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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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제9대 반 {{{#fff {{{+1 믈라덴 2세 수비치}}} }}} {{{#fff Mladen II Šubi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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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70년 |
사망 | 1340년 (향년 69~70세) |
재위 | 보스니아 반 |
1304년 ~ 1322년 | |
크로아트 왕국의 반 | |
1312년 ~ 1322년 | |
아버지 | 팔 1세 수비치 |
형제 | 죄르기 2세 수비치, 그르구르 5세 수비치, 팔 2세 수비치 |
아내 | 앨린 |
가문 | 수비치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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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 등장하는 보스니아 반샤그 제9대 반(Ban), 크로아트 왕국의 반.2. 행적
1270년경 브리비르 백작, 크로아티아 반, 보스니아의 도미누스인 팔 1세 수비치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스플리트 백작을 역임한 죄르기 2세, 세베니차 백작을 역임한 그르구르 5세, 트라우 백작을 역임한 팔 2세가 있었다. 수비치 가문은 헝가리 왕국의 크로아티아계 봉신으로, 벨레비트 산맥 남쪽의 거의 모든 해안 도시를 통제해, 크로아티아 내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는 1303년 스카르도나의 백작으로 언급되었고, 1304년에는 훔의 영주로 언급되었다.1304년 숙부인 믈라덴 1세 수비치가 보스니아 반을 역임하던 중 파타네리족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아버지 팔 1세 수비치는 그를 새 반으로 추대하고 군대를 이끌고 보스니아를 침공하여 1305년 2월 수비치 가문의 권력을 회복했고, 자신을 전 보스니아의 군주로 선포했다. 그는 아버지의 지원을 받으며 보스니아 산악지대에서 농성하는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으며, 자다르를 놓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대결하는 아버지를 도왔다. 1311년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가 베네치아군이 점거하던 자다르를 탈환한 뒤 그를 자다르 백작에 선임했다.
1312년 5월 1일, 아버지 팔 1세 수비치가 사망했다. 그 후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크로아티아의 반이 되었고,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자후믈레 및 달마티아 해안 도시들을 지배했다. 당시 헝가리 국왕이었던 카로이 로베르트는 헝가리 대귀족들을 제압하느라 바빠서 크로아티아 일대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믈라덴 2세는 스크라딘에 본부를 두고 광대한 영토에서 사실상 무제한의 권력을 누렸다. 1313년 9월, 믈라덴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자다르 공작이라는 칭호를 포기하는 대신 자다르의 시민권을 유지했고,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조건으로 자다르를 베네치아에 반환했다. 그는 이를 통해 베네치아와 화해하고 영지를 안정적으로 이끌려 했다.
1315년 봄, 트로기르 시의 수장이자 포테스타인 마테이 조리가 안드레아스 가문과 무력 충돌을 벌인 끝에 그들을 추방했다. 믈라덴 2세는 안드레아스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기에,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트로기르 시 코뮌에 "도시에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쓸 수 있는 백지수표와 인질 40명을 넘겨라"고 요구했지만, 코뮌은 거부했다. 그들은 믈라덴 2세가 침략할 것을 우려해 성벽 밖에 있는 수도원을 파괴하여 도시에 대한 군사 기지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로 했다. 하지만 믈라덴 2세는 침공하는 대신 도시에 큰 벌금을 부여하는 것으로 끝냈고, 마테이가 지위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마테이가 더 많은 권력을 얻으려고 믈라덴 2세의 궁정 구성원드과 접촉한 사실이 발각되자, 믈라덴 2세는 1317년 마테이를 축출하고 1318년 트로가르 시와 마테이의 지지자들에게 추가적인 제재를 가했다.
1316~1317년 겨울 넬리피치 백작과 쿠르야코비치 백작이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다. 믈라덴 2세는 그들에게 벌금을 부과한 것 외에는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1316년 3월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이 사망한 것을 틈타 우소라와 솔리를 공략했다. 이에 세르비아군이 보복으로 스톤을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1318년, 믈라덴 2세는 라틴 제국의 명목상 황제이자 아내 앨린의 사촌인 타란토 공 필리프 1세[1]의 십자군에 가담해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과 대결했다. 그러나 전황이 갈수록 불리해지자, 남동생 죄르기 2세를 인질로 보내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믈라덴 2세는 보스니아를 안정시키기 위해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의 뒤를 이어 반을 칭한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스테판 2세와 오르텐부르크 백작 마인하르트의 딸 중 한 명과의 결혼을 주선했다. 또한 보스니아에서 보고밀파가 여전히 강성한 것을 고려해 관대한 입장을 취했는데, 이 때문에 교황청과 갈등을 빚었다.
1319년 시베니크 시가 믈라덴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시베니크 코민은 베네치아 공화국에 구원을 청했지만, 베네치아가 미처 개입하기 전에 반란이 진압되었다. 믈라덴 2세는 시베니크 귀족이자 반란 지도자인 코자 일리야를 투옥해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1321/1322년 시베니크가 두 번째 반란을 일으켰고, 트로기르 시도 이에 가담했다. 믈라덴 2세는 시베니크 주변을 약탈한 뒤 시베니크 시를 포위했으며, 코자의 형제들을 성벽 앞으로 데려와서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조리 처형했다.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이에 반감을 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심지어 그의 막내 동생인 팔 2세 수비치 마저 반란에 가담했다. 1322년 3월, 시베니크 시는 베네치아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베네치아 함대가 즉시 파견되어 믈라덴 2세의 보복을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도시에 주둔했다. 트로기르 역시 카로이 로베르트에게 믈라덴 2세의 폭정을 고발했으며, 여차파면 베네치아를 주권자로 받들려 했다.
상황이 이처럼 급박해지자, 믈라덴 2세는 크로아티아 귀족 회의를 열어서 갈등을 풀려 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때마침 헝가리 대귀족들을 모조리 제압하여 왕권을 다진 카로이 로베르트는 크로아티아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전해듣고, 이 기회를 틈타 크로아티아에도 왕권을 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카로이 로베르트는 믈라덴의 폭정을 규탄하면서, 새로운 크로아티아 반으로 이반 바보니치를 선임하겠다고 선언했다. 믈라덴 2세는 이에 맞서 카로이 로베르트가 파견한 헝가리군과 맞섰지만 시베니크와 클리스 요새 인근에서 벌어진 연이은 전투에서 패배한 뒤 클리스 클리스 요새에서 농성했다. 그러다가 카로이 로베르트가 크닌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동생 죄르지 2세를 파견해 왕과 협상하도록 했다.
카로이 로베르트는 믈라덴 2세의 신변을 보장할 테니 크닌으로 출두하라고 권고했고, 믈라덴 2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믈라덴 2세는 크닌에 도착한 직후 체포되어 왕과 함께 헝가리로 끌려갔고, 모든 직위와 영지를 박탈당했다. 믈라덴 2세와 경쟁했던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는 카로이 로베르트로부터 체티나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 이르는 달마티아 해안 도시들과 보스니아 전역을 영지로 수여받았고, 이반 바보니치는 크로아티아의 반이 되었으며, 수비치 가문은 이전의 영향력을 영원히 잃고 군소 영주 가문으로 전락했다. 그 후 믈라덴 2세는 헝가리에서 억류된 채 조용히 지내다가 1341년경 사망했다.
믈라덴 2세는 앙주 가문의 여인인 엘린과의 사이에서 카타리나 수비치를 낳았다. 카타리나는 1326년 레그니차-브제크 공작 볼레스와프 3세와 결혼했으며, 1352년 남편이 사망한 뒤 남편의 유언에 따라 브제크와 올라바 여공작이 되어 1358년 사망할 때까지 6년간 군림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3세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고, 1358년 사망한 뒤 브제크와 올라바는 의붓아들인 바츠와프 1세와 루드비크 1세에게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