청 없이 지방을 순회하는 순찰직이었으며, 임시직 개념이라 그 임기도 관찰사보다 짧은 6개월이었다. 품계도 그리 높지 않아(4~5품) 지방관들을 제압하기도 어려웠다. 북계 동계에 파견되는 안찰사는 병마사라고 따로 분류해 군권도 주고 전용 청사도 제공하는 등 좀 나은 대우를 받았지만,[3] 이건 국경 지대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런거지 임기는 여전히 6개월 임시직이고 품계도 3품으로 2품인 조선의 관찰사보다는 낮았다. 초기 병마사는 그래도 행정과 군사를 다 총괄했으나 나중에는 군사 업무만 보는 병마사가 추가로 계속 파견되면서 권한도 점점 약해졌다. 품계도 그렇고 조선시대의 병마절도사와 유사하다.

조선의 관찰사는 개국 초기 기존의 안찰사를 단순 개편한 안렴사(按廉使), 안렴사보다 권한이 강화된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각각 시범 운영되다, 태종 때 도관찰출척사가 채택되어 주로 도관찰사(都觀察使)로 불리던 것을 세조 때 더욱 간소화된 관찰사(觀察使)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채택된 것이다.

3. 운영

안찰사 시절보다 권력이 훨씬 강해졌는데, 우선 관찰사가 입주하는 관청( 감영)이 생겼고 임기도 1년으로 늘었다가 다시 2년으로 정해졌다. 당연히 임시직이 아닌 상설직이다. 품계도 종2품으로 지금의 서울 부시장인 한성 부윤이나 나머지 지방의 부윤과 같아 위상도 더해졌다.[4]

관찰사는 한성을 제외한 경기,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팔도에 파견되어 각 지방을 관할했다. 도백 또는 방백이라는 이칭에 따라 경기 관찰사는 기백[畿伯], 평안도 관찰사는 기백[箕伯], 함경도 관찰사는 북백[北伯], 황해도 관찰사는 해백(海伯), 강원도 관찰사는 동백[東伯], 충청도 관찰사는 금백[錦伯], 전라도 관찰사는 완백[完伯], 경상도 관찰사는 영백[嶺伯]이라고도 한다.

각 도의 감사는 감영(오늘날의 도청)이 위치한 고을의 수령도 겸했다. 즉, 감영이 해당 고을의 관아 역할도 겸했다. 전라 감사가 전주 부윤, 경상 감사가 대구 도호부사를 겸직하는 식이다. 오늘날로 치면 강원특별자치도지사 춘천 시장을 겸직하고, 강원특별자치도청 춘천시청 기능까지 하는 셈. 평안 감사를 흔히 ' 평양 감사'라 부르는 것도 이것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예외로 경기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았는데, 경기 감영은 한성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성 자체의 행정은 한성부 청사와 한성판윤이 맡았다.

한성부의 경우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 격인 정2품 한성부판윤이 관할했으며, 종2품인 관찰사들보다 품계가 높았다. 서울 부시장에 상응하는 한성부윤은 다른 부윤 및 지방의 관찰사들과 같은 종2품이다. 그러나 유력 대권 후보인 오늘날의 서울시장과 달리 이때 한성판윤은 한직이었다. 왜냐하면 청요직이 아니었기 때문. 주로 관직 경력상 출신 등의 이유로 삼사의 언관직을 거치지 못해서 정승이라든지 판서로 진출할 수 없지만 대감급으로 승진한 고위 관료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은 관직이었다. 청요직을 거치지 않고 고위직으로 진출한 문관은 사실상의 승진상한선이 한성판윤이다. 물론 정2품 대감이고 한성 성저십리 이내의 행정을 총괄하는 중책을 맡은데다가 여러 고관들의 편의를 봐줄 수도 있는 자리인지라 다른 대감급에 비해 한직이란 것이지 만만하지 않은 자리다. 한성부판윤은 구경, 즉 의정부의 종1품 좌우 찬성, 육조 판서, 한성부판윤에 속할 정도로 고위직이고 조선의 관리 경력에서 더 높은 등급에 오르기 위해 반드시 일정 기간 거쳐야 하는 외관직(外官職)이면서 서울에 있기 때문에 관리에게 유리한 자리였다. 앞서 이야기한 대감들은 정2품 판서 이상을 지칭하는데, 지금의 장관인 판서를 빼고는 판윤보다 더 좋다고 할 자리가 많지는 않다. 판서 이외에 대표적인 직들인 정2품 대제학은 참찬, 판서급이고, 종2품 대사헌은 판서보다 약간 낮은 정도, 정3품 대사간은 담당자들의 면면과 사회 통념상 위치는 높지만, 품계가 상대적으로 낮다. 일단 다른 지방관들보다 일정 부분 경관직(京官職)들에게 업무를 빼앗기는 경향도 있지만, 왕과 가까이에 있기에 승진에 무조건 유리한 편이며, 형조, 사헌부와 함께 한성부 내에서의 사법을 담당하고, 치안업무를 위한 인원을 가지기도 한다. 조선 전기에 한성부에서의 주요 병력은 한성부 관아와 좌우 포도청이었다.

4. 권한

관찰사의 위치는 오늘날의 도지사에 해당되는데, 행정권만 가진 오늘날과는 달리 행정권 외에도 사법권, 군사권까지 있었기에 그 권한은 더욱 컸다. 관찰사는 처음에는 따로 감영(監營) 없이 담당 구역을 돌아다니며 군현(郡縣)들에 대한 감찰과 치안 업무를 하다가, 점차 담당 구역에서의 행정과 사법, 치안, 교육 등을 모두 총괄하는데, 여기서 치안 담당 권한이 바로 군사권이다. 당시는 병농일치(兵農一致) 사회로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게 하고, 전쟁시에 인원을 소집하였는데, 각 지방관들이 해당지역에서 소집된 인원들을 지휘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군현(郡縣) 단위에서 문제해결이 안될 수도 있기에 이들을 위에서 감독하는 자가 관찰사였다. 현대로 치면 관찰사 권한이 도지사가 고등법원장과 고등검사장과 교육감, 시도경찰청장, 소방본부장, 군단장, 각 공공기관의 지부장을 겸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현대 도지사보다 강력한 권한이 있는 대신 자기 관할내 하급 수령에 대한 불미스러운 일이나 큰 재난의 피해와 예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 중앙에 알려지면 파직이나 유배되는 현대의 각료처럼 언제 경질될지 모르는 파리 목숨과 같은 위치이다. 현대 도지사는 임기제가 있어 개인적인 사고만 치지 않으면 임기내 자리가 보장되는 거와 대조된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사소한 일로도 파직이 잦은 반면 웬만큼 큰 사고를 친게 아니면 복직도 현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쉬웠다.[12]

실제로 무인정사에서는 충청 감사 하륜이 충청도 군사들을 끌고 와 활약한 전례가 있다. 병마절도사가 없는 도에서는 도의 모든 병력을 지휘할 수 있었고, 경상도 전라도처럼 병마절도사가 있는 도에서도 어느 정도 군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용인전투에 투입한 전라도군은 전라 병사가 아니라 감사가 지휘했다. 이는 수군도 마찬가지. 수군절도사가 없는 도의 수군은 감사가 지휘했다. 예를 들어 경기 수군은 경기 감사가 지휘했다.

관찰사들의 직급은 종2품으로 동일했지만 당연하게도 어느 지역이냐에 따라 권한이나 선호도도 천차만별이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양과 가깝고 인구도 상당해서 권한도 컸던 경기[13][14]나 서울에서 비교적 가까운 편인 충청도 관찰사가 각광받았고 황해도 쪽도 나름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바로 평안도 관찰사였는데 평안도라는 지역 자체가 중국으로 연결되는 교역로라서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었고[15] 국경 지대라는 특성상 군사권도 막강해서 꿀보직, 땡보직으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감사라고 다 평안 감사[16]인줄 아냐" 혹은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인데 그만큼 당시 양반들이 평안도 관찰사 자리를 요직으로 취급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대로 경상도나 전라도는 지역색이 강하고 양반 문중과 서원이 많아 기피되었고[17] 함경도 지역은 척박한데다가 임진왜란 이전까지만해도 여진 등 북방민족이 활개를 치고, 정치범들의 유배지로 쓰이던 곳이라 기피대상 1순위였다고 한다.

5. 폐지

1895년 기존 8도의 23부제 개편과 이듬해인 1896년 13도제 개편을 거치면서도 계속 관찰사라 불렸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따라 그 권한이 통감부 등에 일부 박탈되어 지위가 위축되었다가, 1910년 일제의 한국 병탄으로 딱 한 달 동안 조선총독부의 지방직으로 개편되어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9월 30일, 조선총독부관제와 지방관관제가 공포되면서 10월 1일을 기해 관찰사 직위가 모두 폐지되고 각 도의 감영이 도청으로 불리게 되면서, 그 수장이 도장관(道長官)으로 개칭되었다. 이 과정에서 13도 관찰사 중 7명이 해임되고 6명은 도장관으로 유임되었다. 각 지방의 부윤은 모두 일괄적으로 일본인으로 교체하였으나 군수는 전원 조선인들이 유임되었다.

그러나 짧게는 1912년에서 길게는 1918년 등과 같이 사실상 무단통치 기간에만 도장관으로 불리다가 도지사로 바로 바뀌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다룬 매체 등지에서 일본인이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도장관에 있다고 다룬 것들이 많아, 많이들 1945년 해방 이후에나 도지사로 명칭이 바뀐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18]

6. 관련 문서


[道伯] 현대 한국에서 도지사를 비유적인 의미로 도백이라 부르기도 한다. [營監] 정3품 이상 당상관(정3품에서 상계 하계는 당하관)을 令監이라고 부르고, 관찰사가 있는 곳을 감영(監營)이라고 하기에 이를 담당한다는 뜻에서 營監이라고 부르는데, 둘 다 발음상 영감이다. [3] 동북면 서북면에서는 감찰사라는 직책이 다른 행정구역의 안찰사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4] 제주목은 목사가 수군절도사를 겸해서 종2품이 부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도 의전은 같은 품계인 전라도 관찰사가 우대받았다. 제주는 먼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관찰사가 아닌 제주목사가 삼읍(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수령들을 지휘하되, 전라도 관찰사에게 사후 보고를 하는 식이었다. [畿伯] 과거엔 경기를 축약해 부를 때 대체로 기()를 썼다. 그 말 자체가 서울의 주변을 뜻하기 때문. [箕伯] 평양의 별칭이었던 기성(箕城)에서 따왔다. 삼국시대부터 부르던 별칭으로, 箕는 기자를 의미한다. [北伯] 함경도의 별칭인 관북을 뜻함. [東伯] 강원도의 별칭인 관동에서 유래. [錦伯] 금강의 머릿글자. [完伯] 전주시의 옛 이름인 완산에서 유래. [嶺伯] 영남에서 유래. [12] 현대의 시도지사는 선거법/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직위 상실은 기본에 최소 5년간 피선거권과 공무담임권이 제한되어 특별사면이라도 받지 않는 한 어떠한 선출직이나 임명직도 맡을 수 앖다. 징역을 갈 정도로 중대한 범죄 뿐만 아니라 토론회나 선거유세중의 허위사실유포 등으로도 벌금 100만원 이상 선고받으면 그 즉시 도지사 직무가 정지된다. [13] 다만 조선시대만 해도 인구는 경기보다 경상도와 전라도 인구가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수도권이기에 권한은 훨씬 클 수 밖에 없었다. [14]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 있는 현재에도 경기도지사의 권한은 무척이나 큰 편인데 부단체장이 2명인 다른 시도와 다르게 경기도는 행정 1부지사/행정 2부지사 체제라서 부단체장이 3명이며 행정안전부에서 파견을 나오는 형태로 임용되는 타 시도의 행정부시장/부지사와는 다르게 대부분 도지사가 도청 내부의 고과평정을 통해 승진시키는 구조라서 인사권도 더 막강한 편이다. 다만 인구가 많은 대도시들이 많고 대도시 특례가 적용되는 특례시도 3곳이나 있어서 산하 기초자치단체장과의 마찰이 심한 곳도 바로 경기도이다. [15] 평안도와 함경도는 조세를 중앙으로 보내지 않고, 중국관리 접대(평안도)나 국경 수비(함경도)에 사용되도록 하였다. [16] 흔히 평양 감사로도 불리지만 이는 평안도 감영이 평양에 있었고 평안도 감사(= 관찰사)가 평양까지 겸해서 관할했으며 무엇보다도 남북분단 후 평양이라는 지명이 북한의 수도로서 평안도라는 지명보다 훨씬 유명해져서 언중이 착각을 하며 생긴 오류다. 평양 감사는 틀린 말이므로 평안 감사로 고쳐 부르는 것이 옳다. [17] 부임 첫 날 행사에서부터 어디로 나가서 맞이해야 되냐는 것으로 관찰사와 문중 세력이 치고박고 싸운 기록이 있고 수령의 재판에 딴지를 걸거나 주민들을 선동하는가 하면 심지어 조정에다가 관찰사를 사문난적이라는 이유로 문중사람들이 단체로 상소를 올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이런 행태가 더 심해져서 암행어사들과 짜고 수령을 무고하는 막장행각도 서슴치 않았다고도 한다. [18]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도 '도장관'이라는 직함명이 많이 언급된다. 그 중 유명한 것이 태평천하. 주인공 윤 직원은 일제 치하에서 자신의 재산을 지킬 수 있어 일제강점기를 '태평천하'로 인식하는 친일 대부호로, 자식들 손자들을 작게는 군수에서 크게는 도장관, 경찰서장으로 출세시키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제일 기대하던 손자 종학은 일본에서 사회운동, 그것도 윤 직원이 제일 싫어하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경시청에 체포되어 윤 직원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