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ius Octavius Appius Suetrius Sabinus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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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출생 |
미상 로마 제국 이탈리아 하스토니움 |
사망 | 미상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야전 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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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군인황제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야전 사령관이며 권신이다. 전체 이름이 길어 보통은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로 통칭된다.다섯 황제의 해 동안 벌어진 내전으로 탄생된 세베루스 왕조 실세 의원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장남 카라칼라의 최측근 무리인 아미쿠스[1] 중 한명이며, 발비누스와 함께 카라칼라의 총애를 받은 인사로 유명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아래에서 로마 귀족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예, 특권을 선사받은 권신이나 카라칼라 사후에는 그 권력을 잃어버린다. 그러다가 세베루스 왕조 붕괴 후,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이자 고르디아누스 2세의 외조카, 양자인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카이사르 등극과 제위 등극에 기여한 공로 등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 집권 직후 소년황제와 공동 집정관에 올랐다.
2. 생애
로마 제국의 본국인 이탈리아 남동부 도시 히스토니움 출신이다. 아버지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역시 원로원 의원이라고 한다.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치하에서 원로원 의석을 이어 원로원 의원이 됐다. 그는 서기 193년(혹은 194년), 10인 위원회(decemvirs) 중 민사재판 판결을 담당한 Decemviri Stlitibus Judicandis로 불린 민사재판 담당 10인 위원회 위원 중 한명이 됐다. 이어 서기 201년에는 재무관에 올랐는데, 황실과 황제의 추천으로 후보가 되어 취임했고 같은 해에는 트리부누스 플레비스(호민관) 직위까지 선사받았다. 이어 2년 뒤인 203년과 3년 뒤인 206년에는 법무관에 올라 세베루스 황실의 후원을 받았다. 즉, 원로원 입성 직후 얼마되지 않은 시점부터 세습 원로원 의원 중 실세 중 실세만 누린 코스를 세베루스 황제 후원 아래 모두 누린 것이다.
이는 그가 법무관 임기를 마친 이후에도 계속됐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는 서기 209년부터 다음해인 210년까지 로마와 이탈리아 내 로마 가도를 관리, 보수하는 관리관(쿠라토르)이 됐고, 이 해에 푸닉 지방 중 권세가들의 자제들이 군복무를 위해 두루 거친다는 아프리카 속주에서 근무하는 장교로 파견됐다. 210년 귀국 직후에는 가족과 법률을 담당하는 고위관료에 임명되어 211년까지 활동했다.
211년 2월 4일, 카라칼라와 게타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망 직후 공동황제가 된 이후부터는 서기 213년까지 카라칼라 휘하 군단장, 야전사령관, 황제 휘하 참모 등을 맡아 카라칼라 측근으로 맹활약했다. 이 당시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는 카라칼라의 여러 장군 중 게르만 부족을 토벌하고 정복하는 원정대의 실질적인 야전사령관이었다고 한다. 처음 맡은 군단은 22군단 프리미게니아였고, 주 복무지는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였는데 서기 213년까지 보인 활약 아래 카라칼라의 최측근으로 입지가 굳어지게 된다.
그래서 서기 213년 12월 직후, 카라칼라 황제의 '아미쿠스(친구)' 중 가장 친밀한 친구가 되어 카라칼라의 비호 아래 권세를 누렸다. 그 시작은 서기 214년 집정관 취임이었는데, 이때 그와 함께 한 인사는 공교롭게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아폴리나리스였다. 이 사람은 카라칼라 손에 살해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의 아들로, 카라칼라의 또 다른 '아미쿠스'인 발비누스의 친척이며, 후일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와는 반대편에서 은연 중 대결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아버지다.
카라칼라는 그 잔혹함, 무자비함, 비열한 성격과 별개로 자기 측근과 친구들에게는 매우 호의적이고 자상했는데,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에게는 존경심까지 표할 정도로 그 사랑이 대단했다. 덕분에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는 다른 전직 집정관들과 달리, 총독으로 파견됨에도 황제의 결정을 대리 행사하는 재판권까지 하사받았고 로마와 이탈리아 식량 공급을 담당하는 중책까지 선사받았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의 위세는 서기 215년, 216년에도 계속됐는데, 그가 맡은 관직과 임무는 이탈리아와 로마 내 법 질서를 수호하고 도적들을 토벌하는 것도 포함됐다. 이는 로마가 건국된 이래, 가장 이례적인 조치였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카라칼라가 세금을 징세하면서 벌어진 로마와 이탈리아 내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목적이 컸다. 따라서 그는 이런 절대적이고 무자비한 권한을 받아 토벌권, 재판권, 수사권까지 손에 쥐는데, 이런 권한에도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는 이탈리아 공동체와 가족 해체를 막고자 재정 문제 및 징세 불만을 슬기롭게 해결했다.
따라서 그는 카라칼라에게 더 큰 신임을 받아 216년, 217년에 연달아 황제의 명령을 하달하고 명령하는 제국 특사 자격으로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속주로 파견됐다. 그러다가 217년 4월 8일, 카라칼라가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마르티알리스 손에 여행 중 암살된다. 이때 그는 새황제가 된 마크리누스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마크리누스는 그를 소환했다. 그러다가 엘라가발루스가 집권하고 세베루스 왕조가 부활한다.
그렇지만 세베루스 왕조 재건 뒤에도, 그는 특별한 관직을 맡지 못한다. 카라칼라가 기록말살형만 당하지 않았을 뿐 제국 전체 각 계층에 적이 많았던 상황, 그가 카라칼라의 복심과 같았던 점, 원로원 내부 경쟁과 견제 등이 주된 이유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그가 엘라가발루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 아래에서 같은 처지인 카라칼라의 옛 아미쿠스 동료 발비누스 등과 다르게, 황제와 아우구스타가 임명하는 어떤 명예, 영예도 누리지 못한 것을 보면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고 한다. 아마도,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의 두 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 모두와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던 점이 주된 이유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카라칼라 암살과 율리아 돔나의 죽음 직후부터 소식이 전혀 없다.
그러다가 서기 225 ~ 230년 사이, 전직집정관 중 원로원 내 제비뽑기 추첨으로 선출되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 됐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이후 수에트리우스가 예전 같은 고위직을 맡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끝으로 사실상 정계은퇴를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235년 세베루스 왕조가 완전히 붕괴되는데, 이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즉위한 상황에서도 그가 관직에 오르거나 영예를 선사받았다는 이야기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238년 6월, 단독황제가 된 고르디아누스 3세의 동료집정관으로 그 이름을 올린다. 이런 까닭에 서구권 로마사 연구자들은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가 정계은퇴 대신 완전히 원로원 내부, 황실과의 연줄 경쟁 등에서 밀렸다가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 아니냐고 예측 중이다. 이 예측이 맞다면 수에트리우스가 다시 권력을 누리기 위해, 고르디아누스 가문과 손잡고 어린 소년 황제를 단독황제로 올렸을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로리엣과 같은 학자들은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가 프라이토리아니를 통해 원로원이 내세운 푸피에누스, 발비누스를 제거하고, 원로원을 압박해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카이사르 직위를 내려주고 단독황제까지 올린 설계자 내지 비호세력 중 주동자로 추측 중인데, 이는 합리적인 근거가 많아 사실로 보인다고 한다.
이렇게 고르디아누스 3세의 동료 집정관이 된 이후,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티메시테우스와 율리우스 프리스쿠스,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아직 내각에 이름을 올리거나, 권세를 쥐기 보단 갓 복귀해 기지개를 편 시점인 것을 생각하면 꽤 놀라운 일이다.
이에 대하 여러 학자들은 그 이유 중 하나로, 그가 고령인 까닭일 확률이 높을 거라고 말한다. 이 예상은 당시 정황, 이 인물의 경력, 기록상 사실 등에 비추어 사실로 보인다. 그나마 알려진 정보라곤, 그가 복점관을 지냈고, 죽을 때까지 황제 보좌 사제였으며, 오늘날의 아벤티노 언덕에 있는 저택에서 살았다는 것 정도다. 헌데 이마저도 그가 고르디아누스 3세 동료집정관 경력 이후 사제활동, 정치활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의 단독황제 등극 후 집정관을 지낸 이후, 동시대 로마 원로원 내 고령 의원들처럼 은퇴 후 저택에서 은거했다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 중이다.
[1]
뜻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