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법인 배재학당 |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 | |
배재대학교 부속유치원, 어린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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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중학교 | 배재대학교 | |
산하기관 |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 배재학당 대천수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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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72c01> 본명 |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
한국어명 | 아편설라 (亞篇薛羅)[1] |
출생 | 1858년 2월 6일 |
펜실베이니아주 사우더턴 | |
사망 | 1902년 6월 11일 (향년 44세) |
충청남도
오천군
하서면
어청도 앞바다[2] (現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옥도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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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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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서울특별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
직업 | 선교사 |
배우자 | 엘라 도지 아펜젤러 |
자녀 |
장남 헨리 도지 아펜젤러 장녀 앨리스 리베카 아펜젤러[3] |
종교 | 개신교 ( 감리교 감독교회)[4] |
학력 | 드루 신학교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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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감리회 선교사. 1885년 조선에 왔으며 선교와 교육 사업에 힘을 썼다. 일제강점기전에 사망했기에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가 설립한 배재학당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2. 일생
미국 펜실베이니아 사우더턴(Souderton)의 스위스계· 독일계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5] 그의 부모는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한 5세대 이민자 가정이었으며, 부계는 스위스, 모계는 독일 팔츠 지방 출신의 이민가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기디언(Gideon)은 독일개혁교회 신자였으며, 어머니 머리아(Maria)는 재세례파의 분파인 메노파(Mennonite) 신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펜젤러가 어렸던 시절에도 독일어로 된 마르틴 루터의 성경을 반복해서 읽어주곤 했고 집에서 거의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어려서부터 독일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이후 성장하여 펜실베니아의 프랭클린 마셜 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 주의 드루 대학의 신학부에서 수학하고 졸업했다.[6] 가풍의 영향으로 본래는 장로회 신자였으나 성장하며 교단을 옮겼으며 한국에선 감리회 선교사로 활동했다.희비교차가 되는 부분인데, 처음에는 조선이 아니라 인도 제국에 선교활동을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는 언더우드도 마찬가지로 인도 제국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1883년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개최된 전미 신학교 연맹 수련회에서의 기록까지만 봐도 인도행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로 미국인의 선교 활동이 자율화 되자 조선행이 가능해졌던 게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아펜젤러의 변화는 1884년 프린스턴 신학교 선교 모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1885년 부활절인 4월 5일에 갓 혼인한 그의 아내 엘라와 함께 장로회 선교사인 호러스 언더우드 그리고 같은 감리회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7]과 그녀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려 했으나 조선 땅을 밟자마자 미군 측의 조지 클레이턴 포크 대사가 "조선의 정세가 위험하여 젊은 여성(아펜젤러 부인)은 입국할 수 없다"고 불허하였다.[8]
결국 아펜젤러 부부는 잠시 일본으로 가 머물다가 7월 29일에 다시 입국하였다. 비록 입국이 미뤄졌으나 그 날짜에 의의가 있기에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언더우드, 스크랜튼 모자, 아펜젤러와 함께 이 날을 한국의 개신교 최초의 날로 본다. 여담으로 이 때 배에서 내려 입국할 당시, 처음에는 무심코 아펜젤러가 먼저 내리려 했다. 그러다가 최초로 한국 땅에 발을 내딛는 중요한 순간임을 깨닫고, 자신의 아내인 엘라가 먼저 내리게 했다.
이후 조선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국내 최초의 서양식 사립학교이자 감리회 종립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감리회를 학교 이념으로 하여 세워지긴 했지만,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처럼 종파와 교리에 상관없이 조선인들에게 선교활동을 펼치라고 가르침을 행했다.[9] 이때가 그의 나이 겨우 27였다. 배재학당의 학훈인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겨라.'를 만들었고,[10] 그의 아들인 헨리 도지 아펜젤러는 배재교가를 작사·작곡했다.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의 응원가를 개사해 만들었다고 한다. 배재학교의 교표가 프린스턴 대학의 교표와 비슷한 이유도 바로 이것.[11]
1902년에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위치한 어청도 앞 바다에서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대판산성주식회사의 구마가와마루 호에 타고 있다가 같은 회사의 선박 기소가와마루 호와의 충돌사고로, 성경 번역 작업에 동참하기 위해 같이 승선한 조한규와 정신여학교 학생을 구하려 탈출을 미루었고 결국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순직하였다. 아펜젤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인양하지 못했으며,[12]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가묘가 만들어져있다. 이런 아펜젤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서천 지역에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이 세워져 운영되고 있다. 한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는 서로 절친한 친구였고, 교류도 왕성하여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연세대학교에는 아펜젤러의 이름을 딴 아펜젤러관(사적 제277호)이 있다.
3. 평가
인성적인 면에서든 활동적인 면에서든 구한말의 인물들 중 여러모로 귀감이 되는 이로, 현대에서도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 개신교계를 비롯해 역사학계와 교육학계에서도 그의 업적과 행보에 따른 역사적 의의 때문에 연구하는 이들이 많다. 또한 직접적인 조선의 독립 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거나 당시 조선에서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이들을 교육 및 계몽하는데 힘써 독립운동사에도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학생 인권단체이자 독립운동 단체였던 협성회를 조직한 것도 아펜젤러가 최초이다.[13] 또한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는 독립운동가들의 산실 중 하나였다. 일단 종교 시설로 당시 경찰행정의 손에서 피할 수 있었고,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운영하고 있으니 일제로서는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장례 또한 치러졌다.배재고등학교는 창립자를 기리기 위한 아펜젤러의 동상과 초상화 등을 소장 중이다. 외부인 개방 시간에 배재고등학교 정문의 수위실에 문의를 하고 직접 볼 수 있으니 참고. 그 외엔 정동제일교회 근방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운영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14][15]
4. 가족
가족으로는 아내 엘라 도지 아펜젤러(Ella Dodge Appenzeller, 1854–1916)와 아들 헨리 도지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 1890–1953), 딸 앨리스 리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1950)가 있다. 이들 역시 한국에서 교육 활동에 힘썼다. 헨리 아펜젤러의 아들 내외와 딸의 묘역은 합정역 인근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다.5. 종교 학술 및 선교 활동
지식인 출신 선교사 답게 조선에 있어서도 독자적이거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합하여 학술 활동을 꾸준히 하였는데, 이 같은 아펜젤러의 노력은 한국의 개신교의 근본에 큰 기여를 했다.- 입국 직후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선교사회 설립.
- 배재학당 설립.
- 한국 성경번역부에서 언더우드와 게일 등을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과 함께 마가복음, 마태복음 한국어 번역.
-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설립.[16]
- 서울지역과 인천지역에 내리교회 설립.
- 성경 보급을 위한 출판사 및 서점 설립에 관여(1890년 조선성교서회[17], 대한기독교서회와 구 종로서적의 전신)
6. 여러 에피소드
시대가 시대인지라 지금으로서 보면 참 기상천외한 일들도 많고 아펜젤러의 대인배스러운 면모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18]- 이승만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이승만은 개교 이후 초기의 제자 중 한명이었다. 이승만이 젊었을 적에는 하도 자주 순경들에게 붙잡혀 구금되어서, 관할 경찰서에 가서 어려서 실수를 한 것이라고 해명하여 구치소에서 빼오는 것이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이승만은 독립협회 활동 및 만민공동회 활동을 하다가 5년 7개월간 투옥된다.
- 그의 아들인 헨리 도지 아펜젤러는 교장직을 맡으며 배재학당의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다만 아펜젤러의 후손들이 직접적으로 학교 운영에 손을 댄 건 아들 헨리까지였다.
- 헨리 다지 아펜젤러 이후의 아펜젤러의 직계 후손들도 배재재단과 현재까지 관계를 맺고 있다. 매년마다 그의 후손들이 한국과 배재고등학교를 방문하며, 상술한 아펜젤러의 동상 앞에서 조상의 봉사와 희생을 기리는 시간을 갖는다.
- 한편 딸 앨리스 아펜젤러는 기록상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백인으로 이화학당 제6대 당장이 되었다. 앨리스는 이화학당 대학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고, 이화여전을 정동[19]서 신촌[20]으로 옮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 한복도 즐겨 입었다고 한다. 아내와 자녀들에게도 한복을 입히기도 하고. 아펜젤러와 그의 가족들이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
- 1886년도에 한양에 콜레라가 크게 창궐하자 조선 왕실은 제중원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국고를 쏟아부었는데 중간에 탐관오리들이 이 구제비를 야금야금 빼어가자 화가 몹시 나서 아펜젤러의 평소(?) 이미지와는 다르게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관리들에게 가열찬 독설을 쏟아 부었다.[21]
- 하루는 자택에서 쉬던 중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노비 계급의 어린 여자아이가 쓰러져 죽음 바로 직전에 있었다고 한다. 이 아이 역시도 콜레라에 걸려있었는데, 아펜젤러는 감염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안에 들여 아이의 마지막 길은 그나마 따뜻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1]
아(펜젤러)목사라고도 불렸다.
[2]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마가와마루 호에 탑승했다가 다른 선박과 충돌사고가 벌어져 탑승객들을 구한 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익사했다. 아펜젤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3]
한국 최초의 외국인 2세라고는 하는데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을 기준으로 한다는 전제에서다.
벨테브레는 말할 것도 없고
하멜도 조선에서 체류 중일 때 자식을 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 혼혈 2세'라면 최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4]
장로회 →
감리회. 본래 장로회 신자였으나 성장하면서 감리회로 교단을 옮겼다. 감리교 감독교회는 나중에
연합감리교회가 된다.
[5]
미들네임과 성을 보면 된다. 아펜젤러라는 성은 스위스의 독일어권 사용지역인 스위스 동북 지방의 아펜첼(Appenzell) 칸톤에서 유래한 것이며 미들네임인 거하드(
게르하르트)는 모계에서 온 성이다.
[6]
드루 대학은 신학대로 굉장히 유명하고 저력 있는 명문 대학이다. 물론 다른 학부도 유서깊다. 아펜젤러가 엘리트 계급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7]
이화학당과
삼일소학당의 설립자
[8]
당시
갑신정변 발생 직후여서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엘라 아펜젤러는
임신 2개월 차이기도 했다. 이 때 태중에 있던 아이가
이화여자전문학교 제6대 교장이자 마지막 외국인 교장인 앨리스 아펜젤러였으며 그 뒤를 이어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 된 인물이
김활란이다.
[9]
배재학당에 종교적 특성이 두드러진 건 오히려
광복이 이뤄진뒤 한참 후로, 국민들이 살 만해지자 학교 측에서도 차츰 종교 이념을 안착하였다. 그런 뒤 현대에 들어오면서 다시 종교 색채가 옅어졌다고.
[10]
정확히는 아펜젤러가 직접 한글로 적은 것은 아니고, 이는 훗날
배재고등학교의 교사 중 한 명이 영어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11]
헨리 도지 아펜젤러가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이었던 것 처럼 언더우드 역시 프린스턴 출신이기에
연희전문학교의 교표도 프린스턴 대학과 흡사하다. 이것이 그대로 이어져
연세대의 교표가 되었다.
[12]
바다에 빠졌고 1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걸 감안하면 앞으로도 발견되기 힘들 것이다.
[13]
따라서 협성회 활동은 배재학당이 중심이 되었다.
[14]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은 인터넷 열람 서비스를 제공하며, 주말 구분 없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매주 월요일과 법정공휴일에는 폐관.
[15]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은 본디 배재학당의 동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으나 배재중고교가
고덕동으로 터를 옮기며 기념 건축물로 운영하였다가 2008년 부터 박물관으로 리모델링 하였다. 강북 도심 지역의 중고교 편중, 협소한 부지, 강남권 개발 등의 각자의 이유로 강북에 있던 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했고 배재중고교도 강동구로 옮겼다.
[16]
때문에 배재고등학교에서는 졸업생들을 수능 직전에 데려가는 것이 연례 행사라고 한다.
[17]
朝鮮聖敎書會
[18]
사실 정상적인 선교사라면 매우 온정적인 성품을 갖는 게 당연한 것이다.
[19]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는 정동에 그대로 남았으며, 1943년 이화여고보와
이화여전의 재단이 분리되었다. 1992년에는 정동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도 세워졌다. 오늘날
이화여고와
이화외고는 학교법인 이화학원에서,
이화여대와 이화여대 부속학교들은 학교법인 이화학당에서 운영하고 있다.
[20]
現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 이대부속유치원, 이대부초, 이대부중,
이대부고도 함께 있다. 단 이대병설영란여중과
이대병설미디어고는
중랑구에 있다.
[21]
그도 그럴 것이 여러 항목으로 나뉘어진 구제비(제약비, 인건비 등) 중에서도 당시 돈으로 1만 달러(!) 가량이
제물포 등지에 임시 진료소를 설치하고 운영에 쓰도록 책정되었는데, 이를 탐관오리들이 홀라당 먹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