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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일 | 1932년 4월 15일 | |||||
해체일 | 1945년 | |||||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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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만주국 국방부 | |||||
규모 | 약 17~22만명 | |||||
총사령 | 강덕제 | |||||
참전 |
중일전쟁 소련-일본 국경분쟁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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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군은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군대이다. 1945년 8월 15일 해산 당시 15만~22만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군관구제를 실시하고 있었다.2. 역사
만주군을 다룬 오마이뉴스 기사중화민국 동북변방군(약칭 동북군), 즉 장쉐량의 봉천군벌은 30만 명의 대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고작 만여 명의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그중 6만 명 정도가 투항하는데, 이들이 만주군의 토대이다. 무기와 제복 또한 초기에는 동북군의 물자가 고스란히 사용되었다. 오합지졸이던 중국의 군벌군답게 아편 중독자가 즐비했고, 훈련도도 낮아 교전만 붙으면 깨지기 일쑤였으며 부대 이동 시에는 여러 폐가 많았다.
1933년 2월, 황제 푸이의 친위대인 금위대가 설치되었고, 1934년에는 만주국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이들만 만주군 장교로 임용되도록 법이 제정됐다.[1]
3. 계급
체계는 국민혁명군 계급과 유사한 방식이었지만, 계급장의 형태는 당연히 일본 육군식이다.구분 | 계급 | 계급장 |
원수 | 총사령[2] | |
장관 | 상 장 | |
중장 | ||
소장 | ||
교 관 | 상교 | |
중교 | ||
소교 | ||
위관 | 상위 | |
중위 | ||
소위 | ||
준사관 | 준위 | |
부사관 | 상사 | |
중사 | ||
하사 | ||
하사근무[3]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cting_Junior_Sergeant_arm_badge_%28Manchukuo%29.png |
|
병 | 상등병 | |
일등병 | ||
이등병 |
만주군 육군 장군들.
만주군 군악대.
4. 군종
4.1. 만주국 육군
자세한 내용은 만주국 육군 문서 참고하십시오.4.1.1. 만주국 헌병
자세한 내용은 만주군/헌병 문서 참고하십시오.4.2. 만주국 해군
자세한 내용은 만주국 해군 문서 참고하십시오.4.3. 만주국 공군
자세한 내용은 만주국 공군 문서 참고하십시오.4.4. 금위대
자세한 내용은 금위대(만주국) 문서 참고하십시오.4.5. 기타
4.5.1. 간도특설대
자세한 내용은 간도특설대 문서 참고하십시오.4.5.2. 흥안군
자세한 내용은 흥안군(만주국) 문서 참고하십시오.5. 해산
1945년 8월 18일,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소련군이 소만국경을 돌파해 들어오며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미 정예사단 다 빠지고 패잔병이 된 관동군도 박살나는 와중이었다. 종전 이후 만주군의 잔당들은 알아서 국부군과 인민해방군으로 갈아탔다.6. 만주군과 한국군
만주군에서는 조선인을 상당수 받아들였다. 간도특설대가 바로 만주군 소속의 부대. 만주국 패망 당시 조선인 최고 계급자는 박병두로 중장이었다.[4]그 외에 장성급으로 마천산, 임준해가 있다.[5]만주군 출신 인물들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문서의 출신 인물을 참고할 것.광복 후 만주군 출신자들은 대한민국 국군 건군 과정에서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국군 창설 후 점차 우위를 차지했다.
건군 당시의 파벌로는 만주군파 외에도 중국군파( 국부군)[6], 일본군파가 있었는데, 이들 3개 파벌 가운데 만주군파가 우위를 점한 까닭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먼저 중국군파는 숫자가 적었다. 광복군은 정통성은 있고 해방된 조국에서 당당 할 수 있었고 낯부끄럽지 않았으나 사회주의계열을 제외하면 100명을 좀 넘기는 수준이었고 사회주의계열인 광복군 제1지대와 동북항일연군도 둘이 합쳐 1000~1500명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 적은 인원 중에서도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실전경험이 전무한 인원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일제 패망 후 장교경력자 우대 명목으로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을 닥치는 대로 받아들였다. 국민당군에서 싸워봤거나, 아님 미군 교관에게 훈련받아 미국식 군사교리에 익숙했던 극소수를 제외하면[7] 실전에 써먹기 부적합한 이들이었다. 초기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남조선 국방경비대 시절)과 정부수립 후 초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대한민국 국방부차관을 모두 점유하긴 했으나 실력으로 꿰찬게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차지한 자리로 이내 밑천을 드러냈다.[8]
일본군파는 파벌에서 메인으로 등극하기에 두 가지 약점이 있었다. 하나는 미국 고문관과의 마찰이었다. 일본군파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건 당연히 육사출신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당대 아시아 최고의 군사교육기관이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입교한 최상위 엘리트라는 자부심이 강했고[9], 중일전쟁을 통해 전투경력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경력 짧은 위관급에 불과한 미국 고문관의 참견을 성가시게 여겼다. 또 나이 지긋한 사람이 많아서 사관학교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일본식 관습(대표적으로 군도패용이나.반자이 돌격 같은 인명 경시풍조)과 교리에 대한 고집이 강해서 일본군이라면 질색하던 미 고문단과 마찰이 심했다. 당연히 미군 고문관의 보고서는 악평으로 가득찼는데 국내에 기반이 없던 이승만은 미국 고문관의 보고서를 객관적 평가로 수용하고 있었다.[10]
또한 일본군파는 그 안에서 또다시 파벌이 나뉘었다. 엘리트라 자부하던 일본육사파, 그리고 전쟁 막바지에 반강제로 동원되었던 학병파, 마지막으로 장교가 아니었던 하사관파. 이들 세 파벌은 당연히 사이도 좋지 않았다. 개중 학병파는 반강제로 군에 들어왔던 이들이라 해방 이후 먹고 살기위해 군에 돌아오긴 했지만 복무의지가 강하지 않아 병사들까지 염세적으로 만든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조선이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만큼, 이들 세 파벌의 인원은 가장 많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유대감이나 결속력이 없었고, 이것이 다수임에도 만주군파에게 뒤쳐지게 된 한 이유가 된다.
만주군파는 모두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으로 단일화되어, 단결력이 좋았다. 물론 만주국육군군관학교가 일본육사처럼 고급 교육기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한 중국군벌들이 중구난방으로 세운 군사학교들 보단 체계가 잡혀 있었고,[11] 개중에서도 조선계는 몇 안되는 출세길 찾아 매달린 조선내 차상위 엘리트 계층이었다. 항일독립군이 만주에서 축출된 41년 겨울 이후로도 화북지역에서 중국군 게릴라나 마적떼 상대로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에,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변변한 게릴라전 경험도 부족했던 대다수 광복군 출신들보단 기량이 우세했다.[12] 무엇보다 만주군 시절 일본군 고문관의 지휘를 받아본 탓에 미국 고문관에도 금세 익숙해져 별다른 마찰을 빚지 않았다. 국군의 전신이 자위대처럼 미군을 보좌하던 남조선 국방경비대이며, 한국 전쟁 개전 이후에는 유엔군의 작전지휘를 받아왔음을 생각하면 큰 플러스 요소였다. 또한 만주국 건국과 입교시기를 고려하면 대부분이 청장년층의 젊은 나이여서, 새로운 방식을 쉽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당시 주한 미국군사고문단장인 로버트 준장의 서한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서한에서 중국군파는 늙고 무능하고 부패하며, 일본군파는 말이 안통하는데다 군벌이 될 가능성도 있는 맛이 간 집단으로 묘사된다.[13] 반면 백선엽, 정일권 등 호의적으로 거론되는 장교들은 모두 만주군파에 속한 인물들이다. 대부분 청장년층으로 나이까지 젊었던 그들이 국군 내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7. 기타
[1]
이는
일본에 협력했던 늙어서 말 안 듣는
군벌들을 밀어내고,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육성해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는 초급
장교들로부터
장교단을 채우기 위한 조치였다. 이렇게 밀려난
군벌들은 건국원훈 칭호를 받고 명목상 높은 지위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는 병력도 뺏기고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했다.
[2]
만주국 황제
푸이가 맡았다.
[3]
부사관에 준하는 병.
[4]
북한 평양에서 소련군에 체포되어 관동군,만주군 포로들과 함께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있었고 억류중 일본 정계에 여러번 도움을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고 하며 1956년 석방되어 일본으로 갔다.
[5]
임준해,마천산은 장성급이란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6]
광복군은 실병력이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장교단이 병사보다 훨씬 많은 기형적 구조였다. 실전 경험을 가진 장교들은 모두 국민당군에서 일본군, 공산군과 교전한 국부군 출신이었다.
[7]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중장이던 시절, 중장까지 진급하고 당시 미국 다음의 우방국이던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한
김홍일이 대표적 인물이다. 국민당군에서 군단 참모장을 지냈고, 미군 교관에게 훈련받았다.
[8]
대표적으로
송호성과
최덕신
[9]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사관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은
왕공족이나
조선귀족 정도의 상류층이 아니면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정도로 여려운 일이었다.
[10]
피를 본 가장 대표적 인물이
김석원 장군.
중일전쟁 당시 대대병력으로
국부군 사단을 격퇴하여, 해방 후
진해회담 당시 국군에 인물이 없다는 이승만의 푸념에
장제스 전 총통이 '당신 나라에 김석원이라는 명장이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가장 유명했던 그도 얄짤없었다. 단순히 유명하다 수준이 아니고 영친왕(중장)은
왕공족, 홍사익(중장)은 사형당했으므로 사실상 조선인 중 최고계급(대좌)이었다.
[11]
중국군파 육군초대사령관
송호성은 청나라때 세워진 신식군사학교인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 출신이고 경험도 쌓았지만 독도법조차 깨치지 못했다. 즉, 일부 기회 잘 잡았거나 특출난 인간 아닌 평균적인 질을 담보할 수 없었다.
[12]
식민치하 조선인들이 잡을 수 있었던 출세길 중에
고등문관시험이나 일본육사는 집에 돈 없으면 힘들었다. 그럼 쥐어짜내서 어느정도 학력은 쌓았지만 집안이 가난한 대다수 조선 청년들에게 현실적인 출세길은? 가깝게는 헌병보조나 면서기, 사범학교에 입학해서 선생님이 되기, 멀게는 만주군관학교가 된다.
[13]
중국군파 가운데 유일하게 호의적으로 평가된 인물은 미국식 군사교리에 익숙한 김홍일, 일본군파에서는
4.3 사건의 진압을 유화적으로 마무리한
유재흥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