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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손보기박사.jpg
이름 손보기(孫寶基, Sohn Pow-key)
파른
출생 1922년 7월 7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 삼선평
(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1]
사망일 2010년 10월 31일 (향년 88세)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하동 용인효자병원
학력 이리공립보통학교 ( 졸업)
휘문고등보통학교 ( 졸업)
연희전문학교[2] (문과 /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 사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 / 석사)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대학원 ( 역사학 / 박사)
약력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용재 석좌교수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한불문화연구소 소장
한국민속학연구소 소장
석주선기념박물관 관장

1. 개요2. 생애3. 기여 및 업적4. 저서 및 논문5. 수상내역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역사학자 고고학자로 한국 고고학의 초창기를 이끈 인물 중 한명이다.

2. 생애

1922년 7월 7일 경기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이리공립보통학교, 1940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8.15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1기로 졸업하고 194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 신라시대 화랑 연구'로 국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9년 3월 1일부터 1952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문학부 사회과 역사전공(現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서 강사, 1953년 조교수로 승진해 1957년 11월 13일까지 재직했다.

1963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대학원에서 '조선의 정부 구조 연구'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64년부터 1987년까지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문과대학장 재직 중이던 1968년 11월 3일에는 연희전문학교 선배인 윤동주의 시비를 연세대학교 핀슨관 앞에 '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정년퇴임 후에는 한국선사문화연구소를 설립했고, 연세대학교 용재 석좌교수와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를 지냈다.

2010년 10월 31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하동 용인효자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3. 기여 및 업적

서울대학교 재직 시절 조선인 재미동포의 국권회복운동 역사를 조사했다. 더불어서 석기시대 연구 관련해서 당시 암암리에 퍼졌던 식민사관 타파에도 힘을 썼던 사람이기도 했다.[3]

1964년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석장리(現 공주시 석장리동)에서 최하층 20만년 전부터 최상흥 2만년 전까지의 구석기 시대 유물 수 만 점을 발굴해 북한 뿐만 아니라 남한에도 구석기 시대가 존재했음을 증명했다. 그 뒤 1992년까지 12차례에 걸쳐 발굴과 조사 작업을 벌였다.

1973년 충청북도 제천군(現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 점말동굴유적에서 신석기 시대 유물을 발굴했고, 1976년 청원군 문의면(現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노현리 두루봉 동굴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을 발굴했다. 1982년에는 경상남도 통영군(現 통영시) 욕지면 노대리 상노대도에서 신석기 시대 유물이 담긴 조개더미를 발굴했다.

1984년 세종 집현전 문화와 인쇄출판 기술을 연구했고, 1992년에는 몽골의 구석기 시대 유적을 발굴해 우리나라와 몽골 문명의 유사성을 입증했다. 1996년에는 장보고의 해상 경영을 연구했다.
2009년, 공주 석장리에 세워진 석장리 박물관에는 파른 손보기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으며, 개관 당시 기증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4]

원래 고고학 전공자가 아니라 고인쇄가 전공이다. 그래서 고활자와 인쇄술에도 연구 업적을 남겼다. 예를 들어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최초의 인쇄물임을 밝히는데 박병선 박사와 더불어 공헌하였다. 본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사후에 모교인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한 삼국유사는 이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다시 국보로 격상되어 현재 국보 제306-3호이다. 국보급 보물 문서를 공개하지도 않고 함부로 자기 집에 소장한 것은 논외로 하자. 또한 금속활자를 직접 재현해 고려 때의 뛰어난 합금기술 및 부어내기 기술을 증명해 기존에 알려졌던 연대보다 70년 앞선 1160년대에 이미 금속활자가 발명되었음을 밝혀냈다.

한글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여서 구석기고고학 용어들을 일부 우리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한자로 된 용어를 주로 쓰고 거기에 영어, 불어등 외국어 원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일일이 순우리말로 바꾸고 이렇게 바꿔 쓰자는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원래 고고학 용어를 순우리말로 바꿔 쓰기 시작한 것은 북한의 한흥수, 도유호가 최초이고 손보기는 도유호의 용어를 그대로 갖다 쓴 수준이다. 어쨌든 남한은 5차 교육과정 때부터 초중고 교과서에서 고고학 용어 일부를 우리말로 바꿔 사용해갔다. 그 결과 고고학은 우리나라 학문 분야에서 보기 드물게 순우리말 용어가 널리 쓰이는 분야가 되었다. 덕분에 한국사를 공부하는 중고딩들이 외울 거리를 약간이나마 줄여준 분이기도 한거다. 그런데 말이나 단어가 너무 생경하고 어법도 안 맞아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는 평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여담으로 손보기를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들이 죄다 나비넥타이를 메고 있을 것이다. 이는 일반 넥타이를 메면 발굴할 때 넥타이가 유물에 닿아서 불편하다고 이렇게 메기 시작한 것이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 같이 된 것이다. 사실 빌굴할 때 굳이 넥타이를 맬 이유는 없지만....

4. 저서 및 논문

* 저서
  • 《한국의 고활자》(1971년)
  • 《금속활자와 인쇄술》(1977년)
  • 《세종대왕과 집현전》(1985년)
  • 《세종시대의 인쇄출판》(1987년)
  • 《한국 구석기학 연구의 길잡이》(1988년)
  • 《석장리 선사 유적》(1993년)
  • 《장보고와 청해진》(1996년)
  • 《공부의 즐거움》(공저, 2006년)
  • 《석장리 유적과 한국의 구석기 문화》(2009년)

* 논문
  • 〈이조전기정치기구의 기능적 분석〉
  • 〈석장리 자갈돌 찍개문화층〉
  • 〈석장리 후기구석기시대 집자리〉
  • 〈미국에 있어서의 광복운동〉
  • 〈체질학상으로 본 한국사람의 뿌리〉

5. 수상내역

  • 2003 위암장지연상
  • 200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성왕상
  • 1990 옥관문화훈장
  • 1987 세종문화상
  • 1976 외솔상 문화부문 학술상

[1] #, 《샘터솔방울 인물 10 - 우리 역사를 새로 쓴 고고학자 손보기》 참조. [2] 연세대학교 [3] "일본인의 식민사관에 의한 선사 편년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연세춘추 1964. 12. 7일자 기고문 중 [4] 초창기에는 파른 손보기 기념관에 유품들을 전시했으나, 현재는 기획전시실과 맞바꿔서 석장리박물관 본관에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고 이 기념관은 기획전시실로 이용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