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8 22:16:44

박병호 ↔ 오재일 트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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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8일 파일:kt wiz 영문 워드마크.svg 파일:kt wiz 영문 워드마크 화이트.svg 박병호 ↔ 오재일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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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트레이드 결과4. 평가
4.1. 트레이드 당시4.2. 트레이드 이후
5. 기타

1. 개요

2024년 5월 28일 kt wiz 삼성 라이온즈 사이에서 진행된 트레이드를 다루는 문서.

2. 전개

<nopad> 파일:박병호 방출 요청.jpg
2024년 5월 28일, 수도권 팀의 간판급 타자가 소속팀 구단에 방출 요청을 했으며 조만간 웨이버 공시될 예정에 있다는 베이스볼 코리아 전수은 기자의 보도가 발표되었다. # 직후 스포츠춘추 소속인 배지헌 기자의 트위터를 통하여 그 선수는 박병호이며 선수가 KT 구단한테 방출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 본래 KT는 트레이드를 고려했으나 여의치 않아서 박병호 본인의 요청에 따라 방출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그 후 실제로 박병호가 웨이버 공시를 요구했다는 기사가 보도되며 사실로 확인되었다. 방출 요청 사유로는 2024년 들어 줄어든 출장 기회에 대한 박병호의 불만이었다고 밝혔다. 이강철 감독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박병호를) 배려를 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배려하다 끝나야 하겠다. 참는 사람에게 이기는 사람이 없다. 잘 참는 사람이 언젠가는 이긴다"라고 표현하였다. #

이강철 감독은 박병호의 타격감이 좋지 않은데도 그를 중심 타선에 배치하며 기용해왔던 적이 있기에 좁아진 입지를 이유로 방출을 요청했다는 것에서 일부 kt팬들은 분노하였고, 그동안 베테랑으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온 선수이기에 더욱 아쉬운 결과로 보이며, KT 최고의 영입으로 평가받았던 박병호의 FA 계약도 아쉬운 마무리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불어 상승세인 팀에 언해피를 남기고 떠났다는 점에서 더욱 아쉽다는 평을 받았다.

다만 이후 발표된 박병호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구단과의 마찰은 없었다고 한다.[1] 이적을 요청한 4월 초부터 트레이드 움직임이 지지부진하자 트레이드, 또는 웨이버 공시 후 이적이 이루어 지지 않을 시 잔여 연봉도 포기한 채 은퇴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 것. 28일 선수단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으며, 이강철 감독과도 인사를 나눴다고 밝혔다. # 이강철 감독도 트레이드 이후 박병호를 응원했다. #

박병호가 스포츠경향과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박병호는 4월부터 구단과 대화를 나눠왔다고 밝혔다. 부진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팀 상황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구단에게 타 팀으로의 이적을 먼저 이야기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도록 트레이드가 되지 않는 것을 보고[2] 25일 경기[3]가 끝난 후 은퇴를 요청했으나, 구단에서 만류했고 박병호의 깔끔한 커리어 마무리를 위해 트레이드를 다시 한 번 추진해보겠다는 답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래도 트레이드가 되지 못할 경우에는 웨이버 공시를 택하자고 이야기를 나눴고, 웨이버 공시를 했는데도 아무도 원하지 않으면 그때는 은퇴를 선언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같은 날 오후 8시경, 지역[4] A팀 내야수와 트레이드가 임박했다는 베이스볼 코리아 전수은 기자의 단독 보도가 발표되었다. #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사진의 실루엣이 오재일의 사진과 똑같다는 점과 해시태그에 오재일이 뛰었던 # 두산 # 갤럭시s24울트라가 있었다는 점을 토대로 오재일 ↔ 박병호 트레이드가 아니냐는 추측이 많았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29일 염경엽 LG 트윈스 감독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 스스로 LG 염경엽 감독에게 컨택한 것이 드러났다. LG 트윈스 선수단 구성 상황과[5] 박병호의 가치 하락 등의 이유로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의 박병호에 대해 냉랭했던 트레이드 시장을 짐작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kt wiz는 이러한 냉랭한 시장 상황과 은퇴를 결심한 선수를 두고 최선의 결과값을 얻어내었으며, 삼성 라이온즈와 베테랑인 박병호, 오재일 모두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는 최선의 상황이 주어졌다.

3. 트레이드 결과

트레이드 일자 2024년 5월 28일
파일:kt wiz 엠블럼.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박병호 오재일
‘방출 요청’ 박병호, 결국 KT 유니폼 벗는다…삼성 오재일과 1대1 트레이드 ‘빅딜 성사’

5월 28일 22시쯤에 트레이드가 최종 합의, 공식 발표되었다.

4. 평가

4.1. 트레이드 당시

선수들의 이름값만 따지면 메가 트레이드이기에 많은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박병호는 넥센, 오재일은 두산 시절 맹활약을 펼치며 간판 타자로 두각을 나타냈고, FA로 이적한 트레이드 당시 소속팀에서도 합류 초반에는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두 선수 모두 전성기가 지나 선수 생활 말년에 접어들었고, 올 시즌에는 나란히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과거와 같은 활약을 펼치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두 베테랑에 대한 환기의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러나 두 선수의 입지와 별개로 두 팀의 이해관계는 명확하다. 두 선수 모두 1루 겸 지명타자로 뛸 수 있는 거포라는 것은 비슷하다.
  • 삼성 라이온즈
외국인 타자인 맥키넌의 장타력이 기대 이하였고, 팀 전체적으로 봐도 우타자가 부족한 상황이다. 또한 구자욱, 김지찬 등 주전 좌타자들이 좌상바 경향을 보여 좌완을 상대로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우타 거포의 수혈이 급했다. 거기다 타팀 입장에선 잔여연봉 때문에라도 박병호를 선뜻 데려오기 꺼려졌을 것인데, 삼성 입장에선 오재일과 박병호의 연봉차이는 2억원으로 박병호를 데려왔을 때 발생하는 금전적 지출을 최소화하고 셀러리캡 위반을 피할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 kt wiz
삼성과는 반대로 주전 1루수로 도약한 문상철이 우타자라서 좌타 1루수 카드를 내민 삼성에게 혹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내야진이 거의 우타자 일색이었다. 트레이드 성사 시점에서의 1군 엔트리를 보면 천성호를 제외한 모든 내야수들이 우타자로 구성됐고, 백업에도 오윤석, 장준원 등 우타자들이 비교적 많았다. 그 천성호도 당시 타격감이 좋지않아 오히려 우타자인 신본기가 주전으로 자주 나서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반대로 외야수는 사실상 1루수로 뛰고 있는 문상철과 이제 막 부상에서 돌아온 배정대를 빼면 전부 좌타자 혹은 스위치 히터였다. 좌타자인 오재일이 합류하면서 플래툰이 더욱 다채로워지는 것이 팀 구성상 더 나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양쪽 팀 모두 부활에 기대치를 걸고 있는 왕년의 대형 1루수끼리 맞바꿨다는 것에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또한 박병호가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된 틈에 오재일이 트레이드 발표 당일 대타로 나와 솔로 홈런을 치면서[6] 상당히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일반적인 트레이드는 남는 포지션을 내주고 부족한 포지션을 받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이번처럼 나이, 포지션, 플레이 유형 모두 비슷한 선수들끼리 트레이드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두 선수 모두 팀에서의 입지가 예전과 같지 않은 베테랑 선수면서 한 명은 좌타자, 한 명은 우타자라는 차이점이 있고, 결정적으로 박병호가 먼저 이적을 요청하고 이게 일파만파 커진 영향을 받은 덕에 성사된 트레이드이다.

4.2. 트레이드 이후

박병호는 5월 29일 키움 히어로즈 전에서 장외홈런을 쳤다. 이어 31일에는 역전 쓰리런 홈런을 날리는 등 전성기 포스로 하드힛 타구를 쏘아대고 있다. 이적을 하자마자 기존의 박병호로 돌아오자 부진이나 에이징커브가 아닌 의도적인 태업 아니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중이다. 물론 이건 농담이며 이적 이후 동기부여가 되며 부활하는 사례는 생각보다 흔하다. 최근에도 한때 같은 팀이었던 서건창이 기아로 가자마자 반등한 사례가 있다.

다음날인 1일, 박병호가 첫타석부터 3점 홈런을 치면서 완벽한 부활을 알렸지만, 같은 날 오재일은 4타수 무안타 2병살 2삼진, 13타수 연속 무안타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보여줬다.

2일, 오재일도 대타로 나와 드디어 홈런을 쳤고, 박병호는 1사 만루에서 병살을 치며 문동주의 7이닝 무실점에 간접적으로 기여했지만, 천적이던 이민우를 상대로 8회 선취 적시타이자 결승타를 치며 4번타자의 역할을 다했다.

이후 박병호가 지속적으로 부진하며 월간 OPS 0.6대로 추락하여 결국 6월 18일 클린업에서 밀려나 7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다. 오재일은 1루수로는 아쉬운 타격 성적을 기록했지만 대타 겸 백업 1루수로 OPS 0.7은 넘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평가가 역전될 가능성도 꽤나 생겼다.

5. 기타

  • 이 트레이드는 양 팀 간에 이루어진 첫 번째 트레이드이며, kt는 이 트레이드를 통해 전 구단을 상대로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 사실 삼성은 2017년 시즌이 끝난 뒤에, 이승엽의 은퇴로 인한 1루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네소타 트윈스를 퇴단해 국내 리그로 돌아올 예정이던 박병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박병호를 영입하기 위해 당시 보류권을 가지고 있었던 넥센 히어로즈[7][8]에게 사인 앤 트레이드를 제안한 적 있었다. 하지만 넥센 측이 거부하면서 최종적으로는 결렬되었다.
  • 두 선수는 2005년에 데뷔한 동갑내기이자 상무 입대 동기로 모두 트레이드 경험이 있었고, 트레이드 후 기량이 만개했던 선수다. 박병호는 2011년 7월 31일 KBO 공식 트레이드 마지막 날에 LG에서 넥센으로 트레이드가 있었고 오재일은 2012년 7월 9일 이성열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넥센에서 두산으로 트레이드 된 적이 있었다. 두 선수가 2011년 7월 31일부터 2012년 7월 9일까지 넥센에서 약 1년간 같이 동료로 지낸 적이 있다. 또한 두 선수 모두 전성기를 보낸 팀을 뒤로 하고 FA로 팀을 옮겼으며, 트레이드 당시 FA 계약 마지막 해였다.[9]
  • 트레이드가 확정되자마자 KT 구단의 공식 홈페이지 선수단 목록에서 박병호가 삭제되었고 곧바로 오재일이 추가되었다. 일반적으로 선수가 새로운 팀의 유니폼을 입고 사진 촬영을 했거나 합성 사진이라도 만든 후에 추가하는게 대부분인데 삼성 시절 프로필 사진으로 바로 추가되었다. 심지어 2024년 최신 프로필 사진도 아닌 2023년까지 쓰던 프로필 사진이다. # 기록말살형
  • KBO 역사상 단일시즌 50홈런을 기록한 3명의 타자( 이승엽, 심정수, 박병호)가 모두 삼성에 입단한 경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3명 모두 입단 과정이 다르다.[10]
  • 오재일은 프로 입단 당시 홈구장이었던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당시 수원야구장)로 돌아오게 되었다. 200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현대 유니콘스의 2차 3라운드 지명을 받고 데뷔한 오재일은 5월 15일 수원야구장에서 열린 삼성과의 홈경기에서 오승환을 상대로 데뷔 타석을 가져 삼진을 기록했다.
  • 트레이드 직후 두 선수 모두 원래 쓰던 응원가를 그대로 쓰고 있다. 박병호는 상징과도 같은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에서 팬들이 일찌감치 예상한대로 구단명만 '라이온즈'[11]로 바꿔서 썼고, 오재일은 김상헌 응원단장이 작사작곡한 응원가를 팀명만 바꿔서 썼다. 박병호의 응원가야 KT도 키움의 것을 그대로 썼으면서 충분히 유서깊은 응원가이기에 충분히 예상되었지만, 김상헌 응원단장이 스스로 작곡한 오재일의 응원가를 그대로 넘겨주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 많다.[12] 그래서 이 트레이드는 박병호 + 응원가 ↔ 오재일 + 응원가로 사실 2:2였다는 드립이 있다.
  • 프로 데뷔 후 KBO에서는 줄곧 수도권 팀[13]에서만 선수 커리어를 이어온 박병호는 선수 커리어의 말년을 비수도권 팀에서 보내게 되었다.
  • 공교롭게도 두 선수 모두 이적 후 첫 번째 경기에서 전성기를 보낸 팀을 상대했다. 박병호는 키움전에서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 오재일은 두산전에서 대타로 나섰다.
  • 트레이드 전날 오재일의 삼성에서의 마지막 타석이 추격 솔로홈런이었으며, 트레이드 직후 박병호의 삼성에서의 두 번째 타석 역시 추격의 솔로홈런이었다.
  • 삼성은 왕조시절인 2014년 전설의 핵타선 14넥센을 상대로[14] 치열한 혈투 끝에 우승을 가져온 전적이 있는데[15], 14넥센의 4번 타자였던 박병호가 돌고 돌아 삼성으로 오게 되자 삼갤에서 "어린 시절 정말 갖고 싶었지만 이제는 낡아버린 장난감을 어른이 되어서 가진 기분." 이라는 명언이 올라왔다. # 그리고 삼성 이적 후 갑작스런 회광반조로 MVP 모드에 돌입하자 그 장난감은 낡지 않은 명품 장난감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폐품인줄 알았는데 골동품이었다
  • 시즌 중의 트레이드는 선수단의 등번호가 다 결정된 상태에서 진행되므로 남는 번호도 자연스레 마땅치 않아서 일단은 트레이드 맞상대의 등번호를 그대로 달고 다음 시즌에 등번호를 바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삼성과 KT 전부 몇몇 번호를 비워두고 시즌을 시작한데다 두 선수 모두 등번호에 애착이 있어 서로의 등번호가 아닌 새로운 등번호를 달고 시즌을 재개하였다. 박병호는 52번이 코너 시볼드가 사용하고 있어서 52번과 형상이 유사한 59번, 오재일은 36번에서 제일 가까운 공번이었던 40번을 잠시 사용했다가 트레이드 전까지 36번을 썼던 류현인이 상무로 입대하면서 36번으로 다시 등번호를 바꿨다.

[1] 이번 트레이드 자체가 kt의 전략적 부분이었다는 평가도 있는데, 은퇴선수를 가지고 WIN-WIN의 상황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 선수 트레이드시 은퇴를 본인입으로 이야기한 선수를 이적시키는 것 보다 웨이버를 요구한 선수를 영입했을때 얻어지는 결과값이 더 크고, 특히 일반적인 트레이드를 하기에는 가치가 많이 떨어진 박병호이기에 웨이버 언급을 통해 10위팀 등 하위권 팀들에게 영입기회가 간다는 부분에서 오는 타팀들의 기회비용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키고 결국 오재일이라는 비슷한 상황의 선수를 영입하였다. kt 입장에선 은퇴 선수를 가지고 주어진 상황에서의 최대 결과값을 얻어냈다. 박병호가 내상을 입긴 했으나 박병호로선 당연히 감수해야하는 부분이기에 성공적인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기사에 따르면 KT는 4월부터 일부 구단에 박병호의 트레이드를 시도했지만 성사가 어려웠다고 밝혔다. 박병호의 극심한 부진과 적지 않은 연봉, 포지션 문제와 더불어 트레이드를 논의하던 시점이 아직 시즌 초반에 가까웠던지라 타 구단들이 트레이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3]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기 바로 전날이다. [4] 어느 지역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복수의 팀이 있는 수도권, 영남권과 달리 호남권과 충청권은 팀이 1팀씩밖에 없어서 유추가 쉽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5] LG는 우선 굳건한 주전 1루수인 오스틴이 있고 주포지션은 아니지만 1루수를 볼 수 있는 김현수, 문보경, 팀의 핵심 유망주인 김범석도 1루수로 자주 나서고 있기 때문에 박병호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kt 보다도 기회가 밀릴 수도 있었다. [6] 트레이드가 경기 종료 직후 발표됐는데 오재일의 추격포는 9회 말에 터졌다. 즉 홈런이 나온 후 트레이드 발표까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7] 넥센 히어로즈가 키움 히어로즈로 스폰서 및 팀명이 바뀐 것은 박병호가 귀국한 후인 2019년부터이다. [8] 더군다나 미네소타로 이적할 당시 FA로 나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임의탈퇴 신분으로 보류권이 넥센 측에 있었고, 따라서 국내 복귀를 하려면 보류권을 가지고 있는 넥센으로만 복귀할 수 있었다. 만약 이 당시 넥센이 아닌 다른 팀이 박병호를 영입하려면 넥센의 동의를 얻어 임의탈퇴를 해제한 뒤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9] 다만 박병호는 FA 자격 재취득 최소 기한인 4년이 경과하지 않아 2025년에는 비FA 계약 대상자이다. [10] 이승엽은 신인 드래프트 지명, 심정수는 FA 이적, 박병호는 트레이드. [11] 트레이드 직후에는 '최강삼성'으로 하자는 의견도 다수 있었다. [12] 사실 김상헌 단장은 이학주 응원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타 팀에서의 사용을 허가했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각 팀에서 새로운 응원가를 만들어서 썼다. 삼성시절 이학주 응원가는 팀 응원가로 개사되어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13] LG(2005~2011. 7.), 키움(2011. 8.~2015/2018~2021), KT(2022~2024. 5.) [14] 물론 이 당시 삼성도 팀 타율 3할을 기록하는 등 만만찮은 핵타선이였다. [15] 공교롭게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삼성이 우승을 확정지을 당시 상태 팀의 마지막 타자가 박병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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