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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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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Peac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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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EN TO MY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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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데뷔 전과 후3. 1집의 시작4. 일본에서의 데뷔와 대성공5. 대한민국으로의 금의환향 그리고 전성기6. 전성기 이후, 미국 진출과 일본 활동7. 2010년대8. 2020년대

1. 개요

보아의 활동에 대해 정리한 문서이다.

2. 데뷔 전과 후

초등학교 6학년때 오빠를 따라 댄스 경연대회에 나갔다가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약 2년 반을 연습생 생활을 했었다.
파일:MxW6K67.jpg 파일:ezgif-1-d09f7d425c.gif
▲ (아래) 1998년 13세 연습생 보아

데뷔 당시에 SM 당시 소속 가수인 H.O.T. 신화 등의 팬들이 많은 루머를 쏟아냈다. 보아를 잘 안 돌봤던 선배가수들, 즉 신화나 H.O.T. 멤버들을 이수만이 폭행했고 심지어 다른 소속사 가수인 god까지도 폭행했다는,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황당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루머[1]들이었다.

실제로 데뷔 당시의 전후로 피묻은 칼이나 난도질된 곰인형 등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들 또래의 여자아이가 자신의 오빠들과 함께 활동한다는 모습이 질투를 불러 온 듯 하다.[2] 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 보아 본인이 언급한 바에 의하면 그 당시에 H.O.T. 해체설이 돌았는데, H.O.T. 팬덤에서 " H.O.T.는 푸대접하면서 저런 어린애한테 H.O.T. 벌어다 준 돈을 다 퍼붓는다!" 같은 오해를 하면서 보아의 안티가 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역시 원조는 다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데뷔하기 전부터 많은 안티를 양산하게 되었다. 당시 PC 통신망이나 인터넷상 공개게시판에서 심심찮게 보아에 대한 루머나 비방을 볼 수 있었다. 아이돌 팬덤에서 루머를 양산하면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일반인들에게도 퍼지는 방식이다. 남자 아이돌 팬덤을 빠순이라 싫어하던 이들조차도 공개게시판에서 팬덤이 양산한 루머를 같이 동조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연령대가 높은 이들 중에도 싫어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유지만 "어린 애가 공부는 안하고 가수한다고 설친다"는 것이 일반인에게 비호감으로 비쳐진 원인이었다. 요즘이야 나이 어린 친구들이 어릴 때부터 가수를 준비하고, 위 세대도 딱히 나쁘게 보는 시선이 없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보아가 한참 트레이닝 받던 과거 90년대만 해도 춤을 추러 다니거나 연예인 된다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면 "어린 게 헛바람 들어서 공부는 안하고 연예인이나 되고 싶어 나댄다" 같은 시선이 팽배했다.

심지어 곧 성인이 될 고등학생 아이가 이렇게 하고 다녀도 이런 시선인데, 이제 갓 초등학교 졸업한 아이가 그런다고 생각해보라. 절대 곱게 보일리가 없다. 그냥 이때 꼰대문화가 지금보다 더 심해서 그런거 안무가 배윤정은 춤이 너무 좋아 안무팀을 쫓아다니며 배웠는데 부모님한테 들켜 다리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맞았다고 한다. 가수 가희는 아예 부모가 더 이상 춤바람 들지 말라고 강원도 이름모를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집어 넣어 가희가 서울로 도망갔던 적이 있다고 말했을 정도. 그 당시 20살이 갓 된 그들조차 이런 시선을 받았는데 보아에 대한 시선이 고왔을리가 없다.

어린 아이가 어른들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어색함을 느낀 탓도 있었고[3], 보아의 성격 자체도 어른스러워서 인터뷰에서 조금만 조숙한 발언을 하면 "무슨 어린애가 저런 식으로 말하냐?"며 단순히 거부감을 드러내는 걸 넘어서 엄청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SBS 한밤의 TV연예 인터뷰에서 "만 13세다운 생활을 못하는 상황인데 아쉽지는 않나요?" 라는 질문을 받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으니까 한 마리 토끼라도 잡아야죠. (학교생활과 가수를 병행하기는 힘드니까 가수활동이라도 열심히 할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가 화법이 어린애답지 않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받아서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방송에서 '두 마리 토끼'라는 말을 쓴 적이 전혀 없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어렵겠지만 '어린이는 어린이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지금보다 더 심했고 어린이는 가요가 아닌 동요를 불러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보아가 어린 시절이었던 1990년대 초반은 물론이고 1980년대 시절에도 아이들은 동요를 그냥 유치한 구닥다리 노래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에 유행가도 아니었고 취향에도 맞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안 불렀던 시기였다. 당장에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초반부터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가수들이 누구였는지를 잘 생각해보자. 그 시대의 어린 아이들도 마이클 잭슨 문워크같은 브레이크 댄스를 연습하고 힙합이나 뉴 잭스윙 곡을 찾아서 들었다. 실제로, 1990년대 당시의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 난 알아요' 는 다같이 랩 가사까지 모두 다 외우면서 쉽게 불러도 정작 어린아이들이 들을만한 동요는 거의 모르고 관심도 없으니 어버버거리고 한 소절도 제대로 따라부르지도 못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지금 2020년대를 기준으로 30대~40대의 어른들에게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동요 있으면 하나 불러보세요." 라고 묻는다면 " 그거 먹는 건가요?" 라고 대답하면서 알고 있는 동요가 별로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당장에 요즘 시대는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EBS를 안 보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실제 어른들의 구닥다리같은 인식과 아이들의 삶에는 엄청난 괴리감이 있었다. 게다가, 그 시절은 어린 아이들이 즐기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 게임의 검열도 심한 시기였던데다 대놓고 못보게 탄압을 하던 아이러니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던 시기였다.

또한 이 때 쓰인 보아의 안티 팬픽들이 유명하다. 당시 모든 인터넷 게시판에다 무더기로 (심지어 쥬니어 네이버나 야후 꾸러기 같은 곳에도) 안티 팬픽들이 도배가 되었으며, 이때 유행한 만화나 게임의 팬페이지 개인 홈피 방명록에도 도배가 되어 있었다. 행운의 편지처럼 끝부분에 이 글 퍼나르지 않으면 가정불화가 생긴다고 협박을 적어놨고 당시 순진한 개초딩들은 다 낚였다. 지금 기준에서는 작성자 및 퍼나른 사람들에게 싸그리 체포해서 모두 빨간줄을 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보아 안티세력의 사이버 폭력 및 오프라인 폭력은 정말 도가 지나쳤다.

그 중에서도 최악은 보아가 이수만과 그렇고 그런 사이여서 비정상적인 총애를 받았다는 루머. 10대 초반의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헛소문과 악성 팬픽[4]이 버젓이 유행했던 것이다. 아동성범죄와 사이버 폭력에 대해 개념이 희박했고 정부 주도로 정보인프라 구축과 수요기반 확대를 밀어붙이던 시절이라 인터넷을 규제하는 것에 애를 먹었던 2000~2002년[5] 일이라서 가해자들이 운좋게 거의 무탈하게 넘어간 경우였지, 최진실 사건 이후로 사이버 폭력의 위험성이 알려진 지금은 얄짤없이 감방으로 직행인 일들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안티로는 비견될 사례가 없으며, 그나마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사실상 문희준이나 간미연 정도 밖에 없다. 흔히 보아를 수식하는 "아시아의 별"이라는 칭호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금의환향한 이후부터 2002년 2집 No.1으로 전국적으로 뜨면서 얻은 것이다. 즉, 안티들을 실력 하나로 모두 잠재워버린 강력한 멘탈의 소유자다.

과장해서 보아의 팬클럽을 제외한 사실상 남자 아이돌 팬들 모두가 안티였고 대중에게는 비호감이던 시절이었다. 이런 이유로 보아의 팬들은 대부분 전성기부터 현재까지 아직도 남초 성향이 짙다. 걸크러쉬 기믹을 얻은 것은 전성기를 찍고 난 이후부터다. SM의 과도한 상업적인 마케팅, 당시 가요계의 범람하던 실력이 없던 아이돌에 대한 염증, 어린 나이에 솔로 가수로 데뷔하면서 상업화에 대한 혐오감, 난해한 가사로 인해서 실력을 보여주기 어려웠던 점이 컸다.

3. 1집의 시작

파일:졸커보아.gif
파일:boa6.gif

그렇게 약 3년 간의 고된 트레이닝과[6] 준비기간을 거쳐 2000년 8월 1집 <ID: Peace B>를 발매하며 데뷔하게 된다.

보아의 데뷔는 SM에게는 대형 프로젝트 중 하나였는데, SM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해외 진출의 초석으로 여기며 오랜 기간과 비용을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각종 다큐멘터리에서 밝혀진 바로는 보아는 연습생들 중 유일하게 일본어 수업을 받았고, 방학 기간 동안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보내 현지 아나운서 집에서 홈스테이를 시켜가며 일본어에 능숙해지도록 교육을 시켰다. 게다가 보아 1집은 김형석, 유영진, 방시혁, 김조한, 박진영 등 지금 들어도 거물급인 작곡가 및 음반 제작진들이 대거 투입되어 만든 대형 프로젝트였다. 뮤직비디오도 쉬리 강제규 감독이 참여하며 화제가 되었고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약 30억[7]이 보아의 데뷔에 들어간 비용이었다고... 이 때문에 SM의 입장에서는 자사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기획물이었던 셈이었다.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가 매우 컸던 2000년대 초반을 생각해보면, 그 당시 30억 투자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데뷔 당시의 보아는 순탄치 못했다. 뭐니뭐니해도 안티들이 상당히 많아서 인식마저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뷔곡인 <ID; Peace B>는 난해한 곡 스타일과 유영진 특유의 괴상한 가사로 인해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며 아쉬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ID; Peace B>의 최고 성적은 SBS 인기가요에서 핑클의 <NOW>와 1위 후보로 같이 오른 것이다. 판매량은 177,612장으로 그 해 데뷔했던 신인들 중 가장 많은 음반을 팔아서 선방했지만, 팬에 비해 안티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하기도 애매하게 느껴졌다. 유영진 특유의 비마이너한 노래임에도 절반의 성공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당대 최고의 신인임을 내세우며 홍보한 대형 신인으로는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시장에서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니라 SM의 푸시로 여러 음악프로에 꾸준히 출연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어느 정도 주목받는 신인으로서의 인지도는 가져갔다는 것이다.[8] 게다가 이 당시 보아는 H.O.T. 팬들을 비롯한 신화 등등 각종 보이그룹 팬들의 악성루머와 또래 연령층의 질투로 안티층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야 가요계 짬도 높고 위상이든 실력이든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지만, 저 당시 보아는 대중적인 기반이 전혀 없는 신인이었다. 당연히 안티들에게는 만만한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이 당시 공격은 지금 생각해보면 무시무시하였다.[9]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절의 보아를 기억하지 못한다.[10] 본인도 흑역사로 치부하는지 콘서트에서조차 이 시절의 노래들은 거의 부르지 않는다.

어쨌든 어린 소녀 가수라는 점 만큼은 대중에게 어필이 되어서 통신사 광고와 식품[11] 광고도 찍는 등 적자까지는 아니어서 금전적으로 정산은 받았다고 한다. 훗날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했을 때 첫 수입은 5천만원이었다고 밝혔다.

이후 <sara>라는 후속곡으로 활동한 뒤 2001년 3월에 1.5집인 <Jumping into the new World - Don't Start Now>를 스페셜 앨범으로 발매하고 활동하지만 큰 호응은 얻지 못하고 조기에 활동을 끝낸 후, 바로 일본 데뷔 준비를 하게 된다. 사실 이 앨범으로 큰 반응 자체를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보아가 세계무대로 활동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보여준 앨범으로 실제 앨범 수록곡은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구성되어 있다.

4. 일본에서의 데뷔와 대성공

보아의 일본 데뷔는 앞서 기술한 대로 SM의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SM은 과거 S.E.S.의 실패 노하우를 분석해 보아의 데뷔를 준비한다. 음반시장에서 지원여력이 충분한 에이벡스와 계약을 하고 쇼케이스를 하며 데뷔를 준비해 나가게 된다. 덧붙여 에이벡스의 소속가수만 당시에 200팀이 넘었다. 이 중에 스타급은 상위 10% 정도밖에 없었으며 '대형 음반사'와 계약한 것만으로 성공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에이벡스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에 능통하고 춤과 노래가 완벽한 천재 가수'라는 홍보전략을 세우고 보아를 홍보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2001년 7월 발매된 2번째 싱글인 'Amazing Kiss'까지는 큰 반응이 오지는 않았고[12] 이 때 보아도 향수병에 걸려 벽을 보며 대화하고, 무척 외로워했다고 한다.[13] 보아 본인이 이 시절에 대해 회상하길, 일본 데뷔 쇼케이스에서 대형 삑사리를 내면서 무대를 망쳤고, 에이벡스 관계자에게 "단독 콘서트 하는데 10년도 넘게 걸리겠다"라는 혹평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후로 무대 공포증이 생겨 한동안 무대에 오르지 못했고, 그 때부터 매일 트레이닝에 몰두하는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스케줄도 없어 매일 연습만 했다고 하는데, 특히 이후 독감에 걸려 30kg대까지 빠지면서 입원을 하게 되어 잡혀 있던 스케줄도 취소되고 울어도 달라지는 게 없다고 하여 독하게 마음먹고 재즈댄스를 배운다.[14] 이 때 아파서 활동을 못하였을 때 싱글 하나가 엎어졌다고 하며[15], 2001년 하반기에 공백기가 길어지자 일본 활동이 망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으나 이 때 보아는 재즈댄스를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회심의 재즈댄스를 익혀서 2001년 12월 발매한 '気持ちはつたわる'[16]부터 점차 반응이 오기 시작한다. 이 당시의 보아는 아직 '1집 앨범도 안낸 신인 가수'였지만 NHK가 주관하는 슈퍼 드림 라이브에 초청되어 라이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보아는 여기서 자신의 노래를 올라이브로 격렬한 댄스와 함께 소화해내며 시청자들의 반응을 얻어냈다. 당시 방영 후 NHK 예능국에 '저 어린 가수가 누구냐?'라는 문의전화가 쇄도했다고 하니 그 반응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리라 본다. 이 시기부터 일본 소속사도 보아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면서 유명 CF의 배경음으로 보아의 노래를 넣는 등 점점 홍보를 시작한다. 그 유명한 'LISTEN TO MY HEART'도 유명 핸드폰 cm으로 우선 소개가 되었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NHK POP JAM의 LISTEN TO MY HEART

이후 2002년 1월 "LISTEN TO MY HEART"가 예상치 못한 호응을 얻어내며 인기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노래 악곡 자체는 당시 유행하던 주류 J-POP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던, R&B 느낌이 강한 댄스팝이었지만 매력적인 멜로디와 곡전개, 곡을 능숙히 소화해내는 보아의 보컬 등으로 히트를 치게 된다. LISTEN TO MY HEART는 과장 조금 보태 일본 블랙뮤직의 판도를 바꾼 노래 라고 평한 평론가도 있을 만큼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모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좋은 평가를 받아낸다.

이 당시 보아는 한국 2집 No.1의 발매준비를 위해 한국에 있었으나 일본에서 LISTEN TO MY HEART가 오리콘 데일리 차트 3위에 올라간 덕분에 빨리 일본으로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는다. 당시 보아도 순위가 믿기지가 않아 오리콘 홈페이지에 접속해 차트를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2년 3월 발매된 일본 정규 1집인 동명의 'LISTEN TO MY HEART' 앨범으로 한국인 최초로 오리콘차트 1위에 오른다. 또한 90주가 넘게 차트인을 하며 무시무시한 롱런을 보여주면서 밀리언셀러에 준하는 판매량을 얻어내 대브레이크를 시작한다.

일본레코드협회의 인증으로는 출하량 기준이라 밀리언이지만, 소매점 판매량을 집계하는 오리콘 기준으로는 밀리언에 살짝 못 미쳤다. 한국에서는 출시 당일 1위 소식이 지상파 9시 뉴스에 보도되었다. 일본에서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일화 중에 일본에서 지명도가 낮았던 배우 권상우가 소개될 시 보아의 성씨인 권씨와 같다는 것을 다운타운 DX와 신문 등에서 언급하였다.

보아의 성공배경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SPEED 이후 암전이었던 '춤과 노래에 능한 소녀가수'컨셉의 빈틈을 보아가 적절히 파고들었다는데 있다.[17] 일본 언론에서는 "한국인 가수 보아가 아무로 나미에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극찬을 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춤과 노래에 능하다는 것 이외엔 딱히 공통점을 찾기는 힘들다. 이 부분은 하마사키 아유미가 더 적절하다. 사실, SPEED 이후로 Folder5나 Earth같은 비슷한 컨셉의 걸그룹들도 많이 나왔지만 이렇다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사라졌다. 보아는 그 빈자리를 적절히 메꿔놓았다는 평가다.

결정적으로 에이벡스가 데뷔초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린 스토리가 큰 계기가 되었다. LISTEN TO MY HEART가 반응이 좋자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누구냐는 반응이 많아졌는데 '알고보니 BS 슈퍼라이브에서 춤과 노래를 잘 하던 그 가수였네?' '근데 한국인이었어?' '심지어 3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천재소녀네!!'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스토리가 보아의 성공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5. 대한민국으로의 금의환향 그리고 전성기

일본 진출 당시만 해도 성공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대중들은 보아의 성공과 금의환향에 모두 놀라게 되었다. 미디어에서는 보아의 경제적 가치를 분석하는 뉴스 자료가 연일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어린 고등학생 나이로 9시 뉴스 대담에 초청되면서 생방송 인터뷰까지 하는 등[18] 일본에서 대성공을 한 뒤 보아에게 전국적으로 쏟아진 스포트라이트는 어마어마하였다.


2002년 가수 보아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No.1무대로 전성기 인기를 누렸을때 모습이다.

그리고 2002년 4월 대한민국에서 2집 No.1을 발매하게 된다. 신나는 비트와 파워풀한 댄스는 한국 대중들에게도 크게 먹혔고 보아에게 '우리 오빠를 넘보는 나쁜X' 정도의 시선을 보이던 철없는 또래층 역시 팬층으로 흡수해 내며 한국에서도 히트하게 된다. 10대와 20대를 중심으로 남녀 구분없이 팬층이 확보되었고 시사 프로그램 및 신문에 단골 출연하여 다양한 세대에서 인지도를 알리게된다. 2집은 56만 장을 판매하며 그녀의 대한민국 최대 음반판매 기록을 달성했으며 2002년 음반판매량 순위 4위를 차지했다.

일본에서는 그 해 8월 여름에 걸맞는 댄스곡 VALENTI를 발매했으며 보아 최고의 히트곡이 된다. 일본에서 아직도 보아하면 '타이토나 진즈니~'를 부르며 등장함 그리고 그 해 여름, 에이벡스에서 자사 소속 가수들을 메인으로 출연시키며 전국을 투어하는 콘서트 '에이네이션'에 메인게스트에 올라 Every Little Thing, 하마사키 아유미 등 에이벡스의 간판급 가수들과 함께 일본 전역을 순회하게 된다.

이후 일본에서는 奇蹟, JEWEL SONG 같은 노래를 발매하고 모두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안정적인 인기궤도에 오른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일본에서의 히트곡들을 번안한 2.5집 Miracle 앨범을 발매하고 Valenti, 기적 등의 노래로 활동하며 3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린다. 그러나 원곡에 비해 한없이 다운그레이드 된 코러스와 일본 가사를 그대로 직역해 놓은 한국 정서에 전혀 맞지 않는 난해한 가사등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심지어 Valenti는 원곡의 후반부 애드리브를 절반 가량 덜어내며 아쉬운 평가를 받기도. 이 번안곡들은 이런 식으로 애드리브나 미세한 사운드가 빠진 경우가 많다.

이 해 2002년 대한민국에서 2장의 앨범을 발매하여 한국에서 총판 88만 장을 넘게 기록하였으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및 해외 활동으로 인해 길게 활동하지 못했음에도 대히트하게 된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한일 양국을 잇는 문화 전도사라는 이미지와 함께 프랑스의 신문 르몽드 지에 기사가 실리기도.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 해 연말 NHK에서 주관하는 최고의 가요 프로그램인 홍백가합전에 첫 출전하는 영광을 얻었고, 서울가요대상 대상과 한국에서 역대 최연소 나이로 SBS 가요대전 엠넷 뮤직비디오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2002년 막판에 들어 보아 정면에 예상하지 못한 복병이 나타났으니, 바로 장나라였다. 2002년 대한민국 가요계는 보아 vs 장나라의 여인천하 대결로 압축됐는데, KBS 가요대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2002년 후반기에 매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온 세기말 코리안 스윗하트 장나라에 패하며 보아는 아쉽게도 지상파 그랜드슬램에 실패했다. 이 시기의 여자 솔로 가수를 대표하는 경쟁 구도는 사실상 보아- 장나라의 양강구도가 형성되었다.

여담으로 장나라가 SM 연습생 시절에 보아와 같이 연습했다고 한다. SM에서도 둘이서 듀엣 그룹으로 데뷔할 예정이었다는 썰이 있는데, 모종의 사정으로 장나라가 SM을 나가는 바람에 따로 데뷔하게 되었다. 그랬던 둘이 연말 시상식에서 만났으니, 썰이 사실이라면 SM 입장에서는 굉장히 묘한 느낌이었을 듯 하다.썰을 너무 믿지 말자

2003년 1월에는 일본에서 2집 앨범 VALENTI를 발매하게 된다. 이 음반은 높은 퀄리티와 구성력으로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 모두 좋은 호응을 얻어내고 발매 당일 출하량 100만 돌파, 총판 12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넘기며 매우 히트하게 된다. 앨범 발매 후 처음 치룬 자신의 첫 일본 투어 콘서트는 본래 홀투어로 4회 예정이었으나 눈깜짝할세 매진되어 암표가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되자 아레나 공연장으로 2회 더 연장하였으나 역시 매진. 일본의 전 총리인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까지 보러 오는 등의 성공을 거둬 한국에서도 보도되었다.


2003년에 방영된 MBC 음악캠프 중 BoA의 아틀란티스 소녀 무대이다. 당시 보아는 고등학교 2학년을 재학 중이었다.

같은 해 5월 31일, 한국에서도 3집 앨범 Atlantis Princess를 발매한다. 멜빵바지와 고글 안경을 쓴 코디가 화제가 되었고 때마침 롯데월드 어드벤처 매직아일랜드에 동명의 롤러코스터 아틀란티스가 신규 개장하면서 보아가 축하 공연을 해 크게 홍보되기도 했다. 이 앨범은 35만 장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리며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이 때 보아가 직접 9월 쯤에 한국에서도 콘서트를 열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창 활동 중이던 7월에 보아와 데뷔 때부터 함께 했던 한상엽 매니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19] 이후 휴식기를 가진 후 Milky Way로 후속 활동을 재개했지만 콘서트는 결국 열리지 않게 되었고, 3집은 활동 종료 후 무려 15년이 지나서야 아틀란티스 소녀를 제대로 부를 수 있게 됐을 정도로 보아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20]

일본에서는 Shine We Are!/Earthsong 을 발매하였다. 이 싱글은 보아의 첫 오리콘 차트 싱글 데일리 차트 1위를 획득한 곡으로 일본 한국에서 모두 화제가 되었다. 위클리에선 2위를 하였지만 SM 측에선 그냥 데일리 1위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또한 이 시기 혼다기업 전체의 이미지 모델을 맡았는데, 우리로 치면 외국인으로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해외 출신 가수가 삼성이나 LG 기업의 이미지 모델을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인연으로 보아 첫 아레나투어 오프닝에 자사 개발 로봇인 아시모가 등장하기도 하였고, 국내에서도 화제가 되었었다.

이후 한일 양국에서 DOUBLE을 동시 발매하게 된다. 당시 에이벡스 사장은 "에이벡스 최고의 악곡을 보아가 부를 수 있게 하였다."며 이 노래가 히트할 것을 확신하였지만[21] 판매량은 8만 장대에 준하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래도 일본 연예인 연말 수입 랭킹에서 에이벡스 자사 연예인들 중 하마사키 아유미 다음으로 높은 수익을 거두고 홍백가합전에도 2회 연속 초청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에이벡스내 뿐만 아니라 전체 일본 여가수 수익 2위를 기록했다. 그냥 에이벡스가 다 해먹었다. 또한 보아는 일본 연말 가요제에 출연하느라 한국 연말 가요제에 참석을 하지 못했다. 헬기를 타고 이동하려는 계획도 있었으나, 국가간 헬기 이동은 무리였는지 취소됨.

2004년 1월에는 LOVE&HONESTY 앨범을 발매하고 정규앨범을 3연속 차트 1위에 올리며 인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음반시장이 점점 죽어가며 65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다.

첫투어로 요요기경기장에서 공연하긴 했으나,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아레나투어를 시작한다. 5회 예정이었던던 투어 규모는 너무 빠른 매진으로 4회 연장해서 9회 공연을 하고 마무리 지었다. 이 시기에는 지금과같은 아이돌문화가 자리잡지 않아 당시 자국 여가수로도 매진이 힘들었던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의 20000석이 넘는 좌석을 단 몇초만에 매진시키는 기력을 보여준다.

또한 콘서트 내내 대부분의 노래를 라이브로 격렬한 춤과 함께 소화하는 모습 또한 호평받았으며, 특히 시각적으로 뛰어난 효과와 함께 혼다 개발 로봇인 '아시모'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다.


2004년에 방영된 MBC 음악캠프 중 BoA의 My Name 무대이다.[22]당시 보아는 고등학교 3학년의 나이였다.

2004년 6월, 한국에서는 자신의 4집 앨범 My Name을 발매하고 활동에 돌입한다. 이 시기 유명한 인물로 옆에서 같이 백업댄서를 맡은 가희가 있다.[23] 예쁘장한 백댄서로 당시 화제가 되었었다. 4집 앨범은 이전과 다른 파워풀한 컨셉과 강렬한 안무 등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뮤직비디오 촬영을 일본 유명 클럽을 대여해 찍었던 것도 화제였고 이전까지 틴팝 위주의 부드러운 멜로디의 노래만 부르던 모습과 대비되 어반알앤비풍의 세련된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강렬한 색조 화장을 한 보아의 모습은 그 당시 큰 충격으로 각인되었다. 4집의 이미지변신은 큰 성과를 거두어 이후 보아의 한국활동에 중요한 기점으로 작용하게 된다.[24] 2003년엔 이효리에 약간 밀려 여가수 선호도 조사에서 2위를 했던 보아가 이 시기엔 1위로 치고 나왔다. 음반시장이 줄어들기 시작해 20만 장이 팔려 전작들에 비해 감소했지만 2년 연속 이수영에 이은 여성 솔로가수 2위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 시기 남희석의 사회로 진행된 팬미팅에서 올해 한국 콘서트 계획이 있다고 했었으나 소속사 사정때문인지 그런 일은 없었다. 또한 MKMF에서 대상인 최우수 뮤직비디오상을 받았다. (그 때의 MC가 신동엽-김정은이었는데, 2002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콘서트를 계획했으나 세트 이동등에 문제가 생겨 엎어졌다.

이후 일본에서는 QUINCY/コノヨノシルシ를 발매하고 중박 성적을 거두고 그 해 12월 메리크리를 발매. VALENTI 이후 자신의 대표 히트곡을 만들며 화제가 된다. 메리크리는 시즌겨냥송으로 당시 쟁쟁한 가수들과 함께 발매되었지만[25] 연말 공연까지 이어지면서 꾸준히 차트에서 롱런, 히트하게 된다. 결국 초동의 3배 이상을 팔게 되고 선행 싱글이었던 메리크리의 인기는 이후 발매된 베스트 앨범의 밀리언 버프를 더한다.

05년도 초에는 자신의 첫 베스트앨범인 BEST OF SOUL을 발매하고 100만장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며 히트한다. 앨범 발매후 2번째 전국 아레나투어를 개최했으며 이후 발매한 DO THE MOTION도 싱글로는 첫 위클리 차트 1위를 기록(외국인으로서 23년만의 1위)하며 수록곡 모두 FASIO, 립톤, KDDI같은 유명 회사제품들에 타이업되며 좋은 판매량을 보였다.


2005년에 방영된 MBC 음악캠프 중 BoA의 Girls on Top 무대이다. 당시 보아는 20살이었다.

2005년 6월, 한국에서는 5집 Girls On Top을 발매. 초창기 한참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즘 가사와 콘셉트 때문에 아쉬운 평가를 받았지만[26] 무대 위에서 보여준 강렬한 퍼포먼스와 뛰어난 안무실력에 라이브 실력 등을 뽐내며 후속곡 MOTO까지 모두 좋은 반응을 얻으며 히트한다.

이 앨범은 전작 My Name보다 컨셉이 더 세져 대중의 반응은 호불호가 있지만 댄서의 등에 올라타는 춤이 화제를 모았고 보아가 하고 나왔던 울프컷 헤어스타일이 여중, 고생들에게 대히트를 쳤다. 2005년~2006년 졸업 앨범을 보자. 한 반에 5명 이상은 그 머리를(...) 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연말 엠넷 시상식인 MKMF에서 뛰어난 공연을 선보이며 화제가 되었다. 음반 판매량 역시 13만 장을 기록하며, 그 해 여성 가수 중 빅마마 다음으로 앨범을 많이 팔았다.

이렇게 5집은 2000년대에 발매된 마지막 앨범이 되었고, 이 후 5년동안 해외 활동을 하느라 새 앨범이 나오지 않았다. 보아의 새 앨범은 2010년이 되어서야 나오게 된다.

2005년 이후 5년간 한국활동은 미국진출 준비로, 일본 활동은 2006년, 2007년, 2008년 연이어 앨범발매 및 전국 아레나투어를 개최하며 매년 발매한 앨범 모두 오리콘차트 1위를 기록하며 7앨범 연속 1위로 일본 역대 여가수 3위라는 기록을 세운다.

6. 전성기 이후, 미국 진출과 일본 활동

2008년까지 7장의 앨범을 연속으로 오리콘차트 1위에 올려 일본 역대 여가수 3위라는 영예를 얻고 2009년 2번째 베스트앨범(오리콘 데일리 1위/위클리 2위)을 끝으로 일본보다는 미국활동에 주력하게된다.

전성기 이후로 음반 판매량이 감소한 배경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긴하나, 코어팬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게 가장 큰 이유. 하마사키 아유미 같이 강력한 코어팬층을 가진 가수들은 전성기가 지나도 확고한 고정팬들 덕분에 대중들에게는 한물간 가수처럼 취급되어도 계속 코어팬 중심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은데 보아는 대세가수였던건 맞지만 전성기 시절에도 인기에 비해 코어팬은 적은 편이었다. 보아의 일본내 이미지는 '일본 가요계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건강하고 밝은 천재 외국인 소녀가수' 같은 이미지였지 아무로 나미에 코다 쿠미처럼 패셔니스타, 여성워너비 이미지 등 만든게 아니었기에 코어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베스트 이후 코어팬을 잡을 컨셉과 노선을 확실히 했어야 하는데, 보아가 가장 잘하고 자신 있어하는 보이시하고 파워풀한 모습은 일본에서는 그렇게 반기지 않는 컨셉이었다. 한국에서의 마이네임, 걸스온탑 등의 여덕몰이를 한 컨셉을 일본 팬들이 보고 기절초풍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반응이 좋았던 LOSE YOUR MIND, Sweet Impact 등의 컨셉은 일본에서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베스트 이전 보아의 트레이드 마크는 5:5 긴생머리였고, 보아의 최전성기 시절 이를 따라하는 10대, 20대 여성 또한 많았기 때문에 보아의 숏컷, 단발머리 컨셉에는 거부감을 보였다.

여담으로 한국에서는 특히 팬들 중심으로 이 당시 AVEX에서 보아가 반버닝파였기 때문에 푸쉬에서 밀렸다는 소문이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오히려 마츠우라 전무로 바뀐 이후 싱글들을 보면 DO THE MOTION 때는 타이업도 잘 넣어준 편인데다가 프로모션과 콘서트도 바뀌기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밀어주었다. 애당초 바닝파/비바닝파 논란 자체가 팩트보다는 추측에 가까운 썰들이 많기 때문에 무작정 받아들이기에는 곤란하다. 때문에 마츠우라의 푸쉬와 보아의 인기를 이어서 생각하는 건 정확하지 않은 분석이다. 상식적으로 멀쩡히 잘나가고 수익 잘 내주는 가수를 단순히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자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이후 AVEX가 자기들 허락 안받고 SM이 미국진출 준비했다고 보아한테 여러모로 활동에 불이익을 준 건 맞다

한국에서의 활동은 5집 이후 5년 동안이나 끊겼다. 나중에 SM이 회사차원에서 보아는 미국 활동 준비를 해왔다고 했으나[27] 보아의 한국 활동은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고 봐도 좋을 정도.

이후로 애니밴드 같은 프로젝트성 활동에 참여도 하였지만 대부분 단발성 프로젝트나 OST 몇 곡 부르는 정도에 그쳤고 예전만큼 왕성한 방송활동은 보여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 보아도 한국에서의 무대와 팬들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28]

2007년 즈음 SM과의 계약이 마무리되어 엠넷미디어 등 다른 기획사에서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으나 쿨하게 SM과 재계약했다.




08년도말 데뷔싱글 Eat You Up을 발매하고 미국진출을 시작한다. 뮤직비디오를 내수용, 미국용으로 나눠서 찍었는데 위가 내수용이고 아래가 미국용이다. 보면 알겠지만 나름대로 기존 팬들 정서에 맞고 무리한 연출이 없는 내수용에 비해 난해한 연출과 저렴한 CG(...), 그리고 댄스브레이크 부분에서 꼭 동네 꼬마애가 낙서해놓은 듯한 뒷배경등 여러모로 싼티나는 연출로 인해 혹평을 받았다.[29]

미국 1집은 한국인 최초 빌보드 메인 차트 빌보드 200에서 127위를 기록한다. 한국인 최초 메인 차트 진입이라는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누가봐도 후에 진출하는 가수들보다 불리한 점이 있는데, 유튜브 등 sns가 활성화 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아시아 톱가수로 성장한 보아가 미국에선 3번째 데뷔를 하며 불합리한 스케줄을 (비행기에 탑승해서 가고 있는데 현지 스케줄이 취소됨. 그러나 미리 알려주지 않음 등) 소화한다. 이 시기는 지금보다 미국 시장 진출이 동양인 가수에게 힘든 시절임을 감안해야 된다. 일본 진출 때와는 달리 자아가 이미 형성된 상황에서의 해외 진출은 또 다른것이었기에 여러모로 힘든 경험을 해야 했다. 3번째 싱글인 Energetic으로 레이디가가가 섰던 무대인 SF프라이드(San Francisco Pride) 무대에도 섰지만, SM이 동방신기의 소송 문제에 휘말리게 된다. 이에 보아를 미국 진출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프로듀서로서 케어하던 이수만이 헐레벌떡 급거 귀국. 보아의 모든 미국활동은 올스탑. 무려 5년을 투자한 모든 계획이 엎어지게 된다.

미국에서 지역 가수들은 투어를 하면서 점점 관객을 모으고 지역을 기반으로 인기를 모으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 보아도 이와 같은 프로모션이 일환으로 전미투어를 직접 계획하고 있었다. 각종 인터뷰와 언론매체에서 전미투어 소식을 알렸고 이것은 미국 활동에서의 가장 큰 핵심 활동 계획이었으나 투어 계획 발표 후 두 달도 안 되어 소송이 터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아의 미국 활동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고 본인을 케어하거나 홍보를 할 여력도 없었으며 이렇다할 활동도 없이 다시 아시아 시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도 2007년이 본인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고 가수 생활을 그만두려고까지 생각했다고 하는데 2008년 미국 진출이 그런 회의감을 없애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전미 투어까지 준비하고 지방 라디오 활동부터 시작해서 밑바닥부터 천천히 올라갈듯 했던 미국 활동이 흐지부지하게 끝난 이유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는데, 동방신기가 불화로 팀이 나눠지며 동방신기가 잔류한 SM, JYJ를 안고 간 AVEX의 불편한 관계가 작용했다. 게다가 이 JYJ 사건 때문에 이수만이 미국 진출한 보아 도와주다가 황급히 한국으로 달려오기도 했으니...사실 설이 아닌 팩트다. 괜히 JYJ랑 보아가 사이 나빠진게 아니다

여하튼 정규 앨범 발매 후 한국인 최초로 빌보드 메인차트 중 하나인 빌보드 200에 125위로 진입하며 미국 투어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일본에 와서 작년에도 나가지 않았던 a-nation에 나와서 노래를 하고 있다거나 소리 소문도 없이 일본에서 싱글과 베스트앨범이 나오는 등 팬들에게는 여러가지로 의문이 많았던 미국 활동의 결말이었다.

원더걸스가 HOT 100에 진입한 직후 한국인 최초 메인차트 진입이라고 언플을 한 탓인지 보아도 빌보드 메인차트에 진입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원더걸스가 진입한 빌보드 HOT 100 의 경우 싱글 차트, 보아가 진입한 빌보드 200은 앨범 차트로 둘 다 메인 차트가 맞다.[30]

비록 상업적으로 성공은 아니였지만 보아는 후에 자기 입장에서는 더 넓은 시장도 경험하고 음악적 성장에 있어 좋은 경험이었다고 인터뷰하기도 하였다.[31] 실패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먼저, SM이 AVEX와의 마찰을 생각안하고 미국 진출 준비했고, JYJ와의 문제를 안이하게 생각하고 방치했다. AVEX와 사업 파트너로서 단절을 각오하고 부딪히더라도 처리했어야 됐다. JYJ 문제 또한 이미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이어서 미리 해결했어야 했고. 그 다음은 이미지, 음악스타일 등 보아라는 가수를 너무 미국 현지 스타일에 맞추고, 보아가 가진 장점을 못살린게 문제다.[32] 여기에 미국 여가수들은 섹시 아니면 귀여운 틴팝 스타일만 먹일거라는 착오도 한 몫했다.뒤에 진출하는 한국 솔로가수만 해도 미국 스타일보다는 자신이 가진 장점 물론 유튜브 활성화 덕도 많이 봤지만 으로 진출했고, 영어가 아닌 한국어 가사로도 인기 끌었기 때문.[33] 한국ㆍ일본 활동만으로 자넷 잭슨의 콜라보[34] 제의나 미국 활동에서 저스틴 팀버레이크ㆍ마이클 잭슨의 안무가와 댄서팀,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였던 퀸시 존스같은 거물들에게 인정받은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여기에 미국 진출이 이른 시기라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보아가 진출한 2008년은 유튜브가 활성화 되기 전이다. 가창력을 무기로 삼는 가수가 아닌 이상, 유튜브의 파급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 여러모로 아쉬울 수 밖에 없다.

7. 2010년대

일본에서의 인기는 이미 전성기도 충분히 겪어 보았고 본인도 음악적 성장에 보다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사실상 라이브 활동에 주력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콘서트도 전국투어를 제외하고는 본인의 하나의 연말콘서트 브랜드인 BoA the LIVE라는 라이브 활동에 집중하는 편.

일본에서의 인지도는 한 때 대세 여가수였던만큼 높고, 두고두고 회자되는 히트곡도 많이 있지만 현역 수준으로 활발히 소비되지는 않고 트렌드에 따라가지 않는 가수정도.

겨울마다 2004년에 발매한 '메리크리'가 매년 크리스마스송의 각종 차트에 들며 11월부터 음반차트와 음원차트 역주행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시간이 갈수록 일본의 국민 크리스마스 명곡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듯. 2014년엔 높은 인기에 힘입어 메리크리 발매 10주년이라며 깜짝 CM을 깜짝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2010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했다. 유희열이 보아에게 13살 때로 돌아가도 가수가 될 꺼라는 말에 가수는 되겠지만 보아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웃음반 진담반의 말을 했다. 해외에서 홀로 싸워 나가야 한다는 고독감 때문이라고 한다. 대신 키를 키워 소녀시대 맏언니로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35][36]

2011년에 메이크 유어 무브 촬영으로 미국에 가있느라 일본에서 음반을 안 내면서 휴식기를 가지다가 2011년 12월 DVD 싱글 "Milestone"으로 일본 활동을 재개했는데[37] 아이튠즈 순위가 7년전에 발매한 메리크리와 20위에서 투닥거리며 다투다 결국 Milestone 은 70위권 밖으로 밀려났고 메리크리는 여러 신곡들을 제치고 7위를 기록하며 대 이변을 기록했다.

그 후 약 2년 동안 일본에서의 활동은 암전. 그리고 이 때의 뮤직 스테이션 출연이 마지막. 보아 역시 타 한국가수들과 마찬가지로 음악 방송 출연이 막히게 되었다. 2년의 공백기에는 K팝 스타의 심사위원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고, 보아 본인이 시즌2를 마지막으로 하차할 때, 더 이상 가수로서의 활동을 미룰 수 없어서 라는 말을 하였다.[38]

2013년 2월 일본에서 한국 7집인 Only One을 번안한 싱글로 활동 재개. 4~5개월에 한 장씩 싱글이 나오며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4년 9월 마침내 4년 만에 일본 정규 8집 WHO`S BACK?[39]을 내며 4년 반만에 전국투어 콘서트를 개최. 비록 아레나투어를 하던 시기에 비해 콘서트 규모는 한참 못미쳤지만,[40] 공연 모두 전석 매진시키며 공연 전문가와 팬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댄스가수임에도 라이브 활동에 집중한다는 점. 뛰어난 가창력과 라이브 실력이 호평의 요인으로 보임. 또한 동일 콘서트에서 부른 자작곡 'FLY'를 12월에 발매하여 일본활동을 이어갔다.

한국에서의 활동은 간간히 노래 내주면 음원차트 상위권에도 들고 어느정도 화제가 되는 수준. 6집 허리케인 비너스를 발매할때는 5년만에 컴백이라고 하며 컨셉사진이나 뮤직비디오 공개가 검색어 상위권에도 오르고 선공개곡 GAME은 음원차트 올킬, 뒤이어 공개된 수록곡들도 전부 차트에도 드는 등 화제가 되었으며 여성 솔로로 그해 음반 판매량 1위를 기록하였다.[41] 6집 선공개곡이었던 GAME은 히치하이커로 활동하는 지누가 만들었으며 뮤비는 보아의 둘째 오빠인 권순욱 감독이 제작. 보아가 앤디워홀의 뮤즈 에디세즈윅에게 영감을 얻어 '한국의 에디세즈윅'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 팩토리걸의 에디세즈윅을 오마주한 컨셉으로 대호평을 받았다. 곡 자체는 호불호가 갈렸지만 그래도 퍼포먼스는 역시 믿고 보는 보아정도의 반응을 얻으며 화제. 하지만 허리케인 비너스의 컨셉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너무나도 난해하여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을 들었다.[42] 결과적으로 볼 때, 5년만의 국내컴백이었던만큼 기대감도 컸고 팬덤의 충성심도 대단했기 때문에 성적은 꽤나 준수했다. 앨범은 발매 당일 판매량이 2만장을 넘었고 초동이 3만장이 넘었으며, 총판은 약 6만장에 달했다. 데뷔 10년차 솔로여가수로서는 경이로운 성적임은 분명하다. 활동 2주차에 타이틀 곡 Hurricane Venus로 뮤직뱅크 1위를 차지했을 당시 음반점수가 9천점을 넘었다. 같은 1위 후보였던 가수들의 총점보다 높았다. 음원성적도 2~3위 상위권을 머물렀다. 당시 순위제가 없던 음악중심을 제외하고 뮤직뱅크에서 3주 연속 1위, 인기가요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해 총 5회 1위를 거두었다.

영화 메이크 유어 무브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어 2011년에 촬영해 이듬해 개봉한다고 했지만 밀리고 밀려서 2014년에 개봉했다. 영화의 아시아 쪽 배급을 SM과 극적으로 화해한 CJ가 맡게 되어 미국 활동의 또다른 가능성이 열렸다. 미국 쪽 배급사는 영화 쥬만지 등을 배급했던 회사.

2012년 여름엔 본인 작사 작곡의 자작곡 미디움템포 댄스곡인 Only One이 공개 후 전 음원차트 올킬, 전문가들에게 높은 평을 얻었으나,[43] 같은 시기 싸이 강남스타일 2012 런던 올림픽이 터지면서 묻힌 감이 있다. 팬들이나 대중들이나 이 노래는 봄이나 가을에 나왔으면 대박이 터졌을거라며 아쉬워 했다.[44] 하지만 그 해 연간 멜론차트 40위를 차지하는 등 히트를 기록했고, 당시 오랜만의 보아 컴백곡이라는 점이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특히 이 당시 2절 댄스 부분을 소속사 후배 가수들과 커플댄스로 구성했는데,[45] 절륜한 춤솜씨와 퍼포먼스로 후배가수 팬들에게도 큰 호평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 노래를 기점으로 사실상 보아의 음악 스타일이 바뀌었다는 점이 중요. 가수로서의 전환점이 된 노래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의미 있는곡. 특히, 서정적인 멜로디와 달리 엄청난 고난도의 안무가 화제를 모았다. 그도 그럴것이 메이크 유어 무브, 스텝업의 안무를 맡았던 세계적인 안무가 내피 탭스 부부가 안무를 짜주었기 때문.


2011년도에는 K팝 스타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연하였다. 10년 넘게 갈고 닦은 내공과 오랜 무대경험, 연예계 짬밥을 바탕으로 양현석, 박진영같은 대선배들 사이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내뱉는 심사평이 큰 호응을 얻었다. 당시 대한민국 굴지의 3대 연예기획사인 SM, YG, JYP가 모여 오디션을 한다는 소식에 프로그램 자체가 시작 전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YG, JYP에서는 대표수장이 나오는 반면 SM에서는 소속가수인 보아가 섭외되자 본인도 고민을 많이 했다고. 결과적으로 출연을 결정했고, 프로그램과 본인 스스로에게 모두 득이 되었다.[46][47]다른 심사위원들이 지나치게 과잉된 심사평이나 심히 편향적인듯한 심사평으로 논란이 되었던 것과는 달리 실력 위주의 냉철한 심사, 참가자의 장단점을 정확히 지적하는 심사, 멘토를 맡을 때 참가자의 단점을 확실히 고치는 모습 등으로 큰 호평을 얻었다. 또한 일본 진출 직전인 2001년 이후로 무려 10년 만의 예능프로 출연으로서, 그동안 신비주의 전략을 고수해 미디어 노출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보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 알았다는 평이 대다수. K팝 스타로 입덕한 신생 팬도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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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스타 마지막 생방송 때

이후 K팝 스타 시즌2[48]에도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연하고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더 이상 가수 활동을 미룰 수 없다며 K팝 스타 시즌3부터는 불참. 그 자리는 안테나 뮤직 유희열이 대신해 심사를 하였다. [49]

현재 보아가 한국에서 중점적으로 미는 장르는 '어쿠스틱 팝'. 허리케인 비너스가 화제성에 비해 생각만큼 아쉬운 성과를 거두자 아예 Only One을 기점으로 방향 전환했다. 비록 상업적인 성과는 전성기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음악자체에 대한 반응은 좋은 편, Only One은 그 해 연간 차트에도 들고 퍼포먼스, 음악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나온 '그런 너'는 비활동 곡이었지만 발매직후 모든 음원차트 순위에서 TOP 10에 진입. 어느정도 선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댄스팝, EDM 등 다양한 장르를 거치던 보아가 자신에게 맞는 음악을 찾고 어덜트화되어간다며 호평하는 이들도 늘었다.

2013년도 1월에 한국에서의 첫 단독콘서트BoA Special Live 2013 Here I am을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개최. 13년 만에 한국에서 콘서트를 진행해 수많은 팬들이 환호. 그동안 일본에서의 콘서트를 보며 부러워 끙끙대는 한을 드디어 풀게 되었다. 티켓팅이 열리고 약 30초 만에 매진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1회 예정이던 콘서트가 1회 추가 공연이 결정되었고, 그 추가 공연도 30초만에 전석 매진. 이렇게 열성적인 모습을 보인 탓인지 결국 전국 투어가 결정되었고, 대만 콘서트까지 진행되었다. 콘서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으며 이 때 팬들을 위한 자작곡인 '그런 너'가 공개 'Only One'의 전 이야기로 팬들이 무척 아끼는 곡이 되었다.



5월 12일 정규앨범 8집 "Kiss My Lips"를 발표하였다. 관련기사 5월 6일 자정에 보아 본인이 작사, 작곡하고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가 피쳐링으로 참여한 선공개곡인 Who Are You를 발표 하였는데,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1~2위로 진입하였다. 8집 앨범은 12개곡 전곡 작사, 작곡, 프로듀싱에 보아가 직접 참여하며[50]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십분 발휘했다. 평단에서도 무척 좋은 평을 들으며 아이돌 가수로서는 드물게 IZM에서 별 4개를 받았고, 올 해의 음반 TOP10 중 유일한 아이돌 가수의 음반이었다. 또한 하이원 서울가요대상에서 최우수 앨범상을 수상하며 퍼포먼스 가수의 면모뿐 아니라 음악가로서도 인정받았다.

3년이라는 긴 공백기와 전체적으로 달라진 음악적 색채 때문인지 이전보다 아쉬운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과거 댄스팝, 힙합 위주의 음악[51]에서 어쿠스틱, 일렉트로니카 등 다양한 음악장르를 보기 좋게 버무린 앨범 구성. 음악적으로 한단계 진보했다는 평을 받으며 리스너와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각종 호평들

한 기획사의 아이돌에서 발전해 진정한 아티스트로 인정받는 중. 2015년 8월 여성 아이돌 최초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2015년 12월 2일. 일본 FNS 가요제에 출연해 카하라 토모미와 함께 자신의 겨울 명곡 '메리크리'를 열창하였다. 오랜만의 메이저 연말 방송 출연이었기 때문에 반가워하는 반응들이 많았다. 방송 직후 일본 웹사이트 인물 검색순위 3위에 올랐으며, 아이튠즈 싱글 차트에서 발매된 지 10년도 훨씬 넘은 메리크리가 23위에 오르는 등 간만에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2015년 12월 25일, 뮤직 스테이션 슈퍼 라이브에서 '메리크리' 무대를 선보였다.


2016년 6월 17일 SM과 타 아티스트의 콜라보 SM'STATION'의 19번째 음반인 No Matter What을 발매 하였다. 콜라보 가수는 빈지노이다.

2017년에는 프로듀스 101 시즌2의 국민 프로듀서 대표 및 MC로 활약했다. 프듀 시즌2의 제작자 안준영 PD의 말에 따르면, 기획 당시부터 보아를 꼭 섭외하고 싶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 '연습생'이라는 개념을 거의 최초로 알린 인물이 바로 보아였기 때문. 국민 프로듀서 대표로 활약하며 보아는 연습생들에게 여러 조언을 해주며 멋진 모습을 보였다.[52]


2017년 4월 28일 SM STATION2의 5번째 음반인 봄비 (Spring Rain)를 발매 하였다.


2017년 6월 26일 CAMO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디지털싱글 CAMO를 발매하였다.

2018년 1월 16일 마이클잭슨 데뷔 3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SM STATION2로 마이클잭슨의 곡 Man In The Mirror을 원작자 사이다 가렛과 함께 불러 발매했다.

2018년 1월 27일 일본 후지테레비의 MUSIC FAIR에 출연했다. 단독으로 VALENTI와 私このままでいいのかな를, 그리고 여가수 JUJU와 奇跡を望むなら를 불렀다.

2018년 1월 30일 선공개곡 내가돌아를 발매하였다.


2018년 2월 20일 데뷔 후 첫 미니앨범 ONE SHOT, TWO SHOT를 발매하였다. 그리고 이 노래는 2018년 4월초부터 전세계 H&M 매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2018년 2월 14일 일본 정규 9집 私このままでいいのかな (나 이대로 괜찮은걸까)가 발매되었다.
또한 4년만에 보아의 일본 전국 투어 《BoA THE LIVE 2018 ~Unchained~》 공연을 진행했다. 공연이 끝나고 나갈 때 공연을 위해 재녹음한 곡들을 모은 미니앨범 Unchained를 나눠주었다.

2018년 8월 25일 AVEX의 야외 음악 페스티벌 'a-nation 2018 supported by dTV & dTV 채널'에 참가하였다. 약 30여분 동안 9곡을 선보이는 대단한 라이브를 선보였다. 특히 중간의 7곡 메들리는 보아의 추억의 히트 넘버들을 들을 수 있었다.

2018년 10월 24일 한국 정규 9집 WOMAN 이 발매되었다. ‘홧김에 (Irreversible)', ‘Little More', ‘If', ‘No Limit' 등 자작곡 4곡은 물론, 타이틀 곡 ‘Woman'과 수록곡 ‘Encounter'도 직접 작사해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WOMAN 무대 시작부분이 인상적이다.

2018년 11월, SBS의 음악 예능 프로그램 더 팬에 심사위원 격인 팬마스터로 참여했다.

2018년 12월 《BoA THE LIVE 2018 X'mas / in Seoul》 공연을 진행했다. 보아의 7년만의 크리스마스 라이브이자, 한국에서 처음 개최한 BoA THE LIVE 공연인사이다. 한일 개최를 위해 최초로 한국곡, 일본곡을 절반씩 구성하였다. 또한 보아 데뷔 18주년만에 공식 응원봉이 나왔다. (아별봉이라고 부른다.)

2018년 12월 1일 대만에서 개최된 Asia Fashion Awards 2018 in Taipei에 참여했다. 3회째가 되는 이번 시상식에서 보아는 ONE SHOT,TWO SHOT + My Name + Talking + Woman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참고로 2회에는 CL이, 4회에는 현아가 참여하는 등 한국 가수들이 자주 참석하는 듯하다.

2018년 12월 4일 주노플로의 싱글 'Autopilot (Feat.BoA)'에 피쳐링으로 참여했다. https://youtu.be/0o-T2sGa9IU

2019년 1월 25일 보아 일본 싱글 'AMOR' 음원이 공개되었다. 뮤비는 12월 20일에 선공개 되었으며 AMOR 무대는 보아 더 라이브 2018 X'mas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2019년 3월 26일 공개된 박지훈의 첫번째 미니앨범 'O'CLOCK'의 4번 트랙 'Would You...' 작사/작곡에 참여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Lovee라는 예명으로 참여했으며 지금까지 이 명의로 발표한 곡은 한국 2집 No.1에 수록된 dear my love..가 유일했는데 이 곡이 두번째가 된다. https://youtu.be/IJs7mOFS_5U

2019년 3월 29일 공개된 중국의 아이돌 그룹 Boy Story의 5번째 디지털 싱글 'Oh My Gosh'의 작곡에 참여했다. Lovee의 예명으로 참여했다. https://youtu.be/Z7bsJf5lPT0

2019년 4월 3일 보아 일본 싱글 'スキだよ-MY LOVE-'의 음원과 음반 둘 다 공개되었다. 원래 본 앨범은 2월 27일에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내부 사정으로 인해 4월 3일로 미뤄졌다. AMOR와 커플링 곡이다.

한국 음원사이트에는 4월 4일 정오에 공개되었다. AMOR와 スキだよ-MY LOVE- 둘 다 보아가 프로듀싱 했으며 スキだよ-MY LOVE-은 각트가 작사가로 참여했다. 본 곡의 무대는 3월 30일 MUSIC FAIR에서 공개되었다.

6월 4일, 보아의 새로운 한국 디지털 싱글 'Feedback'이 공개되었다! 피처링으론 넉살이 참여하였다. 6월 5일 8시 차트에 23위까지 반등을 성공하였다! Feedback의 뮤비가 2시간 30분 만에 공개되는 등 또 팬들의 화를 돋구었다. 스엠이 스엠했다... SM 공식 트위터에 점핑보아들의 뮤비 어디에 삶았냐는 원성이 많다.

보아의 신곡 Feedback이 나오는데 이어 동방신기 유노윤호의 첫번째 미니앨범의 수록곡인 'Swing'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또한 나 혼자 산다에도 유노윤호와 함께 출연했다.

8월 25일로 데뷔 19주년이 되었으며, 인스타에 감사 인사를 올렸다. #

9월부터 보아의 일본 투어 '#mood'가 진행된다. BoA The LIVE가 아니라 BoA LIVE TOUR 이다. 투어는 2014년 WHO's BACK? 투어 이후로 5년만이다.

보아 공식 팬클럽 점핑보아도 다른 SM 아티스트처럼 Lysn 앱에서 모집을 시작한다! 4기 모집 이후 9년만. 이어 10월 26일, 27일에 한국 콘서트 #mood In Seoul이 시작된다. ACE 회원 인증 시 선 예매가 가능하다.

2018년 12월에 진행한 보아 더 라이브 Xmas의 라이브 음원이 발매되었다. 일본 정규 9집의 수록곡 Manhattan Tango와 일본 정규 8집 Only One [53], 작년 말에 발매된 일본 싱글 AMOR, 보아의 대표곡이자 겨울시즌곡인 메리크리까지 총 4곡이 발매되었다.

10월 23일, #mood 투어에서 앵콜곡으로 선보였던 일본 디지털 싱글 'Wishing Well'이 공개되었다.[54] 또한 10월 26-27 양일간 #mood 인 서울 콘서트를 진행했으며 통산 130회 공연을 달성했다. 한국 앨범이 올해 안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11월 5일, 보아의 생일을 맞이했으며, 11월 11일에는 모든 한국 음원사이트에 'Wishing Well'이 공개되었다. 또한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기념 콘서트에 참여한다.

12월 12일, 미니2집 'Starry Night'이 공개되었다. 타이틀은 크러쉬와 함께했으며 역시 요번 앨범에도 자작곡이 들어간다. 매일 한 곡씩 하이라이트 클립을 보여줬다. 웬일 이 앨범은 빌보드 2019년 최고의 K-POP 음반 TOP 25에 선정되었다.

8. 2020년대

  • 2020년
    • 6월, 보이스 코리아 2020의 코치로 출연했다.
    • 7월, 아는 형님 성시경과 출연했다. 2018년 이후 두 번째 출연이다.
    • 8월 25일, 한국 데뷔 20주년을 맞이했다. 오후 8시 25분에 'BoA Debut 20th Anniversary Special V LIVE' 를 진행했다.
    • 12월 1일, 정규 10집 BETTER 가 발매되었다.
    • 12월 3일,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출연했다.
    • 12월 5일, KBS 2TV의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전설로 출연했다.
    • 12월 6일, MNET의 연말 시상식인 MAMA에 출연했다. 'You're Still My No.1'이라는 타이틀로 No.1과 Only One (파트너: 태민), Better 3곡을 공연했으며 Inspired Achievement Artist(공로상)를 수상했다. 이는 2017년 MAMA Japan 이후 3년 만의 MAMA 출연이었다.
    • 12월 10일, 스브스뉴스에서 제작하는 웹예능 문명특급 EP.159화에 출연하였다. 호스트 재재가 보아의 열렬한 팬으로, 상당히 알차게 보아의 활약상을 요약해주고 신곡을 홍보해주었다.
    • 12월 25일, 일본 아사히 TV의 연말 방송 Music Station ウルトラ SUPER LIVE 2020에 출연하여 당연하게도 메리크리를 불렀다.
  • 2021년
    • 5월 30일, AVEX 유튜브 채널에서 ‘BoA JP 20th - THE PROLOGUE -’가 공개되었다. 25분이나 되는 상당한 분량의 인터뷰로, 일본 데뷔 20주년의 Prologue격의 영상이다. https://youtu.be/iuZdoTBqQYI
    • 8월,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파이트 저지로 출연했다.
    • 10월, 18년만에 몬도 그로소와 결합하여 BoA가 피처링했던 그의 대표곡인 ‘Everything needs love’를 재녹음했다. 코로나로 인해 녹음 파일을 보내주는 방식으로 진행했는데, 몬도 그로소(오사와 신이치)의 말로는 단 한 번의 녹음만으로 곡이 완성될 정도로 BoA의 기량이 여전했다고 한다.
    • 11월 5일, 본인의 생일에 일본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는 디지털 싱글 ‘My Dear’를 공개했다. 약 1년만의 신곡으로 지금까지 곁에 있어 준 팬들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 곡이라고 한다. 가사 속에 본인의 과거 가사들이 키워드로 들어가 있어 팬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한 재미와 감동이 되기도 했다. https://youtu.be/rBBMRIwHmMs
    • 11월 20일, 2021 K-Music Week (11월 18일-22일, 총 5일간) 중 셋째 날(K-POP Dreamers(아티스트가 꿈꾼 노래))에 출연하여 Better Only One을 불렀다.
    • 12월 1일, 일본 후지테레비의 연말 방송 FNS 가요제 제1야에 3년 만에 출연하여 당연하게도 메리크리를 열창하였다.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서 라이브를 진행하여 송출하였다.
    • 12월 2일, SM엔터테인먼트 유튜브가 진행중인 리마스터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아의 데뷔곡인 ID;Peace B가 새롭게 공개되었다.
    • 12월, SM엔터테인먼트의 NCT127 소속 멤버 유타가 레귤러 DJ로 온에어 중인 ‘NCT 127 ユウタのYUTA at Home’ (매주 목요일 21:00-21:30)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2일과 9일, 16일까지 3주에 걸쳐 출연하였으며 오랜만에 꽤 긴 시간동안 일본어로 말하는 보아를 볼 수 있었다.
    • 12월 8일, K-VIBE FESTA(CONCERT) 콘서트에 참여했다. 온라인 콘서트로 진행되었으며 보아의 당일 퍼포는 Better와 메리크리 (Merry-Chri)였다.[55]
    • 12월, 일본 데뷔 20주년을 기념한 FILM LIVE 제2탄으로 ‘BoA 20th Anniversary FILM LIVE ~TOUR EDITION~’ 개최 계획이 공개되었다. 22년 2월부터 3월에 걸쳐 전국 5개 도시 10개 공연으로 개최되는 상영회로서 BoA THE LIVE EDITION과는 다른 세트리스트로, 특별하게 편집된 영상을 전달한다고 한다. https://youtu.be/ShP67eTdtIU
  • 2022년
    • 1월 1일, SM엔터테인먼트의 프로젝트인 Girls On Top의 걸그룹 GOT the beat의 멤버로 발표되었다. 이로써 보아는 데뷔 21년만에 첫 그룹 활동을 하게 되었다.[56] 과거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다시 가수를 한다면 그룹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졌다.
    • 2월 9일, 제19회 한국대중음악상의 후보들이 공개되었는데, 보아 10집 BETTER가 최우수 케이팝-음반 부문에 수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었다. https://koreanmusicawards.com/project/%eb%b3%b4%ec%95%84-better-the-10th-album/ [57]
    • 3월 2일, SM엔터테인먼트 유튜브가 진행중인 리마스터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My Name이 새롭게 공개되었다.
    • 3월 13일, 일본 데뷔 20주년 기념 라이브 및 베스트 앨범 발매 계획이 공개되었다. 스페셜 라이브 'BoA 20th Anniversary Special Live -The Greatest-'는 오는 5월 29일 단 하루 1회 공연으로 도쿄 국립 요요기 경기장 제1체육관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곳에서 보아가 공연하는 것은 2003년과 2005년에 이어 약 17년 만으로, 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공연 다음날인 5월 30일에는 BoA 20th Anniversary Album 'The Greatest'가 발매 예정이다. 신곡 2곡과 더불어 셀프 커버 10곡이 수록될 예정.
    • 3월 21일, BoA 20th Anniversary'Self Cover Project'의 1탄으로 AGGRESSIVE -The Greatest Ver.-이 공개되었다. 앞으로 10주간 매주 월요일에 한 곡씩 공개되는 프로젝트이며, 세트리스트는 보아 본인의 선택과 더불어 SNS나 FILM LIVE 등에서 취합된 팬 앙케이트 조사 등을 바탕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https://youtu.be/mRh6HBDs3_U
    • 3월 23일, 일본 잡지 'SPUR' 5월호의 표지를 장식했다. 보아가 일본 잡지의 표지를 장식한 것은 2014년 이래 약 7년 만의 일이며, 5000자 상당의 인터뷰도 함께 수록된다고 한다.
    • 3월 28일, BoA 20th Anniversary'Self Cover Project'의 2탄으로 make a secret -The Greatest Ver.-이 공개되었다.
    • 4월 4일, BoA 20th Anniversary'Self Cover Project'의 3탄 抱きしめる -The Greatest Ver.-이 공개되었다.
    • 4월 11일, BoA 20th Anniversary'Self Cover Project'의 4탄 DO THE MOTION -The Greatest Ver.-이 공개되었다.
    • 4월 18일, BoA 20th Anniversary'Self Cover Project'의 5탄 コノヨノシルシ -The Greatest Ver.-이 공개되었다.
    • 4월 25일, BoA 20th Anniversary'Self Cover Project'의 6탄 Every Heart -ミンナノキモチ -The Greatest Ver.-이 공개되었다.
    • 5월 2일, BoA 20th Anniversary'Self Cover Project'의 7탄 QUINCY -The Greatest Ver.-이 공개되었다.
    • 5월 9일, BoA 20th Anniversary'Self Cover Project'의 8탄 LOVE LETTER -The Greatest Ver.-이 공개되었다.
    • 5월 16일, BoA 20th Anniversary'Self Cover Project'의 9탄 Sweet Impact -The Greatest Ver.-이 공개되었다.
    • 5월 23일, BoA 20th Anniversary'Self Cover Project'의 10탄 LISTEN TO MY HEART -The Greatest Ver.-이 공개되었다. 셀프커버의 마지막을 장식한 곡으로, 보아 본인이 편곡을 했다고 한다.
    • 7월 4일, 맥주 브랜드 버드와이저에서 'Dream Again' 이라는 타이틀로 패키지 디자인이 다른 한정판 캔을 발매했다. 관련 영상은 https://youtu.be/C7_g8wvuhvc에서 확인 가능하며, 전국 편의점에서 한정 수량으로 구매 가능하였다.
    • 7월 18일, 중국의 류위신(XIN)이라는 여가수와 함께 찍은 Better 중국어 버젼 MV가 공개되었다. 작년 20주년 기념 기획 중 하나였다고 추정되며, 이 여가수는 중국의 오디션 방송에서 우승을 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https://youtu.be/O5ttP6YWbNc https://youtu.be/E4NfknEJd2Q (Making Film)
    • 8월, 스트릿 맨 파이터에 파이트 저지로 출연한다.
    • 8월 5일, SM엔터테인먼트에서 운영하는 SMP FLOOR에 BoA의 10집 타이틀곡이었던 BETTER의 안무영상이 업로드되었다. 보아 데뷔 이래 공식 안무 영상은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2020년 11월 5일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https://youtu.be/1DhepiUn0L4
    • 9월 16일, LISTEN AGAIN FESTIVAL 2022에 참가해 오랫만에 야외 페스티벌 공연을 했다.
    • 9월 21일, 뉴욕에서 개최된 2022 KOREA-U.S. SMEs go TOGETHER K-POP MINICON에 참여하였다.
    • 10월 2일, 일본 도쿄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개최된 NBA Japan Games 2022의 Halftime Show에 출연했다.
    • 10월 25일, 보아가 작사 작곡에 참여한 도영(DOYOUNG) X 김민하 - Fallin'이 발매되었다. https://youtu.be/fxMcfoNs4v4
  • 2023년
    파일:보아갓더비트[1].gif
  • 1월, 1년만에 재결합한 갓더비트로 음방활동을 하였다 .

[1] 당시의 보아 덕후들의 증언에 의하면 SM건물 앞에는 항상 지금도 빠순이들은 늘 죽치고 있었고, 보아가 지나가면 '보아야!!'하고 불러서 보아가 웃으며 쳐다보면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퍼붓거나, 보아가 1집 후속곡 '사라'로 활동할 때 후렴구에서 '안사!, 안사!'를 외치거나 다함께 '꺼져라!'를 외치거나 사라(살아)의 반댓말로 죽어! 죽어! 등의 행패를 부리고 바나나껍질, 빈 음료수캔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2] 이와 비슷하게 데뷔하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안티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경우는 소녀시대 제시카도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연예인이 된 보아의 모습을 보면서 동경하는 마음을 품고 가수가 된 케이스도 있다. [3] 실제로 보아가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했을 때 MC진이 했던 말 중 하나가, "보아가 너무 어린 나이때부터 어른들의 이해관계에 엮이는 걸 보며 불쌍하다는 생각도 했다"는 것이었다. [4] 당시 인터넷 음지에서는 야설문화가 판을 치고 있던 시기였는데, 야설 내용이 연상의 남자와 중, 고딩의 여성의 관계로 이루어진 창작 야설의 여주인공 이름을 "보아"라고 지은 야설이 어마무시하게 나오기도 했었다. 당연하지만, 요즘 같은 시기라면 당연히 고소를 당하고, 명예훼손 등으로 체포당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범죄였다. [5] 당시는 2~3차 정보화촉진기본계획 등이 추진되던 확장기, 심화기였다. [6] SM의 사옥은 서울인데, 보아의 집은 당시 경기도 남양주시였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버스로 왕복 2~3시간이 넘는 거리를 다니며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이 당시엔 남양주에서 서울에 가려면 무조건 버스로 다녀야 했는데, 경춘선은 전철이 안 뚫렸을 때라서 어쩔 수 없이 남양주에서 서울까지 버스로 다녀야 했다. 경춘선 전철이 개통된 것은 2010년 12월이다.) 게다가 2000년 초반 당시 SM은 시설도 매우 낙후되어서, 비가 새는 건물에서 댄스 트레이닝을 받고, 그것도 거울 없이 유리창에 비치는 모습을 보며 연습하는 등, 여러모로 열악했다고. [7] 이 기획의 이름은 '신비 프로젝트'로 보아에게 투자한 30억을 다 쓰기 전 일본에서 대박을 치면서 투자원금을 모두 회수하고 흑자 전환한 프로젝트. [8] 이 때 유영진은 신화의 <Only One>을 1년이 넘도록 공들여 작업하고 있었는데 후에 너무 신경 쓰느라고 보아의 데뷔곡을 대충 만들었다고 사과 인터뷰를 함. [9] 이 당시 팬덤 문화가 좀 그런 경향이 심했다. 지금이야 보는 시각들도 많아지고, 자칫 잘못하면 팬뿐만 아니라 해당 가수한테까지 악영향을 끼쳐서 웬만하면 조심하는 편이지만. 특히 H.O.T. 팬들의 베이비복스 멤버 테러 사건, 젝스키스 팬들의 DSP사옥 테러 사건 및 조영구 차량 피해 사건은 지금 일어났다면 사회적으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지금은 이런 일이 벌어지면 소속사가 빡쳐서 고소장 넣고 가해자를 인실좆시켜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테러방지법은 덤이고. [10] 사실 어찌보면 당연하다. 1집 이후 나온 스페셜 앨범활동은 성공하자 못했고, 오히려 일본에서 히트 친 이후 주목을 받았고 이후로도 쭉 승승장구하며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는 대가수가 되었으니 체감차이가 클 수밖에. No.1이 데뷔곡인줄 알았던 케이스도 더러 있기도 하고, 국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것도 No.1으로 활동할 때 부터이다. [11] 초코틴틴 [12] 물론, 성공은 아니지만 아주 폭망까지는 아니었다. 두 싱글 합쳐서 10만장 가량 나갔다. [13] 이 당시 우타다 히카루의 'time will tell'을 들으며 힘을 얻었다고 한다. [14] ID ; peace B 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소녀인데 무섭다는 반응이다. 이에 여성스럽게 수정해서 나온게 Amazing kiss. 그러나 이때 보아를 보면 날아다닌다. 그리고 살이 너무 빠져 뼈밖에 없었지만 미소녀의 정석을 보여줌. 그리고 탄생한 곡이 바로 훗날 2집에 실리는 'moon&sunrise'이다. 보아 작사 곡으로 혼자인 외로움을 담은 가사로 당시 히라가나밖에 몰라 한자는 눈물 루(淚)밖에 없었다. [15] 싱글로 나오려던 곡이 'Next step'이라는 설이 유명하다 [16] 한국제목 '마음은 전해진다' [17] SPEED의 해체 이후로는 친근한 옆집 누나 이미지를 무기로 내세웠던 모닝구 무스메가 일본 걸그룹의 패자로 등극한다. [18] SBS 나이트라인, 스튜디오 초청 생방송 단 1회, 이외는 인터뷰 녹화 뉴스였다. [19] 한상엽 매니저의 사망일로부터 불과 3일이 지난 7월 12일 음악캠프에 출연한 모습를 보면 '아틀란티스 소녀' 무대를 힘겹게 소화하는 걸 볼 수 있다. 현재는 영상이 내려갔다. [20] 2013년 첫 콘서트 때는 3집 수록곡이 아틀란티스 소녀를 포함해 단 한 곡도 세트리스트에 오르지 못했고, 2015년 콘서트에서 앵콜곡으로 아틀란티스 소녀를 불렀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 춤도 소화하지 않고 노래만을 부르기도 했다. [21] 자사 대표가 이런식으로 어느 노래에 대해 자신하며 홍보하는 경우는 이례적이었기에 이후에 이 노래가 그다지 좋은 판매량을 거두지 못했을 때 여러 번 회자되었었다. 실제로 판매량이나 반응면에서는 Shine We Are!쪽이 더 호응이 좋았음에도 DOUBLE로 홍백가합전에 출전한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자신이 있었던 모양 [22] 컴백 스페셜인지라 노래와 맞는 컨셉으로 무대가 장식되었다. [23] 가수 애프터스쿨의 멤버이자 리더였던 그 가희가 맞다. 2.5집 Miracle로 활동할 때, 기적과 Valenti 무대에서도 백업을 했었다. 이 둘은 훗날 프로듀스 101 시즌2에서 재회한다. [24] 이 때쯤부터 보아 본인이 앨범에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게 되었으며 sm에서는 Spark를 타이틀곡으로 하자고 했으나 보아 본인이 장문의 편지를 써 My Name으로 타이틀 곡을 결정하였다. [25] 마츠우라 아야, 나카시마 미카, 오오츠카 아이 같은 가수들과 경쟁 [26] 가사가 시대를 앞서간 편. 전형적인 유영진식 페미니즘 가사라 유영진은 이런 노래를 꽤 발표한 편이지만 개중 어느 노래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보아가 불러서 히트친 것. 최근 페미니즘이 주목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아가 정규 9집 Woman으로 컴백함과 더불어 Girls On Top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27] sm과 avex는 1년 단위로 보아를 한국 6개월, 일본 6개월 나누어서 활동을 시켰다고 한다. 연말연초가 되면 매니저를 비롯한 보아의 한일 스탭들의 신경전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주로 오가는 대화는 "작년에는 한국에서 ㅇㅇ일 더 일했으니 이번에는 일본에서 ㅇㅇ일 더 일하도록 하죠?" 따위의 대화. 한국에서 활동하는 이 6개월의 시간을 미국 진출 준비에 썼다고 하니.. [28] 07년도 제주 한류엑스포 공연에서 한국에서의 무대에 굶주려 있었다고 본인이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을 보고 팬들도 같이 오열. 이 때만해도 공백이 5년이나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29] 참고로 이 감독의 전작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Genie in a bottle, 제니퍼 로페즈의 Get Right로 유명 히트곡의 뮤직비디오를 다수 찍어왔던 감독. 위 작품들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대체 보아 뮤직비디오는 왜 저렇게 찍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감독이 동양인 인종차별한게 아닌가 싶을 정도 [30] 보아가 먼저 빌보드 200에 진입했으니 한국인 최초 메인 차트 진입은 보아가 맞다. [31] 이 인연으로 보아는 새로운 안무가와 프로듀서들을 접하며 보다 넓은 음악적 인맥을 가질수 있게되었고, SM 입장에서도 미국 시장과 인맥이 터진 덕분에 다양한 프로듀서와 관계자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지만 SM의 과오다. [32] 실제 일본 진출할 때도 일본 현지 여가수 스타일보다는 보아가 가진 실력과 이미지에 맞게 준비해서 진출했고, 해당 음악에 맞게 컨셉을 잡고 활동했다. [33] 비단, 한국 가수가 아닌 레이디 가가와 아델 등 영미권 가수들이 자기만의 스타일과 장점으로 성공한 것을 보면 미국같은 큰 음악시장에서는 개성이 중요하다. [34] SM에서는 스케쥴 문제로 거절했다. 팬들이 괜히 욕하는게 아니다. [35] 근데 정작 보아 본인은 천상지희와 비슷한 나이대이다. 다나, 선데이와 동갑이고 스테파니보다 1년 언니. [36] 소녀시대 태연과는 고작 3살차이다. [37] 일본 데뷔 10주년 기념 1탄으로 홍보해 놓고 티저까지 뽑는 등 다음을 기대하게 만들었으나 1탄 이후 감감 무소식. 많은 팬들에게 분노와 실망을 안겼다. [38] 이후 SM은 아예 소속사 자체가 해당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는데, 후에 썰전에서 희철이 말하길 SM이 참가자들에게 딱히 줄 수 있는 혜택이나 참여자를 뽑거나 하는 모습이 없어 논란이 되기 전에 그만두었다고 밝혔다. [39] 후즈백의 신곡은 First Time 단 한 곡. 어떤 팬들은 신곡이 1곡 뿐이라며 실망하며 논란이 되기도 하였으나, 정작 곡수보다 논란이 된 것은 성의없는 앨범 디자인. 3분 완성짜리 디자인으로 자켓 디자이너도 보덕살생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앨범을 내지 못한 4년 동안 쌓인 싱글이 무척이나 많았고, 앨범을 내려다 한 번 엎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의 활동곡을 모은 베스트앨범 격의 앨범. 그런 만큼 수록곡 하나하나 퀄리티가 높다. [40] 첫공연이었던 NHK홀 공연은 7600명 동원. 이후 공연들은 3000명 남짓한 규모로 전성기에 비하면 한참 적은 숫자이긴 하다. 다만 2010년도 BoA the LIVE 이후로는 일본에서 전국 투어는 안한 지 오래였고, 이미 전성기가 지났다는 점을 감안해서 봐야 할듯. [41] 당시 선공개곡인 GAME은 공개되자마자 30만 건 이상의 유튜브 조회수를 기록하였으나 SM에서 뮤비 속 글자 하나의 스펠링을 틀리는 바람에 삭제. 영상을 교체하며 조회수가 다 날아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42] 허리케인 비너스의 코디는 예란지. 역대 최악의 코디라고 말해지며 충격의 보라돌이는 아직도 회자됨. 보아가 직접 같이 일해달라고 부탁해 모든 옷은 수작업으로 공을 많이 들인 옷을 제공하였으나 너무나 독창적인 세계관과 보아의 체형을 고려하지 않은 의상, 과한 메이크업 등으로 멘붕을 불러일으킴. [43] 후크송 일색인 아이돌노래 판에 멜로디로 승부를 둔 노래라는 점이 좋은 평가를 얻은 것으로 보임. [44] 5월에 컴백하려 했으나 밀렸다는 소리가 있음. [45] 동방신기 유노윤호, 슈퍼주니어 은혁, 샤이니 태민, EXO-K 카이, 세훈, EXO-M 루한, 레이까지 당시 SM 소속의 모든 남성그룹에서 최소 한명씩은 이 무대에 섰다. TRAX는 밴드이므로 제외 [46] 현직 가수보다는 프로듀서에 가까운 양현석이나 박진영과 달리, 현직 가수로 활동하는 보아에게는 어린 참가자를 보는 것이 감회가 남달랐던 모양이다. 보아 스스로도 어리고 꿈많은 참가자들을 보며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고. [47] 사실 보아가 캐스팅된 것은 이수만이 반강제로 추천했기 때문이다. 이수만 본인이 안 나가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중년 남자 셋이 앉아있으면 프로그램 아무도 안 볼 거라고 했다고... 실제로 보아 앞에만 PPL 음료가 몰려있었다.. [48] 이 시즌에는 구구단 김세정 우주소녀 남다원이 나섰다. 그런데 김세정은 보아에게 "캐스팅 포기"라는 굴욕을 당했다. [49] 보아는 K팝 스타로 SBS 연예대상에서 특별상을 수상. 이로써 미디어 노출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요대상, 연기대상, 연예대상에서 모두 상을 받는 희귀한 경험을 했다. [50] 사실 홧김에 소속사 측에 '다음 앨범은 내가 다 할게요!'라고 선언해서 만들기 시작한 앨범이라고... 한 두곡도 아니고 열 곡이 넘는 양을 작사,작곡,프로듀싱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기에, 본인이 뱉은 말을 후회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결과가 좋게 나와 뿌듯해했다고 한다. [51] 이미 6집에서부터 일렉트로니카, 재즈 발라드,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 [52] 제작진들에 따르면 보아는 촬영 하루만에 연습생 98명의 이름을 모두 외웠다고 한다. 또한 보아가 연습생들의 고민상담이나 해주고 조언을 해주는 일이 많았는데, 보아가 제작진에게 '연습생들이 방송될 분량을 뺏고 싶지 않다'며 자신을 편집해달라고 요청했다고. [53] 한국 정규 7집이지만 일본어이다 [54] 일본 아이튠즈, 라인 뮤직 등 일본 음원사이트에만 공개되었다. 뮤비 없는건 덤 [55] 보아가 메리크리 한국어 버젼을 공식으로 공연한 것은 지금까지 단 2회였는데, 2007년 애니밴드 콘서트와 2013년 보아 한국 첫 단독콘서트에서였다. [56] 참고로 막내인 aespa 윈터와는 무려 15살 차이다. [57] 이는 2004년 1회 3집 Atlantis Princess 앨범으로 올해의 음악인-여성 부분 노미네이트, 2005년 2회 4집 My Name 앨범으로 올해의 음악인-여성 부문 노미네이트, 2019년 16회 9집 WOMAN 앨범으로 최우수 팝 부문 노미네이트에 이은 4번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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