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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조가 1786년(정조 10)에 후궁 의빈 성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묘지명이다.2. 내용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문효(세자)가 병오년(1786년) 5월에 죽었고 여섯 달이 흘러 갑신(9월 14일)에 빈 또한 죽었다. 세상을 떠난 지 석 달이 지나 경인(11월 20일)에 고양군 율목동에 있는 문효(세자)의 무덤 왼쪽 산등성이 임좌(정남향에서 약간 동쪽으로 기울어진 방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빈은 문효(세자)를 잃고 나서 항상 죽고 나면 문효(세자)의 묘 가까이에 장사 지내기를 바랐는데 마침내 소원을 이루었으니 빈은 오히려 한을 풀고 문효(세자)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을는지. 오호라 슬프다.
빈은 나면서부터 밝고 총명하여 돌이 지나자 능히 이름을 구분할 줄 알았다. 용모가 깨끗하고 행동은 단정하고 상서롭고 온화했다. 열 살이 넘어서 궁중에 뽑혀 들어왔는데 모든 왕실 친척 여인들이 높은 집안 혈통인 줄 알았고 타고난 기품이 남달라 능히 겸손을 지니고 검약을 이행했다. 의리의 큰 부분을 밝게 분별하고 굳게 지키는 바가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당시 내전( 효의왕후)에게 아직 후사가 없다고 슬프게 울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사양하였고 죽어도 명을 따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나는 감동하여 다시 다가가지 않았다. 15년이 흘러 널리 후궁을 뽑고 나서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고사하였는데 사속(하인, 노비)을 책벌하자 스스로 명을 받들었다. 당석(잠자리) 한 달에 임신을 하여 임인년(1782년) 9월에 원량(왕세자)을 낳았다. 그 해에 소용으로 봉했고 금세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으니 아들이 왕세자가 되어서였다. 이에 더욱 스스로 삼가고 두려워하며 내전에게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정성껏 예를 갖췄다. 시침(밤에 웃전을 모시는 일) 할 때 말하기를 "이제 나라의 형세가 의탁할 데가 있지만 위로는 내전(효의왕후)이 있고 또 후궁( 화빈 윤씨)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다시 당석하지 않으려 간절히 간하고 사양하며 피했다.
내전(효의왕후)은 이미 그 아들(문효세자)을 자기 아들로 삼았으나, 가령 양육을 할 때는 반드시 생모에게 맡겼으니 곧 우리나라(조선)가 예로부터 전해오는 규칙과 정례였다. 빈은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고 내전을 따랐고 내전(효의왕후)은 빈이 양육 하여금 하여 조금 장성하기를 기다렸다. (빈은) 곧 삼가 살피며 반드시 밤부터 아침까지 불을 밝혔고 잠을 잘 때는 옷을 벗은 적이 없기를 5년 동안이 하루 같았다. 몸소 천한 일을 하고 (문효세자에게) 극진하게 존중하며 말했다. 혹자가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고 말하면 대답하기를 "저군(왕세자)은 내전(효의왕후)의 아들입니다. 내가 어찌 감히 내가 낳은 자식이라며 스스로를 높이겠습니까?" 하였다. 거처는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고 옷을 입고 음식을 먹는 데 있어서는 소박함을 따랐는데 (빈이) 말하기를 "내 오늘날의 부귀영화는 대단히 분수에 넘치는데 도리어 더욱 스스로를 과시하고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면, 어찌 나 자신에게 재앙이 오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동궁(왕세자)을 위해 복을 아낀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1786년) 5월의 변고(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사망)를 당했을 적에 능히 이성적으로 비유하여 견디며 얼굴빛과 말에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이 혹 괴이하게 여기고 어찌 조금도 걱정이 없냐고 하자 이르기를 "내 몸은 스스로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근심하면 나라에 큰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어찌 그리 병에 걸렸는가? 증세는 약과 침술로 고치지 못하였고 한 달 만에 병이 깊어졌다. (빈이) 날마다 필히 세수하는 모습을 내가 가서 보았다. 비록 정신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몸은 움직일 수 없어도 나를 대할 때는 의관을 정제하고 기력을 내서 메아리가 울리듯이 응답했다. 임종하기 전날 밤에 내가 (빈에게) 가자 홀연히 처량하게 말보다 앞서 눈물을 흘렸다. 내가 꾸짖으며 말하기를 "평소에 나를 볼 때 슬픈 얼굴을 한 적이 없었거늘 이제는 이와 같으니 어째서인가?" 하였다. 빈이 대답하기를 "내전(효의왕후)이 아들을 낳는 경사를 전부터 지극히 축원했습니다. 천신(천한 신하)이 다시 임신을 한 것이 비록 종사에는 매우 다행이지만 남몰래 근심과 두려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복이 분수에 넘쳐서 병이 위독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예전부터 바라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다다라서 애달픕니다. 혹 바라온데 자주 정전에 납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한다면 장차 다가오는 경사를 지하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감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정리하고 자리에 나아가 (생을) 다하였다. 내가 들어가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빈이 나라를 위하고 내전(효의왕후)을 참으로 위하는 지극한 정성에는 거짓이 없었으니 어찌 죽음을 앞두고 이와 같이 간곡하겠는가? 내전은 일찍이 그 성의에 매우 친밀하여 (빈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이 마치 형제를 잃는 듯했고, 궁 안 사람들은 탄식하고 애석해하며 통곡하고 부르짖기에 이르렀다.
빈이 내명부 후궁 품계를 받은 후로 나는 더욱 엄하게 단속하여 이따금씩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처지였으나 (빈은) 기꺼이 한마음으로 왕명을 받들었다. 간혹 은택에 대해서는 오히려 두려워하며 멀리했으니 시간이 흘러도 겸손한 마음을 그대로 지켰다. 일찍이 빈의 집안 묘지 터가 이롭지 아니하니 논의하여 이장하자고 하자 빈이 간언하기를 "천한 집안의 일에 번거롭게 관청의 돈을 쓰는 일은 사사로운 뜻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이장은 중대한 일이라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니 원하건대 옷감을 팔아서 이장하는데 드는 비용을 보충하라." 하였다. 동궁(왕세자)의 외가 사친(생외조부모)은 예에 따라 찬성으로 추증하지만 나는 일찍이 허락하지 않고 있다가 5월에 (문효세자) 상을 당하고 나서 교지를 내렸다. 빈은 두려워하기를 마지않았고 집안사람이 주청하여 분황(관직을 추증할 때 지내는 의식)을 하려고 하자 빈이 말리며 이르기를 "추증은 곧 나라의 법전에 기재되어 있어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없으나 또 어찌 감히 함부로 장대히 하겠는고." 하였다. 이처럼 내가 빈에게 매양 은수(임금이 특별히 내리는 하사품)를 인색하게 내리는지라 음식과 옷감이 도리어 궁녀보다 못하였으나, 빈은 비록 능히 몸을 굽히고 검소함을 좇아 이행하였다. 그럼에도 걱정하면서 가난하고 군색하더라도 번번이 궁중 사람들에게 빌려줘서 빈이 죽고 나자 옷상자에 남아 있는 비단이 없어서 염습(고인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 할 때 모두 저자에서 구하였다. 생전에 은 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고인의 입속에 쌀, 구슬, 동전 등을 넣음)을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하였다. 궁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로 말하기를 "빈이 지켜 온 일을 진실로 알고 있었으나 진정한 청빈이 마침내 여기에 이른단 말인가." 하였다.
빈에게는 두 오라버니가 있는데 곤궁하여 스스로 살아갈 길이 없건만 일찍이 사사로이 도와준 적이 없었다. 내가 타이르며 말하기를 "조정의 관작은 대단히 함부로 내릴 수 없건만 너는 어찌하여 남은 녹봉으로 굶주림과 추위를 도와주지 않는가?" 하였다. 빈이 근심하며 대답하기를 "궁방이 설치된 후로 감히 웃전의 허락 없이는 한 물건도 제멋대로 쓰지 않았는데 하물며 사가의 천한 사람을 위하여 은덕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 때문에 빈의 상사에 친족은 대체로 옷과 신발을 빌렸다고 한다. 후궁의 가족은 관직이 없으면 궁중 출입을 허락받을 수 없으나 본궁에서는 접견을 허락하는 정례가 있었다. 그러나 빈은 본궁에 나가서 지내더라도 몇 년 동안 격조한 가족이 왔을 때 대문을 넘지 못하도록 하며 말하기를 "올 때 감히 웃전의 허락을 받지 아니하고는 만날 수 없다." 하였다. 대저 형제가 곤궁하고 난처하면 돕고자 하고 가족과 오래 떨어져 지내면 만나고자 함이 인지상정이거늘 빈이라고 어찌 다른 사람과 다르겠는가? 내 명을 삼가 지키고 한 가지 일도 마음대로 하지 않았음을 이를 통해 충분히 증험하였다. (빈은) 궁궐에 거처한 지 20여 년 되었는데 아직 다른 사람을 못마땅하게 본 적이 없고, 혹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서 다가가기 꺼려지더라도 자세하고 원활하게 하여 일이 이치에 맞고 옳게 이르도록 하였다.
나는 평소 밖에서 하는 말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고 빈 또한 묵묵히 응하면서 대화 주제가 내정을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혹 처소에 이르면 부리는 궁중 여종들은 두려워서 숨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빈이) 스스로 삼가고 엄하게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바가 이와 같았다. 여공(수, 바느질, 길쌈 등)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하는 것은 여사였고 문장 또한 예사 사람보다 뛰어났으니, 수리학을 배우면 자세하고 분명하게 알고 능히 깨달았다. 대개 정신과 식견이 열려서 진리를 깨달아 이르는 곳마다 밝게 깨달았으니 단지 재능과 기예만 완전히 갖춘 것에 그치지 않았다. 아, 빈의 장례 때 반드시 내가 비명(비석에 새긴 글)을 쓰는 것이 어찌 재주와 용모를 잊지 못해서 그러하겠는가?
나는 궁중을 다스림에 있어서 엄격하고 가혹하여 일을 할 때 아랫사람이 명을 받드는 데 있어서 뜻이 맞을 때가 적었다. 빈은 후궁의 대열에 든 지 20년이 되는데 교훈으로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를 삼게 하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뜻을 지켰다. 응대할 때는 법도가 있었고 스스로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이것은 출중하게 어질어도 참으로 어렵다. 분수를 삼가 지키고 신분의 높낮음에 질서가 있고 엄격했다. 사적인 알현은 통렬히 끊었고,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킬 때 물이 찬 그릇처럼 조심하는 일을 경계하고 염려하였으니 이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제 의리의 관계는 지극하여 옳고 그름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나, 감히 말을 할 수 없고 일의 형세가 손을 쓸 수 없게 되어도 오히려 능히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있는 힘을 다하여 물러서지 않고 지킨 의리는 마침내 지극히 마땅하고 바른 곳으로 가도록 하는 것은 글을 읽는 선비들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혹 그러한 사람이 있는다면 절조를 능히 잘 지킨다고 여길 수 있다고 당대에 이를 전하는 미담과 후일의 상론(옛사람을 평론함)이 될 것이다.
빈은 출신이 한미하여 스승의 도움을 받지 못했으나 잉첩의 도리를 배우지 않아도 이치를 알았으니, 내전(효의왕후)을 위한 애타는 마음과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은 천지신명도 인정할 것이고 쇠와 돌도 뚫는다. 한 몸의 높고 귀한 영화를 즐거워하지 않았고 한 몸의 높고 귀한 영화를 즐거워하지 않았고 언제나 간절하고 충정을 다하여 매우 간절한 말로서 반드시 내전을 위해 정성을 바치고자 하였다. 이로써 장차 죽음을 앞두고 애달프게 우는 것은 평생 동안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니, 비록 옛날에 죽은 뒤에도 간하는 충심과 배를 찌르는 정성도 진실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을 것이며 덕을 지키는 마음가짐이 순수한 것은 본연에서 나온 것임을 징험할 수 있다.
마땅히 어진 아들을 낳아 왕세자의 자리를 계승하여 국가의 형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안정되는 공로를 세웠고 경사스럽게 왕실을 흥성하였으나, 국운이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많이 어긋나서 창졸간에 올해 여름 상변(1786년 5월,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어찌 배 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났으니 빈의 자취는 장차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 것이다.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기술하지 않는다면 누가 알고 전할 것인가. 끝내 사라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면 이것은 오직 빈 혼자만의 한이 아니라 문효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마침내 대략 찬차(가려 뽑아 차례를 정함) 하였는데 (내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말이 길어졌다.
빈은 계유년(1753년) 생이고 향년 34세로서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첫해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빈은 창녕인으로 창녕 성씨이니 고려 중윤 인보가 시조가 되고 중윤의 아들 송국이 문하시중을 지냈고 삼대 이후에 비로소 본조(조선)에 들어와 여완은 검교정승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었다. 문정의 첫째 아들은 석린, 둘째 아들은 석용이고 셋째 아들 석인은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냈고 시호는 정평이었으며 빈의 선조가 된다. 가문이 중도에 기울어져서 보계를 잃었다. 7대조 만종이 제릉 참봉을 지냈고 고조 경이 군자감 정을 지냈다. 아버지 윤우는 찬성을 추증 받았고 어머니 (부안) 임씨는 정경부인으로 추증 받았으니 인의를 지냈던 종주의 딸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하늘을 따르는 행동은 돈독한 행실이고 사람을 말로 감동시키는 것은 지극한 말이다. 몸소 정중히 행동하며 입으로는 지극한 말을 했으나 복록은 덕의 부응을 받지 못하고 위태로워졌으니 운명인가 보다. 저 고요한 율천은 문효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길이 서로를 지켜줄 터이나 백세동안 배회할 것을 생각하며 상심할 것이다.
수록대부(상보국숭록대부) 금성위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 박명원( 화평옹주의 남편)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전면을 삼가 기록합니다.
통정대부 이조참의 겸 규장각 검교 직각 지제의 신 서용보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음기를 삼가 기록합니다.
숭정기원(1628년)후 세 번째 병오(1786년, 정조 10) 11월 (미상) 일에 세우다.
빈은 나면서부터 밝고 총명하여 돌이 지나자 능히 이름을 구분할 줄 알았다. 용모가 깨끗하고 행동은 단정하고 상서롭고 온화했다. 열 살이 넘어서 궁중에 뽑혀 들어왔는데 모든 왕실 친척 여인들이 높은 집안 혈통인 줄 알았고 타고난 기품이 남달라 능히 겸손을 지니고 검약을 이행했다. 의리의 큰 부분을 밝게 분별하고 굳게 지키는 바가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당시 내전( 효의왕후)에게 아직 후사가 없다고 슬프게 울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사양하였고 죽어도 명을 따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나는 감동하여 다시 다가가지 않았다. 15년이 흘러 널리 후궁을 뽑고 나서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고사하였는데 사속(하인, 노비)을 책벌하자 스스로 명을 받들었다. 당석(잠자리) 한 달에 임신을 하여 임인년(1782년) 9월에 원량(왕세자)을 낳았다. 그 해에 소용으로 봉했고 금세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으니 아들이 왕세자가 되어서였다. 이에 더욱 스스로 삼가고 두려워하며 내전에게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정성껏 예를 갖췄다. 시침(밤에 웃전을 모시는 일) 할 때 말하기를 "이제 나라의 형세가 의탁할 데가 있지만 위로는 내전(효의왕후)이 있고 또 후궁( 화빈 윤씨)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다시 당석하지 않으려 간절히 간하고 사양하며 피했다.
내전(효의왕후)은 이미 그 아들(문효세자)을 자기 아들로 삼았으나, 가령 양육을 할 때는 반드시 생모에게 맡겼으니 곧 우리나라(조선)가 예로부터 전해오는 규칙과 정례였다. 빈은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고 내전을 따랐고 내전(효의왕후)은 빈이 양육 하여금 하여 조금 장성하기를 기다렸다. (빈은) 곧 삼가 살피며 반드시 밤부터 아침까지 불을 밝혔고 잠을 잘 때는 옷을 벗은 적이 없기를 5년 동안이 하루 같았다. 몸소 천한 일을 하고 (문효세자에게) 극진하게 존중하며 말했다. 혹자가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고 말하면 대답하기를 "저군(왕세자)은 내전(효의왕후)의 아들입니다. 내가 어찌 감히 내가 낳은 자식이라며 스스로를 높이겠습니까?" 하였다. 거처는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고 옷을 입고 음식을 먹는 데 있어서는 소박함을 따랐는데 (빈이) 말하기를 "내 오늘날의 부귀영화는 대단히 분수에 넘치는데 도리어 더욱 스스로를 과시하고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면, 어찌 나 자신에게 재앙이 오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동궁(왕세자)을 위해 복을 아낀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1786년) 5월의 변고(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사망)를 당했을 적에 능히 이성적으로 비유하여 견디며 얼굴빛과 말에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이 혹 괴이하게 여기고 어찌 조금도 걱정이 없냐고 하자 이르기를 "내 몸은 스스로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근심하면 나라에 큰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어찌 그리 병에 걸렸는가? 증세는 약과 침술로 고치지 못하였고 한 달 만에 병이 깊어졌다. (빈이) 날마다 필히 세수하는 모습을 내가 가서 보았다. 비록 정신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몸은 움직일 수 없어도 나를 대할 때는 의관을 정제하고 기력을 내서 메아리가 울리듯이 응답했다. 임종하기 전날 밤에 내가 (빈에게) 가자 홀연히 처량하게 말보다 앞서 눈물을 흘렸다. 내가 꾸짖으며 말하기를 "평소에 나를 볼 때 슬픈 얼굴을 한 적이 없었거늘 이제는 이와 같으니 어째서인가?" 하였다. 빈이 대답하기를 "내전(효의왕후)이 아들을 낳는 경사를 전부터 지극히 축원했습니다. 천신(천한 신하)이 다시 임신을 한 것이 비록 종사에는 매우 다행이지만 남몰래 근심과 두려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복이 분수에 넘쳐서 병이 위독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예전부터 바라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다다라서 애달픕니다. 혹 바라온데 자주 정전에 납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한다면 장차 다가오는 경사를 지하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감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정리하고 자리에 나아가 (생을) 다하였다. 내가 들어가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빈이 나라를 위하고 내전(효의왕후)을 참으로 위하는 지극한 정성에는 거짓이 없었으니 어찌 죽음을 앞두고 이와 같이 간곡하겠는가? 내전은 일찍이 그 성의에 매우 친밀하여 (빈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이 마치 형제를 잃는 듯했고, 궁 안 사람들은 탄식하고 애석해하며 통곡하고 부르짖기에 이르렀다.
빈이 내명부 후궁 품계를 받은 후로 나는 더욱 엄하게 단속하여 이따금씩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처지였으나 (빈은) 기꺼이 한마음으로 왕명을 받들었다. 간혹 은택에 대해서는 오히려 두려워하며 멀리했으니 시간이 흘러도 겸손한 마음을 그대로 지켰다. 일찍이 빈의 집안 묘지 터가 이롭지 아니하니 논의하여 이장하자고 하자 빈이 간언하기를 "천한 집안의 일에 번거롭게 관청의 돈을 쓰는 일은 사사로운 뜻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이장은 중대한 일이라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니 원하건대 옷감을 팔아서 이장하는데 드는 비용을 보충하라." 하였다. 동궁(왕세자)의 외가 사친(생외조부모)은 예에 따라 찬성으로 추증하지만 나는 일찍이 허락하지 않고 있다가 5월에 (문효세자) 상을 당하고 나서 교지를 내렸다. 빈은 두려워하기를 마지않았고 집안사람이 주청하여 분황(관직을 추증할 때 지내는 의식)을 하려고 하자 빈이 말리며 이르기를 "추증은 곧 나라의 법전에 기재되어 있어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없으나 또 어찌 감히 함부로 장대히 하겠는고." 하였다. 이처럼 내가 빈에게 매양 은수(임금이 특별히 내리는 하사품)를 인색하게 내리는지라 음식과 옷감이 도리어 궁녀보다 못하였으나, 빈은 비록 능히 몸을 굽히고 검소함을 좇아 이행하였다. 그럼에도 걱정하면서 가난하고 군색하더라도 번번이 궁중 사람들에게 빌려줘서 빈이 죽고 나자 옷상자에 남아 있는 비단이 없어서 염습(고인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 할 때 모두 저자에서 구하였다. 생전에 은 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고인의 입속에 쌀, 구슬, 동전 등을 넣음)을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하였다. 궁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로 말하기를 "빈이 지켜 온 일을 진실로 알고 있었으나 진정한 청빈이 마침내 여기에 이른단 말인가." 하였다.
빈에게는 두 오라버니가 있는데 곤궁하여 스스로 살아갈 길이 없건만 일찍이 사사로이 도와준 적이 없었다. 내가 타이르며 말하기를 "조정의 관작은 대단히 함부로 내릴 수 없건만 너는 어찌하여 남은 녹봉으로 굶주림과 추위를 도와주지 않는가?" 하였다. 빈이 근심하며 대답하기를 "궁방이 설치된 후로 감히 웃전의 허락 없이는 한 물건도 제멋대로 쓰지 않았는데 하물며 사가의 천한 사람을 위하여 은덕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 때문에 빈의 상사에 친족은 대체로 옷과 신발을 빌렸다고 한다. 후궁의 가족은 관직이 없으면 궁중 출입을 허락받을 수 없으나 본궁에서는 접견을 허락하는 정례가 있었다. 그러나 빈은 본궁에 나가서 지내더라도 몇 년 동안 격조한 가족이 왔을 때 대문을 넘지 못하도록 하며 말하기를 "올 때 감히 웃전의 허락을 받지 아니하고는 만날 수 없다." 하였다. 대저 형제가 곤궁하고 난처하면 돕고자 하고 가족과 오래 떨어져 지내면 만나고자 함이 인지상정이거늘 빈이라고 어찌 다른 사람과 다르겠는가? 내 명을 삼가 지키고 한 가지 일도 마음대로 하지 않았음을 이를 통해 충분히 증험하였다. (빈은) 궁궐에 거처한 지 20여 년 되었는데 아직 다른 사람을 못마땅하게 본 적이 없고, 혹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서 다가가기 꺼려지더라도 자세하고 원활하게 하여 일이 이치에 맞고 옳게 이르도록 하였다.
나는 평소 밖에서 하는 말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고 빈 또한 묵묵히 응하면서 대화 주제가 내정을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혹 처소에 이르면 부리는 궁중 여종들은 두려워서 숨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빈이) 스스로 삼가고 엄하게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바가 이와 같았다. 여공(수, 바느질, 길쌈 등)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하는 것은 여사였고 문장 또한 예사 사람보다 뛰어났으니, 수리학을 배우면 자세하고 분명하게 알고 능히 깨달았다. 대개 정신과 식견이 열려서 진리를 깨달아 이르는 곳마다 밝게 깨달았으니 단지 재능과 기예만 완전히 갖춘 것에 그치지 않았다. 아, 빈의 장례 때 반드시 내가 비명(비석에 새긴 글)을 쓰는 것이 어찌 재주와 용모를 잊지 못해서 그러하겠는가?
나는 궁중을 다스림에 있어서 엄격하고 가혹하여 일을 할 때 아랫사람이 명을 받드는 데 있어서 뜻이 맞을 때가 적었다. 빈은 후궁의 대열에 든 지 20년이 되는데 교훈으로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를 삼게 하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뜻을 지켰다. 응대할 때는 법도가 있었고 스스로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이것은 출중하게 어질어도 참으로 어렵다. 분수를 삼가 지키고 신분의 높낮음에 질서가 있고 엄격했다. 사적인 알현은 통렬히 끊었고,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킬 때 물이 찬 그릇처럼 조심하는 일을 경계하고 염려하였으니 이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제 의리의 관계는 지극하여 옳고 그름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나, 감히 말을 할 수 없고 일의 형세가 손을 쓸 수 없게 되어도 오히려 능히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있는 힘을 다하여 물러서지 않고 지킨 의리는 마침내 지극히 마땅하고 바른 곳으로 가도록 하는 것은 글을 읽는 선비들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혹 그러한 사람이 있는다면 절조를 능히 잘 지킨다고 여길 수 있다고 당대에 이를 전하는 미담과 후일의 상론(옛사람을 평론함)이 될 것이다.
빈은 출신이 한미하여 스승의 도움을 받지 못했으나 잉첩의 도리를 배우지 않아도 이치를 알았으니, 내전(효의왕후)을 위한 애타는 마음과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은 천지신명도 인정할 것이고 쇠와 돌도 뚫는다. 한 몸의 높고 귀한 영화를 즐거워하지 않았고 한 몸의 높고 귀한 영화를 즐거워하지 않았고 언제나 간절하고 충정을 다하여 매우 간절한 말로서 반드시 내전을 위해 정성을 바치고자 하였다. 이로써 장차 죽음을 앞두고 애달프게 우는 것은 평생 동안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니, 비록 옛날에 죽은 뒤에도 간하는 충심과 배를 찌르는 정성도 진실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을 것이며 덕을 지키는 마음가짐이 순수한 것은 본연에서 나온 것임을 징험할 수 있다.
마땅히 어진 아들을 낳아 왕세자의 자리를 계승하여 국가의 형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안정되는 공로를 세웠고 경사스럽게 왕실을 흥성하였으나, 국운이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많이 어긋나서 창졸간에 올해 여름 상변(1786년 5월,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어찌 배 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났으니 빈의 자취는 장차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 것이다.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기술하지 않는다면 누가 알고 전할 것인가. 끝내 사라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면 이것은 오직 빈 혼자만의 한이 아니라 문효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마침내 대략 찬차(가려 뽑아 차례를 정함) 하였는데 (내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말이 길어졌다.
빈은 계유년(1753년) 생이고 향년 34세로서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첫해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빈은 창녕인으로 창녕 성씨이니 고려 중윤 인보가 시조가 되고 중윤의 아들 송국이 문하시중을 지냈고 삼대 이후에 비로소 본조(조선)에 들어와 여완은 검교정승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었다. 문정의 첫째 아들은 석린, 둘째 아들은 석용이고 셋째 아들 석인은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냈고 시호는 정평이었으며 빈의 선조가 된다. 가문이 중도에 기울어져서 보계를 잃었다. 7대조 만종이 제릉 참봉을 지냈고 고조 경이 군자감 정을 지냈다. 아버지 윤우는 찬성을 추증 받았고 어머니 (부안) 임씨는 정경부인으로 추증 받았으니 인의를 지냈던 종주의 딸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하늘을 따르는 행동은 돈독한 행실이고 사람을 말로 감동시키는 것은 지극한 말이다. 몸소 정중히 행동하며 입으로는 지극한 말을 했으나 복록은 덕의 부응을 받지 못하고 위태로워졌으니 운명인가 보다. 저 고요한 율천은 문효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길이 서로를 지켜줄 터이나 백세동안 배회할 것을 생각하며 상심할 것이다.
수록대부(상보국숭록대부) 금성위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 박명원( 화평옹주의 남편)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전면을 삼가 기록합니다.
통정대부 이조참의 겸 규장각 검교 직각 지제의 신 서용보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음기를 삼가 기록합니다.
숭정기원(1628년)후 세 번째 병오(1786년, 정조 10) 11월 (미상) 일에 세우다.
3. 상세
의빈의 부친 성윤우는 본래 홍봉한( 혜경궁 홍씨의 부친, 정조의 외조부)의 청지기였다. 45세에 교련관으로 무관의 반열에 올랐고 1761년(영조 37)에 유원 첨절제사를 끝으로 무관직에서 물러났다. 1769년(영조 45)에 사망했다. 모친 부안 임씨는 성윤우의 계실(繼室)이고 1756년(영조 31)에 사망했다. 의빈은 홍봉한 가문의 연으로 1762년(영조 38) 이후에 궁녀로 입궁했고, 혜경궁 홍씨가 거두어 친히 길렀다.1766년(영조 42) 무렵에 정조가 의빈에게 승은[1]을 내렸는데 의빈은 아직 효의왕후에게 자녀가 없다는 이유로 죽음을 맹세하며 정조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당시 정조는 의빈의 의사를 존중하고 물러났다.
1773년(영조 49)에 의빈은 청연공주, 청선공주, 영희, 경희, 복연과 고전 국문소설 《 곽장양문록》(전 10권 10책)을 필사했다. 이 영향으로 정조는 의빈의 붓글씨가 범상함을 넘었다고 기록했다.
1778년(정조 2)에 정순왕후(당시 왕대비)는 왕실의 후사를 위해 원빈 홍씨를 간택했다. 그러나 원빈 홍씨는 입궁한 지 1년도 안 되어 후사 없이 죽었다. 1780년(정조 4)에 두 번째로 간택된 화빈 윤씨 역시 아이를 낳지 못했다. 1780년(정조 4) 무렵에 의빈은 정조가 15년 만에 다시 승은을 내리려 하자 재차 거절했다. 그러자 정조는 의빈의 하인에게 벌을 내렸고 결국 의빈은 명을 따랐다.
1782년(정조 6)에 문효세자를 낳고 소용(昭容)에 올랐고 이듬해 의빈(宜嬪)으로 진봉했다. 당시 빈호 '의(宜)' 자는 정조가 직접 정했다. 1784년(정조 8)에 옹주를 낳았고 그해 문효세자는 왕세자로 책봉됐다. 그러나 옹주와 문효세자 모두 앞세워 보냈고 자신 역시 임신한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조는 의빈의 용모가 깨끗하고 성품은 단정하고 온화하면서 겸손하고, 총명하고 식견이 뛰어나고, 수리학에 재능이 있고, 붓글씨를 잘 쓰고, 여공(수, 바느질, 길쌈 등)과 요리를 잘하고, 법도를 잘 지키고, 아랫사람을 잘 다스리고, 근검절약하고, 항상 효의왕후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회고했다.
정조는 의빈의 죽음을 애도하며 묘지명, 묘표, 치제 제문, 비문 등을 썼는데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그 절절한 심정을 짐작하게 한다.
4. 대중매체에서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은 약 200년 뒤인 2005년 로맨스 소설 《 비단속옷》,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2007년 드라마 《 이산》, 2016년 뮤지컬 《정조-만천명월주인옹》, 2017년 로맨스 소설 《우아한 환생》, 《 옷소매 붉은 끝동》 등에서 각색되어 그려졌다. 또한 2021년 하반기 동명의 《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MBC에서 방영되었다.
[1]
왕이 궁녀와 합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