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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제14대 황제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 احمد شاه بهادر |
|
|
|
<colbgcolor=#4A5D23><colcolor=#fff,#fff> 이름 |
무하지드 웃딘 아흐마드 샤 가지 مجاهدالدین احمدشاه غازی |
출생 | 1725년 12월 23일 |
무굴 제국 델리[1] | |
사망 | 1775년 (향년 49세) |
무굴 제국 델리[2] | |
재위 기간 | 무굴 제국 황제 |
1748년 4월 29일 ~ 1754년 6월 2일 (6년) | |
대관식 | 1748년 4월 29일 |
전임자 | 무함마드 샤 (제13대) |
후임자 | 알람기르 2세 (제15대, 당숙) |
부모 |
아버지 :
무함마드 샤 황제(1703 ~ 1748) 어머니 : 쿠드시야 베굼 |
자녀 | 샤 자한 4세 (제18대)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clearfix]
1. 개요
무굴 제국의 제14대 황제.재위 기간 대부분 동안 신하와 하렘의 궁정 여자들에게 휘둘렸던 유약한 군주였다. 실권은 재위 내내 사프다르 장이나 이마드 울물크 같은 재상들이 휘어잡고 있었고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는 그다지 존재감 있는 황제가 아니었다. 그의 재위 기간 내내 아프가니스탄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북인도를 침공하면서 무굴 제국은 극도로 약해졌고, 심지어 1752년에는 마라타 동맹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는 등 굴욕은 계속되었다. 구자라트나 벵골의 오리사 등 대부분의 지역들이 함락되어 떨어져나갔고 무굴 제국은 수도 델리 근교만을 겨우 지배하는 지방 정권으로 격하되었다.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는 1754년 신하 이마드 울물크에게 눈이 뽑혀 장님이 되어버린 후 갇혀있다가 1775년 사망한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는 1725년 무함마드 샤와 쿠드시야 베굼 황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난 직후 무함마드 샤의 첫째 아내이자 공식 황후였던 바드샤 베굼이 그를 데려갔고,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를 마치 제 친아들처럼 여기며 키웠다. 하지만 아흐마드는 자라날 때부터 꽤나 험난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 무함마드 샤 황제는 아들에게 제대로 된 제왕교육을 시킬 생각이 없었고, 결국 아흐마드는 문맹이었으며 군사 훈련에도 제대로 참가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황제는 아흐마드를 반쯤 학대했고 재정에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자 신분에 걸맞은 용돈도 제대로 내려주지 않으면서 아흐마드는 꽤나 비참하게 자라났다. 이런 아흐마드가 황제에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계모인 바드샤 베굼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3]무함마드 샤 시절의 무굴 제국은 이미 반쯤 붕괴된 상태였다. 특히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가 1739년에 수도 델리를 함락하고 200여 년간 모아놓은 재화를 바닥까지 긁어가면서 무굴 제국은 어마어마한 치명타를 입었다. 중앙정부의 힘이 이전과는 달리 심각하게 약화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지방 나와브들은 바로 난을 일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지방들이 독립을 선포하며 떨어져나갔다. 게다가 황족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모여 집안싸움에 몰두하고 있었으니 전형적인 망조가 들어버린 추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한편 서쪽 페르시아에서는 나디르 샤가 암살당한 뒤 다시 아프샤르 왕조가 조각조각 분열되었고, 개중 무굴 제국과 가까운 아프가니스탄 지방에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등장해 아프간 일대를 휘어잡기 시작한다.
무굴 제국에서는 옛 티무르 제국의 전통인 '승계 전쟁'이라는 관습을 물려받아 왕이 죽을 때마다 후계자들이 전쟁을 벌여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왕이 교체될 때마다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라호르의 나와브 자카리야 칸 바하두르가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 야하 칸 바하두르와 미안 샤 나와즈 칸 사이에서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나와즈 칸이 야하 칸 바하두르를 몰아내고 승리를 차지하며 펀자브의 나와브로 즉위했다. 새로운 펀자브 나와브으로 부임한 나와즈 칸은 무굴 중앙정부에 대해 반감이 막심했다. 제대로 지켜주지도 못하면서 막대한 세금만 뜯어가는 델리의 무굴 황실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던 것. 이 불화를 교묘히 이용한 것이 바로 무굴 제국에 침입할 기회만을 노리던 아흐마드 샤 두라니였다. 두라니는 3만 기병을 나와즈 칸에게 제공하는 등 이간질을 계속했고, 특히 당시 제국의 재상이던 카마르 웃딘 칸이 야하 칸 바하두르의 양아버지였던 것을 이용해 완전히 나와즈 칸을 무굴 제국에게서 등돌려놓았다.
결국 1748년 4월에 나와즈 칸은 아흐마드 샤 두라니와 손을 잡고 무굴 제국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아프간 군대가 물밀듯이 무굴 국경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듣고 놀란 무함마드 샤는 아흐마드 왕자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신드 주의 나와브이던 무라드얍 칸 칼호로, 대재상 카마르 웃딘 칸, 하피즈 라맛 칸, 아와드 지방의 군주 사프다르 장[4], 야하 칸, 알리 모하메드 칸 등 수많은 장군들을 휘하에 파견해 이들을 막도록 했다. 이렇게 이미 나디르 샤의 침공으로 골골대던 무굴 제국이 영혼까지 끌어모아 겨우 집결시킨 7만 5천 대군이 1만 2천 명의 아프간 군대와 격돌했다. 이를 마누푸르 전투라고 부른다. 이 마누푸르 전투에서 아흐마드 왕자는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아프간 군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황제가 크게 총애하던 대재상 카마르 웃딘 칸이 전사했고, 무함마드 샤는 이 소식을 듣고 그를 애도하다가 슬픔에 잠겨 1748년 4월 26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5]
2.2. 치세의 시작
무함마드 샤가 카마르 웃딘 칸의 죽음을 애도하다 슬픔에 잠겨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전쟁 영웅 대접을 받던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가 4월 29일 델리의 붉은 요새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웃드 지방의 나와브[6] 사프다르 장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이마드 울 물크를 중임했다. 특히 어릴 적부터 자신을 보좌했던 제 시종 자베드 칸에게는 '나와브 바하두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5,000에 달하는 군대를 지휘할 권리를 부여했다. 자베드 칸은 황태후 쿠드시야 베굼과 결탁하며 스스로의 권력을 채워나갔고, 이미 5만에 달하는 군권을 쥐고 있던 쿠드시야 베굼이 자베드 칸을 전폭적으로 밀어주면서 자베드 칸은 무굴 제국의 실세로 떠오른다. 특히 쿠드시야 베굼은 자베드 칸과 한 편을 먹고 적극적으로 국정에 개입하며 제 뜻에 맞지 않는 신하들은 마음대로 죽여버리기까지 했는데, 1749년 자베드 칸이 주도한 대재상 사프다르 장 암살 계획이 실패하자 이 갈등은 수면 위로 치닫는다.안그래도 황태후의 뒷배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던 자베드 칸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보던 사프다르 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베드 칸과 정면충돌하게 된다. 그러나 황태후의 비호와 황제의 암묵적인 방관 속에서 활개를 치던 자베드 칸은 전혀 굽히지 않았다. 1750년에는 말와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다가 돌아온 군사령관 살라밧 칸이 휘하 군사 18,000여 명에게 지급할 급료를 요구하자 자베드 칸은 오히려 살라밧 칸을 가두어버렸고, 살라밧 칸은 급료를 받지 못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제 재산을 모두 처분하며 알거지가 되어버렸다. 이런 일까지 발생하자 사프다르 장은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자트족과 마라타인들을 모아 대군을 이끌었고, 쿠드시야 황후의 세력들을 대거 숙청했다. 중간에 황제가 적대 행위 중지를 명령하며 일시적으로 진군을 중단하기는 했지만 1752년에는 몰래 자베드 칸을 암살해버렸다. 이렇게 사프다르 장이 막나가기 시작하자 위협을 느낀 황제도 그에 대항할 세력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마누푸르 전투로 격퇴당했던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끈질기게 인도로 쳐들어왔다. 그는 1749년에 다시 인도로 넘어와 무굴 제국을 침공했는데 주 요구 사항은 빈곤한 카불 지방을 운영하기 위해 펀자브 일대 4개 행정구에서 세금을 걷어갈 권리를 가져가는 것이었다. 펀자브의 총독 모인 울물크가 그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두라니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평화협정을 맺고 말았다. 그러나 무굴 제국이 협정 내용을 준수하지 않자 두라니는 1752년 다시 인도를 재침공했다. 분노한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라호르 일대까지 싸그리 불태우고 약탈하게 된다. 재상 사프다르 장은 이를 막기 위해 마라타 동맹에게 막대한 재물과 영토를 떼주고 5만 명의 대군을 빌려왔지만, 그와중에 사프다르 장과 따로 놀던 자베드 칸과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는 사프다르 장이 무슨 일을 하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두라니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펀자브, 카슈미르를 그대로 아프간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무굴 제국은 다시는 이 영토를 되찾지 못한다.
북쪽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이 발흥하는 와중에 남쪽에서는 마라타 동맹이 절정기를 맞이하여 계속해서 북쪽으로 치고들어왔다. 구자라트와 오리사 지방이 마라타인들에게 넘어간다. 1753년까지만 해도 구자라트에 무굴 제국이 아슬아슬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져버린 것.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라지푸트 일대에 여러 총독들을 임명하고 18,000여 명의 대군을 파견해 반란군들을 제압하려 들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동쪽의 벵골 지방은 더 심각했다. 마라타 동맹은 부유한 벵골 지방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결국 11년 간 벵골 지방을 지켜오던 알리바디 칸 역시 마라타 군대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오디샤 지방 전체가 마라타 군대의 손에 넘어갔고 무굴 제국의 벵골 영토는 미드나포르 일대로 크게 축소된다. 게다가 무굴 제국의 벵골 총독은 임명될 때마다 마라타 동맹의 허가를 받아야했고 매년 마라타 동맹에게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바쳐야만 유지될 수 있었다.
2.3. 마라타 동맹의 보호국
1750년의 인도 대륙 판세. 초록색으로 표시된 무굴 제국은 델리 일대만을 겨우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말했지만 이 시기 무굴 제국은 이미 대제국으로서의 면모는 사라지고 반쯤 망한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반대로 아우랑제브 시절부터 무굴과 전쟁을 치러온 마라타 동맹은 그 세력이 정점에 달해 인도 대륙 상당수를 집어삼키며 무굴 제국과 완벽히 상황이 역전되어 버렸다. 아우랑제브 황제 시절에는 무굴 제국이 마라타인들을 남쪽 변방으로 밀어붙이던 것과는 반대로 이제는 마라타 군대가 북인도까지 휘젓고 들어오면서 무굴 제국을 국력상으로 압도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 굴욕은 끝이 없어서 1752년에는 마라타 동맹이 심지어 무굴 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말이 보호국이지 사실상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무굴 제국은 매년 마라타 동맹에게 막대한 돈을 바쳐야했고, 힘이 없었던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는 마라타 동맹의 페슈와[7]에게 굴복했다. 재상 사프다르 장은 마라타 동맹에게 지원을 받아 최대 위협이던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와 로힐라족을 견제하기도 했다.[8]
한편 재상 사프다르 장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는 사프다르 장에게 점점 위협을 느꼈다. 안그래도 제 어머니에 맞서 군대를 일으킨 인물이 저한테도 칼날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 따위는 없었기 때문. 황제는 이마드 울물크를 새로운 카드로 꺼내든다. 이마드 울물크는 황제의 지원을 받아 반-사프다르 장 세력의 구심점으로 떠올랐고, 사프다르 장은 1753년 영지인 아마다바드를 박탈당하고 대재상직에서 쫒겨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프다르 장은 해임 직후 자트족과 제 추종자들을 모아 델리를 약탈하는 등 소동을 일으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물러나고 제 본거지인 아와드로 돌아간다. 사프다르 장이 사라지자 이마드 울물크가 새로운 재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마드 울물크는 사프다르 장보다도 한 술 더 뜨는 위인이었다. 150만 루피를 제 소유로 횡령하고 봉급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등 최악의 탐관오리였던 것이다. 이마드 울물크의 횡포는 날로 심해졌고 황제는 그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2.4. 폐위와 죽음
이마드 울물크가 갈수록 패악질을 부리자 황제는 다시 사프다르 장을 불러오려 시도한다. 이를 눈치챈 이마드 울물크는 황제를 궁에 가두어버리고 역으로 마라타 동맹과 손을 잡는다. 사프다르 장은 군사를 일으켜 이마드 울물크를 쫒아내기 위해 델리 근교로 들어왔다. 황제 역시 그의 손을 잡고 대군을 몰고 마라타 동맹과 싸우기 위해 남하했다. 하지만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는 1754년 시칸다라바드 지방에서 마라타 군대에게 대패했고, 황제의 어머니를 포함해 황족들마저 포로로 잡힐 정도로 치욕을 겪었다. 시칸다라바드 전투에서 패배한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는 황족들마저 버리고 델리로 후퇴했다. 이마드 울물크는 마라타 군대와 함께 다시 델리로 들어갔고 다시 황제를 가두어버렸다. 다시 재상직을 차지한 이마드 울물크는 이제 황제마저 연금하고 사실상의 무굴 제국의 실세로 군림했다. 한편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가 계속 이마드 울물크에게서 벗어나려 시도하자 끝내 황제의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어버리고 폐위해 황궁에 가두어버린다.[9] 이마드 울물크는 1754년 알람기르 2세를 새로운 꼭두각시 황제로 즉위시켰다.그렇게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는 1754년에 폐위되어 쫒겨난 후 살림가르 요새에 유폐되어 있다가 1775년 49세의 나이로 인생을 마쳤다. 그의 아들들 중 하나인 샤 자한 4세가 1788년 짧은 기간 동안 무굴의 제18대 황제로 재위하기도 한다.
2.5. 카나틱 전쟁
2.5.1. 제1차 카나틱 전쟁(1746~1748)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의 무굴 제국이 한참 알아서 망해가던 시절, 프랑스와 영국은 슬슬 인도에 탐욕의 마수를 뻗쳐가기 시작한다. 한편 인도 전체를 호령하던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 사후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함마드 샤 시절 1724년 아사프 자흐 1세가 하이데라바드로 내려가 나와브보다도 높은 '니잠'의 칭호를 자칭하고 하이데라바드 번왕국을 세우고 사실상 독립해 떨어져나간다. 이렇게 상황이 어지러운 와중에 결국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하이데라바드 번왕국,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무굴 제국을 포함한 여러 인도의 세력들이 인도의 패권을 두고 대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 전쟁을 바로 '카나틱 전쟁(Carnatic Wars)'라고 부른다. 카나틱 전쟁은 총 3차례에 걸쳐 일어났으며 제1차 전쟁은 1746년~1748년, 제2차 전쟁은 1749년~1754년, 제3차 전쟁은 1756년~1763년까지 지속된다. 이 세 번에 걸친 전쟁들 중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의 재위기에는 제1차와 제2차 전쟁이 발발한다.제1차 카나틱 전쟁은 유럽에서 발생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40년 유럽 본토에서 수많은 국가들이 참전하며 오스트리아 황위를 두고 전쟁이 일어났고, 1744년에는 영국마저 전쟁에 참여해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전쟁이 막 터진 당시 인도 대륙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동인도 회사가 모두 존재했는데, 아무래도 먼 타향에서 같은 유럽인이라는 이유로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 본토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 측은 최대한 영국인들과 갈등을 피하려 들었지만 반대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 내 프랑스인들을 적대하기 시작한 것. 영국은 로열 네이비를 동원해 프랑스의 상선들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빡친 프랑스 역시 이에 대응해 군대를 동원하면서 이젠 인도에서마저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 터지게 생긴 것이다.
당시 프랑스 측의 총사령관은 1715년 인도에 도착한 듀플렉스 경이었다. 듀플렉스 경은 1742년에는 인도 주재 프랑스 총독으로 임명되며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인도 내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1746년에 네가파탐 지방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 해전이 일어났고 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이 패퇴하며 벵골로 물러났다. 프랑스는 기세를 몰아 9월에는 첸나이 마드라스의 영국 요새를 함락했고, 협상 과정에서 다시 영국에게 돌려주기로 약속했지만 중간에 듀플렉스가 파토내버렸다. 그렇게 영국군이 인도 내 프랑스 세력의 중심지인 퐁디셰리를 공성하기도 하는 등 양측은 지지부진한 싸움이 이어지다가 유럽에서 계승 전쟁이 종전되자 인도의 1차 카나틱 전쟁도 끝난다. 프랑스는 영국군에게 마드라스 요새를 돌려주는 대신 북아메리카의 루이스버그 요새를 반환받았다. 프랑스는 여전히 하이데라바드의 보호국으로 남았고, 별다른 세력 구도 변화는 없었다.[10]
2.5.2. 제2차 카나틱 전쟁(1749~1754)
하이데라바드의 니잠이었던 아사프 자흐 1세는 제대로 된 후계를 세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가 죽자 아들 나시르 중과 손자 무자파 중 사이에서 왕위를 다투는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인도에 영향력을 키울 기회만을 노리던 프랑스와 영국 역시 당연히 이 계승 전쟁에 한 손 거들었다. 프랑스는 무자파 중을 지원했고 영국은 반대로 나시르 중을 지원했다. 1차 카나틱 전쟁의 여파가 끝나지 않은 1749년에 양국이 지원하는 무자파 중과 나시르 중이 격돌하면서 사실상 프랑스와 영국의 대리전이 일어나니 이를 제2차 카나틱 전쟁이라고 부른다. 무자파 중의 편에는 찬다 사히브와 프랑스가 있었고 나시르 중 곁에는 무함마드 알리와 영국이 있었다. 처음에는 영국이 지원하던 나시르 중이 중간에 급사해 죽어버리면서 무자파 중이 승리하는 듯 싶었지만, 무자파 중 역시 결투하다가 숨지면서 전세는 예측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무자파 중이 전혀 예상치 못하게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급박하게 변했다. 무자파 중을 지원하던 프랑스는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의 동의조차 받지 않고 그의 형제 살라밧 중을 새로운 하이데라바드와 데칸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살라밧 중은 4월에 하이데라바드에 입성해 니잠을 자처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살라밧 중의 형제이자 무굴 제국의 장군이던 니잠 웃다울라는 살라밧 중이 하이데라바드를 먹는 것을 보고 크게 질투했고, 결국 마라타 동맹의 도움을 받아 무굴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15만 대군을 이끌고 하이데라바드를 침공했다. 하지만 프랑스 군대는 1751년 12월 월식의 이용해 마라타 군대와 니잠 웃다울라의 군대에 대승을 거두고 아마드바드 조약을 체결해 마라타 동맹을 하이데라바드 너머로 쫒아냈다. 니잠 웃디울라는 무굴 제일의 적인 마라타와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부하들에게 독살당해 죽었다.
하지만 살라밧 중도 얼마 못가 하이데라바드에서 쫒겨났다. 1751년 로버트 클라이브가 영국군을 데리고 아르콧을 점령했고, 아르콧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도시를 방어해냈기 때문. 1754년에는 퐁디셰리 조약을 맺고 무함마드 알리 칸이 새로운 카나틱의 나와브로 임명되었다. 1753년에 살라밧 중과 프랑스 군대는 동맹을 맺고 마라타인들이 차지하던 키르카스 북부 지방을 공격했다. 당시 무굴 제국을 꺾고 인도 최대의 세력으로 군림하던 마라타 동맹 역시 서양의 막강한 화력과 앞선 과학 기술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1754년에는 라고지 본슬레 1세를 패배시켰고, 이후에도 3년 동안 인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마라타 군대를 쫒아내며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렇게 살라밧 중이 마라타 군대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의 도움이 컸다. 프랑스가 인도 내부의 아군을 늘리기 위해 살라밧 중에게 막대한 지원을 퍼부으며 1757년 경에 일반 대포보다도 훨씬 빠르게 발사가 가능한 화기들을 다수 지원해주었기 때문.
[1]
現
인도
델리.
[2]
現
인도
델리.
[3]
이게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아흐마드는 이 시절의 영향으로 황제에 즉위한 이후에도
하렘과 황비들에게 지나치게 의지하게 된다.
[4]
당시 무굴 제국 전체보다 더 힘이 강했다.
[5]
이때 이미 무함마드 샤는
나디르 샤의 델리 약탈과 계속된 반란으로 심신이 지나치게 지친 상태였다. 거기서 더이상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진 것.
[6]
무굴 제국의 관직. 나와브 정도에 해당되는 최고위급 관직이었다.
[7]
마라타 동맹에서 황제를 뜻하는 칭호였다.
[8]
물론 마라타 동맹이 공짜로 해준 것은 아니었고,
아그라와
아지메르 등 막대한 영토를 뜯어갔다.
[9]
이 소식을 듣고 사프다르 장은 충격을 받고 사망했다.
[10]
한편 이 1차 카나틱 전투는 영국의 인도 식민화의 토대를 놓은
로버트 클라이브가 처음으로 참여한 전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