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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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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
2.1. 교통사고2.2. 팀 내 주축 선수들의 트레이드2.3. 경영위기 상황에서의 드래프트 전략2.4. 1994년 최해식 폭행 및 트레이드 사건2.5. 1995년 항명사건2.6. 경영진, 프런트, 코칭스태프 내부의 불화2.7. 창단멤버가 없는 팀

1. 개요

1990년 창단돼 2000년 초 해체됐을 정도로 구단의 역사가 꽤 짧았고 팬덤 베이스도 약했던 데다가[1] 구단의 전성기로 꼽히던 1996~1999년 중반까지는 선수들에 대한 통제가 극심했던 김성근 감독의 재임기였기에 선수들이 사고를 칠래야 칠 수 없던 환경이었다. 그래서 다른 구단에 비해 선수들이나 팬들이 스스로 사고를 친 일이 없고, 대부분 예기치 못하게 벌어진 일들이다.

2. 목록

2.1. 교통사고

1990년 6월 21일 2군 선수단 버스가 전라북도 김제시 번영로에서 맞은 편 차로에서 달려오던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해 운전기사와 트레이너가 사망하고 선수 전원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 관련 KBS 뉴스9 보도 영상 사고 관련 연합뉴스 기사 당시 이 버스는 전주시를 출발해 군산시로 이동해 군산상업고등학교에서 연습을 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사고는 역대 KBO 리그에서 유일하게 일어난 구단 버스 관련 인명사고다. 성난 관중들이 상대팀의 버스를 불태우거나 홈팀 버스의 진로를 막고 연좌농성을 벌이거나 주행 도중 경미한 접촉사고가 난 적은 있었으나 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다른 차와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차가 완파된 것은 이 사고가 유일하다.

2.2. 팀 내 주축 선수들의 트레이드

1997년 10월 이후 대한민국 외환위기로 인해 여러 기업들이 도산하거나 그에 준하는 경영 위기에 놓였다. 대기업들이 운영하던 프로야구단에도 위기가 찾아오는데 예상대로 다른 재벌 구단에 비해 자금력이 부족했던 호남의 해태 타이거즈 쌍방울 레이더스에게 나란히 시련이 찾아왔다.[2]

특히 레이더스의 모기업이었던 쌍방울그룹은 1997년 12월 무주리조트에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하는 바람에 크나큰 손실을 입게 되었으며[3] 그룹의 돈이 없어져가는 마당에 선수들의 연봉은 올라가고 점점 인플레는 심각하게 진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기업의 자금력은 당시 8개 구단 중 최하위 수준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쌍방울 선수단의 페이롤은 8개 구단 중 1위였다.

결국 쌍방울은 기존의 선수단을 근근이 이어나가기 위해 현대 유니콘스 삼성 라이온즈 등 당대의 재벌 구단을 상대로 주력 선수들을 연달아 거액에 팔아치우게 된다. 1997년 시즌 후 현대 유니콘스로부터 포수 김형남[4]과 내야수 이근엽에 현금 9억원 묶어서 받는 대신 주전 포수 박경완을 내주는 거래를 했다. 그리고 1998년 8월에는 또 현대 유니콘스로부터 정통파 투수 가내영, 언더핸드 투수 박정현[5]에 현금 6억원을 묶어 붙박이 마무리 투수 조규제와 맞바꿨다. 이 트레이드로 쌍방울은 당장의 가용현금으로 최소 15억원을 챙겼고 박경완과 조규제를 품에 안은 현대는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창단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다만 이 트레이드 때문에 쌍방울 팬들이 상당한 박탈감을 갖게 됐고 현대 유니콘스를 원망하게 된다.

현대가 쌍방울의 주축 둘을 영입해 우승한 것에 자극받은 재계 라이벌 팀 삼성 라이온즈는 1998년 시즌 후 외야수 이계성과 포수 양용모에 현금 20억원을 더하는 조건으로 팀의 정신적 보스였던 김기태구원 20승의 김현욱을 트레이드했다. 극심한 가난으로 인해 박경완, 조규제, 김기태, 김현욱 등 팀의 주축 선수들을 연달아 내준 쌍방울은 김기태의 트레이드로 사실상 모든 것이 끝났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였다.[6] 그렇게 쌍방울은 28승 7무 97패[7]를 기록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2.3. 경영위기 상황에서의 드래프트 전략

팀 자금사정이 점점 어려워지자 고졸 선수들만 지명하고 1-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학으로 진학시켰다. 당시에는 2라운드 지명 유효기한(현재 2년)이 없어 지명만 해놓고 대학으로 보낸 뒤 대학에서의 기량을 보고 헐값의 계약금을 제시 후 입단시키거나 지명권 포기를 하는 일들이 있었다. 박정권, 이영욱도 쌍방울의 지명을 받고 각각 동국대와 홍익대로 진학했다.

2.4. 1994년 최해식 폭행 및 트레이드 사건

1990년 1차 지명으로 쌍방울에 입단한 최해식은 입단 이후 줄곧 2군에서만 계속 뛰자[8] 불만이 쌓여갔다. 1994년 어느날 모처럼 1군 경기에 출전했으나 외야 플라이에 그쳤다. 모 코치가 "수고했어, 잘했어" 말을 건넸고 간만에 나간 타석에서 아웃으로 물러나 속이 상했던 최해식이 인상을 쓰자 발로 최해식의 얼굴을 차는 일이 벌어졌다. 하마터면 실명까지 이어질 뻔한 아찔한 사고였고 격분한 최해식이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해태와의 트레이드 협상을 진행했으며 결국 선수 생활 말년에 접어든 장채근과 유니폼을 맞바꿔입는다.

그런데 이 트레이드는 최해식의 인생을 역전시키는 신의 한 수가 되는데 해태로 가자마자 동기이자 주전이었던 정회열의 부상으로 기회를 잡게 되면서 단번에 타이거즈의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찼다. 최해식은 은퇴하기 전까지 두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고 최해식이 오기 전까지 해태의 주전 포수였던 정회열은 최해식에게 밀려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된다.

2.5. 1995년 항명사건

쌍방울그룹은 시즌 도중 전격적으로 백종관 사장, 박영규 단장, 한동화 감독을 해임하고 김우열 타격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임명하였다. 이례적인 인사조치의 배경은 당시 시즌 성적도 부진[9]했지만 시즌 개막 이전에 진행된 `정신교육 항명사건'이었다.

쌍방울은 이의철 그룹부회장의 지시로 이용일 구단주대행이 선수단 전원에게 3일간의 정신교육 실시를 지시했으나 한동화 감독과 박영규 단장이 무리한 교육이라며 정면으로 반발, 교육에 불참하였다. '일본통' 이용일 구단주대행과 '미국통' 한동화 감독의 관계는 불편했고, 이의철 그룹부회장도 구단 프런트 인사들을 좋게 보지 않아 단장과 감독이 교체될 것이라는 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2.6. 경영진, 프런트, 코칭스태프 내부의 불화

이용일 구단주 대행은 쌍방울 창단 감독이었던 '미국통' 김인식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 1992시즌이 끝나자마자 김인식의 후임으로 김성근 사단의 일원인 '일본통' 신용균을 영입했었다. 한동화는 신용균 감독과 비슷한 시기에 수석코치로 합류했으나 야구관의 차이로 불협화음이 심했으며 신용균은 결국 1년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지역연고 출신인 김준환(군산상고) 최영상(전주고) 코치를 제외한 대부분의 코치들[10]이 팀을 떠나야만 했다.

1992-1993년 신용균 감독 시절에는 일본프로야구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가을 캠프에 코치진과 선수들을 파견했는데 한동화 감독이 부임하자 일본 파견을 중단하였다.

2.7. 창단멤버가 없는 팀

1992년 시즌 후 신용균 감독 부임 과정에 새출발을 명분으로 이승희, 김봉근, 김평호, 서창기, 김만후 등 창단멤버를 일괄적으로 정리하고 팀의 구심점들이 사라지자 그런저런 선수들이 오다가다 잠시 머무르는 '기차역 대합실'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신인급 김기태는 1993년 부상으로 부진했고, 성영재는 데뷔시즌인 1993년 1승 13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 당시에도 신인보다는 타팀에서 고참급 선수들을 주로 영입했으며 경기 출전을 놓고 코칭스태프-선수들간의 불협화음이 나타나자 타팀 트레이드 또는 강제은퇴 방식으로 선수들을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끝까지 남아 있던 창단 멤버는 투수는 김원형, 박진석, 김기덕 야수는 김호뿐이었다.

김성근 감독 시절에도 주로 한물간 스타들을 영입하는 방식으로 팀 전력을 강화했다. 당시 신예급이었던 심성보가 술회하기를 해태 등 타팀에서 한가닥했던 대선배들이 쌍방울로 대거 합류해서 군기가 강했고 연습량도 많아 사람들이 쌍방울 고등학교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오상민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하여 말한 일화로 코치진의 지시로 트레이너로부터 마사지 받는 모습을 선배들이 보자 전부 지나가면서 '어디서 신인급이 마사지를 받냐고' 머리통을 정말 많이 맞았다고 했다.

최해식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구단 창단 당시 각 팀으로부터 2명씩 특별양도를 받아 선수단을 구성하여 이방인들의 팀 인상이 강했으며 해태로 트레이드 된 후 해태에 가보니 고향 선배들이 다 여기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11]

[1] 애초에 쌍방울이 연고지로 삼았던 전라북도는 원래 호남 연고팀이던 해태 타이거즈의 영향력이 여전히 짱짱했고 타 지역, 특히 수도권으로의 인구 유출이 극심해졌기에 가뜩이나 다른 팀보다 연고지 인구가 적었던(당시 전주시의 인구는 50만명대였다.) 쌍방울 처지에서는 팬덤이 확장될래야 확장될 수 없던 환경에 놓여 있었다. [2] 두 야구단의 모기업 계열사인 쌍방울 해태제과가 보름여의 시간차를 두고 부도를 맞았다. [3] 무주리조트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쌍방울그룹 좌초의 결정적 원인이 됐지만 이미 주력 사업인 속옷 사업과 방적 사업 외에 건설업, 전자업 등 비주력 사업에 여럿 손을 댔다가 성과를 내지 못하는 문어발식 경영이 경영 부실을 키웠다. 공교롭게도 해태 타이거즈의 모기업 해태그룹 역시 문어발식 경영 때문에 쓰러졌다. [4] 1996년 한국시리즈 당시 정명원과 함께 1회부터 8회까지 호흡을 맞추면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포수다. [5] 김성근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있던 시절 신인왕에 오르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 때문에 쌍방울에서 김성근 감독과 재회한 것을 반갑게 여기기도 했다. [6] 김성근의 회고록에서도 이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7] 쌍방울이 이해 거둔 97패는 역대 최저 승률 3위인 롯데 자이언츠의 2002년 시즌과 동률이다. [8] 김호근, 전종화가 1군에서 주로 마스크를 썼고, 조범현 당시 배터리코치는 신인 박경완을 밀어주고 있었다. [9] 당시 10연패중이었다. [10] 김광웅 2군감독, 김윤겸 투수코치, 유지훤 수비코치, 우경하 타격코치, 강만식 투수코치, 조 알바레즈 수비 및 주루코치 [11] 김성한, 이건열, 백인호, 조계현 등 군산상고 선배들이 많았다. 고교 대선배 김일권은 1996년 시즌을 앞두고 코치로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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