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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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D7585> 코트로마니치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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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토마셰비치 | }}}}}}}}} |
<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제3대 여왕 {{{#fff {{{+1 옐레나 그루바}}} }}} {{{#fff Jelena Gru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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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1399년 3월 18일 이후 (향년 불명) |
보스니아 왕국 | |
재위 | 보스니아 왕비 |
1391년 ~ 1395년 | |
보스니아 여왕 | |
1395년 9월 ~ 1398년 5월 | |
배우자 | 스테판 다비샤 |
자녀 | 스타나 코트로마니치 |
가문 | 코트로마니치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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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스니아 왕국 제3대 여왕.2. 생애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학자들은 자클루미야[1] 출신의 니콜리치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392년 7월 17일자 루슈치 헌장이다. 보스니아 제2대 국왕 스테판 다비샤는 이 헌장에서 옐레나를 왕비로 지칭하고, 그녀가 자신이 루슈치 수도원에 토지를 기부하는 걸 지지했다고 밝혔다. 니콜리치 가문은 다비샤의 치세인 1393년 라구사 공화국으로부터 스톤의 공무를 징수할 권리를 얻었다. 그녀는 다비샤와의 사이에서 외동딸 스타나를 낳았다. 스타나는 다비샤가 살아있는 동안 보스니아 귀족 유라즈 라디보예비치와 결혼했다.1394년, 스테판 다비샤는 달마티아 대귀족이었던 이반 호르발트를 쳐부수고 도보르 시를 파괴한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에게 위협을 느꼈다. 그는 곧장 도보르 시 인근 진영에서 지기스문트를 찾아가, 그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고 충성을 서약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를 넘기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더해, 지기스문트를 자신의 주권자이자 보스니아 왕좌의 지명 상속인으로 인정했다. 그가 이토록 가혹한 조건에 동의한 계기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 대가로, 지기스문트는 다비샤를 헝가리의 최고위 관리에 포함하고 소모기의 백작에 선임했다.
하지만 1395년 9월 8일 다비샤가 사망한 뒤, 보스니아 대귀족인 흐르보예 부크비치 흐르바티니치 대공, 파블레 라디노비치, 산달지 흐라니치, 유라즈 라디보예비치는 지기스문트를 왕으로 세우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의회를 소집한 뒤 옐레나를 여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지기스문트는 보스니아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시르미아 인근으로 진군했지만, 보스니아 귀족들이 군대를 소집하여 맞대응하려 하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급했기에 물러나기로 했다. 그 후 지기스문트는 1396년 9월 25일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했고, 이 때문에 보스니아에 대한 별다른 압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옐레나는 의회와 귀족 대표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통치했다. 옐레나의 치세에 반포된 헌장에서, 그녀는 자기와 상의한 귀족으로 흐르보예 부크비치 흐르바티니치, 파블레 라디노비치, 산달지 흐라니치, 바탈로 산티치 등을 언급했다. 그러나 라구사 공화국은 그녀가 보스니아와 라구사 간의 기존 협정에 서명하는 전제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며 공물을 보내길 거부했다. 이에 라구사 출신의 보스니아 재무관 조레 복시치(Žore Bokšić)가 중재에 나섰고, 라구사 공화국은 1397년에 비로소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보냈다. 보스니아 대귀족들은 그녀의 집권기 동안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왕권은 쇠락하고 보스니아 왕국이 여러 대귀족의 영역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398년 1월, 오스만 제국군이 봉신인 세르비아 영주 스테판 라자레비치와 함께 보스니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과 폭설로 인해 많은 병사가 얼어죽자, 그들은 보스니아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그해 5월, 여왕의 집권에 대한 외세의 압력이 심해지고, 통치력이 없는 그녀 때문에 행정이 잘 돌아가지 않는 것에 부담을 느낀 귀족들은 그녀를 퇴위시키고 스테판 다비샤의 친척인 스테판 오스토야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녀의 친족들은 퇴위에 반대했다가 라구사로 피난가야 했지만, 그녀는 보스니아에 남아서 왕대비로서 영예를 받았다. 그러나 "신의 은총으로 라구사, 보스니아 등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이름은 1399년 3월 18일 라구사에서 보낸 편지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되었고, 이후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그녀가 수녀원으로 보내졌고, 1399년 자후믈례를 덮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