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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본명 |
로버트 아서 탤벗 개스코인세실 Robert Arthur Talbot Gascoyne-Cec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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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0년 2월 3일 |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하트퍼드셔 주 햇필드 | |||
사망 | 1903년 8월 22일 (향년 73세) |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하트퍼드셔 주 햇필드 | |||
재임기간 | 제44대 총리 | ||
1885년 6월 23일 ~ 1886년 1월 28일 | |||
제46대 총리 | |||
1886년 7월 25일 ~ 1892년 8월 11일 | |||
제49대 총리 | |||
1895년 6월 25일 ~ 1902년 7월 11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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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작위 |
3대 솔즈배리 후작[1] 가터 기사 (Order of the Garter) 왕립 빅토리아 대훈장[2] |
|
학력 | 이튼 칼리지 (-1845년) | ||
이튼 칼리지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수학 / B.A. (1847-1850년), M.A. (1850-1853년) |
|||
신장 | 193cm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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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극후반을 대표했던 영국의 수상이자 정치가. 빅토리아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총리이며, 에드워드 7세 시대의 첫 총리였다. 비슷한 시기에 수상을 역임했던 지도자인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과는 달리 벤자민 디즈레일리와 같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였다. 보어 전쟁, 파쇼다 사건같은 일들이 그의 재임 중에 일어났다.조상은 엘리자베스 1세의 국왕비서(Secretary of State)를 맡은 초대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이다. 그의 차남 로버트 세실이 솔즈베리 백작이 되고[3] 7대 백작 제임스 세실이 후작이 되어 솔즈베리 후작가가 된다.
유일하게 제1재무경(First Lord of the Treasury)을 겸직하지 않은 채 총리를 수행한 인물이기도 하며 솔즈베리는 제1재무경을 겸직하지 않는 대신 외무대신을 겸직했다. 그래서 솔즈베리의 업적은 실제로 외교에 중점이 맞춰져 있다. 주요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영국의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을 깨고 개입주의 외교정책 시행. 영일동맹이 대표적 정책 중 하나이다.
영국의 마지막 귀족 출신 총리이기도 하다.[4] 이는 영국의 완전한 입헌화, 귀족정치의 완전한 종언을 상징한다고 평가받는다. 또, 사실상 마지막 정통 하이 토리 성향 보수당 총리이다.
2. 생애
2.1. 초기
1830년 잉글랜드 하트퍼드셔에서 제 2대 솔즈베리 후작 제임스 게스코인세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의 인생은 그다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또래 아이들에게 수시로 왕따를 당한 것은 물론이고, 10살 때 이튼 칼리지에 입학한 뒤에도 계속 왕따를 당하다 결국 5년만에 자퇴까지 하고 만다.불행한 유년기 이후, 솔즈베리는 체질을 건강히 하라는 주치의의 권고에 따라 영국령 식민지들을 여행했다. 호주, 뉴질랜드, 케이프 식민지 등지를 여행하던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식민지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보고 불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2.2. 정치 입문
2년간의 여행으로 건강과 자신감을 얻은 솔즈베리는 1853년 스탬퍼드 지역의 하원의원직을 제안받는다. 성직자의 길과 정치가의 길 중 무엇을 택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는 고심 끝에 의원직을 맡아 보수당의 일원이 된다. 당시 수상이었던 존 러셀 경[5]의 평화주의 정책을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준다"며 비판하고 나서, 솔즈베리는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1866년 36세의 나이에 인도 국무상에 오르게 된다.1년 후 아버지인 2대 솔즈베리 후작이 사망하자 후작위를 계승해[6] 상원의원에 임명되며 직책을 그레이 백작에게 넘겼지만, 벤저민 디즈레일리 내각에서 유능함을 입증하는 데 성공해 1874년 다시 인도 국무상 자리에 복귀한다.[7]
4년간 인도의 정책들을 담당하며 그는 디즈레일리와 신뢰관계를 쌓았고, 솔즈베리의 능력을 높이 본 디즈레일리는 1878년 그를 외무장관에 임명한다. 당시 발칸 반도는 전쟁의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고, 전임 외무장관이었던 더비 백작은 무능한 정책결정으로 영국과 러시아의 세력다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도권에 대한 영국-러시아 양국의 첨예한 대립은 점점 위기로 고조되어 갔으며, 당연히 오스만 투르크와의 문제까지 추가되며 상황은 노답 일로를 걷고 있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며 오스만과 산 스테파노 조약을 맺으며 영국은 더욱 불리한 상황이기도 했다.
이때 솔즈베리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러시아를 베를린 회의에 참여하게 한다. 물론 판은 비스마르크가 다 깔아 놓은 거지만 그 이후는 베를린 회의 문서 참고. 덕분에 영국은 러시아와의 동유럽 패권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2.3. 대영제국 수상이 되다
2.3.1. 1차 집권: 44대 총리, 1885 ~ 1886, 219일간
1880년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이 총선에서 패배하고 글래드스턴의 자유당 정권이 들어서자, 당연히 내각의 일원이었던 솔즈베리도 외무장관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881년 디즈레일리가 사망하자, 그는 보수당의 당수로 선출되었다. 1884년 글래드스턴의 자유당 내각이 투표권 확대 법안을 기획하자 솔즈베리는 "지금 동네 무식쟁이들한테 나라의 운명을 맡기자는 거요? 망하고 싶어서 안달났소?"이라며 반대 성명을 냈다. 뿐만 아니라, 솔즈베리는 글래드스턴의 외교정책도 신랄하게 깠다. 이집트에서 반영 폭동을 잠재우는 데 지지부진했던 내각은 야당인 보수당의 좋은 먹잇감이었으며,[8] 결국 1885년 솔즈베리는 대영제국의 수상에 오르게 된다.하지만 1885년 그가 처음 수상으로 취임했을 당시 보수당은 의회 안에서 확실한 수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솔즈베리는 비참한 당시 노동계층들의 생활상을 개선하기 위한 주거법안을 의회에 제출한다. 그리고 자유방임주의가 절정이었던 당시 영국 사회에서 이 법안은 정말 파격적이었던 것이고 솔즈베리는 격렬한 반대에 맞닥뜨려야만 했다. 심지어 대다수 언론인들과 야당 인사들은 솔즈베리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버렸고 1886년 1월 솔즈베리는 총리 취임 후 불과 7개월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2.3.2. 2차 집권: 46대 총리, 1886 ~ 1892, 6년 17일간
그렇지만, 솔즈베리가 다시 집권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글래드스턴 내각이 아일랜드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법률을 제출하면서 자유당에서 내분이 발생했던 것. 총리 직에서 사퇴한 지 불과 6개월만인 1886년 7월 솔즈베리는 수상으로 재등극하게 된다.2기 내각에서 솔즈베리는 자신의 주특기였던 외교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다. 이 시기 영국의 외교적 관심이 집중된 곳은 지중해, 그 중에서도 단연 이집트와 인도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였다. 1887년 영국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지중해 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1889년에는 해군법을 개정하여 영국의 해군력을 증강하는 데 총력을 쏟았다. 개정된 해군법 덕분에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로 최대 규모로 성장하게 됐으며, '영국 해군의 전력은 해군력 2,3위 국가의 전력을 합친 것보다 우위여야한다.'라는 가이드라인이 세워진 것도 이 때의 일이다.[9]
2.3.3. 3차 집권: 49대 총리, 1895 ~ 1902, 7년 16일간
이후 1892년 벌어진 총선에서 자유당이 아일랜드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시 의회에서 다수를 점함에 따라 솔즈베리는 다시금 총리직에서 사퇴해야만 했지만 다음 선거였던 1895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면서 세 번째 총리직을 맡게 된다. 3기 내각에서도 솔즈베리는 외교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소위 '찬란한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 영국의 외교적 고립주의를 이끈 것이 바로 솔즈베리 본인. 파쇼다 사건으로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날 뻔도 했지만 솔즈베리는 뛰어난 협상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양보를 얻어냈으며 보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아프리카 대륙의 상당 부분을 유니언 잭 밑에 위치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만 임기말인 1902년에는 찬란한 고립을 스스로 깨고 러시아에 대항해 일본과 최초로 근대적 동맹관계인 영일동맹을 맺는다.한편 내치에서도 몇가지 주목할 만한 정책이 수립됐는데, 아일랜드에서 온건한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소작농들의 불만을 완화시키는 한편으로 장애 아동을 위한 공립 교육 기관을 수립했다.
이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기고 난 뒤인 1902년 솔즈베리는 건강 상의 문제를 이유로 총리직에서 사임한다.[10] 그의 뒤를 이어 총리직에 오른 인물은 그의 조카이자 후일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외무장관 직을 역임하면서 유대인들의 국가 설립을 약속한 밸푸어 선언의 당사자 아서 밸푸어.
2.4. 말년
고도비만이었던 솔즈베리는 만성적인 심장병과 호흡 곤란을 앓고 있었고, 여기에 다리에 종양까지 생기면서 이로 인한 패혈증으로 1903년 8월 22일 숨을 거둔다.3. 여담
- 총리 재임 시기 빅토리아 여왕이 그에게 공작위를 제시한 적이 있었는데 두 차례나 거절했다. 거절한 이유가 참 재밌는데 처칠처럼 세습 귀족이 되면 정치 활동을 못할까봐 그런 것도 아니고, 글래드스턴처럼 평민으로 남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공작으로 작위의 급이 올라가면 그 수준에 걸맞은 막대한 생활비를 지출해야 하는데 그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존재하는데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역시 제1차 세계 대전 중 반독 감정으로 인해 성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서 조지 5세에게 공작위를 제시[11]받았으나, 공작이라는 일반 귀족 중에서도 최고위 작위에서 기대되는 호화로운 생활 방식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절한 사례가 있다.[12] 왜냐면 귀족의 으뜸인 공작은 존칭부터가 Most honourable(후작), Right honourable(백작, 자작, 남작)이랑 다르게 Your grace로 급이 높다. 이 존칭은 카톨릭의 추기경이 쓰는 것과 같다. 과장 약간 보태면 거의 소국 군주급의 풍요로움을 자랑해야 구두쇠 소리 안 듣고 살았다.
- 이렇게 엄살을 부려서 청빈한 삶을 살았을 거 같지만 정작 그의 재산은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다. 그의 사망 당시 전재산은 31만 파운드로, 오늘날 화폐가치로 따지면 300억 원을 상회하는 규모. 당시 공작이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13][14]
- 키가 193cm로 영국 총리 중 최장신이였다. 참고로 역대 미국의 최장신 대통령은 에이브러햄 링컨(193cm), 역대 프랑스의 최장신 대통령은 샤를 드골(196cm), 역대 독일의 최장신 총리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헬무트 콜(193cm)이다.
- 조지 커즌[15]과 함께 청나라의 관료인 이홍장과 만난 적이 있다. 왼쪽부터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본인(193cm), 이홍장(187cm), 조지 커즌(193cm). 셋 다 키가 엄청나게 큰데, 이홍장이 두 사람보다 작기는 하지만 큰 차이는 아니다. 로버트 개스코인세실도 나이가 들면서 키가 좀 줄어들었을 것이고, 대두인 데다가 조금 구부려있는 상태로 찍어서 더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기는 하다. 당연히 셋 다 청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당대 영국에서도 엄청난 장신이였으며,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1]
3rd Marquess of Salisbury
[2]
Royal Victorian Order, 기사 칭호 부여(1급, GCVO)
[3]
윌리엄 세실의 장남 토머스는 엑서터 백작이 되었고, 8대손 이후부터는 후작가로 승격된다.
[4]
알렉 더글러스흄(1963~ 1964) 총리는 귀족 출신이긴 했으나 원래는 서민원 의원이었고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작위를 승계받아 귀족원 의원이 된 경우로, 그마저도 논란이 심해지자 총리가 된 지 나흘 뒤 귀족 작위를 (자기 당대에 한해서) 포기한 후 총선에 출마해 서민원에 재입성해야 했다.
마거릿 대처는 총리직을 내려놓은 이후 작위를 수여받은 케이스.
[5]
유명한 수학자 겸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할아버지이다.
[6]
큰형이 후손 없이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
[7]
사실 이때 솔즈베리는 디즈레일리를 개인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8]
1880년에서 85년까지의 글래드스턴 내각은 삐걱거리는 외교정책 등으로 인해 '말썽쟁이 내각'이라고도 불렸다. 이때의 외교적 실책들은 글래드스턴의 흑역사가 되었다.
[9]
여담으로 이때는 아직
독일 제국과 건함경쟁이 벌어지기 전이었다. 이 때 영국이 견제하려고 했던 국가는 프랑스와 러시아.
[10]
본인의 건강도 건강이었고, 아내의 사망에 따른 정신적 충격도 컸다고 한다.
[11]
독일계 귀족의 경우 영지 이름이 곧 가문의 이름이기 때문에 성을 바꾸면 작위를 잃게 된다. 하지만 본인 과실 때문도 아니고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상황이 이리된 것인지라 조지 5세는 새로운 작위를 내려 손실을 보상해주려고 했고, 헤센 대공의 손자니까 공작 작위를 제안한 것.
[12]
사실 루트비히는 헤센 대공가의 손자였지만 아버지가 귀천상혼을 하는 바람에 영지를 상속받지 못해 그 혈통에 비해 가난했다. 당대 명문 귀족치고 드물게 해군 대장까지 오른 이유도 돈 때문이었을 정도. 물론 대공가에서 영지 대신 주식과 채권을 물려주긴 했지만, 헤센이 독일에 위치했던 만큼 대부분의 재산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묶여있었으며 이것들은 1차대전이 벌어지면서 전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대신 루트비히 공자는 밀포드 헤이븐 후작위(Marquess of Milford Haven)를 하사받았다.
[13]
15대 노퍽 공작 헨리 피츠앨런하워드는 1860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린 나이에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요크셔 서부와 서식스, 노퍽까지 세 지역에 있는 약 5만 에이커의 토지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약 247에이커가 1km²이니, km²로 환산하면 환산하면 약 202.3 km²에 달한다. 오늘날
서울특별시의 넓이가 약 605.2km²이니, 서울 넓이의 1/3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4]
현재 영국 최고의 부유한 귀족인 웨스트민스터 공작은, 초대 공작이 사망하면서 손자였던 2대 공작에게 약 60만 파운드의 재산과, 약 600만 파운드 가치의 부동산을 물려줬다고 한다. 현재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재산은 약 101억 2,700만 파운드로 알려져있다.
[15]
폴란드가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할 때
폴란드의 국경으로 제안된
커즌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