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17:25:31

조르주 당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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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24대 국민공회 의장
조르주 자크 당통
Georges Jacques Danton
파일:조르주_당통.jpg
출생 1759년 10월 26일
프랑스 왕국 아르키쉬르오브
사망 1794년 4월 5일 (향년 34세)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재임기간 제24대 국민공회 의장
1793년 7월 25일 ~ 1793년 8월 8일
서명
파일:조르주 당통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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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654><colcolor=#fff> 부모 父: 자크 당통
母: 마리 카뮈
배우자 앙투아네트 가브리엘 당통 ( 사망)
루이즈 세바스티엥 당통
자녀 3명
학력 트루아 신학교 ( 졸업)
종교 가톨릭
최종 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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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공포정치2.2. 충돌과 패배
2.2.1. 로베스피에르와의 충돌2.2.2. 재판2.2.3. 처형
2.3. 유언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3.1. 영화3.2. 희곡3.3.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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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빵 다음으로 교육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프랑스의 제24대 국민공회 의장.

2. 생애

법률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었으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공감하고 정치가로 활동했다.

군중들을 선동 바스티유 감옥 습격하도록 만든 것도 그이고, 파리로 진격해오던 혁명의 적들과 싸우도록 국민의회와 국민들을 고무시켰다.
적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하나에도 용기, 둘에도 용기.
당시 자코뱅파 거두치고 대중 선동의 달인이 아니었던 사람 찾는 게 힘들겠지만 대불동맹에 맞서 루이 16세의 목을 치면서 한 말 또한 프랑스인들을 열광시킨 명언이었다.
유럽의 군주들이 감히 우리에게 맞서겠단 말인가? 그들의 발 언저리에 군주의 모가지를 대신 던져주마!

2.1. 공포정치

우리가 울리는 경보는 비상 신호가 아니라 프랑스의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이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투쟁해야 한다. 그래야만 프랑스의 안전이 보장된다.
공포정치의 극단적인 옹호자로 1792년 프랑스 국민의회에서의 연설은 유명하다.

끝이 없는 유혈사태의 근원이기도 하다. 자코뱅당에 가입해서 혁명재판소를 설치 후, 왕당파들을 엄청나게 처형시켰다.

2.2. 충돌과 패배

2.2.1. 로베스피에르와의 충돌

하지만, 당통은 여성편력도 심했고 온갖 미식과 향락을 즐기는 낭비벽도 있었다. 반면에 로베스피에르는 부정부패를 싫어하고 도덕을 권장하는 것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마시는 차에조차 설탕을 넣지 않을 정도로 금욕적인 인물이었기에 당연히 그를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당통의 도덕성은 당통파 의원들조차 변명해줄 수 없을 정도였다.

반면에 당통은 로베스피에르가 현실은 제쳐두고 지나치게 사상적으로만 과몰입하는 것을 비난하며 "그놈은 달걀 하나도 제대로 삶을 줄 모르는 놈이다." 라며 비꼬았다.

하지만 그간 혁명파들이 저지르는 살인과 패악질에 상당 부분 죄책감을 느꼈고 질려 있었으며, 어떤 의미에선 스스로 속죄한다는 마인드로 자포자기한 측면이 강했다.
나는 인간 자체가 지겹다. 이젠 인간 냄새마저도 신물이 난다.
실은 망명도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지만, 망명을 권유하는 지인에 대한 답변이 걸작이다.
사람이 조국을 구두바닥에 붙이고 다닐 수 있겠는가?

2.2.2. 재판

차후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와 의견이 충돌하면서, 혁명내부의 좌,우파에 대한 탄압 중에 반역 및 뇌물수수 혐의로 재판을 받고 단두대 형을 받았다. 이때 재판이 열렸을 때 한 말 또한 명언이었다.
내가 이 빌어먹을 기관을 만든 게 이맘 때쯤이었다. 신과 인간에게 용서를 빈다.
죄목은 외국인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반혁명 레지스탕스 세력을 도운 죄였다. 열성적인 혁명론자였던 만큼 반역자는 아니었고 로베스피에르에게 맞서 반대세력을 조직하여 내란을 모의한 것도 날조로 보이나 뇌물수수와 부정부패만큼은 지지자들도 도저히 실드를 쳐줄 수 없을 만큼 심각했기에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2.3. 처형

다음은 당신의 차례이다.
처형장으로 향하던 도중 로베스피에르의 집 앞을 지나가면서 실제로 한 말이다. 애초에 본인이 로베스피에르와 손잡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고, 뒤이어 지롱드당 중진들을 처형하고, 마지막에는 동지인 에베르까지 노선이 다르다고 하여 처형했으며 이제는 본인도 노선이 다르다고 단두대로 끌려가게 됐으니 공포정치의 끝에 또 다른 반대파에 의해 로베스피에르도 단두대로 가리라는 건 누구나 예상가능했고, 실제로 3개월 뒤 그렇게 됐다.

2.3. 유언

내 머리를 나중에 민중에게 잘 보여 줘라. 그만한 가치가 있느니라.
단두대에서 죽을 때 그의 나이는 34살이었다. 그는 실제로 놀랄 만큼의 대두였기 때문에, 이 유언은 나름의 농담으로 볼 수 있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3.1. 영화

  • 당통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여러 번 영화화되었는데, 1982년, 안제이 바이다가 감독한 당통이 가장 유명하다.

3.2. 희곡

  • 게오르크 뷔히너의 희곡, 당통의 죽음은 혁명기 당시 당통의 일대기를 그린 걸작이다. 세계 각지에서 매년 공연되는 뛰어난 작품. 대한민국에서는 1983년 초연되었는데, 당통이 박통처럼 들린다는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의 압력으로 영어식인 단톤의 죽음으로 개명되어야 했다는 촌극이 있다. 그리고 라 마르세예즈도 생략당했다.

3.3. 게임

  •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 등장. 암살단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템플 기사단의 지원을 받는 로베스피에르와 대립한다. 사형 직전 암살단이 구출하러 오지만 자신의 죽음이 로베스피에르를 몰락시킬 수 있다며 거절, 대신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한 친구들을 구해달라 부탁하고 처형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