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8:37:24

보나파르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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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기의 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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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1제국의 국장이자 보나파르트주의의 상징.
<colbgcolor=#6f6f8f> 영어 명칭 <colbgcolor=#ffffff,#1f2023>Bonapartists / Bonapartist Party
활동 시기 1805년(파일:모호 아이콘.svg ) ~ 1889년
1799년(파일:모호 아이콘.svg ) ~ 1889년
주요 정치인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3세
당파 리더 뤼시앵 보나파르트(Lucien Bonaparte)
나폴레옹 조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Napoléon Joseph Charles Paul Bonaparte)
이념 반(反) 부르봉 왕조
반(反) 귀족주의
자유보수주의[1]
프랑스 내셔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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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자코뱅주의 ( 1815년과 그 이전)
반(反) 엘리트주의
보나파르트 근왕주의
계파 :
자유주의
급진주의 ( 백일천하, 나폴레옹 3세 재위 초반)
보수주의 ( 1870년대 이후)
반동주의 ( 1880년대 이후)
스펙트럼 빅 텐트
좌익 ( 1815년[2])
중도 ( 1799년 ~ 1852년)
중도우파 ( 1852년 ~ 1870년)
우익 ( 1870년 ~ 1880년)
우익 ~ 극우 ( 1880년 ~ 1899년)
영향 현대 보수주의
드골주의
우익대중주의
원류 파시즘

1. 개요2. 분파3. 성향4. 여담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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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나파르트주의[3] 나폴레옹 1세 그의 가문[4] 혹은 추종자들이 추구한 정치 이데올로기이다. 보나파르트파(Bonapartiste)라고도 한다.

2. 분파

백일천하 시절
  • 자코뱅 보나파르트주의: 반교권주의, 반자본주의, 자유주의(특히 언론의 자유), 평등주의, 반-부르봉 왕가, 내셔널리즘 성향의 혁명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좌익적 보나파르트주의이다. 백일천하 당시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언론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부르봉 왕가에 맞서 사람들에게 나폴레옹을 지지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 제정이 독재로 흘러가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 자유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자코뱅주의자들에 비해 온건했으며 선출직 하원의회를 조직했으나, 이 의회 체제는 의회민주주의 체제는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헌법에 자유주의적 조항을 받아들이도록 타협시키는데 역할이 컸다.

제2제국 시절
  • 정통 보나파르트주의: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성향의 정통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다.
  • 청색 보나파르트주의: 청색(blues)이란 프랑스 혁명 시기 공화파 병사들을 이르는 말이다. 제롬 보나파르트가 이쪽 소속이었으며, 대중주의( 좌익대중주의), 반교권주의 성향을 띄었다. 정통 보나파르트주의자들에 맞서 보나파르트파 내 좌익 성향이었다.
  • 질서 보나파르트주의: 샹보르 백작 앙리와 가까운 파벌이었으며, 법통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초보수주의적이었으며 질서 유지를 위해 체제에 반하는 공화주의자들을 공격적으로 때려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자유 보나파르트주의: 구 오를레앙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파벌로, 의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옹호했다. 1860년대 말부터 주요 파벌로 급부상했으며 1869년 별도의 정당으로 선거에 출마해 제1정당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3.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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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대중주의) 사상의 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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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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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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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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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의자들에게는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약속하고, 부유층에게는 안전을 약속하고, 왕당파에게는 자신 역시 군주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노동자들에게는 공정한 분배를 약속하고, 농민들에게는 안정적이고 평온하며 동시에 가부장적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를 약속함으로써 지지를 얻어냈다.
카를 마르크스 나폴레옹 3세 평가.[5]
다른 주요 프랑스 왕당파 세력보다 공민권 확대와 정치 개혁, 근대적 국민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 편이었다.[6] 즉 전근대적 요소에 기반한 보수세력인 오를레앙파, 법통파와 달리 프랑스 최초의 '근대적 보수우파' 정치 세력에 가깝다.[7][8]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정교분리, 능력주의 관료제 확립, 근대적 대륙법 확립, 내셔널리즘 고전적 자유주의적 가치를 지향하기도 했으나 황제로 군림하는 등 공화주의와는 거리가 있었고[9] 개인 카리스마에 의존한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특히 '보나파르트주의'가 사실상 확립되고 정계 일선에 등장한 나폴레옹 3세 프랑스 제2제국기에서는 이러한 권위주의적 면모가 더욱 돋보여 사실상 파시즘의 전조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 본인의 병환, 나폴레옹 1세의 자유제정 약조, 제롬 보나파르트의 자유제정이행 시도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의회주의와 언론의 자유 등의 색채를 띠기도 하였다.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 19세기 후반의 보나파르트주의는 보나파르트 황가의 통치를 긍정하는 것을 대분모로 하는 다양한 사상적 이익집단들을 대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선 부르봉 가문으로 대표되는 봉건주의 혈연적 귀족주의에 반(反)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나, 지도자 개인의 카리스마에 기반하는 반엘리트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자유주의로는 분류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10]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프랑스 혁명기의 코르들리에 등 급진 공화파들이 좌익대중주의의 시작이라면, 보나파르트주의는 상기한 바와 같이 우익대중주의의 시초이자 초기 파시즘의 발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나폴레옹 1세가 포퓰리스트였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나폴레옹 3세의 통치 방식이 최초의 근대적 포퓰리즘에 기반했다는 것은 주류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이와 같은 논란은 넓은 의미에서의 보나파르트주의가 상이한 통치술을 가진 나폴레옹 1세와 3세의 치세를 모두 아우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4. 여담

정통왕당파(Legitimistes), 오를레앙파(Orleanists)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3대 왕당파 / 우익 세력이었다. 다만 정통왕당파는 보수주의 우파, 보나파르트주의는 내셔널리즘 우파, 오를레앙파는 자유주의 우파에 가까웠다.[11]

5. 같이 보기




[1] 프랑스어 위키백과에서도 나폴레옹 3세가 주장한 Empire libéral를 자유보수주의로 간주하고 있다. # [2] 1815년 복위한 나폴레옹은 백일천하 당시 소위 자유 제정을 약속하면서 당시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만들었다. 덕분에 자유주의자들을 다수 끌어들일 수 있었으며, 그래서 부르봉 법통주의자들과 대비되어 좌파로 여겨졌다. [3] 프랑스어로는 Bonapartisme, 영어로는 Bonapartism [4] 특히 나폴레옹 3세 [5] 나폴레옹 3세 치세의 초기를 잘 함축한 평가이다. 나폴레옹 3세는 뛰어난 개인적 매력을 발산하며 대다수 대중의 지지를 얻고, 정치-경제적 안정을 약속하며 부르주아와 엘리트층 등 핵심층의 지지를 이끌어내었다. [6] 공화파가 표방하는 시민국민주의보다는 프랑스 국수주의에 더 가깝다. [7] 에릭 홉스봄 드골주의의 시초라고 평가했다. [8] 19세기 프랑스 역사상 왕당파 중에 법통파, 오를레앙파, 보나파르트파 중에서 가장 '온건'한 부류를 꼽자면 의회민주주의를 존중한 오를레앙파에 가까웠지만 (다소 권위적이었을지언정)가장 진보적이고 근대화를 추진한 세력은 보나파르트파였다. [9] 보나파르트주의는 명목상 공화주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었지만 프랑스 땅의 황제(Empereur de France)가 아니라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s Français)라고 칭하여, 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라는 공화주의 이념을 반영하였다. 이미 유럽에는 로마 제국처럼 공화주의적 요소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도 세습군주나 다름없는 존재가 황제로 군림한 사례가 있기에,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고도 자국의 정치체제를 공화정이라고 주장할 여지가 있었다. 물론 그 때의 관점이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현대의 시각에서 나폴레옹 정권은 명백히 군주정으로 분류된다. [10] 반면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같은 좌파들도 결과적으로 독재를 했지만, 이들은 되려 봉건적 악습 철폐를 위한 의도를 띠고 있었다. 즉 "자유의 적에겐 자유가 없다"는 것에 기반해 대중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향을 띠는 이들과 달리 보나파르트주의는 독재를 기본적으로 긍정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11] Slama, Alain-Gérard Slama (2006). Vous avez dit bonapartiste?. L'Histoire n. 313. pp. 6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