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1:29:38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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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스테판 라자레비치 }}}}}}}}}}}}

<colbgcolor=#ff0000><colcolor=#fff> 모라비아 세르비아 초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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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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Лазар Хребељановић}}}
파일: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jpg
출생 1329년
세르비아 왕국 프리레펙
사망 1389년 6월 28일 (향년 59~60세)
브란코비치 영주권 코소보
재위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
1371년 ~ 1389년
아버지 프리바크 흐레벨랴노비치
배우자 밀리카
자녀 스테판, 부크, 마라, 옐레나, 드라가나, 테오도라, 올리베라
가문 흐레벨랴노비치 가문


1. 개요2. 생애3. 사후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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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초대 공. 세르비아 제국 붕괴 후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외교술로 세르비아 대부분을 장악해 세르비아 왕국의 부활을 꾀했지만, 1차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사후 세르비아 정교회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2. 생애

1329년경 세르비아 프리레펙[1] 요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리바크 흐레벨랴노비치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 치하 세르비아 궁정에서 로코테티스(Логотет: 특정 부서의 수장)를 역임했으며, 세르비아의 주요 광산 중심지인 노비 브르도 주변의 광산과 정착지를 영지로 다스렸다. 어머니와 형제자매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라자르는 세르비아 궁정에서 퍼터(ставилац: 왕실 식탁에 차릴 음식을 구입, 준비 및 제공하는 자)를 맡았다고 전해진다. 퍼터는 세르비아 궁정에서 가장 낮은 직위였지만, 통치자와 매우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355년 12월, 두샨이 47세의 나이로 급사했고, 외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가 황제에 선임되었다. 라자르는 새 황제의 궁정에서 퍼터 직위를 유임했다. 그 후 세르비아 제국은 분열되었다.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테살리아의 통치자 시메온 우로시는 1359년 우로시 5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고 스스로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차르'를 칭했으며, 제국의 북동부 지역인 브라니체보와 쿠체보를 지배하던 라스티슬라리치 가문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나머지 지역을 다스리는 대귀족들은 우로시 5세를 주군으로 받들었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명령을 신경쓰지 않고 자기들 이권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우로시 5세는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드리나 강과 아드리아 해 사이의 세르비아 북서부를 지배하며 헝가리의 침공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던 보이슬라프 보이노비치에게 의존했다. 보이슬라프는 세르비아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세르비아 중앙부의 루드니크 산에서 아르아 해안의 코니블리까지, 그리고 드리나 강 상류에서 코소보 북부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라자르는 이 시기에 보이슬라프의 측근이 되었고, 1363년 7월 우로시 5세가 보이슬라프와 세르비아 영주 무사 사이의 영토 교환을 허용한 헌장에서 증인으로 언급되었다.

1363년 9월, 보이슬라프가 급사했다. 그 후 부카신과 우글레샤 므르냐브체비치 형제가 세르비아 제국의 가장 강력한 거물이 되었다. 그들은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제국 남부 지역을 통제했다. 우로시 5세는 부카신은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으로 선임했고, 우글레샤를 데스포티스로 삼았다. 한편, 보이슬라프의 조카인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는 1368년까지 삼촌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라자르는 이 시기에 독립하여 지역 영주로서 성장했다. 그는 남쪽의 므라냐브체비치 가문의 영지, 서쪽의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의 영지, 북쪽의 라스티슬라리치 가문의 영지와 경계를 이룬 일대를 다스렸다.

라구사 공화국의 역사가 마르보 오르빈에 따르면, 1369년 라스 주판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와 라자르는 광산이 풍부한 코소보로 확장하려는 부카신에게 반감을 품고 연합군을 결성한 뒤 우로시 5세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여 맞서 싸웠다. 므르냐체비치 가문과 연합군의 결정적인 충돌은 코소보에서 벌어졌다. 라자르는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 이미 철수했고,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우로시 5세는 여러 궁정 영주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후 우로시 5세는 정계에서 사실상 사라졌고, 부카신은 독립된 통치자로 군림했다. 라구사 공화국은 우로시 5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이름으로 공물을 바쳤지만, 1370년 4월 우로시 5세를 배제하고 부카신에게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을 확인받았다. 다만 니콜라는 헝가리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했다.

1371년 9월 26일, 세르비아 제국의 권신 부카신과 우글레샤가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마리차강 전투에서 맞붙었다가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전사했다. 부카신의 아들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가 뒤이어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이 되었지만, 오스만 제국군에 맞설 병력이 없었기에 그들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많은 영토를 헌납했다. 그해 12월 4일, 우로시 5세가 사망했다. 세르비아 영주들은 명목상으로나마 스테판 우로시 5세를 군주로 인정했지만, 그가 사망하고 난 뒤 후계자를 자처한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를 아예 인정하지 않고 부카신의 옛 영지를 공략했다. 이때 라자르도 끼어들어 프리스티나를 점령했다.

라자르는 다른 세르비아 대귀족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갈수록 강성해지던 보스니아 반샤그의 반 트브르트코 1세와 우호 관계를 맺은 뒤, 그와 함께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를 협공하기로 했다. 1373년 가을, 라자르는 트브르트코 1세의 보스니아군과 함께 공세를 개시해 니콜라를 격파하고 그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니콜라는 우지체에서 생포된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이후 두 사람은 니콜라의 옛 영지를 나눠가졌다. 1377년 가을, 트브르트코 1세는 자신이 세르비아의 상당 부분을 확보했으며, 친할머니 엘리자베타가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의 딸인 걸 근거로 삼아, 자신이 세르비아의 왕실인 네마니치 왕조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그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라자르는 그를 세르비아 국왕으로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세르비아 공 칭호를 사용하는 걸 인정받았으며, 자기가 가진 영지의 지배권 역시 인정받았다.

그 후 라자르는 트브르트코 1세의 비호를 받으며 다른 세르비아 귀족들을 압박했고, 루드니크 산지의 니콜라 조이치와 토플리카 강 계곡의 노박 벨로크비치를 복속시켰다. 1379년, 라자르는 헝가리의 가신을 칭하던 라스티슬라치치 가문으로부터 쿠체포와 브라니체포를 공략하고, 해당 지역의 영주로서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제 라자르의 영토는 옛 세르비아 제국 영토에 있는 다른 영주들보다 거대했으며, 군대와 행정망이 잘 조직되었다. 그는 수도를 크루셰바츠로 정했으며, 모라바 강 계곡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다뉴브 강과 사바 강, 북서쪽으로 드리나 강을 따라 이어진 영역을 지배했다. 여기에 니시와 우지체 등 주요 도시와 세르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광산 중심지인 노보 브르도와 루드니크를 지배했다.

또한, 라자르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는 지역에서 도망친 정교회 수도사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으며, 이전에 사람들이 살지 않아 경작되지 않았던 모라비아 일대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해 이주민들을 그곳에 정착하도록 했다. 그리고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의 황제 즉위 이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페치의 세르비아 총대주교간의 분열을 치유하고 화해하고자 노력했다. 1375년 4월 세르비아 초대주교 사바 4세가 사망하자, 그해 10월 라자르는 페치에서 세르비아 교회 공의회를 소집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대해 온건적인 성향의 제프렘을 선출하도록 유도했다. 그 후 두 총대주교청은 과거의 앙금을 씻고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라자르는 이외에도 1381년 라비니차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로 삼은 크루셰바츠에 성 스테판 교회를 세우는 등 교회 후원에 힘썼다.

이렇듯 라자르는 트브르트코 1세의 비호 아래 갈수록 위세를 떨쳤지만, 제타 공국을 세운 발시치 가문, 코소보의 부크 브란코비치, 마케도니아 서부의 마르코 므르냐체비치, 마케도니아 일대의 콘스탄틴 드라가시, 라도슬라프 흘라펜 등은 라자르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중에서 마르코 므르냐체비치와 콘스탄틴 드라가시, 라도슬라프 흘라펜은 오스만 제국의 가신이 되었다. 1388년에는 제타 공작 주라지 스트라미로비치 발시치도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위협도 점점 거세졌다. 1381년, 가신들의 영토를 방해받지 않고 통과하던 튀르크 약탈대가 모라비아 세르비아에 침입했다. 이에 라자르의 가신인 크렙 부코슬라비치와 비토미르가 파라친 시 인근의 두브라브니차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1386년, 오스만 술탄 무라트 1세가 훨씬 많은 군대를 이끌고 니시를 탈취했다. 이에 라자르는 니시 남서쪽에 있는 폴로치니크에서 무라트 1세와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다.

라자르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거세지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결혼 동맹을 추진했다. 1386년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이반 시슈만과 자기 딸 드라가나를 결혼시켰으며, 1387년 3월 헝가리 왕국 크로아트 왕국 국왕 자그문트와 동맹을 맺고 딸 테오도라를 자그문트의 핵심 추종자인 가라이 미클로시와 결혼시켰다. 여기에 부크 브란코비치와 군사 동맹을 맺었고, 트브르트코 1세로부터 군사 원조를 약속받았다. 이윽고 1389년 6월, 무라트 1세가 이끄는 27,000 ~ 30,000가량의 오스만군이 부크 브란코비치의 영토인 프리슈티나 인근 코소보 평원에 이르렀다. 라자르는 이 소식을 접하자 즉각 군대를 일으켜 부크 브란코비치와 합세했고, 트브르트코 1세도 원군을 파견했다. 여러 연대기는 오스만군에 맞선 라자르, 부크, 트브르트코 1세 연합군의 규모를 최소 12,000명, 최대 30,000명으로 추산한다.

1389년 6월 15일, 1차 코소보 전투가 발발했다. 양자는 이 전투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라자르와 무라트 1세 모두 목숨을 잃었다.[2] 전투 자체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라자르가 이끌던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은 이 전투로 잃은 병력을 복구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여기에 전투 5개월 후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가 북쪽 영토를 무력으로 탈취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르비아 공으로 선임된 스테판 라자레비치와 섭정 밀리카는 헝가리 왕국에 대한 충성 서약을 파기하고 오스만 제국의 가신이 되었다.

3. 사후

라자르의 유해는 부크 브란코비치 영지 수도인 프리슈티나에 있는 승천 교회에 안장되었다가 1390년 또는 1391년에 라바니차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그는 세르비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6월 15일로 정해졌다. 그의 유물은 1941년까지 브르드니크-라바니차 수도원에 보관되었다가, 나치 독일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기 직전인 1941년 4월 프루스카 고라 산에 있는 베세노보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이후 프루스카 고라에 있는 라자르의 유물이 나치 독일군에 맞서 싸우는 공산 게릴라 부대에게 위협받자, 세르비아 총대주교구는 1942년 4월 14일 독일 점령 당국의 허가를 받고 라자르의 유해가 담긴 유물함을 베세노보에서 베오그라드 대성당으로 옮겨 성당의 성상벽 앞에 안치되었다. 1954년, 세르비아 정교회 공의회는 라자르의 유물을 라바니차 수도원으로 반환하기로 결정했지만, 실제 시행은 코소보 전투 600주년인 1989년에 이뤄졌다.

4. 가족

  • 밀리카(1335 ~ 1405): 부칸 2세 네마니치의 아들인 드미타르 네마니치의 손자 브라트코 네마니치의 딸.
    • 스테판 라자레비치(1377 ~ 1427):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1389 ~ 1402), 세르비아 데스포티스(1402 ~ 1427)
    • 부크 라자레비치(1380 ~ 1410): 무사 첼레비의 가신이었으나 1410년 6월 15일 코스미디온 전투 도중에 쉴레이만 첼레비 진영으로 배신한 뒤, 쉴레이만의 후원을 받고 스테판을 축출하려 했다가 무사의 가신에게 격파된 후 체포되어 즉결 처형되었다.
    • 마라 라자레비치(? ~ 1426): 코소보 전체와 몬테네그로 북부, 남부 및 남서부 세르비아 영주 부크 브란코비치의 부인.
    • 드라가나 라자레비치(? ~ 1395년 이전):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이반 시슈만의 왕비.
    • 테오도라 라자레비치(?~ 1405년 이전): 헝가리 귀족 가라이 미클로시의 부인.
    • 옐레나 라자레비치(? ~ 1443): 제타 공작 주라지 2세 발시치와 초혼, 보스니아 대귀족 산달지 흐라니치와 재혼.
    • 올리베라 라자레비치(1372 ~ 1444):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세의 첩실.


[1] 현재 코소보 코소보스카 카메니차 인근 [2] 라자르는 모든 사료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무라트 1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사료마다 다르게 나오기에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