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레콩키스타 시기 개종 여부에 따른 호칭 | ||
<colbgcolor=#ddd,#383b40> 기존 종교 | 이후 종교 | |
가톨릭 | 이슬람 | |
가톨릭 |
모사라베 Mozárabe (개종 X) |
물라디 Muladí (가톨릭→이슬람 개종) |
이슬람 |
모리스코 Moriscos (이슬람→가톨릭 개종) |
무데하르 Mudéjar (개종 X) |
무데하르는 레콩키스타 시기 이베리아반도 가톨릭 왕국의 무슬림 신민을 의미한다. 어원은 아랍어로 "길들여진 자"라는 뜻의 무닷잔에서 차용하였으며 다소 비하적인 명칭이다. 중세 이베리아 이슬람 왕국의 가톨릭 신민 모사라베와 대비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서기 8세기 무슬림들은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정복하였으나 11세기 중반 이후 조금씩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북부의 카스티야 왕국 등 가톨릭 왕국들이 영토를 다시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을 레콩키스타, 이른바 "재정복"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들이 "재정복"한 지역에서 투항한 무슬림들은 한동안 이슬람 신앙을 유지할 권리를 제한적으로나마 보장받았지만 레콩키스타가 완료된 후에는 이슬람에서 가톨릭으로 강제로 개종당하고 개종당한 후에도 " 모리스코"라고 불리며 이등시민 취급을 받았다.
2. 상세
11세기 중반 이후 후우마이야 왕조가 무너지고 무슬림들이 여러 타이파 국가들로 분열하면서 서로 전쟁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 등 북부의 가톨릭 왕국들은 분열된 타이파 세력들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1492년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가 함락될 때가지 무슬림 포로나 투항자, 신민들이 꾸준히 가톨릭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오늘날 스페인인 인구의 11%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아랍인 혹은 베르베르인 조상을 두고 있는 것으로 나왔는데 모사라베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가 다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은 훨씬 더 높을 것이다.레콩키스타 시대에 유대인들은 대부분 상공업자나 토지 관리인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무슬림이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재정복한 지역에서 무슬림 농민들을 갑자기 다 추방하거나 죽이면 가톨릭 왕국 입장에서도 손해인 데다 무슬림 성직자나 군인들과의 항복 협상 과정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권리 보장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무데하르들은 세파르딤 유대인에 비하면 탄압과 보복을 적게 받는 편이었다.
아라곤 왕국은 무슬림 지배가 짧았던 예이다 같은 북부 도시에도 무슬림 구역이 있었으며 재정복한 발렌시아 지역의 농민들은 재정복 당시 상당수가 무슬림이었다. 아라곤 왕국의 북부에도 무데하르 인구가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아랍어를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이슬람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당시 스페인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사라고사 시민 상당수가 가톨릭의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테야 대신 메카로 순례를 갈 것이라는 기록이 남았던 것으로 보아 아라곤의 무데하르 인구 규모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데하르들은 종교 생활 관련하여 이런저런 눈치를 봐야 했지만 유력자의 가신으로 봉사하는 경우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예배도 드릴 수 있었다. 카탈루냐보다 남쪽에 있던 발렌시아 주에서는 농민 인구 상당수는 아라곤 왕국의 정복 후에도 이슬람을 유지하였으며 주민의 상당수가 여전히 아랍어 구사가 가능했고 심지어 1492년 그라나다 에미르국이 정복되고 점령지의 주민들이 가톨릭으로 개종 아니면 추방이 강요된 상황에서도 발렌시아에서만큼은 이슬람 샤리아법이 1520년대까지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다. 1570년대 베네치아인들이 남긴 기록에 다르면 발렌시아의 귀족들은 현지 농민들이 여전히 이슬람식으로 예배를 보는데도 별반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라곤 왕국의 귀족이나 지주들이 이들을 냅둔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원래 카탈루냐와 발렌시아에 해당하던 지역은 로마 제국의 속주이던 시절 주로 포도주와 올리브유, 가룸[1] 로마 제국 각지로 수출하며 번영을 누렸으나,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면서 수출 시장이 붕괴되었었다. 무슬림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이후에는 이렇게 버려진 포도밭을 오렌지 과수원이나 논으로 바꾸고, 관개시설을 확충하여 인구 부양력을 대폭 늘려놓았다. 그런데 벼농사는 엄연히 노동집약적 산업이고 쉽거나 즐거운 일도 아닌데 벼농사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무데하르나 모리스코 농민들을 한 큐에 다 추방했다가는 지주들의 생계 기반이 흔들리는게 당연했다. 다른 한편으로 무슬림 인구가 일찍이 축출된 카스티야나 에스트라마두라 지방 건조지대 고원의 경우 주 산업이 목축이었는데, 양치기들은 이미 북부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 일대에 차고 넘쳤기 때문에[2] 무슬림들을 말 바꾸고 다 추방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었다.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톨레도, 코르도바, 세비야를 함락하는 과정에서 많은 무슬림 학자들과 수공업자, 건축가들이 신민이 되었는데 이들이 발전시키고 영향을 준 예술 양식을 무데하르 양식이라고 부른다. 특히 건축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3] 가톨릭 왕국의 도시에서 무슬림 신민들이 모여살던 구역은 알하마(Aljama[4])라 불렸으며 모스크, 마드라사, 할랄 도축장, 아랍식 빵집, 아랍식 목욕탕 등의 시설을 보유했다.
3. 소멸
레콩키스타가 진행되고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슬림들의 입지가 점차 위축되면서 이슬람에 대한 박해도 가중되기 시작했다. 15세기를 기점으로 이베리아반도 가톨릭 왕국 도시의 무슬림 구역은 하나둘 해체되고 모스크들은 성당으로 개조되기 시작했다. 1491년 그라나다 조약에서 나스르 왕조 내 무슬림들이 신앙을 지킬 권리가 약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492년 그라나다 재정복 당시 흥분한 그리스도인 군인들이 무슬림들을 살육하는 사례에서 보듯 시대가 지날수록 무데하르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1492년 레콩키스타가 완료된 후 1497년 포르투갈 왕국에서는 이슬람을 믿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으며 카스티야 연합 왕국에서는 1502년, 아라곤 왕국에서는 1526년부로 이슬람을 믿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 추방시켰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무데하르 무슬림들이 명목상으로나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이들을 "작은 무어인"이라는 뜻의 " 모리스코"라고 불렸다. 안달루시아의 상당수 무슬림들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산악 지대로 숨었는데 이들이 건설한 마을은 오늘날 "안달루시아의 하얀 마을들"[5](Los Pueblos Blancos)의 기원이 된다.
이등시민 취급을 받던 모리스코들도 1609~1614년 사이 모리스코 추방 정책으로 상당수가 북아프리카로 추방당하고[6] 잔존한 모리스코들은 스페인인들과 완전히 동화되었다.
[1]
로마인들의 즐겨 먹던 액젓 비슷한 음식. 생선으로 만든다
[2]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와 갈리시아 일대는 산성 토양이라서 농업 생산성이 낮은 편이다.
[3]
19세기부터는 중세 말 무데하르 양식 예술을 재해석한 네오 무데하르 건축 양식이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 유행하고 있다.
[4]
아랍어로 당이나 공동체 등을 의미하는 Al Jam'ah 알 자므아가 어원이다.
[5]
이슬람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사각형에 하얀 칠을 한 집들
[6]
북아프리카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이들을 배교자라고 공격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