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13 22:24:35

스테판 우로시 1세

파일:스테판 우로시 1세.jpg
이름 스테판 우로시 1세
(영어: Stefan Uroš I, 세르비아어: Стефан Урош I)
출생 1223년
사망 1277년 5월 1일
직위 세르비아 국왕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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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왕국의 4대 국왕. 33년의 치세 동안 많은 업적을 쌓은 명군이었으나, 말년에 아들 스테판 드라구틴의 정변으로 실각하였다.

2. 생애

1223년경 스테판 네마니치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손녀 안나 단돌로 사이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243년 이반 블라디슬라프의 친 불가리아 정책에 불만을 품은 데다 몽골군이 세르비아를 횡단하면서 심한 파괴를 자행하는데도 별다른 저항도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의해 새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블라디슬라프는 감옥에 갇혔지만, 아내 벨로슬라바는 제타 일대에서 항전했다. 그해 여름, 두 형제는 더 이상의 내전은 이롭지 않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스테판 우로시 1세가 세르비아의 왕이 되는 걸 인정하는 대신 제타를 통치하며 '제타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몽골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나라를 재건하고 경제를 발전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우선 트란실바니아에서 거주하다가 세르비아로 도망친 작센 광부들을 받아들였다. '사시(Sasi)'라고 불린 이들은 우수한 광산 기술을 가졌다. 우로시는 이들이 가톨릭 신앙을 갖는 걸 용인해주는 대신 노보 브르도, 브르스코보, 루드니크 등지에 정착하여 광산을 개발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광산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광산 주변에 새로운 도시들이 세워졌다. 광산업의 발전은 무역의 성장을 촉진하였으며, 우로시가 자신의 은화를 주조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우로시는 광부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특별 무장 부대를 배치하였고, 상인들의 이익을 무역 협정으로 보장하고 강도에게 습격당해서 생긴 손실을 보상해줬다.

한편, 우로시는 대외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제 무대에서 세르비아의 위상을 강화하려 하였다. 우선 서쪽의 자훔을 정복하고 헝가리 왕국과의 국경 지대를 강화하였고, 1252년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거주하는 가톨릭 신자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을 놓고 마찰을 빚은 두브로브니크로 쳐들어가 도시 주변을 황폐화시켰다. 두브로브니크는 이에 맞서고자 1253년 불가리아의 차르 미하일 아센 1세와 동맹을 맺었으며, 1254년 헝가리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 동부로 쳐들어가서 람 강 일대까지 영토를 강탈하고 비엘로-폴을 황폐화시킨 후 후퇴했다. 스테판 우로시 1세는 1254년 가을에 불가리아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식하였고, 같은 해에 두브로브니크와 화해하여 두브로브니크가 국제 무역을 수행하는 권리를 넘기는 대가로 연간 2,000 두란트를 받기로 하였다. 또한 가톨릭 신자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은 세르비아 국왕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우로시는 뒤이어 제타의 주판인 라도슬라프를 타도하고 그의 영역을 몰수했다.

1246년 니케아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3세가 불가리아로부터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빼앗고 테살로니키를 탈환하였으며, 1252년 서부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까지 확장했다. 이에 시칠리아 왕 만프레드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아카이아 공국을 지원하며 니케아 제국을 견제했고, 우로시 역시 니케아 제국이 너무 강해지는 걸 경계해 이들을 지원하였다. 1254년 요안니스 3세가 죽고 이피로스와 시칠리아군이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가면서 니케아 제국의 시선이 그쪽에 쏠린 틈을 타, 우로시는 1258년 스코페, 프릴레프, 키세보를 접령했다. 그러나 1259년 9월 미하일 8세가 이끄는 니케아군이 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테살리아, 시칠리아 왕국 등의 연합군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격파하고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하자, 그는 점령한 도시를 비우고 세르비아로 철수했다.

우로시는 세르비아 정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자신의 통제하에 놓으려 노력했다. 1263년 세르비아 대주교 아르세니예 스레마크가 사망하자, 이복 형인 훔의 주교 프레디슬라브를 신임 대주교 사바 2세로 임명하였다. 또한 두브로브니크 대주교구와 바르 대주교구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자, 바르 대주교구가 가톨릭임에도 이들의 손을 들어줘서 종교적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소포차니 수도원을 설립하고 왕실의 구성원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를 그리도록 하였으며, 힐란다르의 아토스 수도원에 예배당을 짓고 수도사 도멘티안에게 성 사바 1세의 생애와 성 시메온( 스테판 네마냐)의 생애를 다룬 전기를 쓰도록 하였다.

우로시는 헝가리 왕 벨러 4세의 딸 카트리네와 자기 아들 스테판 드라구틴을 결혼시킴으로써 헝가리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1268년 벨러 4세와 아들 이슈트반 5세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우로시는 이 틈을 타 헝가리에 속한 마흐바를 침공하였다. 초기엔 성공적이었지만, 벨러 로스티슬라비치의 역공으로 패배하고 생포되고 말았다. 벨러 4세는 헝가리 공주 카트리네와 결혼한 드라구틴이 세르비아에서 더 많은 권력을 얻고 국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한다는 조건 아래 그를 풀어줬다. 이후 드라구틴은 '하위 왕'으로 언급되었다. 하지만 우로시는 헝가리의 간섭을 떨치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기로 하고, 미하일 8세와 접촉하여 미하일의 딸 안나 팔레올로고스와 차남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의 결혼에 관한 협상을 시작했다.

1269년 동로마 제국 사절이 찾아왔을 때, 그는 장남 드라구틴은 병약하기 때문에 이 나라를 통치할 수 없다면서 밀루틴이 세르비아를 통치할 거라고 약속했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안나 공주 일행을 보냈지만, 도중에 강도떼에게 습격당하여 많은 재물을 빼앗겼고, 세르비아 궁정이 초라한 것에 실망한 데다, 드라구틴 왕자가 궁정에서 영향력이 여전한 것을 보고 우로시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여기고 결혼을 무효화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그 후 우로시는 동로마 제국과 등을 돌리고 시칠리아 왕 카롤로 1세와 손을 잡았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과 전쟁까지 벌이지는 않았다.

1275년, 우로시는 두브로브니크를 다시 침공했다. 두브로브니크의 통치자 페터르 세폴로는 처음에는 세르비아의 공세를 격파하고 함대를 파견해 세르비아 해안 도시들을 약탈했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의 매복에 걸리는 바람에 대패했고, 40명 가량의 두브로브니크 귀족들이 포로로 잡혔다. 그중 함대 사령관 베네딕트 군둘리치와 베네치아인 한 명은 우로시의 명령으로 실명형에 처해졌다. 이후 양측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중재 아래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렇듯 세르비아의 경제를 육성하고 대외 확장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중앙 집권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더욱이, 그는 아들들에게 영지를 할당하지 않고 가능한 한 모든 국토를 자신의 수중에 두었다. 1268년 헝가리에 포로로 잡힌 뒤 드라구틴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고 왕국 일부를 그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한 뒤 풀려났지만 약속을 지키기 않았다. 드라구틴은 1275년 두브로브니크와의 전쟁 직후 새로 확보한 영지를 자신에게 양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우로시는 또 다시 거부했다. 결국 1276년, 드라구틴은 헝가리의 지원을 받고 반란을 일으켰고, 가트스코 전투에서 진압군을 물리쳤다. 우로시는 결국 퇴위하였고, 소포차니 수도원에서 수도자 서약을 하고 1년간 은거하다 1277년 5월 1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