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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c002d><colcolor=#fff> 로널드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 Attempted assassination of Ronald Reag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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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건 대통령이 피탄되기 직전 손을 흔드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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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발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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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 1981년 3월 30일 오후 2시 27분경[EST] |
유형 | 살인미수, 과실치사[2] |
발생 위치 | 미국 워싱턴 D.C. 워싱턴 힐튼 호텔 |
가해자 | 존 힝클리 주니어 |
범행 동기 | 배우 조디 포스터의 이목을 끌기 위한 목적 |
피해자 | 로널드 레이건 / 제40대 미국 대통령 |
제임스 브래디 / 제17대 백악관 대변인[3] | |
팀 매카시 / 미국 비밀경호국 특수요원[4] | |
토마스 델리한티 / 컬럼비아 특별구 경찰관 |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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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지오그래픽 영상 |
존 힝클리 주니어가 1981년 3월 30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2.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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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부터 이틀 전인 3월 28일 힝클리는 버스편으로 워싱턴 D.C.에 도착해 파크 센트럴 호텔에 투숙했고, 신문 워싱턴 스타를 보고 레이건의 동선을 파악하며 범행 계획을 짰다. 이틀 후인 30일에 레이건은 워싱턴 힐튼 호텔에서 미국 노동단체연합(AFL-CIO)의 대표들과 오찬을 가진 후 백악관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워싱턴 힐튼 호텔은 대통령 전용 출입구가 있었고 이 출입구에서 주차 장소까지는 9m밖에 되지 않았기에 레이건이나 다른 미국 비밀경호국 요원들도 방탄복을 착용하지 않았다.
물론 거리가 9m밖에 안 되어도 대통령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에 시크릿 서비스와 경찰 당국은 주변 검문검색을 철저히 해서 안전이 확인된 사람들만 통과시켰다. 그런데 일부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 군중 속에 섞여들었고 그 중에는 힝클리도 끼어 있었다.
3월 30일 힝클리는 .22 LR 실탄 여섯 발을 꽉 채운 Röhm RG-14 리볼버 권총을 숨긴 채로 군중 속으로 숨어들었고 폴리스 라인 맨 앞까지 접근했는데 대통령 리무진과 불과 4.6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오후 2시 27분 오찬을 마친 레이건 대통령이 출구로 나왔고 역시 폴리스 라인 바깥에 서 있던 기자들이 레이건에게 질문해 댔으며 레이건은 답변을 위해 잠시 멈추었다. AP통신의 마이크 푸첼 기자가 "대통령님(Mr. President)..."이라고 질문의 서두를 말하는 순간 힝클리는 권총을 꺼내 순식간에 여섯 발을 전부 쐈다.
첫 발은 백악관 대변인 제임스 브래디(James Brady)에게 맞았고 총알은 왼쪽 눈 위 이마를 뚫고 들어가 뇌 아래쪽의 뇌 경계선 쪽에 박혔다. 첫 총소리를 들은 경찰관 토머스 델라한티(Thomas Delahanty)는 총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두 번째 총알이 그의 목 뒤에 맞았는데 총알은 그의 척추에 박혔다. 레이건 바로 옆에 있던 시크릿 서비스 요원 제리 파(Jerry Parr)는 총소리가 나는 즉시 대통령을 붙잡고 리무진에 강제로 밀어넣었고 팀 맥카시(Tim McCarthy) 요원은 리무진 앞을 막아섰다. 이 바람에 세 번째 총알은 빗나가서 맞은편 길가에 있던 창문을 맞혔다. 네 번째 총알은 맥카시 요원에게 맞았고 총알은 맥카시의 하복부에 명중하여 폐와 간을 관통하여 지나갔다. 다섯 번째 총알은 열려 있던 리무진 문의 방탄 유리에 맞았고 여섯 번째 총알은 리무진 차체에 맞아서 빗나가나 했는데, 하필 리무진 차체가 방탄재질이라 튕겨나가면서 열려 있던 리무진 문으로 들어가 안에 있던 레이건 대통령의 왼쪽 겨드랑이에 명중했다. 이 총알은 폐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서 2.5cm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근처에 있던 시크릿 서비스 요원들이 즉시 힝클리를 덮쳤지만 워낙 지근거리에서 총격을 가한 데다 힝클리가 단 1.7초만에 리볼버에 들어 있는 여섯 발을 전부 다 발사하는 바람에 대처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요원들에게 덮쳐진 힝클리는 바로 경찰차에 태워졌다.[5]
조사 과정에서 총기와 총알을 입수한 경로가 나왔는데 텍사스 댈러스에 있는 총포상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그런데 구입한 총알이 문제였다. 문제의 총알은 .22 LR이었는데 총알 중심부에 아지드화납[6]을 집어넣은 특수한 총알이었다.[7] 폭발력은 크지 않지만 체내에서 폭발하면 그 힘으로 쪼개진 총알 조각이 전방위로 퍼져나가 인체 내부에서 큰 피해를 주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실제로 첫 번째 총알이 그렇게 폭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제임스 브래디의 뇌 아래쪽에 박힌 총알이 폭발하면서 뇌에도 피해를 입힌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 델라한티 경관과 맥카시 요원, 레이건 대통령에게 박힌 총알은 폭발하지 않았는데 신관 같은 것도 없고 .22 LR 총알 중심부에 빈 공간을 만든 뒤 폭발성 물질만 소량 채워넣은 조잡한 형태라 폭발 여부가 그야말로 복불복이었다. 따라서 이걸 제거할 때는 의료진이 방탄복을 입고 수술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사망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 총알 제거 수술을 받고 살아남았으나 제임스 브래디 대변인은 중태였고 대수술 끝에 겨우 살아남았다.[8] 그러나 브래디는 총상으로 인해 하반신마비 판정을 받고 평챙 훨체어에 탄 채로 지내다가 2014년 8월 4일 74살 생일(8월 29일)을 얼마 안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이 사건의 영향인지 살아난 후에는 총기규제 옹호론자가 되었다. 총기 규제 로비 그룹 브래디 캠페인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델라한티 경관은 총알이 척추를 관통하는 바람에 왼쪽 팔이 마비되었고 결국 경찰에서 은퇴해야 했다. 맥카시 요원은 부상 후유증이 없었고 가장 빨리 퇴원한 환자가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처음에는 총에 맞지 않은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입에서 거품이 섞인 선홍색의 피를 토하고 양복 밖으로 피가 배어나오자 옆에 탄 파 요원은 레이건을 밀어붙이듯이 리무진에 태우는 과정에서 갈비뼈가 부러져서 폐를 찔렀다고 생각했고 차를 급히 백악관이 아닌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병원으로 돌렸다. 4분만에 차는 병원에 도달했다. 이때 실려와서는 대통령은 멀쩡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는지 농담을 끊임없이 날렸는데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아내 낸시 레이건에게 I forgot to duck이라고 말했다. 총알이 날아올 때 무릎을 굽혀 상체를 낮춰 가격을 피하는 걸( 더킹)을 깜빡 잊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못 들었을까봐 수술실 들어가는 내내 말했다고 한다. 응급실로 실려온 후에도 의식이 있어서 의료진을 보고는 "여러분 모두 공화당원이어야 할 텐데요"라며 농담했고, 의료진은 "오늘은 저희 모두 공화당원입니다"라고 답했다. 여기서도 그치지 않고 산소호흡기를 껴 말을 못 하니 메모지를 달라고 한 뒤 의사들을 향해 "내가 지금처럼 큰 관심을 할리우드에 있었을 때도 받았더라면 거기 계속 있었을 텐데요"라고 필담을 했다.[9]
이렇게 로널드 레이건 본인은 평소같은 입담으로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으나 이미 이때 내부 대량 출혈로 약 40%에 달하는 혈액을 잃은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의료진은 1cm도 되지 않는 총알 자국을 발견했고 마침내 수술 시작 1시간 10분 만에 폐 깊숙이 심장 바로 옆에서 총알을 찾아냈는데 총알을 찾는 동안 레이건 대통령의 뛰고 있는 심장은 신입 외과 인턴이 잡고 있었다고 한다. 마취에서 깨어난 레이건 대통령은 "도대체 그 친구(저격범 존 힝클리 주니어)는 뭐가 불만이었는지 여기 아는 사람 있나요?"라며 의료진에게 농담할 정도의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는데, 1주가 넘게 지난 4월 11일에야 백악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건 이후 레이건 대통령의 지지율은 치솟았고 그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시 걱정되었는지 피격 사건 후 절대 공항 타맥이나 도로를 가로질러 걷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퇴원해서 지지자들에게 인사할 때도 겉옷 안에 방탄조끼를 입었다고 한다.
3. 사건 이후
존 힝클리 주니어는 현행범으로 바로 구속 및 기소되었으며 1982년에 13가지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 심신상실 상태로 평가받아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져 판사가 형사처벌하지 않고 대신 무기한 치료감호를 선고했다.[10] 이에 대중들은 정신질환을 핑계로 범죄에서 도망친다고 생각했다. 교도소가 아니라 정신병원으로 가니까,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법적 처분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논란은 점점 커졌고 결국 1984년 정신이상변호개혁법(Insanity Defednse Reforn Act)이 생겼다. 그때부터 미국 사법에서 '정신질환이 범죄의 이유면 무죄(Not Guilty by reason of insanity)'라는 개념이 '유죄이지만 정신질환(Guilty but mantally ill)'으로 바뀌었다. 이후 정신질환이라는 것을 인정하되 유죄로 판결하고, 그에 따라 정신질환 치료를 주립병원이 아닌 형사 시설에서 진행하게 됐다. 또 피고인 측에서 자신의 정신질환을 입증하도록 했으며 정신질환에 의한 무죄판결은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정신질환을 인정한다는 것이 형벌을 감경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하여, 이렇게 판정된 사람의 상당수가 교도소는 아니지만 구속 강도가 매우 높은 정신과병동에 입원한다. 존 듀폰이 유명한 사례. 이러한 변화는 '죄를 지었으므로 유죄'라는 법조게의 생각과 '정신질환이 있기 때문에 치료가 필요하다'는 정신의학계의 의견을 모두 만족시켰다.[11] 미국의 정신질환자의 범죄 처벌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인 셈이다. 현재 한국의 사법제도도 비슷한 입장이다.워싱턴 D.C.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 2015년까지 수용되어 있었는데 병원측에서 퇴원을 요구했다고 하지만 전술한 대로 대변인 브래디가 세상을 떠나 2014년 8월 8일 그의 유족들이 고소하면서 '33년 동안 브래디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는 살인'이라고 주장했다. 유족 측 변호사는 힝클리는 살인을 저질렀기에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한다며 판결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미국 법원에서 살인죄 적용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즉, 살인죄로 다시 기소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살인죄가 인정되더라도 유죄 판결이 가능하려면 '사건 당시' 제정신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만 하므로 큰 의미는 없다.
사건으로부터 두 달 후 레이건 대통령은 베를린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 와중에 풍선이 터져 마치 총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레이건 대통령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잠시 후에 "빗나갔군(Missed me)." 이라고 한 마디 한 후 연설을 이어갔다. 당연히 관중들은 환호를 보냈다.
2013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조디 포스터가 공식적으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면서 힝클리의 헛된 짝사랑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게 되었다.[12]
힝클리의 집안은 상당히 명문가였고 부시 가문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기도 하다. 힝클리의 아버지 존 힝클리 시니어는 조지 H. W. 부시의 1980년 공화당 경선 때 부시에게 정치헌금을 기부한 적도 있었다. 힝클리의 형제인 스콧 힝클리는 레이건 암살 미수 다음날 닐 부시[13]의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음모론자들은 부시 가문과 레이건 암살이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2016년에는 힝클리가 34년 만에 풀려나게 된다고 보도되었다. # 결국 9월 10일에 석방되었다. # 대신 엄격한 보호관찰이 뒤따르는 건 물론 치료와 교화 프로그램 수강은 이어졌지만 그것도 2022년 6월 최종적으로 해소되었다.
힝클리는 석방 후 가수로 전향해 유튜브에 자작 노래를 업로드하고 있다. # 댓글들이 압권인데 "당신이 활동 초기 했던 일의 큰 팬입니다", "레이건도 자랑스러울 듯", "당신이 한 것 중에 두번째로 좋은 일입니다, 훌륭한 노래네요", "당신의 음악이 심장(heart)에 와 닿진 않지만 폐에 와 닿네요"[14], "'그 사람'의 심장은 빗나갔지만 대신 우리 마음에 와 닿네요" 등등 레이건을 증오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댓글이나 온갖 개드립을 엿볼 수 있다. 결국 본인도 이에 부담스러웠는지 가장 조회수가 많은 영상의 댓글을 막아 두었다. 이와 별개로 힝클리의 음악들 자체는 꽤 좋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2021년에는 정식으로 앨범까지 발매하였고 2022년부터는 오랜 침묵을 깨고 자신이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더 이상 그런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내용의 인터뷰를 몇 차례 했다.
한편 사건 당시 시크릿 서비스 소속 대통령 경호원이였던 로버트 완코(Robert Wanko)가 서류가방에서 UZI를 끄집어내는 장면이 찍힌 적도 있는데 # ## 이 사진이 매체를 통해 퍼진 뒤 UZI의 판매량이 급증했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서 힝클리 주니어를 체포한 비밀경호국 소속 특수요원 대니 스프릭스(Danny Spriggs)는 힝클리 주니어의 인터뷰에 출연해서 자신은 다른 사람은 재활이 가능한 경우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힝클리의 경우 그의 범죄로 인해 두 사람이나 평생에 걸친 장애를 입게 된 만큼 범인인 힝클리는 결코 자유의 몸이 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 사건에서 그가 저지른 일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의 사과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호한 어조로 언급했다.
이 사건으로 1987년부터 권총 폭력 예방법이 하원에 제출되었지만 여러 번 실패했다. 그러나 1991년 3월, 당시 마흔살의 뉴욕 출신 민주당 하원의원은 제임스 브래디의 이름을 따 "브래디 권총 폭력 방지법"을[15] 발의했고, 레이건 전 대통령은 브래디법을 지지하는 오피니언을 뉴욕 타임즈에 기고하기까지 하며 주목을 받았다. #
결국 브래디법은 1993년 상하원을 통과해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하며 역사적인 총기 규제 법안이 만들어졌고, 당시 브래디법을 발의한 하원의원은 나중에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되는 척 슈머였다.
[EST]
미국 동부 표준시각
[2]
사건의 피해자인 제임스 브래디 백악관 대변인이 2014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진행한 부검 결과 총상으로 인한 합병증이 사망 원인으로 지목되었다.(살인미수와 과실치사의 상상적경합)
[3]
머리에 총상을 입어 왼쪽 팔 마비와
언어장애 등의 후유증을 얻었고 총상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사건 발생으로부터 33년 후인 2014년에 사망했다.
[4]
사진 우측의 회색 정장을 입고 있는 사람이다.
[5]
이때 경찰차에 태워진 힝클리는 잡히는 과정에서 팔 한쪽이
골절됐는데 같이 탄 경호원에게 "제 팔이 부러졌어요"라고 읍소하자 그 경호원이 이렇게 화답해 줬다. "너같은 XX는 팔 한쪽 부러진 걸로 끝난 것만 해도 행복한 줄 알아!" 이 장면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레이건 대통령의 일대기를 담은 드라마에도 그대로 나온다.
[6]
뇌관이나 기폭약 등에 쓰이는 화약이다.
[7]
범인이 개조한 것은 아니고
Devastator라는 상표로 나오는 기성품 총알이다.
[8]
비슷한 사례로 먼 훗날 2011년 미국
민주당 국회의원
개브리엘 기퍼즈(Gabrielle Giffords)도
애리조나 총기난사 사건에 휘말려 관자놀이에 총탄이 직격당해 뇌를 관통하면서 반대쪽 관자놀이로 관통당했음에도 살아남았다.
[9]
원문: 'If i had this much attention in Hollywood,l'd have stayed there.'
[10]
대통령 암살 미수범쯤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봐줄 이유가 없었으니,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중한 심신상실 상태였다고 봐야 한다. 20여년 뒤
조지 W 부시 대통령 암살을 계획했던 범인은 힝클리처럼 시도도 없이 예비단계에서 잡혔지만 심신미약이 인정되지 않자마자 짤없이 징역 35년을 선고받았다.
[11]
출처: <나의 무섭고 애처로운 환자들> 67쪽
[12]
물론 포스터의 성 지향성이 이 사건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설령 포스터가 이성애자였다고 한들 스토커인 힝클리와 잘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13]
1955년생 미국의 사업가로, 당시 레이건 행정부의 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의 넷째 아들이자
조지 W. 부시와
젭 부시의 동생이다.
[14]
힝클리 주니어가 쏜 총알이 레이건의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서 폐에서 멈춘 것을 두고 친 개드립이다.
[15]
Brady Handgun Violence Prevention 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