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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반샤그 Boszniai Bánság Бановина Босн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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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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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영역 | |||||
1154 ~ 1377 | |||||
위치 | 보스니아 | ||||
수도 | 보보비츠 | ||||
정치 체제 | 봉건제 | ||||
국가 원수 | 반 | ||||
주요 반 |
보리치(1154~1164) 쿨린(1180~1204)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1314~1353) 트브르트코 1세(1353~1365, 1366~13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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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보스니아 정교회 정교회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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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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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국 | 보스니아 왕국 |
언어별 명칭 | |
세르보크로아트어 | Бановина Босна |
헝가리어 | Boszniai Bánsá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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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세기 중반에서 14세기 중후반까지 보스니아와 그 인근에 존재했던 국가. 국가원수는 반. 보스니아 반샤그의 반이였던 트브르트코 1세가 왕으로 승격되면서 보스니아 반샤그도 보스니아 왕국으로 승격되었다.2. 역사
1136년 보스니아 북부를 점령한 헝가리 국왕 벨러 2세는 '보스니아 공작' 칭호를 신설한 뒤 라슬로 2세에게 이 칭호를 수여했다. 하지만 라슬로 2세에겐 실권이 없었고, 보스니아 현지 귀족들이 헝가리 국왕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대가로 자율적으로 통치했다. 그 중에서 보리치라는 인물이 기록상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반(Ban)이다. 이 인물의 기원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보스니아 출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1162년경, 보리치는 슬라보니아의 성전 기사단에 토지를 기부했다. 이는 보리치의 재산이 슬라보니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사바 강의 브로드 시 인근 그라바즈의 지역 귀족 베리슬라프의 아들이라고 한다. 동로마 제국 역사가 요안니스 키나모스는 보리치가 헝가리 왕국의 가신이었다고 밝혔다. 타지인이었던 그가 어떻게 보스니아의 반이 될 수 있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보리치가 역사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154년이다. 라구사 공화국의 역사가 마우로 오르비니(Mauro Orbini, 1563 ~ 1614)에 따르면, 이해 교황청은 라구사 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보스니아 주교가 라구사 대주교의 관할권에 속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본래 스플리트 대주교의 직접적인 관할하에 있던 보스니아 주교 밀로반은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보리치에게 라구사 응징에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했다. 보리치는 처남 토마쉬 부크미리치(Tomaš Vukmirić)와 함께 출진했으며,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기병대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트레비네에서 미호 보발에비치가 지휘하는 라구사군과 전면전을 치르던 중 토마쉬가 전사하면서 군대의 사기가 급락하자 퇴각했다. 이후 보리치는 트레비네 주교를 통해 라구사 공화국과 협상한 끝에, 보스니아 주교가 라구사 대주교의 관할권에 들어가는 걸인정하고, 라구사에 보상금을 지급하고 화해의 표시로 선물을 가져오는 선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마우로 오르비니의 기록은 교차검증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1154년, 보리치는 분견대를 파견해 헝가리 국왕 게저 2세가 동로마 제국이 통치하는 브라니체보를 포위하는 걸 도왔다. 하지만 얼마 후, 제국 내부에서 헝가리와 호응하기로 약속했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체포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게저 2세는 헝가리로 귀환했다. 동로마 장군 바실리오스 틴트루체스(Basil Tzintziluces)가 헝가리군을 추격했지만 매복에 걸려 섬멸되었다. 1155년 초, 남이탈리아 원정을 막 단행한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헝가리와 쓸데없이 전쟁을 벌일 이유는 없다고 보고 헝가리에 사절을 보내 화해를 제안했고, 게저 2세 역시 받아들였다.
1162년 게저 2세가 사망한 뒤, 이슈트반 3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자국으로 망명한 이슈트반 왕자에게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 새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들게 했다. 보리치는 이슈트반 왕자의 편에 섰고, 이슈트반 왕자는 이슈트반 3세를 몰아내고 헝가리 왕이 된 뒤 자기를 도와준 걸 보답하고자 슬라보니아 영지를 수여했다. 이후 보리치는 슬라보니아의 성전 기사단에게 에스델 마을과 토지를 기부했다. 그러나 1163년 6월 19일, 이슈트반 3세가 독일 용병들을 이끌고 반격을 가해 세케스페헤르바르에서 이슈트반 4세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이후 이슈트반 3세는 보리치를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독일 용병대장 고드프리트를 파견했다. 1282 ~ 1285년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의 궁정 사제이자 연대기 작가인 케자의 시몬이 저술한 <훈족과 헝가리인의 행적(Gesta Hunnorum et Hungarorum)>에 따르면, 고드프리트는 1164년경 이슈트반 3세의 지시에 따라 보리치를 공격해 물리쳤다고 한다. 이후 보리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그 후 보스니아는 1166년 헝가리 남부를 침공한 마누일 1세의 동로마군에 의해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귀속되었다.
1180년, 보스니아를 지배하던 동로마 제국이 마누일 1세 사후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이때 보스니아의 귀족 대표로 활동하던 쿨린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반(Ban)에 추대되었으며, 이후 헝가리 왕국의 가신이 되었다. 1183년,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냐와 함께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한 헝가리 왕국의 벨러 3세의 지휘 아래 전쟁에 참여했다. 헝가리-세르비아 연합군은 동로마군을 모라바 계곡에서 몰아내고,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라브노, 니시, 소피아를 연이어 공략했다.
그 후 쿨린은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고 국가를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당시 그의 영역은 동쪽의 드리나 강에서 서쪽의 크라예보 강까지, 북쪽의 사바 강에서 남쪽의 네레트바강까지 뻗었으며, 경제는 눈에 띄게 발전했다. 1189년 8월 29일, 쿨린은 라구사 공화국을 상대로 라구사 시민들의 무역 특권을 보장하는 <반 쿨린 헌장>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 보스니아 반 쿨린은 당신과 크르바슈 왕자, 그리고 두브로브니크의 모든 시민이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의 진정한 친구가 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들과 함께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올바른 신뢰를 베풀 것이다. 어떠한 악의도 없이 진정한 신뢰와 마음으로 자유 의지로 나에게 선물을 주는 모든 두브로브니크(라구사) 시민들은 내가 통치하는 지역으로 찾아와서 거래하고,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내 장교들로부터 어떠한 외압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떤 악의도 없이 가능한 한 그들을 도와주겠다. 하느님께서 나와 이 거룩한 이들을 돌봐주길 바란다.
그러던 1199년, 제타 공작 부칸 네마니치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쿨린을 고발했다.
헝가리 왕의 봉국인 보스니아에서 쿨린이 그의 아내와 누이, 친척 몇 명과 함께
이단에 빠졌습니다. 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개종했습니다.
부칸 네마니치가 지적한 이단은 바로 보고밀파로, 세상은 육신과 영혼의 대립 및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이뤄졌다는 영지주의를 신봉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는 미카엘과 사타나엘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미카엘이 나중에 예수가 되었고 물질 세계는 사타나엘이 만들었다고 여겼으며, 하느님이 만든 영적 세계는 선하지만 사타나엘이 만든 육적 세계는 악하므로 금욕을 통해 영적 세계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부칸의 고발을 접한 인노첸시오 3세는 1200년 헝가리 국왕 임레에게 보스니아에 대한 개입을 요청했다.
쿨린은 이 일련의 상황을 전해듣고 장차 십자군이 보스니아에 들이닥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교황청에 즉시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서신에서, 그동안 이단자와 참된 신자를 구별하는 방법을 몰랐다면서, 교황이 보스니아에 특사를 보낸다면 어떤 지시도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다. 인노첸시오 3세는 이를 받아들여 이반 카자마리스를 보스니아로 파견했다. 이반 카자마리스는 라구사 대주교 마린과 함께 1203년 4월초 보스니아에 도착했다. 그는 즉시 쿨린과 기독교 장로, 귀족 및 민중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카자마리스는 장로들과 문답을 주고받은 후, 그들의 믿음이 왜곡되었음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정통 신앙으로 회귀하라고 요구했다. 장로들은 이에 동의했고, 1203년 4월 8일 이단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빌리노폴스카 칙령>에 서명했다. 이 칙령엔 쿨린 본인과 라구사 대주교 마린도 서명했다. 카자마리스는 문제가 깔끔히 해결되었다고 여기고 헝가리로 이동했고, 1203년 6월 교황청에 서신을 보내 보스니아의 이단자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알렸다. 그러나 쿨린과 신하들, 그리고 민중은 십자군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으로 회개한 것일 뿐, 실제로는 보고밀파를 고수했다.
1204년경 반에 선임된 스테판 쿨리니치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실해, 오직 교황청과 헝가리 왕국간의 서신에서만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1216년, 교황청은 보스니아에 보고밀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교황 특사를 파견해 보고밀파를 잠재우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20년대에 프랑스 남부에서 기승을 부리던 카타리파에 대한 십자군이 단행되고 있을 때, 니케타스라는 카타리파 대립교황이 보스니아에 거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니케타스가 실존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헝가리 왕국은 점점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보스니아에 대한 종주권을 되찾기 위해 이 소문을 이용하기로 했다.
1221년, 교황 호노리오 3세는 특사 아콘시오를 보스니아로 파견했다. 아콘시오는 보고밀파가 어린아이들에게 모유 수유를 하면서 이단 교리를 설파한다고 주장했하며 이를 박멸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병사했다. 이후 교황은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에게 군대를 일으켜 보스니아에 만연하는 이단을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단행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언드라시 2세는 헝가리 국내 귀족들간의 대립이 심각했기 때문에 이에 응하지 못했다. 십자군 결성이 지지부진해지는 사이, 보고밀파의 위세는 갈수록 강해져 보스니아 전역에 퍼졌을 뿐만 아니라, 남부 헝가리(현재 크로아티아) 지역, 심지어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까지 퍼졌다.
1225년, 요안니스 앙겔로스[1]는 칼로차 대주교 우그린 차크의 독려에 따라 보고밀파를 응징하기 위한 십자군을 단행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군사활동을 벌이지 않았고, 1227년 새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어서 십자군을 단행하라는 요구를 받았음에도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스테판의 행적은 별로 전해지지 않으나, 아버지와는 달리 가톨릭을 신봉했고 종교재판소가 자국의 영역인 비테즈에 신설되어 수십 명의 보고밀파를 화형시키는 걸 용인해 신망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1232년, 보스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스테판은 축출되었다. 이후 마테이 니노슬라프가 보스니아의 새 반이 되었다.
1234년,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는 보스니아 반샤그의 지배권을 슬라보니아와 크로아티아 공작을 역임 중이던 칼만에게 넘기기로 했다. 여기에 스테판 쿨리니치의 아들인 우소라 공 시비슬라프는 보스니아를 스스로 차지하기 위해 보스니아 변경지역을 침략했다. 1234년 10월 17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보스니아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했고, 1235년 8월 9일 칼만을 보스니아의 합법적인 반으로 인정했다. 마테이 니노슬라프는 임박한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1232년과 1235년 사이에 라구사 공화국에 칙령을 내려 쿨린이 지난날 라구사에 수여한 특권을 보장했다. 또한 1240년 3월 22일 라구사에 칙령을 재발행해,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라구사를 침공할 경우 자신이 라구사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며, 라구사 역시 자신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이 칙령은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1세의 재위 기간인 1249년 3월에 재발행되었다.
보스니아 십자군은 1235년부터 작전을 개시했다. 보스니아 전역을 지배하던 보고밀파 신도들은 마테이의 지휘하에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칼만이 이끄는 십자군이 계속 몰아붙인 끝에 1238년경에 보스니아 동부를 휩쓸었다. 마테이는 통행이 거의 불가능한 산악 지형과 원시림이 펼쳐진 보스니아 서부로 피신했고, 칼만은 그해 4월 26일 교황에게 보고밀파를 파괴해 보스니아가 정화되었다고 보고했다. 그 후 십자군은 칼만의 지휘하에 보스니아 서부를 매번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지만, 보고밀파 신도들의 유격전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었다. 마테이는 1240년 십자군을 피해 일전에 우군으로 삼았던 라구사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상황을 살폈다.
1241년,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를 침공했다. 칼만은 이에 맞서 항전했지만 모히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 헝가리는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파괴되었고, 마테이는 그 틈에 보스니아 대부분을 탈환한 뒤 가톨릭 신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이후 트로기르와 스플리트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자,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에게 반기를 든 스플리트 편을 들었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군주로 추대되었다. 1244년, 벨러 4세에게 충성을 바치는 슬라보니아 반 데니스 투르제가 지휘하는 군대가 스플리트를 공략했고, 또다른 헝가리군이 벨러 4세의 지휘하에 보스니아의 글라스코 시로 진군했다. 하지만 보스니아인들의 저항이 격렬해 공략할 가망이 없자, 1244년 7월 21일 글라스코에서 마테이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마테이는 헝가리의 통치를 명목상으로만 인정하고 자신의 소유물을 슬라보니아에 둘 수 있었다. 다만 가톨릭교회의 조직과 인프라를 인정하고 유지해야 했으며, 가톨릭 신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로 했다.
1247년, 벨러 4세와 헝가리 대주교는 새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보고밀파의 위세가 여전히 강성한 보스니아에 대한 새로운 십자군을 개시하라고 주장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테이는 인노첸시오 4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은 항상 확고한 가톨릭 신자로 남을 것이며, 이단자는 절대로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 직후 보스니아를 방문한 교황특사에 의해 확인되었다. 교황은 1248년에 가톨릭 대주교에게 편지를 써서 니노슬라프가 고귀한 사람이고 가톨릭 신앙에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십자군을 일으키지 않을 테니 보고밀파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회심하도록 잘 설득하라고 권고했다.
1250년 마테이 니노슬라프가 사망한 뒤, 사촌인 프리예즈다 1세가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지원에 힘입어 마테이의 아들들을 밀어내고 보스니아 반이 되었다. 이때 보스니아에 속했던 우솔라와 솔리는 벨러 4세가 선임한 반의 통치를 받았고, 나중에는 마초 반샤그에 복속되었다. 마초 반샤그는 나중에 마초 공국으로 승격되었고, 보스니아 역시 복속했다. 프리예즈다 1세는 보스니아 반으로 부임한 후 보고밀파를 토벌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교황청은 도미니코회에 프리예즈다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이 분명하니 아들을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1253년 11월, 벨러 4세는 그가 보고밀파를 상대로 활약한 것을 기려 "Fidelis Noster"(우리의 충실한 사람들)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고르니 미홀작 인근의 보스니아 외부 지역을 수여했다. 1254년, 벨러 4세는 세르비아 왕국을 공격해 자훔리예를 공략한 후 프리예즈다 1세에게 수여했지만, 허아길와 세르비아 사이에 평화 협약이 체결된 뒤 도로 세르비아에 넘어갔다. 1260년, 프리예즈다 1세는 보헤미아 국왕에 맞서는 벨러 4세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1270년 프리예즈다 1세를 든든하게 지원해주던 벨러 4세가 사망한 뒤 헝가리에서 내란이 일면서, 프리에즈다 1세의 권력은 쇠퇴했다. 헝가리의 재무관인 우그린 챠크를 포함한 여러 헝가리 귀족이 보스니아를 자기들 직함에 넣었으며, 보스니아의 일부 귀족은 프리예즈다를 능가하는 영향력과 위신을 가졌다고 한다. 1284년, 프리예즈다 1세는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의 딸인 젤리사베타와 차남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를 결혼시킴으로써, 세르비아의 협력을 받아 이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1287년 프리예즈다 1세가 사망한 뒤, 두 아들 프리예즈다 2세,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가 공동 반에 선임되었고, 보스니아를 절반으로 나누어 분할 통치했다. 1290년 프리예즈다 2세가 사망한 뒤,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가 단독 반이 되었다. 1290년,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후 라슬로 4세의 사촌인 언드라시 3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라슬로 4세의 누이이자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의 왕비인 마리아는 자기 아들인 카로이 마르텔을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려 했다. 헝가리의 가신이자 보스니아의 명목상 주권자인 크로아티아 반 팔 1세 수비치는 카로이 로베르트의 편을 들었고, 스테판 1세 역시 이에 따랐다. 그러나 카로이 마르텔은 1295년 헝가리에서 권력을 잡기 위한 원정을 벌이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마리아는 카로이 마르텔의 아들이자 손자인 카로이 로베르트를 새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1299년, 크로아티아 반 팔 1세 수비치는 자신을 보스니아의 도미누스로 선포하고, 남동생인 믈라덴 1세 수비치에게 보스니아 반 칭호를 수여했다. 스테판 1세는 보스니아에서 수비치 가문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저항했지만, 장인인 스테판 드라구틴은 형제이자 세르비아 공동 국왕인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과 내전을 치르고 있었기에 그에게 지원을 보내지 못했다. 그래서 스테판 1세는 1302년까지 대부분의 영역을 믈라덴 1세에게 빼앗겼지만, 산악지대에 틀어박혀 버텼다. 이후 믈라덴 1세가 교황청의 지지를 확고히 받기 위해 보스니아에 여전히 강성하던 보고밀파를 대대적으로 박해하자, 보고밀파는 이에 맞서 스테판 1세 편에 섰다.
1304년 믈라덴 1세가 보스니아에서 파타네리족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뒤, 팔 1세 수비치는 장남인 믈라덴 2세 수비치를 보스니아의 새 반으로 옹립하고 1305년에 자신을 전 보스니아의 군주로 선포했다. 이후 양자간의 전쟁이 간혈적으로 벌어졌지만 별다른 승패를 가리지 못하다가 1312년 슈바치 팔이 사망하면서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스테판 1세 역시 빼앗긴 영토를 되찾지 못하다가 1314년에 사망했다. 이후 반에 선임된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는 아직 어렸기에 어머니 엘리자베타의 섭정을 받았지만, 1314년 말 믈라덴 2세 수비치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어머니 엘리자베타와 함께 두브로브니크로 망명했다.
이제 보스니아 대부분은 수비치 가문의 지배를 받았지만, 보스니아에서 강력한 입지를 다진 보고밀파를 신봉하는 귀족 및 민중들은 여전히 스테판 2세를 적법한 후계자로 여기고 수비치 가문에 항전했다. 믈라덴 2세는 보스니아를 안정시키려면 스테판 2세와 타협할 필요성이 있다고 인지했다. 그는 스테판 2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고, 카란티아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던 오르텐부르크 백작 마인하르트의 딸들 중 한 사람과 스테판 2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교황청은 스테판 2세가 이단인 보고밀파 신도일 가능성이 있다며 결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지만, 믈라덴 2세의 연이은 설득에 결국 1319년 결혼을 허락하기로 했다.
스테판 2세는 초기엔 믈라덴 2세의 화해 제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믈라덴 2세가 보스니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대신 믈라덴 2세를 주권자로 받드는 것도 동의했다. 하지만 믈라덴 2세는 여전히 보스니아의 반을 칭하는 등 기회만 되면 보스니아를 직접 통치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스테판 2세는 이런 믈라덴 2세의 영향력을 배제하지 않으면 보스니아에서 실권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러던 1321년 말, 크로아티아에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 믈라덴 2세를 배제하길 원한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의 지시에 따라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국경에 군대를 집결했다. 1322년 카로이 로베르트와 믈라덴 2세와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카로이 로베르트 편에 참전했다. 믈라덴 2세가 전쟁에서 패한 뒤 카로이 로베르트에게 체포되어 헝가리로 끌려간 후, 스테판 2세는 체티나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 이르는 달마티아 해안 도시들과 보스니아 전역을 영지로 수여받았다.
1322년, 스테판 드라구틴의 아들이며 스렘의 왕이었지만, 부친이 사망한 뒤 삼촌인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밀루틴과 밀루틴의 아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의 내전이 벌어진 틈을 타 탈옥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스렘으로 돌아간 뒤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세르비아의 왕이라고 선언하고 주화를 주조했다. 스테판 2세는 불가리아 국왕 미하일 아센 3세,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와 함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에 대항했다. 하지만 전세가 데찬스키 쪽으로 기울자 블라디슬라프에 대한 지원을 끊고 1324년 세르비아 북부 지역인 우소라와 솔리를 빼앗았다. 이후 볼레슬라프가 헝가리 왕국으로 축출된 뒤, 스렘 왕국 일부를 획득했다. 한편, 스테판 2세는 보스니아 귀족들의 지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수많은 특권을 줬는데, 특히 여러 귀족에게 주파(župa: 교구)를 하사했다. 또한 1326년 형제인 블라디슬라프를 보스니아 대공에 선임했으며, 자신과 통치권을 공유한다고 밝혔다. 다만 실제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건 어디까지나 스테판 2세뿐이었다.
1323년, 크로아티아의 넬리피치 가문이 이반 넬리피치의 주도하에 헝가리로부터의 독립을 꾀하며 반기를 들었다. 이에 카로이 로베르트는 스테판 2세에게 슬라보니아 반 니콜라 오모디예프에게 가담해 넬리피치 가문에 대한 합동 공세를 벌이라고 지시했다. 스테판 2세는 지원군을 보냈지만, 니콜라 오모디예프의 원정은 실패했다. 1324년 여름, 오미슈, 닌, 클리스 영주인 죄르지 2세 수비치가 카로이 로베르트의 지시에 따라 군대를 일으켜 이반 넬리피치와 대결했을 때, 그는 죄르지 2세를 지원했다. 그러나 죄르지 2세는 크닌 인근에서 참패한 뒤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반 넬리피치는 뒤이어 보스니아를 침공해 비수차 시를 공략했지만, 보스니아 귀족 부크 부코슬라비치가 반격해 비수차 시를 탈환했다. 그 후 스테판 2세는 넬리피치 가문의 원정을 지원한 트로기르 시 주변 일대를 습격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고, 트로기르 시민들은 1326년에 그를 "보스니아, 우소라, 솔리, 훔 및 기타 여러 지역의 통치자이자 주인인 위대하고 강력한 군주"로 떠받들겠다는 내용의 평화 협약에 서명해야 했다.
1325년, 카로이 로베르트는 넬리피치 가문을 상대로 고전하는 니콜라 오모디예프를 경질하고 미카크 미할예비치를 슬라보니아의 새 반으로 선임했다. 미카크는 그해 여름 크로아티아로 진군했고, 스테판 2세는 이를 돕기 위해 여러 함대를 파견했다. 1326년, 미카크는 여러 도시를 공략한 뒤 크로아티아로 더 깊이 진군해 스테판 2세의 지원군과 합세했다. 그러나 넬리피치 가문이 강력한 수비 위치를 선점하고 농성하는 걸 뚫지 못하다가 군대 일부를 미하치로 보내 넬리피치 가문의 반격을 저지하게 한 뒤 헝가리로 후퇴했다. 스테판 2세는 미카크의 원정을 도우면서 체티나 강과 네레트바 강 어귀 사이의 영토를 홥병해, 보스니아 반샤그의 영역은 아드리아해 연안까지 확장했으며, 리반스코, 두반스코, 글라모치코 등 카르스트 폴레 지역을 합병했다. 이후 이 지역은 자파드네 스트라네(Zapadne Strane, 서쪽 지역)로 일컬어졌다. 1326년, 스테판 2세는 라구사 공화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세르비아를 공격해 자후믈례를 공략하고 네레트바 강 하구에서 코나블레까지 이르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더 넓은 지역을 확보했으며, 이모츠키, 리브노, 두브노, 글라모치, 그라호브 시와 요새도 공략했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과거에 자후믈례 일대를 지배하는 브라니보예비치 가문이 자기가 선임한 총독들을 공격해 살해한 것에 원한을 품었기에, 스테판 2세가 자후믈례를 휩쓰는 걸 방관했다. 하지만 스테판 2세가 자후믈례를 공략하고 브라니보예비치 가문의 구성인 2명을 살해하고 브란코 브라니보예비치가 세르비아로 망명한 뒤 도움을 요청하자, 스테판 2세와 세르비아와의 긴장 관계가 고조되었다. 1329년, 스테판 2세는 세르비아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트레비네와 코나블리를 공격했다. 그러나 프리보이 부근에서 데찬스키의 아들인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이끄는 군대의 습격으로 참패했다. 스테판 2세는 전투 도중 말이 죽는 바람에 낙마했고, 가신인 부크 부코슬라비치가 말을 건네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부코 슬라비치는 스테판 2세를 대신해 세르비아군에 맞서 항전했지만 끝내 전사했다. 자후믈례인들은 대부분 스테판 2세의 통치를 받아들였지만, 페타르 톨예노비치만은 달랐다. 그는 자후믈례의 수도인 포포보에 군림하며 스테판 2세에 항전했고, 공략한 영토를 세르비아에 반환했다. 이에 스테판 2세는 토벌대를 보내 그를 격파하고 생포한 뒤, 족쇄에 채운 후 말과 함께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한편, 교황청은 보스니아에서 보고밀파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파비안을 슬라보니아의 심문관으로 임명해 보스니아에서 이단을 근절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교황청은 보스니아의 주권자인 헝가리 국왕에게 보스니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다. 1337년, 크로아티아의 실권자 이반 넬리피치는 교황청에 서신을 보내 과거에 보스니아가 크로아티아 통치자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며, 자기를 보스니아의 주권자로 인정해준다면 이단을 타도하겠다고 제안해 승인을 얻어냈다. 스테판 2세는 이에 대응해 1338년 동생 블라디슬라프와 믈라덴 3세 수비치의 자매인 옐레나 수비치의 결혼을 주선해, 넬리피치 가문과의 전쟁에서 수비치 가문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여기에 믈라덴 3세 수비치의 아내는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의 자매인 옐레나 네마니치였기 때문에, 코트로마니치, 수비치, 네마니치 가문의 동맹이 결성되었다.
1339년,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제라르가 보스니아 반샤그를 방문해 보고밀파에 대한 기소를 하는 것을 놓고 스테판 2세와 협상했다. 스테판 2세는 이단을 타도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약속했고, 교황청은 이를 믿어보기로 하고 1340년 2월 그를 충성스러운 가톨릭 신자로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그 후 가톨릭교회는 1340~43년 보스니아 전역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가톨릭 수도자들은 우소라와 훔에 여러 수도원을 건설했고, 라구사 공화국의 스톤으로 가는 길을 지나던 많은 보고밀파 신도들에게 세례성사를 주었다.
1342년 카로이 로베르트 왕이 사망한 뒤 미성년자인 러요시 1세가 헝가리의 새 국왕이 되었다. 스테판 2세는 이때를 틈타 보스니아를 헝가리로부터 독립시키고 보스니아 국왕이 되기로 마음먹고, 1343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 이반 넬리피치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과 넬리피치 가문간의 갈등이 벌어졌기 때문에 견고한 동맹이 형성되지 못했다. 1344년 이반 넬리피치가 사망한 뒤, 그의 미망인 블라디슬라바 쿠르자코비치가 어린 아들 이반의 이름으로 남편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1345년 6월, 러요시 1세가 크로아티아로 진군하자, 블라디슬라바는 도저히 대적할 도리가 없다고 여기고 항복했다. 다른 크로아티아 귀족들도 러요시가 크로아티아에 있는 동안 앞다투어 귀순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스테판 2세는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려던 마음을 접고, 자다르가 러요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베네치아 총독을 몰아내는 걸 도왔다.
이후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자후믈례 일대를 돌려달라고 끊임없이 주장하자, 스테판 2세는 네레트바 강 어귀에 요새를 대거 건설해 그의 침략에 대비했고, 두샨이 발칸반도 남부 일대를 공략하는 데 관심이 쏠린 틈을 타 1349년 약탈부대를 파견해 코나블레와 트라브니야를 황폐화했다. 이에 격노한 두샨은 1350년 군대를 소집해 보스니아를 침략할 준비를 했다. 스테판 2세는 정면 대결로는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두샨을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적을 험준한 지역으로 유인한 뒤 습격해 무너뜨리기로 했다. 그러나 두샨은 적군의 유인책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고 보스니아 지역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대거 끌어들였고, 스테판 2세는 보보바츠에 고립되어 세르비아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험준한 지형에 위치한 보보바츠 공략에 애를 먹은 데다, 보스니아인들의 유격 전술에 고전했고 식량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6세가 소규모 병력을 일으켜 칼키데스 반도를 점령한 뒤 베리아와 보덴을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두샨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스테판 2세는 빼앗겼던 영역을 되찾은 뒤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의했고, 두샨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두샨의 후계자 스테판 우로시 5세와 스테판 2세의 딸 엘리자베타가 결혼하기로 했고, 자후믈례 일대는 지참금으로서 세르비아에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스테판 2세는 약속을 깨고 1353년 6월 엘리자베타를 헝가리 왕 러요시 1세와 결혼시켰다.
그 후 스테판 2세는 나라를 평온하게 이끌었고, 1352년부터 자신을 보스니아의 헤르초크(Herzog)로 칭했다. 그러던 1353년 9월 28일에 사망했다. 당시 그에게는 살아있는 아들이 없었기에, 형제 블라디슬라프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트브르트코 1세가 뒤를 이어 보스니아의 반이 되었다. 당시 트브르트코 1세의 나이가 성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블라디슬라프가 섭정을 맡았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보스니아 각지를 돌며 가신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35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 엘레나가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즉시 두 아들을 데리고 헝가리로 가서 헝가리 국왕이자 보스니아의 주권자인 러요시 1세로부터 트브르트코 1세의 반 계승을 승인받았다. 다만 다만 형제 중 한 명이 보스니아에 있을 때 다른 한 명은 러요시 1세의 궁정에 있어야 하며, 보고밀파를 박해하는 데 힘을 기울이라는 조건이 달렸다. 옐레나는 복귀 후 밀레에서 귀족 의회를 소집한 뒤 자신과 장남이 보스니아 반샤그 전역의 지배자임을 공인받고, 그 대가로 귀족들의 영지와 특권을 확인했다.
1355년 5월, 옐레나와 트브르트코 1세는 수비치 가문이 쇠락하면서 그들의 땅을 놓고 분쟁이 지속되자 군대를 이끌고 두브노로 진군했다. 이후 달마티아 반과 협상한 끝에, 트브르트코 1세의 외할아버지인 죄르지 2세 수비치가 소유했던 모든 도시와 고모 카타리나가 소유한 도시를 상속받는다는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그가 그 도시들을 진짜로 소유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는 트브르트코 1세가 지나치게 강해지길 원하지 않았다. 1357년, 그는 드리예바를 포함한 하부 보스니아 일대와 서부 자후믈례 대부분을 스테판 2세의 딸이자 자기 왕비인 엘리자베타의 지참금으로 내주라고 요구했다. 트브르트코 1세는 감히 러요시 1세를 거역할 수 없어 그 지시에 따랐다. 그 해 7월, 러요시 1세는 트브르트코와 부크를 보스니아와 우소라의 통치자로 확정했지만, 하부 보스니아와 자후믈례는 의도적으로 그들의 직함에서 제외했다.
그 후 수년간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던 트브르트코 1세는 1363년경 헝가리 출신의 보스니아 주교 페테르 시클로시와 결등을 벌였다. 페테르 시클로시는 1365년 1월 보스니아 주교에 부임한 이래 보고밀파를 보스니아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가톨릭이 확고히 자리잡게 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트브르트코 1세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겨우 잠잠해졌던 가톨릭과 보고밀파의 갈등이 재개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급기야 페테르가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 보고밀파에 대한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키자고 주장하자, 트브르트코 1세는 그가 외국군을 끌여들어 자신의 권력을 박탈하려 든다고 여겨 강한 적대감을 품었다. 트브르트코 1세는 페테르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지만, 페테르에게 고용된 독서가에게 보낸 편지가 발각되면서 실패했다.
1363년, 러요시 1세는 페테르의 종용에 따라 보스니아 이단자들을 근절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4월에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고, 5월에는 라구사 공화국 관리들에게 보스니아에 전쟁이 터질 예정이니 상인들더러 보스니아를 떠나도록 종용하게 했다. 그 후 러요시 1세가 친히 이끄는 헝가리군이 하부 보스니아를 침공했고, 한달 후에는 헝가리의 팔라티노인 콘트 미클로시(Kont Miklós)와 에스테르곰 대주교인 아파티 미클로시(Apáti Miklós)가 이끄는 군대가 우소라를 공격했다. 블라트코 부코슬라비치를 비롯한 여러 보스니아 귀족은 러요시 1세에게 항복해 클류치 요새를 넘겼지만, 부카츠 흐바티니치는 플라바 영지에 있는소코 그라드 요새에서 농성해 헝가리군을 돌려보냈다. 여기에 스레브네크 요새는 러요시 1세의 공세에 용감하게 저항해 격퇴했다. 기록에 따르면, 러요시 1세는 이때 인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러요시 1세는 공세를 중단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러요시 1세가 철수한 후 보스니아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1365년 하반기, 베네치아 공화국과 라구사 공화국은 트브르트코 1세의 가신들이 스테판 2세가 맺었던 자유 통행 조약을 무시하고 상인들을 혹독하게 대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1366년 2월, 보스니아 귀족들이 트브르트코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트브르트코 1세와 엘레나를 축출하고 동생 부크 코트로마니치를 보스니아 반에 옹립했다. 부크가 귀족들에 의해 억지로 추대되었는지, 반란을 주도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이후의 전개를 보면 반란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트브르트코 1세는 어머니와 함께 헝가리 왕실에 귀순한 뒤 헝가리의 종주권을 철저히 받들겠다고 약속한 뒤, 러요시 1세의 지원을 받고 1366년 3월 보스니아로 돌아왔다. 부크는 이에 맞서 싸워 1년간 버텼다. 그러나 보스니아의 강력한 귀족 집안인 산코비치 가문이 트브르트코 1세로 이탈하면서 전세가 불리해지다가, 결국 1367년 말에 수도 보보바츠를 상실하고 추방되었다. 그 후 부크는 교황 우르바노 5세에게 찾아가서 보고밀파 박해에 전력을 기울일 테니 트브르트코 1세를 몰아내고 자기가 보스니아 반이 되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러요시 1세가 트브르트코 1세를 옹호하자 교황청이 개입을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1374년 트브르트코 1세는 불가리아의 도로테아와 결혼한 뒤 부크와 화해했고, 그를 보스니아의 주니어 반으로 선임해 자신의 통치를 돕도록 했다.
1371년,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세르비아 제국이 붕괴되었다. 그 후 세르비아는 여러 공국으로 나뉘었는데, 트브르트코 1세는 모라비아 일대를 통치한 세르비아 영주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반면, 루드니크, 폴리믈리예, 상부 포드리나 일부, 자후믈례 동부 일부, 트레비네, 코나블레 교구 및 라구사 공화국과 접경하는 영지를 관리하는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와 갈등을 벌였다. 니콜라는 트브르트코 1세와 부크가 내전을 치렀을 때 부크를 지원했고, 라자르로부터 루드니크를 탈취했다. 여기에 프리즈렌을 공략하고 장차 세르비아의 새 군주가 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이에 트브르트코 1세와 라자르는 서로 동맹을 맺고 니콜라를 공동으로 대적하기로 했고,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도 두 사람을 지원했다.
1373년 가을, 트브르트코 1세는 헝가리 기병 1,000명을 지원받은 뒤 라자르와 함께 공세를 개시해 니콜라를 격파하고 그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후 두 사람은 니콜라의 옛 영지를 나눠가졌는데, 보스니아는 프드리나, 폴리믈리예, 자후믈례 상부 지역을 확보했다. 한편, 제타 공국의 발시치 가문은 트브르트코 1세와 니콜라가 전쟁을 벌인 틈을 타 트레비네, 코나블레, 드라체비차를 점령해, 보스니아와 국경을 접했다. 그 후 양측간의 국경 분쟁이 이어졌고, 트브르트코 1세는 1377년 초 트레비나, 코나블레, 드라체비차를 급습해 공략했다. 이에 분노한 주라지 1세 발시치(Đurađ I Balšić)는 보스니아를 침공해 네베신예를 약탈했다. 하지만 주라지 1세가 1378년 1월 13일에 급사한 뒤, 제타 공국은 이웃 공국들의 공세로 영역을 상당수 잃었다. 트브르트코 1세는 이 때를 틈타 1377년에 공략한 영토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졌고, 자신이 확보했던 영토와 보스니아 사이의 해안 지대 역시 합병했다. 이리하여 보스니아는 코토르와 라구사 사이의 아드리아 해안지대의 주인이 되었다. 이러한 정복 과정에서, 트브르트코 1세가 점령한 세르비아 영토에 살던 정교회 신자, 사제, 수도자들이 보스니아에 대거 편입되었다.
1377년 가을, 트브르트코 1세는 자신이 세르비아의 상당 부분을 확보했으며, 친할머니 엘리자베타가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의 딸인 걸 근거로 삼아, 자신이 세르비아의 왕실인 네마니치 왕조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그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보스니아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3. 역대 통치자 목록
보스니아 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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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치 | 쿨린 | 스테판 쿨리니치 | 마테이 니노슬라프 | 프리예즈다 1세 |
프리예즈다 2세 |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 | 믈라덴 1세 수비치 | 믈라덴 2세 수비치 |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 | |
트브르트코 1세 | 부크 코트로마니치 | 트브르트코 1세 | }}}}}}}}} |
- 보리치(1154 ~ 1164)
- 쿨린(1180 ~ 1204)
- 스테판 쿨리니치(1204 ~ 1232)
- 마테이 니노슬라프(1232 ~ 1250)
- 프리예즈다 1세(1250 ~ 1287)
- 프리예즈다 2세(1287 ~ 1290)
-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1287 ~ 1314)
- 믈라덴 1세 수비치(1299 ~ 1304)
- 믈라덴 2세 수비치(1304 ~ 1322)
-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1314 ~ 1353)
- 트브르트코 1세(1353 ~ 1366)
- 부크 코트로마니치(1366 ~ 1367)
- 트브르트코 1세(1367 ~ 1377): 1377년 10월부터 보스니아 왕국의 국왕을 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