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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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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례
2.1. 고구려의 북진 정책2.2. 백제의 북진 정책2.3. 신라의 북진 정책2.4. 발해의 북진 정책2.5. 후백제의 북진 정책2.6. 태봉의 북진 정책2.7. 고려의 북진 정책2.8. 조선의 북진 정책2.9. 대한제국의 북진정책2.10. 대한민국의 북진 정책
3. 기타 사례
3.1. 이징옥의 난3.2. 임경업의 심양 침공계획3.3. 운부의 난3.4. 이필제의 난3.5. 해도병마(海島兵馬)의 계획3.6. 고종의 20만 미군 원병과 중국정벌 계획3.7. 의화단 운동 진압군 파병 계획
4.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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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사 역대 국가들의 북진 정책을 모은 문서.

발해가 멸망하기 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의 주도권을 예맥족이 잡았기에 발해 멸망 이후의 고려부터 역사에 존재한 북진은 곧 고토회복을 의미했다. 그러나 만주와 평안북도, 함경북도 일대를 통치한 고구려 발해는 한민족이 주도권을 잡을지언정 다수의 이민족을 지배하에 거느린 다민족국가였고, 발해가 멸망한 이후로 이 지역은 여진족의 금과 몽골족의 원의 통치를 받아 이민족의 영역이 된지 오래인데다 인구밀도도 낮았다. 그래서 고려 이후로는 북진을 펼칠 때마다 한반도 남부의 주민을 북쪽으로 이주시키고 현지 이민족 주민들을 국가 체제에 편입하는 식민화하는 작업도 꾸준히 수행되었다.

통일한국 문서에도 기록되어있듯 역사적 의미에서 한민족의 북진은 조선 초 4군 6진의 건설을 통해 압록강과 두만강,백두산을 사이에 둔 자연 경계까지 이루어져, 압록강,두만강 이남의 한반도로 한민족의 땅으로 정의하고 요동반도, 만주, 연해주로의 세력권 확장을 노려왔다.

2. 사례

2.1. 고구려의 북진 정책

압록강 인근인 졸본성에서 시작한 고구려는 점차 영역을 확대하여 북쪽의 부여를 치고 5세기부터는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2.2. 백제의 북진 정책

  • 472년 개로왕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각각 남과 북에서 협공하자고 제의하였지만 북위가 거절하였다.

2.3. 신라의 북진 정책

  • 진흥왕은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고 한강상류 10군을 차지하였으며 이후 한강하류 6군도 점유하고 최종적으로 고구려 남부(현 함경남도)까지 진출했다.
  • 나당전쟁 직후 신라의 북방 경계선은 임진강 - 안변 선이었으나 남부의 주민을 송악, 패강진으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활발히 펼쳐 2백여 년간 대동강 - 원산만 선까지 꾸준히 북상하게 된다.

2.4. 발해의 북진 정책

동모산에서 발흥한 발해는 수도를 북쪽인 상경용천부에 두었고 이후 북방의 흑수말갈을 복속시켰으며[2] 아무르강 북편에서도 발해의 유적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2.5. 후백제의 북진 정책

  • 견훤 공산 전투, 고창 전투
    후백제의 왕 견훤은 927년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함락시키고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경애왕을 자살시키는 방법으로 시해하고 경순왕을 즉위시키면서 신라를 속국화하고 뒤이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왕건의 고려군을 공산 전투에서 크게 무찌르며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리고 훗날 930년 고창 전투에서 삼한의 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신라 호족군의 지원을 받아 고창에서 고려군과 맞붙었으나 고려의 장수 유금필의 맹활약과 경애왕의 시해사건으로 견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신라 호족들의 통수로 후백제군이 8천명이나 전사하며 대패했고 후백제는 상주 일대 상실 및 신라 호족들이 대거 고려에 투항하는 등 큰 손실을 입게 되어 삼한의 패권을 고려에게 넘겨준다.
  • 견신검 일리천 전투
    일리천 전투는 후삼국시대 최후의 전투이고 고려의 후백제 정벌로만 알려져 있지만 후백제의 고려 남정 방어 및 후백제의 북벌이기도 하다. 935년 3월, 정변을 일으켜 견훤 금산사에 가두고 후백제의 새로운 왕이 된 견신검은 936년 9월 총동원령을 선포하여 일리천에서 고려와 맞붙었으나 935년 6월 금산사에 탈출하여 고려에 망명하고 일리천 전투에 고려군에 합세해 출전한 견훤의 등장으로 후백제군은 사기를 잃고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크게 무찌르며 승리를 거두었다. 견신검은 패잔병을 이끌고 수도 완산주로 퇴각하다가 황산에서 결국 고려군에게 따라잡히고 포위당해 항복한다. 이후 고려의 왕 왕건은 후백제의 수도 완산주에 입성하고 후백제의 항복 및 삼한의 통일을 선포하며 892년부터 45년동안 이어져 온 전란기인 후삼국시대는 고려의 통일로 마무리가 된다.

2.6. 태봉의 북진 정책

905년 평양성주 검용(후삼국시대), 증성의 명귀 등이 투항한 기록이 있는데, 궁예가 대동강 이북의 평양, 강서 일대로 진출했음을 알려준다.

2.7. 고려의 북진 정책

고씨 고려의 후계를 자처한 왕건의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국가 이념으로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북진정책을 채택했다. 이는 고려사 태조 세가에 기록된 이제현의 논평에도 드러난다.
  • 태조의 북진 정책.
    태조는 태봉 시절에 평양까지 북진해놓은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고려 극초기의 북방 국경선을 청천강-영흥만 이남까지 끌어올렸다.
  • 정종, 광종 대의 북진 정책.
    정종과 광종은 태조 대의 국경이었던 청천강을 넘어 청천강 이북에 여러 성을 쌓고 일대를 개척하여 국경을 대령강까지 끌어올렸다.
  • 정종, 인종 대의 서경 천도 시도.
    정종이 서경 천도의 이유로 든 것이 풍수지리상 좋다는 것과 옛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점이다. 인종 시기 묘청은 정종이 말한 이유에 더불어 천도하면 금나라 정벌은 물론이요 황제도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현재 관점에서 보면 황제는커녕 금나라 잘못 건드려서 나라가 망하는 게 더 현실적이었다는 게 문제.
  • 서희 강동 6주 획득 및 북진 시도.
    제1차 여요전쟁에서 서희는 거란군 장수 소손녕과의 담판을 통해 강동 6주에 대한 영유를 인정받았다. 고려사 서희 열전에 따르면 서희는 강동 6주 수복 이후 계속 북상하려 했지만 성종의 만류로 종료되었다.
  • 현종 곽원의 출정.
    고려사 곽원 열전에 따르면 발해부흥운동으로 건립된 흥료국의 지원요청에 따라 출병했지만 성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 덕종 유소, 왕가도의 출정 시도.
    왕가도 열전에 따르면 진지하게 논의가 되었으나 각하되었다.
  • 문종 여진 복속.
    여진의 대부분이 고려에 복속되어 토산물을 바치고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하는 항복)하기를 요청했으며, 심지어 거란에게 받은 벼슬을 버리고 고려에 충성을 맹세하는 부족까지 나타났을 만큼 고려의 간접 영토·영향권이 가장 넓게 확대되었던 것이 바로 이때였다.
  • 숙종 여진정벌.
    성과는 좋지 않았고, 격노한 숙종에 의해 윤관 별무반을 구성되는 계기가 된다.
  • 예종 윤관 여진정벌 동북 9성 개척.
  • 예종 대 요나라 말기 내원성, 보주성 점령
  • 공민왕의 북벌.
    원나라 말기의 혼란함을 틈타 쌍성총관부를 포함해 동북면을 크게 넓히고 서북면을 압록강 건너 제1차 요동정벌 시도.
  • 우왕 최영 제2차 요동정벌 시도.
    이 2차 정벌이 이성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바로 그 시도다.

2.8. 조선의 북진 정책

  • 태종 여진족 정벌.
    조선 최초의 여진 정벌. 태종 즉위 이후 명은 조선 북방에 건주위(建州衛)·모련위(毛憐衛) 등의 위소(衛所)를 설치하고 오도리(吾都里)·올량합(兀良哈)·올적합(兀狄哈) 등 여진족 부족 추장들을 위소 수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조선의 영향력 내에 있던 여진족들에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명의 관직 수여를 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405년(태종 5) 유력 추장이었던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는 명의 건주위 도지휘사(都指揮使), 파아손(把兒遜)은 모련위 지휘첨사(指揮僉事)로 임명되는 등 명의 관직을 받았다. 조선이 보복으로 여진족과의 무역을 일시적으로 단절하자 이에 분개한 올적합(兀狄哈) 김문내(金文乃) 등이 1406년(태종 6)과 1410년(태종 10) 두 차례 경원을 침공하여 병마사(兵馬使) 한흥보(韓興寶)를 포함한 장병들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혔다. #

    사건을 보고받은 태종은 즉각 올적합 정벌을 명하였다. 하륜(河崙)· 성석린(成石璘) 등의 정벌 반대가 있었으나, 태종은 조영무(趙英茂)· 유량(柳亮) 등의 찬성론을 따라 길주찰리사(吉州察理使) 조연(趙涓)을 주장(主將)으로 삼고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신유정(辛有定)·전 동지총제(同知摠制) 김중보(金重寶) 등을 부장으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게 하였다.

    조연은 신유정·김중보· 곽승우(郭承祐)와 함께 원정군 1,150명을 이끌고 2월 29일 길주(吉州)를 출발, 3월 9일 모련위의 두문(豆門)에 도착, 모련위지휘(毛憐衛指揮) 파아손(把兒遜)과 아고거(阿古車)·착화(着和)·하을주(下乙主) 등 4명의 수장 및 여진족 160여 명을 죽였으며 가옥을 불사르는 등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돌아왔다. 이를 통해 조선은 모련위의 핵심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

    태종의 모련위 정벌은 단순히 약탈 징계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조선을 배신하고 명의 관직을 받은 여진족 세력들을 향한 보복전으로 이루어졌다. 정벌 결과 여진족들이 조선을 불신하게 되고 수 차례 조선 변경을 침략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련위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건주위의 주요 세력이었던 동맹가첩목아는 조선의 원정군을 피하여 1411년(태종 11년) 오도리를 이끌고 압록강 북쪽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태종이 죽을 때까지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 침입은 거의 사라졌다. #
  • 세종의 북벌.
    헌법상 대한민국의 영토를 완성시킨 한국 역사 최후의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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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 때 명나라로부터 선춘령[3] 이남을 국경으로 인정받으면서 조선은 두만강 북쪽 일부 지역 여진족의 종주권은 조선에 있다고 생각하였고 여진족 부족장에게 만호 등 조선 무신에 해당하는 관직을 주었다. 성종 훈춘강을 따라 축성하여 해당 지역을 직접 지배할 것이 추진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다.
  • 성종 남만주 개척 시도.
    성종 재위 당시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인 '여자신'이 조정에 직접 와서 성종에게 야춘(훈춘시의 방천지역)과 훈춘(훈춘시의 도심지역)을 위시로 한 남 만주(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해당) 지역 일대 개척을 주장[4]하여 이에 성종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여자신과 성준 등에게 명해 연변 일대에 있는 고구려 시대 장성들을 조사하게 하고 동시에 장성 축조 사업 또한 시작했지만 앞서 있었던 여진 정벌의 실패 때문인지 곧바로 삼사가 "공사는 민력을 고갈시킨다."며 조정에서 여론을 형성해서 거세게 반대[5]하는 바람에 결국 개척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개척을 중간에 중단하고 말았지만, 이전에는 여진족을 정벌하면 인명을 살상하고 곧바로 회군하는 것이 다였는데 성종 시절 연변 개척 주장은 이와 달리 아예 관리를 보내 완전히 개척하여 ' 정복'할 것을 처음으로 주장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특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 효종 북벌론.
    삼전도의 굴욕 이후 치욕에 휩싸인 조선에서 군사를 정비하여 청나라를 공격해 복수설치(復讎雪恥)하자고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운동. 북벌론 중에선 제일 유명하고 한국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비중있게 다루는 분야지만 북벌론 자체는 효종 이후 숙종 때까지도 몇 번이고 논제로 오르락내리락하긴 했으나 숙종 후반기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 조정도 거의 포기하는 상황이었고 이후 북벌론도 현대의 비상령같이 내적 기실을 다지자는 의미로 쓴 편.

    효종의 북벌론 자체도 현실성 없었기에 현대 학계에선 '효종부터가 사실 내실을 다지려고 일부러 크게 벌여본거 아닌가?' 하는 의심도 많은 편이다.

    북벌을 위해 조련한 조총병은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나선정벌에 파병되어 활약하였다.

2.9. 대한제국의 북진정책

구한말 조선, 그리고 조선을 계승한 대한제국 청나라 간도에서 영토 분쟁을 벌이며 실효지배를 주장했었다. 청과 대한제국의 무력충돌
당시 청나라는 서구열강들과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1871년 '평안도관찰사' 한계원은 정부의 승인 없이 압록강 대안의 조선인 개간지를 귀속시키고 항약을 설치하여 관리하기 시작했다. 1889년 평안도에 소재한 조선의 관청인 '강계아사'(江界衙舍)는 압록강 이북의 조선인 개간지를 귀속시켰다. 1880년부터 '회령부사' 홍남주의 묵인 하에 회령 이북을 개간하기 시작한 이래 1881년부터 더욱 광범위한 지역이 개간되어 조선인 수천여 명이 추가 이주하였다. 고종 치세 1883년 '서북경략사' 김윤식 어윤중, 1885년 '토문 감계사' 이중하[6]를 파견하였고 1897년 대한제국 정부는 압록강 대안의 조선인 촌락 보호를 위해 서상무를 '서변계관리사'(西邊界管理使)로 임명하고 조선인 호구조사를 실시하였으며[7] 더불어 '평안북도관찰사' 이도재는 압록강 대안을 각 군에 배속시키고 민병을 모집하여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하고 각 군아에게 압록강 대안의 행정을 맡겼다.

1900년에는 의화단의 난 때문에 국경이 어지러워지자 평안도와 함경도에 진위대를 주둔시켰다. 이들은 종종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변경을 위협하거나 침범하는 비적 등과 소규모 무력 충돌을 벌였다. 1902년에 북간도에는 '함북간도시찰'(咸北間島視察) 이범윤을 파견 후 '향약소'를 설치하는 한편 서간도에는 관아를 세우고 '의정부참찬' 이용태를 '향약장'으로, 서상무를 '부향약장'으로 임명했다. 이범윤은 북간도에서 사병조직이자 비밀감찰조직인 사포대를 조직했다. 이범윤과 그의 사포대가 북간도에서 활동하면서 '무산 간도'를 완전히 점령하고 청 관리를 사로잡아 간도가 한국영토임을 선언하여 '연집강'에 소재지를 둔 청나라의 '연길청'과 지속적으로 충돌한다.

1903년는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사'로 승격하였다. 북간도에서 이범윤은 '회령간도', '무산간도'를 점유하여 청나라 연길청 이사 '첸줘얀'(陳作彦)의 '길강군'과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공사가 이런 월경 공격에 대해 침략 행위라며 항의하는 서한을 대한제국 '외부'(외무부)에 보낸 적이 있다. 반대로 러시아는 만주 철도이권에 관심을 가지고 청군에 공동 대응하자며 대한제국과 이런 합의를 가지기도했다. 첫째, 대한국 정부와 대러시아 정부는 간도 및 그 부근 3마일 이내의 지역에 주(州)를 설치하여 관리한다. ~넷째, 간도에 소란이 생겨 주장(州長)의 권한으로 대응할 수 없을 때, 대한국 정부와 대러시아 정부는 협동하여 적절한 방어책을 강구한다. 그러나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 관아는 청국의 강력한 반발로 철수하였다. 그래서 '부향약장' 서상무는 다시 내려왔다. 단, 간도 영유권 문제에서 유명한 이범윤의 사포대는 어디까지나 정식으로 대한제국군 편제에 속한 정규군이 아니며 이범윤이 간도 지역에서의 청군과 교전을 위해 임의로 모집한 사병일 뿐이다. 다만 고종은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고 세를걷어 사포대의 활동을 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러므로 대한제국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는 민병대 준군사조직으로서의 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일제의 보호국이 되어 외교권을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권리가 일제에게 넘어가고 사실상 속국으로 전락하게 되어 주도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 후 일본 제국은 1906년 11월 박제순 '참정 대신'이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보호를 요청한 것을 구실로 일본군의 간도 파병을 결정했다. 그래서 제1차 러일협약이 체결된 이후인 1907년 8월에 북간도의 한국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용정촌'에 한국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고 일본 제국 육군 헌병을 파병해 청나라 '연길청' 사이에 간도 영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1909년 청일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간도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 두만강 너머의 영토에 대한 영유권 확보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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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대한민국의 북진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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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 사례

3.1. 이징옥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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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이징옥은 자신을 따르는 군대와 북방으로 진출하여 여진족과 연합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금나라 수도 오국성에다가 '대금'을 세우고 반란을 도모하려 한 일이 있다.

3.2. 임경업의 심양 침공계획

병자호란 당시 임경업은 의주 부윤으로 있었는데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으로 역침공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청 태종은 조선 침략에 정예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올인한 상황이였으니 발상 자체는 좋았지만 현실은 암울했다. 우선 임경업의 군은 위에 언급됐듯이 고작 400명 밖에 안됐다. 고로 원래는 아마 명나라의 군대나 김자점의 북방군과 연계하여 적의 심장부를 역공을 가할 계획이었을 듯 한데, 김자점은 애초에 청나라군과 싸울 의지가 없었고 명나라는 국내 각종 도적들의 반란들 때문에 신경을 쓸 여력도 없었다[8]. 그래서 임경업이 평안 병사 유림과 함께 연합 전선을 펴고자 했지만 유림은 어명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이 설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임경업의 심양 역침공 발상은 큰 문제가 3가지가 있었다. 우선 유림이 이끄는 병력조차도 2,000명이었다. 합쳐봐야 2,400명, 그나마 거의 조총수로만 이루어진 병력으로 심양을 침공하는 건 큰 무리였다. 애초에 이 설에서 임경업은 본인에게 5,000명의 군사를 준다면 심양을 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본인이 본래 생각하고 있던 병력의 반도 채 안되는 숫자다. 다음으로 청군은 한덩어리로 움직이는 상황이 아니었다. 임경업이 인근 병력과 합류해서 북으로 진군하려면 인근의 청군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청군 병력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만은 족히 나오기 때문에 설사 임경업이 만약 5,000명의 군사를 모았다고 해도 청이 군의 일부만 보내서 때려잡아도 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청이 아직 명나라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수도를 완전 텅텅 비워놓고 갔을 리가 없으니 심양과 주변에 최소한의 예비 병력이 주둔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당시는 이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것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정작 유림은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와 함께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서 남하하던 중에 자모산성 전투에서 4차례에 걸친 청군의 공세를 모조리 격퇴한 활약을 펼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조가 항복했으니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임경업의 심양 공격론은 2가지 중 하나로 보인다. 하나는 임경업 장군님 만만세 하면서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란 것이고,[9] 다른 하나는 임경업이 전략적 상황 파악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10]

이후 임경업은 이미 화의를 맺고 철군하던 청나라 황제의 조카 요퇴의 병력 300명을 압록강 인근에서 공격하여 격파하고 포로로 잡힌 남녀 120여 명과 말을 회수한다. 의도와 결과는 좋았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이를 빌미로 삼아 청군의 재침을 부를 수도 있는 행동이었고, 조선 조정의 의도도 아니었다.

화친을 반대한 삼학사가 청나라로 끌려가는 도중 백마산성에서 머물게 되자 임경업이 찾아가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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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운부의 난

날이 저문 뒤에 이절(李梲)·유선기(兪選基) 등이 상변(上變) 하기를,
"어느 날 이영창(李榮昌)이 이절의 집에 와서 자면서 갑자기 묻기를, ‘그대가 장지(葬地)를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 스승을 가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이란 중은 바로 운부(雲浮)로서, 당시 나이 70세로 송조(宋朝)의 명신(名臣)이었던 왕조(汪藻)의 후손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 중국에서 표류하여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으며, 머리를 깎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은 위로는 천문(天文)을 통달하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통찰하고 중간으로는 인사(人事)를 관찰하여 재주가 옛날의 공명(孔明)과 유기(劉基)에 밑돌지 않는다는 자였습니다. 그가 불경(佛經)을 승도(僧徒)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자로는 옥여(玉如)·일여(一如)·묘정(卯定)·대성(大聖)·법주(法主) 등 1백여 인을 얻어 그 술업(術業)을 전수(傳受)시키면서 팔도(八道)의 중들과 체결(締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장길산(張吉山)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眞人) 정(鄭)·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 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임금이 또 국청(鞫廳)에 하교(下敎)하기를,
"극적(劇賊)[11] 장길산(張吉山)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道)로 왕래(往來)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陽德)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陰凶)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李榮昌)의 초사(招辭)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道)에 은밀히 신칙(申飭)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1월 10일 임술 3번째기사 / 반역 모의에 관련된 이절·유선기 등은 복주되고 이익화·장영우 등은 귀양 보내다

1697년에 운부와 1백여 명의 승려들은 장길산과 합세해 조선을 차지한 뒤 청나라로 처들어가려했다.

3.4. 이필제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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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부터 1871년까지 이필제는 먼저 조선을 장악한 다음 청나라로 쳐들어가는 북벌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3.5. 해도병마(海島兵馬)의 계획

1801년에는 김건순이 이희영, 강이천과 함께 바다의 한 외딴 섬으로 들어가 군사를 기르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것이 소위 해도병마(海島兵馬)의 계획이다. 목적은 북벌으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는것이었다. 김건순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 김상헌의 후손이기도 하다.

3.6. 고종의 20만 미군 원병과 중국정벌 계획

고종께서는 아직 사절 일행이 여장도 꾸리기 전 내게 ‘대조선 해륙군 대도원수(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 교첩까지 내리셨다. 내가 20만 미국 병사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환국하면, 고종께서는 쉰양강(潯陽江)[12] 건너편까지 통치하기 편하도록 평양으로 황도를 옮길 엄청난 계획을 품으셨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황금은 귀신도 지배한다는데 200만달러의 거금을 흉중에 품고 나니 호장한 용기가 아니 날 수 없었다. 나는 돈을 물 쓰듯 뿌리며 발랄한 외교를 시작했다. 낮에 여는 연회에는 문무백관을 초청하고, 밤에 여는 연회에는 상하원 의원과 기자를 초대하여 동방예의지국을 선전하기에 분주했다. 결국 20만 병사를 원병으로 조선에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하원 표결에 부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든 탑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가 왔다.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원에서 부결되고 만 것이다.

성공을 굳게 믿은 나는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간 비탄과 함께 커다란 걱정이 일어났다. 원병을 빌릴 것을 구실로 얻은 차관 중 이미 소비한 16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어떻게 갚을까 하는 것이다. 백 가지 계책을 세워보아도 도무지 대책이 없어 파리 쫓으면서 낮잠만 자고 있노라니 하루는 외무대신(국무장관)이 관저로 나를 초청했다.

나는 안색이 붉어졌다. 이를 어찌하리오. 가나마나 차관반환을 독촉하러 부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니 갈 수도 없는지라 떨리는 다리로 초청한 장소로 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관저에는 채권자인 뉴욕은행 두취(대표이사)를 비롯하여 관련된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황공히 앉아 외상의 입만 쳐다보며 최후의 처분을 기다렸다.

외상은 이것이 꿈이 아닌가 하리만치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위로 같기도 하고 사과 같기도 하고 회유 같기도 한 어조로 자국의 정책인 먼로주의를 자세히 설명한 끝에, 귀국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것은 유감천만이라면서 결론으로는 차관 중 이미 소비된 금액은 미국 정부에서 대신 갚을 터이니 남은 금액은 즉시 상환하여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전액을 잃을까 우려하여 남은 돈이나마 돌려 받으려는 약은꾀를 미워할 짬도 없이,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고 즉석에서 승낙했다. 나는 미국의 관대한 태도에 감복하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존경할지언정 믿고 따를 나라는 못 되는 줄 깨닫게 되었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신동아

구한말의 외교관 이하영은 자신의 회고에서 미국에 서기관으로 부임하기전 고종의 밀명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란 것이 부산, 인천, 원산 세 항구를 담보로 하여 200만달러를 차관으로 빌리고 그 돈으로 다시 미군 20만명을 빌려서[13] 그 20만 미국 병사로 중국을 정벌하려 한다는 것이 밀명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대조선 해륙군 대도원수'(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 지위를 내리고 평양으로 천도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3.7. 의화단 운동 진압군 파병 계획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는 중 러시아 제국 고종에게 참전할 것을 제의했으나 고종은 거절했다. 만약 참전했더라면 8개국 열강들의 연합군에 대한제국까지 9개국이 되어 역사 교과서가 바뀔 수도 있었다. 실제로 참전했다고 가정할 경우 이미 간도 등 국경지역에서 청군과 무력으로 충돌하고 있던 대한제국군은 러시아군을 보조하면서 밥 숟가락 얻기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 대한제국의 국제적 위상이나 실제 참전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전력, 그리고 당시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영토욕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낙관적인 가정이며 게다가 이 경우 한국의 침략으로 중국인들이 반한감정을 가지면 이후 독립운동에서 매우 큰 불이익을 받았을 가능성 또한 높아졌을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연합군의 승전이 확실해지자 고종이 직접 뒤늦게 일본 공사를 통해 참전 의사를 피력했으나, 일본 공사는 대한제국군의 전력까지 필요한 정도는 아니라며 거절했다. 일본 공사는 본국으로 보내는 전문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하면서 "우스운 일이다."라며 고종을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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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같이보기


[1] 신라는 한강 상류 10군을 차지하였다. [2] 그러나 이후 독립하였다. [3] 공험진 부근 [4] 절도사 여자신은 연변 지역을 점령하면 주변 여진족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여진족의 발흥 자체를 아예 차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남만주 일대에는 야춘해와 근접해 해산물 또한 풍부했고 농경지로 쓸만한 평평하고 넓고 기름진 토지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안보와 경제적 이점 2가지 측면에서 남만주 개척을 주장한 것이었다. [5] 여자신과 성준 등 변방 개척을 주장하던 세력들을 향한 집중적인 탄핵도 같이 이어졌다. [6] 청과의 회담에서 백두산 정계비의 '西爲鴨錄, 東爲土門'을 그대로 해석하여 백두산에서 송화강으로 이어지는 토문강을 조선의 경계라 주장하였다. [7] 그러나 1년뒤 파직되고 다시 내려온다. [8] 실제로 명나라는 병자호란 내내 조선에 아무런 지원 병력을 보내지 못했다. 원래는 강화도 방어를 도와주려고 수군이라도 조금 보내주려 했지만, 이 마저도 풍랑으로 무산됐다고 한다. [9] 백성들이야 이런걸 모르니까 "아 그때 심양을 확 쓸어버렸다면..." 이라는 생각을 했을수가 있다. [10] 물론 병력 문제는 김자점의 병력이 2만이었으니 당연히 임경업이 말한 5천을 네배나 뛰어넘는다. 문제는 김자점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고 그 한시가 촉박한 시간에 김자점에게 달려가서 협조해달라고 할 타이밍이 없었을 것이다. [11] 범죄의 규모가 큰 도둑이라는 의미이다. [12] 양쯔강의 지류 [13] 당시 미국의 총병력이 10만 남짓이었다. 고종이 해외정세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조차도 몰랐음을 알수있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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