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22:05:00

로널드 레이건/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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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평가 평가
정책 레이거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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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반적 평가3. 정치에 대한 평가
3.1. 긍정적 평가
3.1.1. 미국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다3.1.2. 공교육 향상3.1.3. 행정명령 남용 대폭 축소
3.2. 부정적 평가
3.2.1. 인권 후퇴3.2.2. 부패 사건들과 법치주의 훼손
4. 경제에 대한 평가
4.1. 긍정적 평가
4.1.1. 인플레이션 안정화4.1.2. 성공적인 재정 정책4.1.3. 효과적인 규제완화4.1.4. 자유무역 확산4.1.5. 경제성장, 실질소득, 일자리 창출의 호황4.1.6. 석유 자유화 정책4.1.7. 제조업을 쇠퇴시켰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4.2. 부정적 평가
4.2.1. 양극화와 쌍둥이 적자4.2.2. 금융업의 부실화
5. 군사, 외교에 대한 평가
5.1. 긍정적 평가5.2. 부정적 평가

1. 개요

제40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평가를 서술한 문서이다.

2. 전반적 평가

현대 미국 보수주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상징하는 인물인만큼 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가는 견해에 따라 크게 갈리는 편으로, 명과 암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통령으로 자주 손꼽힌다.[1]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정치학자나 역사학자들은 " 이 장벽을 허무시오(Tear down this wall)" 연설에서 알 수 있듯 냉전 종식의 주역이라는 점과 오늘날의 강력한 미국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훌륭한 소통능력을 보여준 대통령이라는 점을 들어 호평하지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정치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스타워즈 계획으로 대표되는 지나친 군비 확장, CIA를 앞세운 제3세계의 정치적 혼란 초래, 사회보장제도의 축소, 전통적 가치들의 복원을 위시한 기독교 근본주의 확산과 그로 인한 폐해 등을 들어 그를 비판한다. 경제학자들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20%대에 달하던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타개하여 물가를 안정시킨 업적을 높게 평가하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양극화 확대는 실책으로 평가한다.

레이건은 깔끔한 이미지와 훤칠한 외모, 뛰어난 언변 등으로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며,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많은 미국인들은 레이건 집권기인 1981-1988년을 미국의 황금기로 인식하며, 그리워하는 경향이 강하다. WASP로 대표되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백인 보수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미국 전체로 따지더라도, 적어도 2차 대전 이후 집권한 대통령 인기 조사에서는 거의 1등, 못해도 2등은 따놓은 당상이라 할 정도. 존 F. 케네디 역시도 인기 있는 대통령이긴 하나 미국 내에서는 레이건의 인기가 압도적이다. 역시나 가장 큰 이유는 냉전을 종식시켰다는 것이지만 레이건에게서 풍기는 긍정적인 분위기와 그의 재치있는 연설, 뛰어난 언변 능력, 대중 커뮤니케이션에서 보여준 국민과의 공감 능력 때문이다. 공화당 성향 미국인들에게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으며, 당내에서는 현대 미국 공화당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2] 그리고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레이건에 대해서 호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대중적인 지지를 폭넓게 받는 편이기도 하다. 정책적 지지 여부를 떠나 대중 스피치에서 보여준 그의 소통 능력과 공감 능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2009년 2월 전화 인터뷰를 통해 진행된 USA 투데이/갤럽 인기투표에서는 링컨과 국부 워싱턴, 케네디를 뛰어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3] 당장 레이건과 동시대의 신자유주의를 대표한 마거릿 대처의 경우, 각종 매체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역대 영국 총리들 중 최상위권의 평가를 받지만, 영국 내에서 안티층이 강고하다는 점을 감안하면,[4][5] 레이건이 얼마나 이미지 관리를 잘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흑인 히스패닉을 위시한 유색인종, 저소득층, 노동자, 이민자, 그리고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 사이에서의 평가는 좋지 않은데, 이란 콘트라 사건의 장본인으로서 CIA가 코카인을 들여와 미국 사회에 마약을 만연하게 만들고서는 마약과의 전쟁을 벌여 흑인 사회의 게토화를 더욱 촉진시켰으며, 감옥이 민영화되었으며, 보석금 제도가 자리잡아 빈민 유색인들의 재소율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 등, 많은 유색인들에게 레이건은 큰 비판을 받고 있다. 후술되는 NWA의 경찰 폭력 풍자곡 Fuck Tha Police나 래퍼 킬러 마이크의 디스곡 '레이건(Reagan)' 등은 그러한 흑인 사회의 목소리를 잘 보여준다. 또한 미국의 전통적 가족윤리를 내세우며 소위 '뒷골목 낙태'와 에이즈 창궐 등에 큰 책임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정치에 개입하는 기독교 세력을 방조해 기독교 근본주의를 악화시키는 바람에 정교분리가 레이건 이후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미국의 부실한 공립학교급식[6]과 형편없는 수준의 국가의료보험에 대한 책임도 제기된다. 그리하여 21세기 이후 선진국답지 않게 빈민과 마약, 약탈이 넘쳐나는 미국 사회의 문제점의 씨앗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3. 정치에 대한 평가

3.1. 긍정적 평가

저는 이것이 순전히 상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건 결코 제 주의 결과를 바꾸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해서라도 어떤 부류의 사람이 미국 대통령직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대표적인 록펠러 공화당원[7]이자 반트럼프 인사인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이미 별세한 로널드 레이건에게 자서 투표했다고 밝히며 #

그 자신은 매파였지만 당내 온건 보수들을 포용하려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부통령으로 제럴드 포드를 지명하려고 하기도 했으며[8], 그게 불발되자 역시 온건파인 조지 H. W. 부시에게 부통령을 맡겼다. 결과적으로 표의 확장성 측면에서 본인도 이득을 봤지만, 레이건의 반대파를 끌어안으려는 행보는 미국인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줬다.

상단에서 언급한 래리 호건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현대의 공화당은 레이건의 정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선 경선 토론을 할 때마다 대부분의 후보들이 "내가 바로 진정한 레이건의 후계자"라고 서로 누가누가 더 레이건을 존경하는지 경쟁을 벌인다. 그만큼 레이건이 제시한 보수주의의 방향; 즉 "미국은 신이 점지한 특별한 국가다"라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확신, "우리는 뭐든 해낼 수 있다"는 낙관주의, "큰 정부를 믿지 말라"는 신자유주의는 레이건 행정부 이래 30여 년 동안의 미국 보수주의의 진로를 결정지었으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 결정지을 것이다.

또한 낙태 반대를 거듭 천명하고 전통적 사회가치를 수호하겠다는 입장을 강경하게 하면서 민주당을 관성적으로나마 지지하던 기독교 신자들을 보수우파 쪽으로 대거 전향시켰다. 그 덕에 현재 미국의 바이블 벨트는 죄다 공화당 강세 지역. 이렇듯 레이건이 규정해놓은 새로운 보수주의는 세계적인 뉴라이트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당장 45대 미국 대통령이자 공화당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던 도널드 트럼프만 해도 레이건 신드롬의 수혜자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인데, 트럼프 캠프의 상징인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는 로널드 레이건이 사용한 슬로건을 그대로 다시 차용한 것이었다.[9]

3.1.1. 미국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다

"많은 미국인들은 6, 70년대의 혼란상과 점점 비대해지는 정부의 규모가 통제범위를 넘어섰다고 느꼈습니다. 레이건은 그 사람들이 원하던 것을 잘 짚어냈어요. 언제부턴가 미국에서 사라졌던 투명성과 낙관주의, 역동성과 기업가정신을 그들은 원했던 거죠."
- 버락 오바마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시작으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베트남 전쟁과 히피 문화의 급격한 확산,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살인사건 중에 하나인 샤론 테이트 살인사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사임, 전임자인 지미 카터의 무능, 그리고 오일 쇼크까지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던 당시 미국의 정국을 빠른 속도로 안정시켰으며 미국의 국력을 다시금 전세계에 과시했다. 적어도 뛰어난 대국민 소통 능력을 가졌다는 것만큼은 미국에서 좌우를 안 가리고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이봐 LBJ, 오늘은 몇 명의 젊은이를 죽였나?"라는 구호가 유행하고, 현직 대통령이 사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이 자기 국민들에게 "지금 경제가 어려운 건 너희들의 의식이 썩어서 그렇다"고 호통치는 혼란스러웠고 절망적이었던 6, 70년대를 레이건은 토마스 페인의 말마따나 "우리( 미국인)가 세상을 다시 만들 수 있다"라는 낙관주의로 극복해내며 어둡고 혼란스러웠던 6, 70년대 암흑기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80년대를 열었다.

3.1.2. 공교육 향상

레이건은 당시 미국 교육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교육의 수월성에 대한 국가적 위원회를 설립했다. 해당 위원회는 위기에 처한 미국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대 초반의 미국 고등학교 졸업자들은 1963년의 고졸자들에 비해 표준화된 수학 시험에서 40점 낮은 성적을 나타냈으며, 언어 영역의 경우에는 50점 더 낮았다고 한다. 13세에서 17세 중 13%가 실질적 문맹으로 간주되었고, 더 어린 연령대에서는 해당 비율이 40%에 육박했다.

이러한 진단을 바탕으로 레이건 행정부는 기초교육 강화에 주력했고, 이러한 정부의 계획과 노력을 "교육에 대한 대국민 라디오 방송(Radio Address to the Nation on Education)"을 통해 설명했다. 덕분에 레이건의 임기말인 1988년 9월에는 시험 점수들이 반등하고, 고등학교 중퇴율이 떨어졌다는 성과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3.1.3. 행정명령 남용 대폭 축소

미국 대통령의 대표적인 권한들 중 하나인 행정명령 제정은, 관점에 따라 미국 의회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될수도 있는만큼, 미국에서는 양당 중 어느 쪽이 집권하든 그 반대 진영에서는 상대 측의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남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이 현재에도 매우 빈번하다. 하지만 레이건 이전의 대통령들은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정명령을 남용했다.

이는 현대자유주의의 효시로 잘 알려진 시어도어 루스벨트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보수주의자인 직전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와 달리 사회경제에 있어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지향했고, 이러한 개입들의 일환으로 행정명령을 대폭 늘렸다. 매킨리의 경우 총 185건에 연평균 41건에 불과한 반면, 루스벨트는 총 1081건에 연평균 145건의 행정명령을 만들었다. 이렇게 행정명령 남용은 미국의 정치적 관행이 되어, 우드로 윌슨은 총 1803건에 연평균 225건,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총 3721건에 연평균 307건의 행정명령을 만들었다.

비록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임기동안에는 총 484건에 연평균 61건으로 크게 감소하지만, 존 F. 케네디가 집권하면서 다시 증가하여 레이건 직전의 지미 카터 또한 총 320건에 연평균 80건의 행정명령을 만든다. 하지만 레이건은 총 381건에 연평균 48건, 즉 카터에 비해 연평균 행정명령 제정을 40%나 감축시켰다. 덕분에 이후 대통령들 또한 레이건 이전의 대통령들보다 행정명령 남용을 훨씬 덜하게 되었고, 이것이 새로운 정치적 관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3.2. 부정적 평가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는 공적 의무보다 사적 이익을, 공공선보다 정경유착을, 노동과 가족보다 부와 명성을 중시했습니다. 80년대는 탐욕과 이기심, 무책임과 무절제, 방기의 전성기였습니다."
- 1991년 빌 클린턴

레이건은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을 정치화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또한 수정헌법 개정을 통한 낙태 금지, 학교에서의 기도 부활 등을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등 정책적으로도 이를 위협했다. 종교와 정치를 섞는 순간 골아픈 일이 일어나는데, 더이상 정치가 토론이나 타협의 영역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딴 나라들처럼 종교로 치고박고 하지 말자는 게 토마스 제퍼슨이 수정헌법 1조를 쓴 이유다.

그 외에는 언행이 너무 교양없고 무식하다는 공격도 받았다. 특히 대통령이 되어서도 점성술사 조앤 퀴글리의 조언에 따라 공식일정을 바꾸고 자신이 본 영화의 내용과 현실을 착각하거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여러번해서 측근들을 당황하게 만드는게 예사였다. 가령 ICBM은 발사 뒤에 취소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화성인의 침공에 맞서 소련과 미국이 힘을 합쳐야 할거라고 걸핏하면 이야기하는 통에 콜린 파월을 아연실색하게 하다못해 "또 저러시네"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레이건이 실시한 교도소 민영화로 인해 한 번 징역을 살게 되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 이 비판에 의하면 별로 그럴싸하지도 않은 이유[10]로 일단 체포부터 하고 본 뒤 벌금이나 징역을 살게 한다. 경범죄라 얼마 되지 않는 수감 기일이지만 그 수가 많아지면 당연히 민영교정시설의 수익이 올라간다. 또한 이런 경범죄라도 반복되다보면 가중처벌로 인해 중형까지도 선고받을 수 있다. 그리고 교도소 민영화는 교도소를 포화상태로 만들어 미국 교도소에서 가석방을 쉽게 받을수 있게 만들었다는 평가도 존재하며 이는 흉악범들도 예외는 야니다.


힙합 그룹 Run The Jewels의 멤버 Killer Mike가 로널드 레이건을 디스하는 곡인 "Reagan".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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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ald Reagan]

Our government has a firm policy not to capitulate to terrorist demands

우리 정부는 테러리스트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제도가 있습니다

That no-concessions policy remains in force

그런 제도는 물론 아직도 유효하고요

Despite the wildly speculative and false stories

추측에 근거한 거짓 소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About arms for hostages and alleged ransom payments

인질이랑 무기를 바꿨다거나 몸값을 지급했다는

We did not, repeat, did not trade weapons or anything else for hostages

우리는 정말, 다시 강조하지만 정말로 인질을 위해 무기나 어떤 것도 바꾸지 않았고

Nor will we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Verse 1]

The ballot or the bullet, some freedom or some bullshit

총알이나 투표권이나, 자유를 얻든가 개소리를 듣든가

Will we ever do it big, or keep just settling for little shit

계속 작은 것에 안주하면 큰 것을 얻을 수 없어

We brag on having bread, but none of us are bakers

빵이 있다고 자랑하지만 굽는 사람은 없어

We all talk having greens, but none of us own acres

배춧잎이 있다고 해도 땅을 가진 사람은 없어

If none of us on acres, and none of us grow wheat

땅을 사진 사람도, 농사하는 사람도 우리 중에 없으면

Then who will feed our people when our people need to eat

우리가 배고플 때 누가 우릴 먹여 살리겠어

So it seems our people starve from lack of understanding

그렇게 우리는 이해의 부족으로 굶주리고 있지

Cause all we seem to give them is some balling and some dancing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것은 농구선수와 춤밖에 없으니

And some talking about our car and imaginary mansions

우리의 차나 상상 속의 저택 이야기나 하지

We should be indicted for bullshit we inciting

우리가 뱉는 개소리 때문에 기소당할만해

Hand the children death and pretend that it's exciting

아이들에게 죽음을 건네고 멋진 일인척하지

We are advertisements for agony and pain

우린 고통을 광고하고 있어

We exploit the youth, we tell them to join a gang

젊은 아이들을 착취하고 갱에 들어가라고 말하고 있어

We tell them dope stories, introduce them to the game

약 파는 이야기를 해주며 그런 삶으로 인도하지

Just like Oliver North introduced us to cocaine

Oliver North가 우리에게 코카인을 가져다준 것처럼

In the 80's when the bricks came on military planes

80년대에 군 비행기에 실어서 말이야

[Ronald Reagan]

A few months ago I told the American people I did not trade arms for hostages

몇 달 전 미국 국민들에게 저는 무기와 인질을 바꾸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My heart and my best intentions still tell me that's true

제 가슴과 제 마음은 그게 사실이라고 아직도 말하지만

But the facts and the evidence tell me it is not

진상과 증거에 의하면 아니라는군요

[Verse 2]

The end of the Reagan Era, I'm like 'leven, twelve, or

레이건의 시대가 끝날 때 나는 열한 살이나 열두 살이었지

Old enough to understand the shit'll change forever

모든 것이 변할 거라는 걸 이해할 수 있는 나이였어

They declared the war on drugs like a war on terror

그들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처럼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

But it really did was let the police terrorize whoever

사실은 경찰에게 원하는 누구든 공포에 떨게 할 권리를 부여한 것이었지

But mostly black boys, but they would call us "niggers"

대부분은 흑인 남자아이들이었지만 그들은 우릴 '깜둥이'라고 불렀고

And lay us on our belly, while they fingers on they triggers

우릴 엎드리게 해놓고 그들의 손가락은 방아쇠 위에 놓았지

They boots was on our head, they dogs was on our crotches

그들의 신발은 우리 머리 위에 두고 개들은 x을 물고

And they would beat us up if we had diamonds on our watches

시계에 다이아가 박힌 손목시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릴 두들겨 패곤 했지

And they would take our drugs and money, as they pick our pockets

우리의 마약과 돈을 가져가고 주머니를 털었어

I guess that that's the privilege of policing for some profit

그게 바로 돈 벌려고 하는 경찰직의 특권이겠지

But thanks to Reaganomics, prisons turned to profits

레이건의 경제 정책 덕분에, 감옥은 영리시설로 변했지

Cause free labor is the cornerstone of US economics

미국 경제의 초석은 자유민의 노동이잖아

Cause slavery was abolished, unless you are in prison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감옥에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You think I am bullshitting, then read the 13th Amendment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면 헌법 13조를 읽어봐

Involuntary servitude and slavery it prohibits

강제노동과 노예제도는 폐지됐잖아

That's why they giving drug offenders time in double digits

그러니까 마약사범들이 두자릿수 형을 받는 거지

Ronald Reagan was an actor, not at all a factor

Ronald Reagan은 배우였지 전혀 인자한 사람이 아니지.

Just an employee of the country's real masters

그도 그저 이 나라의 진짜 주인들의 직원일 뿐이지

Just like the Bushes, Clinton and Obama

부시 대통령 둘이나 클린턴이나 오바마 같이

Just another talking head telling lies on teleprompters

프롬프터에 써 있는 걸 읽는 떠드는 대가리 중 하나일 뿐

If you don't believe the theory, then argue with this logic

내 이론을 믿지 않는다면 이걸 반박해 봐

Why did Reagan and Obama both go after Qaddafi?

왜 레이건과 오바마 둘 다 카다피를 쫓았지?

We invaded sovereign soil, going after oil

우린 남의 나라를 침략해 석유를 찾지

Taking countries is a hobby paid for by the oil lobby

나라를 빼앗는 것이 석유 로비스트들이 후원하는 우리의 취미지

Same as in Iraq, and Afghanistan

이라크랑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마찬가지

And Ahmadinejad say they coming for Iran

Ahmadinejad는 그들이 이란을 침략할 거라 하지

They only love the rich, and how they loathe the poor

그들은 부자들만 사랑하고 빈민은 증오하지

If I say any more they might be at my door

내가 더 말을 한다면 내 문 앞에 나타날지도 몰라

(Shh...) Who the fuck is that staring in my window

(쉿...) 내 창문 안을 쳐다보는 저거 누구야

Doing that surveillance on Mr. Michael Render

Michael Render[11]를 감시하는 저 사람 말이야

I'm dropping off the grid before they pump the lead

나를 죽이기 전에 이곳에서 사라져야지

I leave you with four words: I'm glad Reagan dead

한마디만 하고 갈게: 나는 Reagan이 죽어서 기뻐

Ronald Wilson Reagan

Ronald Wilson Reagan

Ronald Wilson Reagan

Ronald Wilson Reagan

Ronald (6) Wilson (6) Reagan (6)

Ronald (6) Wilson (6) Reagan (6)

Ronald (6) Wilson (6) Reagan (6)

Ronald (6) Wilson (6) Reagan ( 666)

3.2.1. 인권 후퇴

니카라과에서 테러와 학살을 자행하던 우익 민병대 '콘트라'를 몰래 지원한 이란 콘트라 사건이 대표적이지만 임기 초에도 엘살바도르 군을 지원해 800여 명의 시민이 학살당하는 걸 그대로 방조하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을 지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아프리카의 인종주의 정권에 대한 제재 법안이 상하원을 통과하자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물론 미 의회는 다시 투표해서 통과시켰다.

자국민의 인권도 후퇴시킨 측면이 있는데, 안보를 이유로 미국인에 대한 도감청을 늘린 점이나 마약과의 전쟁을 하면서 흑인 사회를 게토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 점이 그것이다. 정작 CIA가 비행기로 코카인을 실어와 흑인 사회를 현재의 마약소굴로 타락시켜버린 것도 레이건이라 앞뒤가 안 맞기에 더 욕을 먹는다.

또한 교도소를 민영화해버렸다. 정부 지출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한 건데 재정 측면으로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있었던 건 사실이나 문제는 감옥의 주목적인 '교정'은 완전히 실패해버렸다. 사기업이 감옥을 운영하다 보니 열악한 수감환경이 큰 문제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수용자가 없어서 감옥이 망하면 안되니까 경범죄를 저질러도 감옥으로 집어넣는 풍조가 생겨났다. 그리고 갱단이 교도소를 장악해도 막지도 못했으며 그 결과로 경범죄로 들어간 범죄자가 갱단에 가입한 뒤 범죄를 제대로 배워 중범죄자가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한 마약과의 전쟁과 맞물려서 마약 관련 사범들의 수용률이 대폭 증가했다. 물론 그 주요 대상자는 만만한 흑인이나 히스패닉. 이는 당연히 재범률 증가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보석금 장사이다. 어찌어찌해서 감방에 쳐 넣게 되면 해당 피고에게 자꾸 보석을 부추겨서 돈을 왕창 뜯어냈다. 이것 때문에 빚에 허덕이는 사람이 생기는 반면 교도소는 날이 갈수록 살이 쪄 갔다. 교도소장 치고 갑부가 아닌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마약관련 초범자가 중형을 살고 나와서 완전히 인생이 망가져 손도 못쓰는 마약중독자로 추락하거나 경범죄 저질렀다가 감옥가서 흉악범이 돼서 나온다거나 등등... 거기에 80년대까지만 해도 일선 경찰력이 많이 썩어있던 상황이라 소위 악덕 경찰(dirty cop)들이 비백인 인구를 대상으로 온갖 구실을 잡아 체포하거나 증거를 조작하는 일도 꽤 있었다. 경찰들이 유색인종 때리고 구타하고 쏴죽이고 불법수색한다고 "경찰 좆까"를 부르짖는 N.W.A Fuck Tha Police가 발매된 게 1988년으로, 이런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시카고 경찰의 고문기술자 존 버지(1947~2018)가 한창 활동한 때도 같은 시기였다. 92년에 일어난 LA폭동도 레이건때부터 쌓이고 쌓이던 것이 폭발한 것.

당시 유행하던 HIV/ AIDS에 대한 대응은 방치에 가까웠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처음 검출되어 유행하기 시작한 에이즈를 두고 레이건 정부는 다분히 호모포비아적인 태도를 취하며 거진 아무 관심을 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백악관 대변인은 한 기자가 에이즈 문제의 정부 지침에 대한 질문을 하자 "혹시 기자님이 에이즈에 걸리기라도 한건지요?"라며 조롱했을 정도로 의도적인 방치를 했다.[12] 이로 인해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성교육의 부재 및 헤로인 주사 바늘 돌려쓰기 등으로 인해 저소득층이 많은 흑인 히스패닉 등 유색인 커뮤니티에게도 매우 큰 타격을 불러 왔다. 키스 해링, 안소니 퍼킨스, 이지-E, 아이작 아시모프 등 미국의 많은 문화예술인들도 에이즈에 스러져 갔다. 레이건은 그나마 정권 말기에 가서야 잠깐이나마 관심을 보였고 그때까지는 공식석상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1994년에 이탈리아의 패션업체 베네통이 그 점을 노려 '에이즈에 걸린 레이건'의 모습을 담은 광고를 만들어 파문을 일으켰다.

3.2.2. 부패 사건들과 법치주의 훼손

레이건 정권의 모든 범죄자들을 모아놓고 찍은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여있는걸 보지 못했어! 그래, 지금까지 225명이나 되지. 225명의 레이건 정권 사람들이 사임했거나, 잘렸거나, 체포됐거나, 기소됐거나, 유죄평결을 받았거나, 법이나 공직자 윤리규정을 어겼더군!
- 조지 칼린

레이건 재임기 동안 행정부의 여러 부패 사건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주택도시개발부의 장관을 비롯한 공화당 인사들이 빈민주택공공사업을 자기들과 친한 사업가들에게 용역을 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은 역대 최대의 주택도시개발부 스캔들로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은 기소위기를 맞고, 내무부 장관은 무려 24건의 중범죄로 실제로 기소되었다. 이 밖에도 환경보호청, 국방부 등에서 고위공직자들이 자금을 유용하거나 기밀을 빼돌리는 등으로 사익을 취했다.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레이건 본인은 '난 모르는 일'이라고 죄다 선을 그었다.

또한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콘트라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때 레이건은 자신은 아는게 전혀 없다고 조사관들 앞에서 증언하였고 공개적으로도 거듭 그렇게 주장하였으나 주범인 올리버 노스 중령은 회고록에서 레이건이 모든 것을 알았다고 썼다.

전문가들은 레이건의 '무관심함'이 정권 내에서 부정부패가 일어나는 것을 방치했다고 본다. 특히 고령에 건강도 좋지 않았으며, 정권 말기로 갈수록 치매의 전조도 나타나 의사소통을 잘 못하거나 국정을 파악하지 못하는 일도 잦았다.

4. 경제에 대한 평가

4.1. 긍정적 평가

4.1.1. 인플레이션 안정화

레이거노믹스는 낮은 세율, 적은 규제, 절제된 정부지출, 인플레이션 지양적 통화 정책이라는 4가지 간단한 원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록 모든 목표들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성과를 낸 것은 확실합니다.
대표적인 통화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초유의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는 등 경제관료 경제학자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지원해 준 점이 이후 미국의 호황과 제2의 전성기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다.

사실 그의 재임 초기에 인플레이션을 때려잡는 과정에서 강력한 긴축 정책을 실시하는 바람에 철강 산업 등이 쇠퇴하고 실업자가 속출하는 등 비난 여론이 크게 일어 그의 지지율이 곤두박칠쳤다. 레이건이 아닌 다른 어지간한 정치인이었다면 불만 여론 때문에 긴축을 풀고 결국 인플레이션을 때려잡는데 실패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레이건은 자신의 지지율에 단기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관료 및 경제학자들의 의견을 깊이 경청하고 결국은 고통이 따르더라도 인플레이션을 타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확고하게 밀어붙인 결과 2~3년만에 물가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경제정책에 있어서 정치적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은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경제학자들은 그를 무척 높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레이건이 집권을 시작한 시기는 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미국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또한 2차 세계 대전 이후, 매년 큰 경기변동 없이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대전으로 인한 유효 수요가 바닥이 나자 성장률마저 점점 떨어지게 되었다.

당시 미국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발생하는 초유의 스태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레이건은 카터 시절 임명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폴 볼커의 경제 정책을 끝까지 지지했다. 볼커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고금리정책을 유지했다. 문제는 볼커의 이러한 고금리 정책이 단기적으로 엄청난 불황을 초래했다는 점이다.[13] 실업률이 무려 10%를 넘었다.

레이건은 온갖 공격과 위협을 받던 폴 볼커에 대한 신임을 유지하였다. 당시 연준은 금리를 21%까지 끌어올렸는데,[14][15] 이로 인해 단기적으로 경기불황과 자산가치 저하로 많은 기업과 부동산들이 헐값에 매각되었고(당시 엄청난 버블경제를 구가하던 일본이 많이 매수했다), 당연히 레이건 정부에 대한 분노와 볼커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르듯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끝에 1982년경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성공했고 미국 경제는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레이건 취임 당시 15%였던 인플레이션이 1983년 3%로 급감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미국은 버블을 방지하고 경제를 구조조정할 수 있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전후로 일본에 대해서도 공세적 입장을 유지하며, 이를 바탕으로 빌 클린턴 대통령 시대에 이르러서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경제호황을 누리게 된다.

4.1.2. 성공적인 재정 정책

또 레이건은 당시 상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의 방해와 냉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국방예산 증액에도 불구하고 GDP 대비 정부지출을 22.9%에서 22.1%로 낮추는데 성공한다. # 또 정부지출이 연간 평균 16% 증가한 직전 카터 행정부와 달리, 레이건은 이 증가세를 9%로 낮췄다. # 레이건이 세율을 크게 낮췄기 때문에 세입이 줄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미국 연방정부의 세입은 5170억 달러에서 1조 달러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해도 28%나 증가한 것으로 산출되며, GDP 대비 연방정부 세입 또한 18.9%에서 18%로 미미하게 감소하는 것에 그쳤다. #

레이건의 세율 인하 정책의 혜택이 부자들에게 편중되었다는 주장도 실제 통계치와 거리감이 있다. 레이건이 세율 인하 정책을 실시한 1980년에서 1982년동안 상위 1%의 실효세율은 30% 감면된 반면, 상위 20%에서는 35% 감면되었고, 상위 20 ~ 40%는 44% 감면, 상위 40 ~ 60%는 46% 감면, 상위 60 ~ 80%은 64% 감면, 상위 80 ~ 100%는 263% 감면되었다고 한다. 즉 최하위 계층은 이전에 납부하던 세금보다 1.63배만큼 더 받았다는 의미인데, 이는 레이건이 세액공제를 2배 늘리고, 세금 면제 구간을 확대하고, 근로장려세제를 3배 늘린 덕분이다.[16] 이에 따라 고소득층의 조세부담율 또한 증가했는데, 상위 1%는 12.9%에서 15.4%, 상위 5%는 27.3%에서 30.4%, 상위 20%는 56.1%에서 58.6%로 증가했다. #

또 레이건의 세율 인하 정책은 민간 부문 활성화에서도 상당부분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1981년의 최고세율 인하는 각 경제주체들로 하여금 더 많은 교육을 받거나 사업을 시작해 자신들의 소득수준을 높일 인센티브가 되었고, 1986년의 세제 개혁은 오라클이나 마이크로소프트같은 신기술 관련 업계에 있는 기업들의 평균 세율을 크게 낮추어 특히 그들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

4.1.3. 효과적인 규제완화

많은 사람들이 알아채지는 못했을테지만, 레이건의 경제적 유산은 IBM PC들이 급속히 보급되도록 한 정보 혁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 기업가적 역동성과 최소한의 규제를 주창하는 그의 메세지는 매일마다 혁신이 새로운 기회들을 창출하고 기술 혁명의 시대에 걸맞은 것이었습니다. 레이건의 1기 임기는 Sun Microsystems, Compaq Computer, Dell, Cisco와 같은 미래의 IT 거인들이 창조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고, 이는 20세기 초반 이래 기업가적 정신에 의한 최대 규모의 신생 기업들의 탄생이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레이건의 조세 정책들은 혁신과 기업가적 정신을 활성화하고 벤처 자본의 성장과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촉진했습니다. 레이건이 규제를 최소화하고 고용시장을 유연화한 것 또한 기술적 발전을 포함한 경제환경의 변화에 기업들로 하여금 더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게끔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레이건이 1980년대에 입안한 정책들의 파급효과는 경제 전체에 확산되어 1990년대 정보 혁명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경제학자 마이클 맨델 #

이전 민주당 정권이 오일쇼크 때 행하던 가격 통제 정책 등 부작용이 많았던 경제 정책들과 규제들을 대거 철폐한 것도 높이 평가받는다. 레이건은 오일과 가스에 대한 가격 통제 조치들을 철폐했고, 케이블 TV, 장거리 전화 서비스, 인터스테이트 버스 서비스, 해운업에 대한 규제들을 완화했다. 그런 와중에도 보건, 안전, 환경에 관한 규제들은 최대한 남겨 놓았다. # 상단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규제 철폐가 1990년대 빛을 발하며 훗날의 경제호황에 기여했다.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오늘날의 번영하는 미국 경제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정책으로 민간 기업과 스타트업의 대규모 활성화가 이루어졌으며, 월가의 세계 금융 패권이 이루어 질 수 있게 하였다.

4.1.4. 자유무역 확산

레이건은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부터 북아메리카 대륙 국가들의 공동시장 구축을 제안했다.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는 1984년 무역과 관세에 대한 법(Trade and Tariff Act of 1984)에 서명해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유무역협정을 협상하기 위한 패스트트랙을 마련했다.

1985년에는 이스라엘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으며, 이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양자 자유무역협정이다. 1988년에는 당시 캐나다 총리인 브라이언 멀로니와 함께 미국과 캐나다 간의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17] 이는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멕시코 3국의 자유무역협정인 NAFTA의 초석이 되었다.

4.1.5. 경제성장, 실질소득, 일자리 창출의 호황

레이건 행정부는 그 전 8년의 제럴드 포드와 지미 카터 정권보다 대부분의 지표에서 큰 우위를 점하였다. 경제성장률은 평균적으로 약 3.6%였는데, 이는 그 전 8년의 2.6%보다 높았다. 1인당 GDP 증가율 역시나 2.6%였는데, 기존 8년은 1.9%였다. 실업률 역시나 7.2%에서 5.5%로 하락하였으며, '미저리 지수'(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을 합친 지표이다) 역시 19.33에서 9.72로 반토막났다.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나서인 1982년 11월부터 1990년 7월까지의 92개월동안의 지속적 성장은 제2차 세계 대전 전후를 제외하고는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경제 확장기이다. 레이건의 임기동안 미국의 실질 GDP는 약 33% 증가했는데, 이 증가분은 당시 서독 동독의 전체 GDP를 총합한만큼 많은 것이고, 또 당시 일본[18]의 전체 GDP의 2/3에 육박한다. #

또한 레이건 행정부에서 양극화가 급격히 이루어 진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절대로 하류층 소득의 하락이 아니었다. 2007년 달러 기준으로 10000달러 이하의 소득을 버는 가구의 비율은 1980년의 8.8%에서 1988년 8.5%로 감소하였고, 75000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가구의 비율은 20.2%에서 25.7%로 무려 5.5%p나 증가했다. 미국 가구들의 실질 중위소득 또한 레이건 임기동안 4000달러 증가했으며, 이는 레이건 임기 이후인 1989년에서 1995년까지의 기간동안 실질 중위소득이 1500달러 감소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

고용지표 또한 매우 양호한 모습을 보여줬다. 임기 초반에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긴축정책을 실행했을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실업률이 상승했으나,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나서는 2000만 개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되었고, 결과적으로 임기 8년동안 1610만 개의 일자리 순증가가 있었다. # 이 정도 수준의 일자리 증가는 1990년대 경제호황의 혜택을 그대로 입은 클린턴 행정부를 제외하고는 역대 최대 수준이다.

4.1.6. 석유 자유화 정책

중동이 오일 쇼크를 일으킨 다음 여전히 높았던 유가를 마가렛 대처와 함께 일명 "석유 자유화 정책"으로 치킨게임을 유발, 엄청난 폭으로 낮추었다. 물론 여러 미국 석유업체들이 파산하기도 하였으나, 여러 다른 산업들과 국민들의 체감 유가는 오히려 좋아졌다. 또한 이 정책으로 OPEC의 단합력을 와해시키며 제 3차 오일 쇼크의 발발을 억제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이로 인해 여러 국가들이 저유가의 득을 보기도 했다.

4.1.7. 제조업을 쇠퇴시켰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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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미국 제조업이 쇠퇴했다는 식의 막연한 느낌과 오해들이 다수 존재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연방준비제도에서 산출하는 월별 산업생산 지수 통계에 따르면, 레이건 취임 당시인 1981년 1월에는 산업생산지수가 51.0656이었던 반면, 레이건 퇴임 당시인 1989년 1월에는 62.3103까지 증가했다. 즉 레이건 임기동안 미국의 산업생산이 22.02% 증가했다는 것이다.

연방준비제도가 산출한 제조업 총부가가치 또한 1981년 1월에 비해 1989년 1월에 현저하게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증가세는 직전의 지미 카터가 재임하던 1977년 1월부터 1981년 1월까지의 기간동안 제조업 총부부가치가 제자리걸음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비록 레이건 임기동안 제조업 일자리가 더 늘어나지 못한 것은 맞지만, 이와 상반되게 제조업의 생산량 자체는 꾸준히 늘어난만큼, 제조업 일자리의 정체는 제조업 규모의 축소가 아니라 자동화 등 기술혁신으로 인해 이전보다 인력이 덜 필요하게 된 결과라고 해석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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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부정적 평가

부두 경제학(voodoo economics)
-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 대선후보를 놓고 경쟁하던 조지 H. W. 부시가 정부의 규모를 크게 줄이지 않고 감세만으로도 재정흑자가 가능하다는 레이건의 경제정책을 두고 한 말이다.
"노숙인들은 그들의 선택으로 노숙인이 된 것이다."
- 1984년 인터뷰에서 레이건의 발언. '경제적 소외계층'과 양극화에 대한 레이건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다.[19][20]

4.2.1. 양극화와 쌍둥이 적자

열흘 전, 레이건 대통령은 이 나라의 어떤 사람들은 요즘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불행하고 심지어 자신과 가족, 미래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걱정한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은 그 두려움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걸까요. 레이건 대통령은 "이 나라는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님의 말씀은 맞습니다.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라고 할만 합니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이 빛나는 도시의 화려함과 영광을 공유하고 있는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빛나는 도시는 아마도 백악관 베란다에서 보이는, 모두가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전부일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도시가 있습니다. 빛나는 도시에는 이면이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주택담보대출을 갚을 수 없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더욱이 그러합니다. 학생들은 필요한 교육을 받을 여유가 없고 중산층 부모들은 자녀의 꿈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만 보아야합니다. 도시의 "이 지역"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가난한 사람이 많고, 곤경에 처한 가족이 많으며, 도움이 필요하지만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더 나쁜건 그 도시에는 지하실이 있고, 그곳에는 추위에 떨고 있는 노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짝이는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도시의 거리, 배수구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대통령님, 당신의 빛나는 도시에서 당신이 보지 못하는 얼굴들, 방문하지 않는 장소에는 절망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오늘날 처한 상태입니다. 대통령은 이 나라가 단순히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라기보다는 "두 도시 이야기"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뉴욕주지사 마리오 쿠오모의 198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 中
오늘날 미국의 심각한 부채 및 양극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도 레이거노믹스에 있다는 평가가 있다. 레이건이 많은 비판을 받은 분야 중 하나가 안 그래도 많이 들어가는 군비 지출을 더욱 확대시킨 것은 당시 감세 정책을 펼치던 미국 정부의 재정에 크나큰 악화를 불러온 원인으로 여겨진다. 일례로 레이건 행정부 아래에서 정부 예산은 1년에 2.5%씩 증가했으며, GDP 기준 국가부채 비율은 26%에서 41%로 늘어났다. 또한 지니계수는 0.36에서 0.39로 크게 악화하면서 미국의 급격한 양극화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른바 미국 정부의 악명높은 "쌍둥이 적자"로 불리는 무역수지와 재정수지 동시 적자는 그의 정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폴 볼커가 시행한 미국 경제의 구조조정은 위에 나왔듯 단기적인 불황을 초래했는데 이때 사라진 일자리 중 대부분이 제조업 분야였고, 이 일자리들은 경제가 회복된 뒤에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금리로 인해 실업율이 10%를 돌파하고 미국의 농업, 제조업, 자영업 분야가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투자도 줄어들었다. 또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높은 이자율을 붙인 채권을 팔았는데, 이로 인하여 전 세계의 투자자들이 미국의 채권을 사기 위하여 달러를 구매하자 달러화의 절상효과가 나타나 메이드 인 재팬 상품들의 가격경쟁력이 상승함으로써 미국의 제조업 분야에 이중고를 안겼다. 고금리 정책이 끝난 이후 레이건 행정부는 플라자 합의로 이를 해결하려 했지만 미국의 블루칼라 일자리가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

4.2.2. 금융업의 부실화

Garn-St. Germain Depository Institutions Act(간-세인트 저메인 예금기관법)로 금융규제를 풀고 정부의 감독기능을 마비시켜 1989년 저축대부조합 파산사태를 일으킨 것도 비난받는다. 카터 정부 말기부터 레이건 정부 초기까지 폴 볼커의 지휘 아래 이뤄진 인플레이션 대책은 저축대부조합들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들은 금리 급상승 이전의 고정이율을 적용했던데다 특성상 이율을 금리보다 높일 수 없었고, 1980년대 초반의 불황으로 자산시장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즉 투자자 입장에서는 시중은행보다도 매력이 없었고 이것이 그들의 심각한 유동성 위기로 나타난 것이었다.

레이건 행정부가 추진한 법안은 조합들의 이율 제한을 철폐했고, LTV 규제를 완화했으며, 연방보험이 보장되는 예금을 이용한 위험대출을 허가했고 규제당국 예산을 줄였다. 즉, 저축대부조합들에게 숨통을 틔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려움은 지속되었고 파산이 잇따랐는데, 이 때문에 미국 연방예금보험 또한 심각한 자금 고갈이 발생하였다. 결국 레이건 행정부는 연방예보의 붕괴를 막으려 진작 문을 닫아야 했을 불량 저축은행들조차도 계속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 시기 저축대부조합들은 이러한 모럴해저드를 기반으로 50%가 넘는 성장율을 이루었다.

1989년, 레이건 집권 전 1%에 불과했던 부실조합 비율은 30%가 훌쩍 넘어있었다. 결국, 조지 H. W. 부시와 빌 클린턴 집권기에 의회에서는 제 일을 하지 못한 규제당국과 이미 파산상태에 이른 예보를 폐쇄하였으며, 대규모 베일아웃을 결정하여 대공황 이래 가장 큰 규모인 1240억 달러(현재 달러-원 환율로 130조 육박)의 국민 세금을 투입, 국가가 나서서 예금을 보장하고 부실조합들과 은행들을 청산, 업계를 구조조정하게 되었다. 또한 이 사태의 영향이 너무 큰 나머지 주정부 주도의 예금보험이라는 개념자체가 사라졌다.

금리 인상이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방향성 자체는 카터 때부터 있던 것이고, 민주당이 공동발의한 초당적 법안이기도 했지만 엄연히 레이건 행정부가 적극적으로 확대추진한 정책이었으며, 막대한 재정적자 문제를 자기 대에서 일을 키워놓고 다음 정부로 해결의 책임을 떠넘기는 무책임함은 분명 큰 비판거리다.

레이건 시기의 금융규제 완화와 빈부격차 심화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추가 규제완화와 함께 훗날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또한 큰 대가를 치르며 인플레이션을 억제시켰던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주도한 구조조정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결국 레이건 시기부터 이루어진 규제완화 기조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2008년의 금융위기를 불러왔다는 평.

5. 군사, 외교에 대한 평가

5.1. 긍정적 평가

로널드 레이건; 공산주의를 꺾은 남자
세계적인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기사 제목 #
레이건 독트린을 통해 소련을 고립시켜 데탕트 무드를 유도하였고, 이는 평화적인 냉전 종식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강경 보수 성향답게 집권 1기에는 군사 초강경파에 속한 인물이었지만 2기에는 유화파였다. 레이건의 군비 강화 정책은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불러일으켜 안 그래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침체되어가던 소련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게 해 결국 동구권 붕괴를 불러왔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이런 평가는 특히 동유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2011년에 레이건 탄생 100주년 기념 당시 미국에서는 조촐한 행사로 차분하게 기념한 반면 동유럽에서는 수도에 동상을 세우거나 그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드는 등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2005년에 공개된 기밀문서들에 의하면, 레이건은 잘 알려진 고르바초프와의 관계 외에도 그의 전임자들인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그리고 체르넨코와의 개인적인 대화에 매우 신경을 많이 썼다. 이를 바탕으로 단순한 '냉전 전사'(Cold Warrior)가 아닌, 대화로 냉전을 풀어가려는 레이건의 모습을 재탐구하는 책들이 씌여졌다. 관심이 있다면 자세한 것은 제임스 그레이엄 윌슨(James Graham Wilson)이 지은 《즉흥적인 대화의 승리》(The Triumph of Improvisation)와 제임스 맨(James Mann)이 지은 《로널드 레이건의 반란》(The Rebellion of Ronald Reagan)을 참조해보자. 해당 문서들은 National Security Archive에 온라인에 공개되어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 레익캬빅에서 하마터면 소련 고르바초프와 함께 모든 핵무기들을 영구폐기시킬 뻔했다.[21][22] 다만 레이건이 우주에서 대륙탄도미사일에 레이저빔 쏘는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 기술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고르바초프도 쉽사리 핵무기를 내려놓지 못했다.[23] 당시 대화내용을 보면 레이건이 관련 기술들을 소련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고르비로서는 믿을수가 있나.

재밌게도 소련 망국의 마지막 지도자인 고르바초프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나 소련을 무릎 꿇려서 냉전을 끝내고 핵전쟁 공포를 종결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레이건은 끝내 받지 못하였다. 레이건은 힘에 기초한 평화를 자신의 평생 안보 독트린으로 삼았던 인물인데, 레이건 시대에 앞서서 비슷한 기조를 추진해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종결시켰던 윈스턴 처칠 역시도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하고 노벨문학상을 받았었다. 대선 후보 시절 '전쟁광'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소련에 대한 강경파에 속했으며, 소련-아프간 전쟁을 지원하고 이란 콘트라 사건에 책임이 있는 등의 행보가 원인이 됐지 않았나 짐작될 뿐이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는데,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24]와 같이 김대중이 사형 집행 당하는 것을 막고[25] 6월 항쟁 시기에는 미군을 통해 전두환 정부의 군 병력 출동을 막았다.

또한 레이건 행정부의 국방예산 증액 덕분에, 레이건 집권기는 미국 군수산업 및 국방 관련 산업의 투자 및 구입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레이건 집권시기에 F-22, 험비,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 등 유명한 최첨단 무기들의 생산 및 개발이 시작되었고, 소련붕괴 후 미국산 무기가 전세계 시장을 휩쓸게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5.2. 부정적 평가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미국의 스타워즈 계획을 뚫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미국의 스타워즈( SDI) 계획에 들어가는 비용의 단 10분의 1이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얻었을 정도로 미군의 군비 지출은 낭비적인 측면이 컸다. 미국내에서는 이를 영화배우를 대통령으로 뽑은 결과라는 자조적인 평가도 나온다. 한마디로 쇼에 능했지 디테일에 충실하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확실히 소련은 군비경쟁 때문에 무너진 게 아니라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개혁이 실패하며 무너진 것이라는 견해가 인류사학적으로 합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이것 말고도 냉전사학계에서 냉전의 붕괴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소수의견들이 뜨겁게 오가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연구를 해보는걸 추천한다. 어찌 되었든 레이건 시대의 군비 확장은 이미 지미 카터 때부터 시작되어 왔던 것으로, 군비 예산 증가율은 두 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 거의 비슷했다. 다만 레이건은 카터 때보다 실속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말이다. 이렇게 치솟던 군비 지출은 후임인 조지 H. W. 부시 대에 이르러 정리되기 시작한다.[26]

또한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 지원과 이 과정에서 이란과 커넥션이 있었다는 게 밝혀진 이른바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외교 정책에서 지나치게 강경하고 '비인도적이다'라는 욕을 먹었다. 이게 언뜻 보기보다 심각한 이유는 의회가 '콘트라 지원하지 말라'고 법을 통과시켰는데도 이걸 무시하고 행정부가 폭주를 했기 때문. 거기에 레이건은 '이란과 인질을 대가로 무기를 거래한 적이 없다'고 TV 담화를 했는데, 이게 완전한 거짓말이었던 것이 불과 몇 달만에 탄로가 난 것이다.

결국 몇 달만에 이런 궁색한 말로 간접적이나마 자신의 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니카라과 사건에서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제소까지 당해 콘트라반군 지원 및 산디니스타 좌파 정부 전복 시도에 대해 국제법 위반및 피해배상 판결 배상까지 당하며 국제적 망신을 당하며 명백한 미국의 과오로 결론내려졌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국제형사재판소 판결 불복및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거부권을 행사하는 추잡함까지 불사해가며 니콰과라에 미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하는 것을 거부한다. 결국 니카라과는 유엔 총회에 호소, 94 대 3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미국을 규탄했다.

다만 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사건의 주범인 올리버 노스 중령이 청문회에 임하는 자세가 대중의 동정을 사는 등 국민 여론이 "탄핵까지 갈 사안은 아니다" 쪽으로 쏠려서 여차저차 마무리되었다.

또한 그 외 성과를 거둔 정부 정책(소련과의 군축 합의라든가)도 결국 카터 시절에 만들어진 거 레이건이 받아먹은 거 아니냐는 비난이 있다. 비슷하게 이란이 억류하고 있던 미 대사관 직원들이 레이건이 취임하자마자 풀려나서 '레이건은 나약한 카터와는 다르다'라는 국민들의 인식을 공고히 해줬는데, 사실 카터 행정부가 자기들이 퇴임하기 직전까지 끈질기게 협상한 결과물을 레이건이 받아먹은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이슬람 반군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퇴임 1년 여 전의 카터 행정부였지만, 레이건은 이 공작을 대폭 확대해서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공산주의 정권들을 속속 무너뜨리고 흔들어댔다.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이들은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과 도덕적으로 대등하다"고 치하한 것이 레이건이고,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미국의 최초 지원의혹이 있는 시점도 레이건 시절. 물론 곰덫(Bear Trap)은 효과적으로 작동해서 소련을 빈사상태로 만들고 침몰시키지만 레이건 퇴임 후 10여년 뒤에 미국도 그 덫에 걸리고 만다.

1982년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에서 너무 대놓고 영국 마가렛 대처 편을 들어주었다는 것으로도 비난받았다. 물론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는 침략자들이고, 영국을 핵심 우방국으로 삼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영국을 편을 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이러한 행보와 교도소 민영화로 인해 히스패닉들에게는 완전히 불구대천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있는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과반수가 히스패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레이건의 이런 행보는 반쯤 자충수인 셈이다.

1985년 4월에 2차대전 유럽 전선 종결 40주년을 맞이해 서독을 순방하던 중 나치 친위대 전사자들이 묻혀 있던 비트부르크의 묘지를 방문해 조의를 표한 것 때문에 엄청나게 까였다. 레이건은 '그들은 나치의 끄나풀이기는 했지만, 복잡한 정세 속에서 상황 판단을 못한 희생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고 변론하고 일정 중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 방문을 추가하는 것으로 반발을 무마하려고 했지만, 미국 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물론이고 라몬즈 프랭크 자파 같은 뮤지션들에게도 각각 'My Brain is Hanging Upside Down (Bonzo Goes to Bitburg)', 'Reagan at Bitburg'같은 노래들로 대놓고 디스당했을 정도.

1987년, 레이건은 부르키나파소 토마 상카라 통치 하에 급격한 성장에 위협을 느낀다. 급진적이고 효율적인 정책으로 부르키나파소는 4년만에 농업 생산량이 2배가 증가한다. 반미 사회주의 개혁혁명가라는 사람이 시행한 성공적인 정책으로 국가가 성장하게 된다면 주변국 역시 반미주의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 레이건 CIA는 상카라의 정적인 블레즈 콩파오레를 포섭하여 쿠데타를 사주하였고 결국 콩파오레의 쿠데타 아래 명군이었던 상카라는 4년이라는 단기간의 집권기를 가진 후 살해당한다. 이후 부르키나파소는 콩파오레의 근 30년 독재 하에 파탄국가로 전락, 오히려 상카라 집권 전보다 훨씬 못할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나락으로 굴러떨어져버렸다.


[1] Andrew L. Johns, ed., A Companion to Ronald Reagan (Wiley-Blackwell, 2015). [2] 흔히 공화당 의원들이 공화당을 지칭할 때 "위대한 레이건의 공화당"이라고 지칭할 때가 많으며 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레이건의 선거 구호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자신의 것으로 쓰기도 했고, 취임식 당일 레이건과 링컨의 성경을 사용해서 선서하였는데 이 두 인물들이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기 때문이었다. [3] 이 투표에서 케네디와 레이건은 각각 민주당, 공화당 성향의 투표자들에게 몰표를 받았으며 정치 성향에 따라서 지지도가 극적으로 갈렸다. 워싱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특히 링컨의 경우는 지지도에선 밀렸지만 정치 성향은 물론 세대 차이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모든 계층에서 고르게 고평가를 받았다. [4] 다만 정치 입문 초창기 당시 강경책을 폈던 것과 달리 대통령 시절에는 뛰어난 언변을 활용한 소통 위주로 정치 생활을 한 레이건과 달리 마거릿 대처는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답게 항상 강경일변도였기에 반대파의 미움을 크게 샀고 현대 영국에서 노동계급, 지식인 계급 앞에서 대처를 찬양하는 것은 사실상 금기시되었을 정도로 영국 내에서 안티가 많다. 당장 대처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마녀가 죽었다며 고인드립을 시전했던 것을 생각하면... [5] 반면 레이건은 전문가들에게 호평이 압도적인 대처와 달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중상위권 정도로 평가되며, 대중들에게 과대평가되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물론 레이건도 모든 대통령을 통틀어서는 상위권 정도의 평가를 받기는 한다. [6] 피자와 프렌치 프라이를 채소로 분류하는 급식이 레이건 대에 탄생했다. [7] 록펠러 공화당원들은 공화당 내 온건주의 라인으로, 보수 강경파의 계보를 잇는 레이건 측과 대립하던 계파였다. 그런 록펠러 공화당원인 래리 호건조차도 레이건을 가장 이상적인 미국 대통령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다만 호건은 공화당이 80년대 이후로 레이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레이건에 대해 어느정도 비판적인 모습도 보인적이 있다. [8] 포드는 전직 대통령 체면이 있는지라 대통령 권한을 일부 자신에게 분할해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고 당연하게도 레이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부통령의 위상이 커진 시기는 보통 레이건의 후후임자인 빌 클린턴이 재임하던 시기로 본다. 미국 부통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앨 고어가 재임하기 이전의 부통령은 실권이 없는 명예직과 다를 것이 없었으니... 아무튼 이러한 제안은 나중에 민주당 정권에서 조금 다른 형태로 실현되어 앨 고어 시기부터 부통령의 권한이 커지기 시작한다. 클린턴 행정부 이후 부통령의 권한은 공화당과 민주당을 가리지 않고 커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공화당 정권을 살펴보자면 조지 W. 부시의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는 실권자로 군림한 것으로 유명하고 도널드 트럼프의 부통령이었던 마이크 펜스 역시 정치적 경험이 일천한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이었기에 실권을 보장받은 부통령으로 알려져있다. 민주당 정권에서는 버락 오바마의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은 오바마의 정치 경력이 비교적 짧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정치적 협상과 외교 실무를 도맡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 바이든의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 역시 상당한 실권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9] 트럼프 본인은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 분명 자기가 떠올렸는데 나중에야 레이건도 옛날에 그 문구를 썼다는걸 알았다고 한다. [10] 허리를 다쳐 몸져누웠는데 개 사료를 주지 못한다고 해서 동물학대 혐의를 적용해서 체포한다든가 빚을 져놓고 그 이튿날 갚지 않았다고 사기죄로 체포한다든가 하는 괴상한 혐의로 체포한다. [11] Killer Mike의 본명 [12] '기독교적 가치의 복원'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정권을 잡은 레이건 행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에이즈는 그야말로 동성애라는 죄악에 대한 신의 징벌로써, 자기들 행정부의 아젠다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13] 물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고질적인 불경기와 카터 시기 일어난 1979년의 제2차 석유파동이다. 볼커가 정말로 배짱이 있다고 평가되는 부분은,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엄청난 고물가+경기침체의 상황에서 더욱 더 심한 경기침체를 감수하고 물가안정에 올인하였고, 결국 인플레를 잡았다는 데 있다. [14]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실질 금리는 7% 정도였다. 그래도 엄청난 거지만. [15] 참고로 이때 베네수엘라와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도 엄청 피를 봤다. 안 그래도 원자재 값이 한창 떨어지는 바람에 재정에 여유가 없어진 상태에서 고금리까지 겹치니 도저히 버틸수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 이후의 신자유주의 정책까지 펼쳐지면서 결국 21세기 들어 중남미 정권이 대거 좌파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이러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파산 자체야 당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대다수가 기초 체력이 나빠서 나자빠진 점도 있지만 그 이후의 처방과정이...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소득층들은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이 아닌 민주당 후보를 선택했다. 전체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레이건이 59 대 41로 앞선 반면, 가구소득 12500달러 이하 계층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54 대 46으로 앞섰다. # [17] 다만 당시 캐나다 내에서는 반응이 좋지만은 않았다. 반미 성향이 강한 캐나다의 진보 진영과 캐나다 자유당 친미 보수 성향인 멀로니 총리를 항해 토착양키 캐나다 경제를 미국에 종속시키려는 사대주의 매국노라고 공격했다. [18] 당시 일본 경제 버블경제 시대였다. [19] 실제로 소외계층에 대한 주택지원 등 일부 복지예산이 삭감되어 나가기도 했다. [20] 다만 미국인들의 인식 자체가 자유는 무한하지만, 책임도 무한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노숙자가 되더라도 본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으로 생각하여 신경쓰지 않는 측면도 있다. 그나마 노숙자와 빈곤층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개선된 게 대침체 이후이고, 정부와 사회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중산층들도 줄줄이 파산해서 길거리에서 카트 끌고 다니는 시대가 된 대봉쇄 때부터다. [21] 기록에 따르면 대화가 대략 이렇게 오갔다. "핵무기 50% 감축 어때요?" "아니 그거 그냥 100% 해버리죠?" "오 좋아요!" [22] 에릭 홉스봄은 " 양대 강국이 서로를 핵전쟁으로 절멸시킬 의도도 이유도 없음을 서로에게 납득시킨 이 순간, 냉전은 사실상 끝이 났었다."라고 단언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사실(냉전의 종식)을 받아들인 것은 역시나 소련 멸망 이후였다."라는 추가설명과 함께. [23] 미국이 그런 기술을 갖게 된다면 소련의 핵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은 한쪽이 선공을 하면 반대쪽이 반격을 하며 상호파괴가 확신된다는 점에서 전쟁억제력이 있는데, 만약 한쪽이 반격을 못하게 된다면? 전쟁억제력은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우리가 오늘날 은하 반대편으로 워프 포탈을 만들 가능성만큼 그 기술에 닿지 못하였다. 물론 고르바초프는 이 사실을 몰랐다. [24]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말라고 직접 서울까지 찾아와서 말했다. [25] 해당 내용은 전임자였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각별히 신경써달라고 인수인계하고 간 내용이기도 했다. [26] 특히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급속전략타격자산들을 중심으로) 육군이 많이 잘려나갔다. 해군은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낮았던 프로젝트 몇 개 날아간 것 빼고는 타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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