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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大 東 輿 地 圖조선의 지리학자인 김정호가 1861년에 제작한 한반도의 지도, 보물 제850호로 지정되어 있다.
2. 특징
KBS 역사스페셜 김정호의 꿈, 조선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
대동여지도는 축적은 동여도와 동일한데, 전체 지도 도엽은 목판 121매, 제책한 책은 213면에 부록지도를 몇 장 더 추가하여 상당히 두껍다. 이는 지도의 대량생산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기 때문. 지도를 모두 합치면 대략 가로 360 cm, 세로 685 cm이다. 100 리를 1 척, 10리를 1촌으로 제작하였으나, 1촌 1보라는 단위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조선 후기에 도량형에 혼란이 왔기 때문에 알 수 없고, 따라서 축척이 얼마인지 계산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전혀 추측이 불가능하지는 않은데, 대략 1:160,000 에서 1:216,000이라는 설이 있다. 1:180,000이라는 주장도 있다.
도로는 곧고 가느다란 선으로, 하천은 비교적 굵은 곡선으로 나타내었으며, 하천을 줄 2개로 그렸을 경우 배를 탈 수 있음을 나타낸다. 도로에는 10리마다 '방점'이라 불리는 점을 찍어 거리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산줄기는 더 굵은 곡선으로 나타내었으며, 산세가 클수록 산봉우리를 그렸지만 등고선이 없어 산의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0리를 표시할 때 일반적인 평지보다 산지의 경우 조금 더 짧게 표기하는 등 대략적인 산세는 가늠이 가능하다. 각 고을의 경계는 점선으로 나타내었다. 또한 읍치, 역원, 조창, 군부대, 봉수대 등 여러 시설을 각각의 기호를 사용하여 나타내었다.
서양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지도 제작 방식만을 사용했다. 이 이후로는 서양식 지도제작술이 대거 유입되고 채택된다. 산이 많은 곳일수록 정확도가 떨어지며, 그 때문에 북쪽 지역으로 올라갈수록 땅이 더 넓어 보인다.
이 지도에는 독도가 없다. 이 때문에 국사 교과서에 독도를 새로 그려 넣느니 마느니 하는 논쟁도 붙었고, 일부 사람들이나 동쪽의 모 섬나라에서는 독도가 한국 땅이 아니라느니 어쩌느니 떠들기도 하는데 어불성설이다.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빠진 이유는 대동여지도가 제작될 시기에 독도는 그냥 무인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즉, 이름도 없는 무인도 하나를 넣기 위해 목판 1장을 더 만들어야 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독도가 주목받게 된 시기는 조선 말기 국가 체제를 몇 번 바꾸면서 행정 구역을 처리하던 시기,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에 편입하니마니 하는 헛소리를 떠들던 시기 이후였고 이때는 대동여지도가 완성된 지 한참이 지난 때였으니 수정도 되지 않았다. 2011년에 독도가 그려진 대동여지도가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보도되었으나, 이는 김정호의 목판본 대동여지도에 한지를 올려 베껴 그린 모사본으로서 김정호의 원본과는 다르다. 아마 조선 말기 독도가 주목받게 되자 모사자가 독도를 따로 추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많이 퍼진 오해가 대동여지도에 대마도가 나온다는 것인데, 사실이 아니다. 다만 대동여지도를 소축척으로 줄여 만든 대동여지전도에는 대마도가 나온다. 이 둘을 혼동하여 생긴 오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한국지리 과목 주요 출제 소재이다.
감정가는 25억 원으로 역대 진품명품이 방영된 이래로 최고 감정가다. 기사[2]
3. 오해
이 오해들은 1925년 최남선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동아일보 칼럼 〈고산자를 회(懷)함〉 상 하에서 비롯되었으며, 김정호의 백두산 7회 등정설, 전국답사설 등이 처음 등장한다. 여기에 김정호가 흥선대원군에 의해 옥사당했다는 내용이 더해져 1934년 《조선어독본》에 실렸고, 해방 이후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3.1. 김정호가 직접 답사했다?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에게 물어 그것을 맡겨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22권이다.
— 신헌
위 글은 김정호에게 발주를 준 당시 조정고관 신헌의 글이다. 저기 등장한 김백원이 바로 김정호로, 백원은 김정호의 자(字)이다.— 신헌
말하자면, 김정호가 백두산을 몇 번 올라갔다느니 전국을 구석구석 답사했다느니 하는 전설적인 풍설은 그냥 최남선이 만든 허구의 이야기이다. 정보를 갱신, 보충하기 위해 몇몇 지역을 직접 답사를 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지도 자체가 무에서 태어난 김정호의 창작품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관리들의 허가를 받아 비변사 등이 소장하고 있는 행정용 지도를 취합했다고 한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많이 참고했다. 현실적으로도 일개 개인이 조정의 허가 없이 봉수대와 주요 관공서를 다 지도에 찍고 다녔으면 정말 잡혀가도 할 말이 없으며, 애초 당대의 치안, 교통 등의 문제를 고려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3]
당시까지는 대지도로는 개념도가 우세했고, 행정용, 군사용으로 쓰이던 군현 지도는 상세도가 우세였는데 김정호는 이러한 지도들을 엮어 하나의 상세한 대지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과거 한창 자국 혐오 성향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는 이 낭설을 기반으로 '조선시대까지 제대로 된 지도 하나 없던 미개한 민족' 따위의 황당무개한 주장까지 나돌기도 했었던만큼, 철저하게 배격해야 하는 부분이다. 상식적으로 조세와 국방 제도가 행정적으로 원활히 돌아가던 조선에서 지도 하나 없이 이러한 시스템을 운용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
3.2. 흥선대원군이 불태웠다?
김정호가 지도를 만든 뒤 '이렇게 정확한 지도는 외적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라는 혐의로 옥사했으며 목판도 불태워졌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불태웠다는 낭설은 1925년 동아일보에서 최남선이 쓴 걸로 추정되는 칼럼 〈고산자를 회(懷)함〉 상 하 내용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는 대동여지도의 위대함을 칭송하면서 그 가치를 몰라본 조선 관헌들에 의해 목판을 압수당했다고만 기술되어 있다.
… 조선 특절의 영적 보탑인 대동여지도는 그만 몰이해한 관헌에게 그 판목을 몰수당하고…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 고산자를 회함 (下)〉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 고산자를 회함 (下)〉
그런데 이를 기초로 1935년에 발간된 조선어 교본인 《조선어독본》에는 이것이 흥선대원군의 명이었다는 내용이 덧붙여진다. 하지만 여기서도 지도를 찍어낸 목판을 압수했다고만 되어 있지 '불태워졌다'는 말은 없다.
원래 돈업시 하는 일이고 보니, 그 엇지 용이(容易)하랴마는, 철석(鐵石)과 같은 그가, 이런 것을 구애하랴. 즉시 경성(京城) 서대문(西大門)밖에 집을 잡고, 소설(小說)을 지어 얻은 돈으로, 근근히 일가(一家)의 생계(生計)를 삼아가는 한편, 하나 둘식 판목(版木)을 사 모아서, 틈틈이 그의 딸과 함께 지도판(地圖版)을 새겻다.
그리하야, 다시 십여년(十餘年)의 세월(歲月)을 걸려서, 이것도 완성(完成)하얏슴으로, 비로소 인쇄(印刷)하야, 몇 벌은 친(親)한 친구에게 나누어 주고, 한 벌은 자기(自己)가 간수하야 두엇섯다. 그런지 얼마 아니되여,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남으로, 자기(自己)가 간수하얏든 것을, 어느 대장(大將)에게 주엇드니, 그 대장(大將)은 뛸 듯이 깃버하며, 곳 이것을 대원군(大院君)께 바첫섯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은 다 아는 바와 같치, 배외심(排外心)이 강(強)한 어른이시라, 이것을 보시고 크게 노(怒)하사 "함부로 이런 것을 만들어서, 나라의 비밀이 다른 나라에 루설되면, 큰일이 아니냐." 하시고, 그 지도판(地圖版)을 압수(押收)하시는 동시(同時)에, 곳 정호(正浩) 부녀(父女)를 잡아 옥(獄)에 가두섯드니, 부녀(父女)는 그 후(後) 얼마 아니가서, 옥중(獄中)의 고생을 견디지 못하얏는지, 통탄(痛嘆)을 품은채, 전후(前後)하야, 사라지고 말앗다.
《조선어독본》 5권 4과 〈김정호(金正浩)〉
그리하야, 다시 십여년(十餘年)의 세월(歲月)을 걸려서, 이것도 완성(完成)하얏슴으로, 비로소 인쇄(印刷)하야, 몇 벌은 친(親)한 친구에게 나누어 주고, 한 벌은 자기(自己)가 간수하야 두엇섯다. 그런지 얼마 아니되여,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남으로, 자기(自己)가 간수하얏든 것을, 어느 대장(大將)에게 주엇드니, 그 대장(大將)은 뛸 듯이 깃버하며, 곳 이것을 대원군(大院君)께 바첫섯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은 다 아는 바와 같치, 배외심(排外心)이 강(強)한 어른이시라, 이것을 보시고 크게 노(怒)하사 "함부로 이런 것을 만들어서, 나라의 비밀이 다른 나라에 루설되면, 큰일이 아니냐." 하시고, 그 지도판(地圖版)을 압수(押收)하시는 동시(同時)에, 곳 정호(正浩) 부녀(父女)를 잡아 옥(獄)에 가두섯드니, 부녀(父女)는 그 후(後) 얼마 아니가서, 옥중(獄中)의 고생을 견디지 못하얏는지, 통탄(痛嘆)을 품은채, 전후(前後)하야, 사라지고 말앗다.
《조선어독본》 5권 4과 〈김정호(金正浩)〉
이후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목판이 불태워졌다고 확대되어 해방 후 국어 교과서와 위인전에도 널리 실리는 바람에, 1980년대까지만 해도 모두가 이를 사실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대동여지도 목판은 두 차례에 걸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첫 번째는 1983년에 공개된 김양선 목사[4]의 소장품 1장이었다. 김양선 목사는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인데, 이곳에서 1920년대부터 한국의 초기 교회사 자료들을 대거 수집해왔다. 그러다가 점차 다른 한국 문화재 전반으로 수집 범위를 넓혀 해방 이전까지 한국 교회사 자료 및 문화재 약 9천여 점을 모았다고 한다. 이후 공산 정권의 핍박을 피해 월남하면서 6천여 점은 가져오는데 성공했으나, 나머지 3천여 점은 그대로 북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5] 이 수집품들도 다시 6.25 전쟁 통에 유실될 위험에 처했으나, 미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일본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이들은 일본 국제기독교대학에 위탁 보관되었는데, 전쟁 중의 혼란 속에 김 목사가 보관증을 분실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종전 후에도 송환에 매우 오랜 시일이 소요되었다. 일찍 송환받은 교회사 자료와 문화재는 그의 모교 숭실대학(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었으나, 1970년에 김 목사가 작고할 때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문화재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1983년에 추가 유물이 국제기독교대학에서 발견되었으며, 대학 측과 유가족의 노력 끝에 이들도 마저 송환되었다. 그런데 이 송환 문화재 가운데 대동여지도 목판 1장이 있었던 것이다. 김 목사가 이 목판을 입수한 경로는 불분명하나, 그의 소장품 가운데 김정호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실학자 최한기의 유품이 많았으므로 이 역시 최한기의 소장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최한기가 빼돌려 기적적으로 소각을 모면한 유일한 목판으로 알려져 있었다.
두 번째는 시간이 흘러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한꺼번에 발견된 목판 11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6.25 전쟁통에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장품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학예사들도 이것이 대동여지도의 목판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목판 원본은 소각되었다는 통설 때문에 이것들은 복제품이라고 믿고 있었다 한다. 하지만 이때 학계 전문가들과 합동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원본이라는 증거들이 발견되었고, 결국 1996년에 이들 모두 김정호가 직접 새긴 원작 진품이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이로 인해 대동여지도 목판이 소각되었다는 설은 완전히 허구로 판명되었으며, 1990년대 중후반 이후 출판되는 위인전은 이런 오류를 거의 다 고쳤다.
이후에는 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1장의 입수 경로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사실들이 드러났다. 이는 원래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대동여지도 목판 대금 청구서'와 '대동여지도 목판 대금 지출결의서'도 남아 있었다. 여기에는 1924년에 이 목판들을 총 60원(오늘날 가치로 약 720만원에 해당)에 구입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들 유물을 판매한 사람은 놀랍게도 최남선의 아들 최한웅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이들 목판은 최남선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남선이 이들을 어떤 경로로 입수했으며, 왜 다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넘겼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또한 그 이전에도 역사학계에서는 흥선대원군이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핍박했다는 설을 여러 근거로 부정해왔다. 이병도는 김정호 옥사설을 강력히 부인하며 그 근거로 여러 가지를 들었다.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지지 어느 것 하나 몰수당하거나 압수당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출처:<한국의 명저>(현암사, 1969)의 "不滅(불멸)의 아틀라스 靑邱圖(청구도)·大東地志(대동지지)·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 金正浩(김정호)"]
오상학도 옥사설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 고종실록』, 『 승정원일기』, 『 추안급국안』 등을 검토했으나 그러한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김정호가 죄를 받아 죽었다면 유재건이 『이향견문록』에 수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유재건은 김정호가 몰(沒)했다고 표현한다. 만약 김정호가 옥사했다면 물고(物故)당했다고 써야 옳다. 만약 김정호가 옥사를 치렀다면 김정호와 교류하였던 최한기나 재정적 후원자였던 최성환, 신헌 등도 연루되어 어떠한 처벌이라도 받았어야 할 텐데 그러한 기록이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은 정승 반열에 든 고위관료였으며 직접 김정호의 지도에 서문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볼 때, 김정호가 옥사했다는 이야기도 역시 허구이다. 김정호가 실제로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순히 지병 등의 이유로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3.3. 일제강점기까지 가장 정확한 (한반도) 지도였다?
대동여지도가 대단함을 강조하려는 생각이었는지 마치 대동여지도가 '정확한 (한반도) 지도'의 시초라도 되는 듯 이야기되기도 한다. 사실 지구가 구형에 가까운 이상 100% 정확한 지도는 지구본 형태의 지도가 아닌 이상 존재할 수는 없으나[6] 김정호가 태어나기 이전에 제작된 높이 3미터 정도인 지도는 몇 가지 존재한다. 다만 지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지리정보가 부족해서 언제나 몇몇 부분이 '많이' 틀렸다.[7] 대동여지도 역시 그러한 오류가 많았으며[8], 특히 북쪽으로 갈수록 지리정보가 부족해서 이 부분이 가장 오류가 많다.[9] 대동여지도가 기존 지도의 잘못된 정보를 상당히 많이 고쳤음은 사실이다. 만든 이후로도 수정할 점이 많아서 김정호 본인은 이 지도를 제작하고 수정하는 데 여생을 다 보냈다고 한다.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 육군이 경부선을 건설하기 위해 조선의 지리를 몰래 측량하러 일본인 측량기술자와 조선인 인부들을 고용하여 전국지도를 만들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는데, 만든 후에 일본군이 대동여지도를 보고 자신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제작한 지도와 별 차이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고 하지만 이 에피소드는 과장된 주장이다.
일본은 한일강제병합 이전에, 정확히는 최소 1872년( 고종 9년)부터 조선에 몰래 잠입하여 한반도 전도를 몰래 30년간 제작했다. 이때 일본은 당시 유럽의 최신 제작기법을 도입하여 축척이 일관되고 각 산의 능선과 등고선을 체계적으로 그린 정확한 지도를 만들었다. 두 지도를 비교하면 안타깝게도 세밀함과 정보의 양에서 엄청난 현실적 격차가 난다.[10][11] 일본은 이 지도를 이용하여 청일전쟁에서 주요거점을 안방처럼 훤히 알고 승승장구했고, 조선의병의 기지를 전략적으로 공격하고 퇴로까지 미리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우위가 뒷받침된 결과가 남한 대토벌 작전이다. (2011년 11월 3일 방송된 KBS 역사스페셜 '30년간의 도둑 측량, 일제는 무엇을 노렸나'에 나온 내용)
그리고 대동여지도도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만든 지도들과 마찬가지로 북쪽으로 갈수록 땅이 더 커보인다고 한다.사실 이는 대동여지도의 모양이 지구본처럼 실제 지구의 모양과 거의 같은 구형[12]이 아닌 네모난 형태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오류이다.
4. 목판
대한민국 보물 제1581호 | |
대동여지도 목판 大東輿地圖 木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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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소재지 | <colbgcolor=#fff>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
분류 | 유물 / 과학기술 / 천문지리기구 / 지리 |
수량/면적 | 11장(22면) |
지정연도 | 2008년 12월 22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사용한 목판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 대동여지도 목판 (大東輿地圖 木板)
조선시대 최대, 최고의 과학적 지도로 평가되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사용된 목판이며, 현전하는 것으로 알려진 12장의 목판 중 11장이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1장이 있다.
재질은 수령 100년 정도의 피나무로 목판의 앞뒤 양면에 모두 조각이 되어 있다. 목판 한 면에는 남북으로 120리, 동서로는 160리 범위의 지리정보가 판각되어 있다. 일부 해안 도서지역을 판각할 경우 전체 목판면의 일부만을 활용하게 되는데, 이 때 여백으로 남는 공간에는 다른 지역의 지도를 판각함으로써 목판의 활용도를 높인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04?∼1866?)가 목판제작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 과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재질은 수령 100년 정도의 피나무로 목판의 앞뒤 양면에 모두 조각이 되어 있다. 목판 한 면에는 남북으로 120리, 동서로는 160리 범위의 지리정보가 판각되어 있다. 일부 해안 도서지역을 판각할 경우 전체 목판면의 일부만을 활용하게 되는데, 이 때 여백으로 남는 공간에는 다른 지역의 지도를 판각함으로써 목판의 활용도를 높인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04?∼1866?)가 목판제작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 과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5. 채색필사본 대동여지도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유산 | ||||
637호 | ← | 638호 | → | 639호 |
백용성 선사 만일선회 방함록 | 채색필사본 대동여지도 | 정암철교 |
19세기 말~ 20세기 초 쯤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로,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를 더 자세하고 채색하여 만든 지도다. 등록문화재 제638호.
6. 보물 제850호
6.1. 보물 제850-1호
대한민국 보물 제850-1호 | |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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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소재지 | <colbgcolor=#fff>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 3가 249-1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
분류 | 유물 / 과학기술 / 천문지리기구 / 지리 |
수량/면적 | 22첩 |
지정연도 | 1985년 8월 9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
『대동여지도』의 여러 이본 중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지도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생몰년 미상)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한 이 지도는 조선의 지도 발달에서 정점에 있으면서 고지도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전국의 남북을 22첩으로 나누어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형태로 제작하여 모두를 아래 위로 맞추면 전국지도가 된다. 지도의 제1첩에는 방안표, 범례인 지도표와 지도유설, 경도오부지도 등과 함께 조선의 최북단인 온성(穩城), 종성(鐘城), 경원(慶源) 일대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유설」에서는 중국의 지도와 지리지의 기원을 말하고 그것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정치·경제·국방·학문연구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와 지리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그 편찬목적을 밝히고 지도제작에 있어 정확한 측정원리를 제시하였다.
지도의 각 첩에서 한면은 동서 80리, 남북 120리를 포괄하고 있다. 목판은 2면을 담고 있으며, 양면에 판각되어 있다. 지도를 제작하는데 약 70장 내외의 목판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2첩을 함께 합치면 남~북 약 6.7m 동~서 3.8m의 대형 지도가 되며 축적은 약 16만분의 1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해안선 도서, 산과 하천의 지형, 지방 군현 등이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각 군현간을 잇는 도로에는 10리마다 방점이 찍혀 있어 군현간 거리 측정이 가능하다. 각 군현 안에서는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道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제작자인 김정호는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이다. 오직 지도를 만들고 지리지를 펴내는 데에만 일생을 바쳤다. 지리지로서 『여도비지』,『동여도지』, 『대동지지』를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구도』(1834)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와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여러 해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이전의 필사본 지도와는 다르게 목판본으로 제작함으로써 지리정보가 사회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지도는 철종 12년(1861)에 처음 찍어낸 뒤 고종 1년(1864)에 다시 재판되었다. 초판과 재판의 간행부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30여점이 넘는 판본이 국내외에 소장된 것으로 볼 때 적지 않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축적 약 90만분의 1의 『대동여지전도』는 이 지도를 축쇄하여 만들어 보급된 것이다.
각 기관에 소장된 지도 중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지도의 표제는 짙은 청색으로 염색된 면포로 되어 있으며 표제는 「대동여지전도」로 되어 있다. 이는 소장자가 보관하면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제1첩은 표제-지도유설-통계표-도리표-경원·온성·종성-지도표-오부도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아(營衙), 진보, 능침과 봉수는 적색으로, 읍치, 역참은 황색으로 가채되어 있으며 읍치 중 성이 축조되어 있는 경우 황색의 원에 적색 실선으로 가채되어 있다.
전국의 남북을 22첩으로 나누어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형태로 제작하여 모두를 아래 위로 맞추면 전국지도가 된다. 지도의 제1첩에는 방안표, 범례인 지도표와 지도유설, 경도오부지도 등과 함께 조선의 최북단인 온성(穩城), 종성(鐘城), 경원(慶源) 일대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유설」에서는 중국의 지도와 지리지의 기원을 말하고 그것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정치·경제·국방·학문연구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와 지리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그 편찬목적을 밝히고 지도제작에 있어 정확한 측정원리를 제시하였다.
지도의 각 첩에서 한면은 동서 80리, 남북 120리를 포괄하고 있다. 목판은 2면을 담고 있으며, 양면에 판각되어 있다. 지도를 제작하는데 약 70장 내외의 목판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2첩을 함께 합치면 남~북 약 6.7m 동~서 3.8m의 대형 지도가 되며 축적은 약 16만분의 1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해안선 도서, 산과 하천의 지형, 지방 군현 등이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각 군현간을 잇는 도로에는 10리마다 방점이 찍혀 있어 군현간 거리 측정이 가능하다. 각 군현 안에서는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道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제작자인 김정호는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이다. 오직 지도를 만들고 지리지를 펴내는 데에만 일생을 바쳤다. 지리지로서 『여도비지』,『동여도지』, 『대동지지』를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구도』(1834)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와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여러 해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이전의 필사본 지도와는 다르게 목판본으로 제작함으로써 지리정보가 사회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지도는 철종 12년(1861)에 처음 찍어낸 뒤 고종 1년(1864)에 다시 재판되었다. 초판과 재판의 간행부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30여점이 넘는 판본이 국내외에 소장된 것으로 볼 때 적지 않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축적 약 90만분의 1의 『대동여지전도』는 이 지도를 축쇄하여 만들어 보급된 것이다.
각 기관에 소장된 지도 중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지도의 표제는 짙은 청색으로 염색된 면포로 되어 있으며 표제는 「대동여지전도」로 되어 있다. 이는 소장자가 보관하면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제1첩은 표제-지도유설-통계표-도리표-경원·온성·종성-지도표-오부도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아(營衙), 진보, 능침과 봉수는 적색으로, 읍치, 역참은 황색으로 가채되어 있으며 읍치 중 성이 축조되어 있는 경우 황색의 원에 적색 실선으로 가채되어 있다.
6.2. 보물 제850-2호
대한민국 보물 제850-2호 | |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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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소재지 | <colbgcolor=#fff>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서울역사박물관 ( 신문로2가) |
분류 | 유물 / 과학기술 / 천문지리기구 / 지리 |
수량/면적 | 1조(21첩) |
지정연도 | 2002년 12월 7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
『대동여지도』의 여러 이본 중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지도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생몰년 미상)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한 이 지도는 조선의 지도 발달에서 정점에 있으면서 고지도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전국의 남북을 22첩으로 나누어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형태로 제작하여 모두를 아래 위로 맞추면 전국지도가 된다. 지도의 제1첩에는 방안표, 범례인 지도표와 지도유설, 경도오부지도 등과 함께 조선의 최북단인 온성(穩城), 종성(鐘城), 경원(慶源) 일대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유설」에서는 중국의 지도와 지리지의 기원을 말하고 그것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정치·경제·국방·학문연구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와 지리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그 편찬목적을 밝히고 지도제작에 있어 정확한 측정원리를 제시하였다.
지도의 각 첩에서 한면은 동서 80리, 남북 120리를 포괄하고 있다. 목판은 2면을 담고 있으며, 양면에 판각되어 있다. 지도를 제작하는데 약 70장 내외의 목판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2첩을 함께 합치면 남~북 약 6.7m 동~서 3.8m의 대형 지도가 되며 축적은 약 16만분의 1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해안선 도서, 산과 하천의 지형, 지방 군현 등이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각 군현간을 잇는 도로에는 10리마다 방점이 찍혀 있어 군현간 거리 측정이 가능하다. 각 군현 안에서는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道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제작자인 김정호는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이다. 오직 지도를 만들고 지리지를 펴내는 데에만 일생을 바쳤다. 지리지로서 『여도비지』,『동여도지』, 『대동지지』를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구도』(1834)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와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여러 해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이전의 필사본 지도와는 다르게 목판본으로 제작함으로써 지리정보가 사회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지도는 철종 12년(1861)에 처음 찍어낸 뒤 고종 1년(1864)에 다시 재판되었다. 초판과 재판의 간행부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30여점이 넘는 판본이 국내외에 소장된 것으로 볼 때 적지 않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축적 약 90만분의 1의 『대동여지전도』는 이 지도를 축쇄하여 만들어 보급된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본 지도의 경우 경도(京都) 및 각(各) 도별(道別) 인구(人口)·물수(物數)가 기재되어 있어 서지학적인 가치가 있다. 또한 목판 인쇄상태와 채색 솜씨, 그리고 보존상태 등이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이본들이 대부분 22첩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이 지도의 경우 제21첩(추자도)와 제22첩(제주도)를 함께 묶어 전체가 21첩으로 되어 있는 것이 독특하다. 「지도유설」의 경우 필사로 쓰여져 있으며, 하천과 내륙 호수의 경우 청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군현과 진보는 적색으로 테두리가 묘사되어 있으며 다른 지도에 비해 채색이 많이 되어 있지 않다.
전국의 남북을 22첩으로 나누어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형태로 제작하여 모두를 아래 위로 맞추면 전국지도가 된다. 지도의 제1첩에는 방안표, 범례인 지도표와 지도유설, 경도오부지도 등과 함께 조선의 최북단인 온성(穩城), 종성(鐘城), 경원(慶源) 일대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유설」에서는 중국의 지도와 지리지의 기원을 말하고 그것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정치·경제·국방·학문연구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와 지리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그 편찬목적을 밝히고 지도제작에 있어 정확한 측정원리를 제시하였다.
지도의 각 첩에서 한면은 동서 80리, 남북 120리를 포괄하고 있다. 목판은 2면을 담고 있으며, 양면에 판각되어 있다. 지도를 제작하는데 약 70장 내외의 목판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2첩을 함께 합치면 남~북 약 6.7m 동~서 3.8m의 대형 지도가 되며 축적은 약 16만분의 1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해안선 도서, 산과 하천의 지형, 지방 군현 등이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각 군현간을 잇는 도로에는 10리마다 방점이 찍혀 있어 군현간 거리 측정이 가능하다. 각 군현 안에서는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道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제작자인 김정호는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이다. 오직 지도를 만들고 지리지를 펴내는 데에만 일생을 바쳤다. 지리지로서 『여도비지』,『동여도지』, 『대동지지』를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구도』(1834)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와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여러 해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이전의 필사본 지도와는 다르게 목판본으로 제작함으로써 지리정보가 사회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지도는 철종 12년(1861)에 처음 찍어낸 뒤 고종 1년(1864)에 다시 재판되었다. 초판과 재판의 간행부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30여점이 넘는 판본이 국내외에 소장된 것으로 볼 때 적지 않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축적 약 90만분의 1의 『대동여지전도』는 이 지도를 축쇄하여 만들어 보급된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본 지도의 경우 경도(京都) 및 각(各) 도별(道別) 인구(人口)·물수(物數)가 기재되어 있어 서지학적인 가치가 있다. 또한 목판 인쇄상태와 채색 솜씨, 그리고 보존상태 등이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이본들이 대부분 22첩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이 지도의 경우 제21첩(추자도)와 제22첩(제주도)를 함께 묶어 전체가 21첩으로 되어 있는 것이 독특하다. 「지도유설」의 경우 필사로 쓰여져 있으며, 하천과 내륙 호수의 경우 청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군현과 진보는 적색으로 테두리가 묘사되어 있으며 다른 지도에 비해 채색이 많이 되어 있지 않다.
6.3. 보물 제850-3호
대한민국 보물 제850-3호 | |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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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소재지 | <colbgcolor=#fff>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103동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신림동) |
분류 | 유물 / 과학기술 / 천문지리기구 / 지리 |
수량/면적 | 22첩 |
지정연도 | 2008년 12월 22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
『대동여지도』의 여러 이본 중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지도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생몰년 미상)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한 이 지도는 조선의 지도 발달에서 정점에 있으면서 고지도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전국의 남북을 22첩으로 나누어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형태로 제작하여 모두를 아래 위로 맞추면 전국지도가 된다. 지도의 제1첩에는 방안표, 범례인 지도표와 지도유설, 경도오부지도 등과 함께 조선의 최북단인 온성(穩城), 종성(鐘城), 경원(慶源) 일대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유설」에서는 중국의 지도와 지리지의 기원을 말하고 그것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정치·경제·국방·학문연구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와 지리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그 편찬목적을 밝히고 지도제작에 있어 정확한 측정원리를 제시하였다.
지도의 각 첩에서 한면은 동서 80리, 남북 120리를 포괄하고 있다. 목판은 2면을 담고 있으며, 양면에 판각되어 있다. 지도를 제작하는데 약 70장 내외의 목판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2첩을 함께 합치면 남~북 약 6.7m 동~서 3.8m의 대형 지도가 되며 축적은 약 16만분의 1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해안선 도서, 산과 하천의 지형, 지방 군현 등이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각 군현간을 잇는 도로에는 10리마다 방점이 찍혀 있어 군현간 거리 측정이 가능하다. 각 군현 안에서는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道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제작자인 김정호는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이다. 오직 지도를 만들고 지리지를 펴내는 데에만 일생을 바쳤다. 지리지로서 『여도비지』,『동여도지』, 『대동지지』를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구도』(1834)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와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여러 해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이전의 필사본 지도와는 다르게 목판본으로 제작함으로써 지리정보가 사회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지도는 철종 12년(1861)에 처음 찍어낸 뒤 고종 1년(1864)에 다시 재판되었다. 초판과 재판의 간행부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30여점이 넘는 판본이 국내외에 소장된 것으로 볼 때 적지 않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축적 약 90만분의 1의 『대동여지전도』는 이 지도를 축쇄하여 만들어 보급된 것이다.
『대동여지도』중 갑자본은 국내에 경상남도 거창박물관본이 있으며 국외에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매우 드물다. 특히 규장각 소장본의 경우 갑자본으로는 가장 상태가 좋으며 완질로 갖추어진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신유본에 비해 내용도 일부 수정된 것이 확인되어 김정호가 1861년 지도를 제작한 후에 내용을 지속적으로 수정하였음을 보여준다.
전국의 남북을 22첩으로 나누어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형태로 제작하여 모두를 아래 위로 맞추면 전국지도가 된다. 지도의 제1첩에는 방안표, 범례인 지도표와 지도유설, 경도오부지도 등과 함께 조선의 최북단인 온성(穩城), 종성(鐘城), 경원(慶源) 일대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유설」에서는 중국의 지도와 지리지의 기원을 말하고 그것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정치·경제·국방·학문연구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와 지리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그 편찬목적을 밝히고 지도제작에 있어 정확한 측정원리를 제시하였다.
지도의 각 첩에서 한면은 동서 80리, 남북 120리를 포괄하고 있다. 목판은 2면을 담고 있으며, 양면에 판각되어 있다. 지도를 제작하는데 약 70장 내외의 목판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2첩을 함께 합치면 남~북 약 6.7m 동~서 3.8m의 대형 지도가 되며 축적은 약 16만분의 1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해안선 도서, 산과 하천의 지형, 지방 군현 등이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각 군현간을 잇는 도로에는 10리마다 방점이 찍혀 있어 군현간 거리 측정이 가능하다. 각 군현 안에서는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道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제작자인 김정호는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이다. 오직 지도를 만들고 지리지를 펴내는 데에만 일생을 바쳤다. 지리지로서 『여도비지』,『동여도지』, 『대동지지』를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구도』(1834)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와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여러 해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이전의 필사본 지도와는 다르게 목판본으로 제작함으로써 지리정보가 사회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지도는 철종 12년(1861)에 처음 찍어낸 뒤 고종 1년(1864)에 다시 재판되었다. 초판과 재판의 간행부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30여점이 넘는 판본이 국내외에 소장된 것으로 볼 때 적지 않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축적 약 90만분의 1의 『대동여지전도』는 이 지도를 축쇄하여 만들어 보급된 것이다.
『대동여지도』중 갑자본은 국내에 경상남도 거창박물관본이 있으며 국외에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매우 드물다. 특히 규장각 소장본의 경우 갑자본으로는 가장 상태가 좋으며 완질로 갖추어진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신유본에 비해 내용도 일부 수정된 것이 확인되어 김정호가 1861년 지도를 제작한 후에 내용을 지속적으로 수정하였음을 보여준다.
7. 유형문화유산
7.1.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제275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는 조선후기 지리학자인 고산자 김정호가 순조 34년(1834)에 자신이 만든 <청구도>를 27년 후에 증보 수정한 대축척 지도로 분첩절첩식지도첩이다. 형태를 보면, 남북을 120리 간격으로 22층으로 구분하고, 동서를 80리 간격으로 끊어 19판으로 구분했음.
동서방향은 구획된 판을 접어서 연결시켜 1첩으로 만들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했음. 남북으로 동서의 방향을 연결시킨 각 첩을 펼쳐서 순서대로 이어대면 연속된 남북을 볼 수 있게 했음. 지도의 제 1층에는 지도의 제목과 발간연도 및 발간자를 명시하고 본도와는 별도로 서울의 도성도와 경조오부도를 상세하게 그렸음. 축척을 보면, 지도의 제 1층 첫머리에 그려져 있는 지도 방안에 매방십리라고 되어 있어서 간접적으로 축척이 표시되어 있음.
지도의 좌표에 해당하는 이 방안은 지도를 동서로 접은 1면을 남북 12방안, 동서 8방안으로 구분하고 있고 남북이 120리, 동서는 80리로 되어 있음. 그리고 1면의 실제 길이는 남북이 약 30cm, 동서가 약 20cm임. 그러므로 동서 20cm가 80리(32km)에 해당되는 축척이므로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약 1/160000이 됨.
지도의 내용을 보면, 일반 지도에서는 지형표시에서 개개의 산지나 평지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나 대동여지도에서는 개개의 산보다 산줄기를 표시하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물줄기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음. 거리는 붉은 선으로 처리하였는데 거의 직선으로 표시하고 십리마다 표시를 하여 어느 지점간이라도 방표의 수를 헤아려봄으로써 거리를 알 수 있게 하였음. 한편 14개 항목의 지도표를 만들어 가능한 부호로 처리한 점도 이 지도의 특징 중의 하나임.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처음으로 만들어 김정호가 목판으로 인쇄하였으며, 그 후 고종 원년(1864)에 수정본이 재간되었음. 박물관의 소장본은 1864년도 재간본으로 박물관 2층 중앙에 전시되어 있음.
동서방향은 구획된 판을 접어서 연결시켜 1첩으로 만들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했음. 남북으로 동서의 방향을 연결시킨 각 첩을 펼쳐서 순서대로 이어대면 연속된 남북을 볼 수 있게 했음. 지도의 제 1층에는 지도의 제목과 발간연도 및 발간자를 명시하고 본도와는 별도로 서울의 도성도와 경조오부도를 상세하게 그렸음. 축척을 보면, 지도의 제 1층 첫머리에 그려져 있는 지도 방안에 매방십리라고 되어 있어서 간접적으로 축척이 표시되어 있음.
지도의 좌표에 해당하는 이 방안은 지도를 동서로 접은 1면을 남북 12방안, 동서 8방안으로 구분하고 있고 남북이 120리, 동서는 80리로 되어 있음. 그리고 1면의 실제 길이는 남북이 약 30cm, 동서가 약 20cm임. 그러므로 동서 20cm가 80리(32km)에 해당되는 축척이므로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약 1/160000이 됨.
지도의 내용을 보면, 일반 지도에서는 지형표시에서 개개의 산지나 평지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나 대동여지도에서는 개개의 산보다 산줄기를 표시하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물줄기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음. 거리는 붉은 선으로 처리하였는데 거의 직선으로 표시하고 십리마다 표시를 하여 어느 지점간이라도 방표의 수를 헤아려봄으로써 거리를 알 수 있게 하였음. 한편 14개 항목의 지도표를 만들어 가능한 부호로 처리한 점도 이 지도의 특징 중의 하나임.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처음으로 만들어 김정호가 목판으로 인쇄하였으며, 그 후 고종 원년(1864)에 수정본이 재간되었음. 박물관의 소장본은 1864년도 재간본으로 박물관 2층 중앙에 전시되어 있음.
7.2.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제188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는 철종 12년(1861)에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가 만든 우리나라 전국 지도로 최고의 선본이다. 총 22첩으로 되어 있으며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형태로 되어 있어 모두를 아래 위로 맞추면 전국지도가 된다. 제1첩에는 지도유설, 경도 및 각 도별 人․物 수, 지도표, 경도오부지도 등이 수록되어 있고 제2첩부터 제21첩까지가 전국지도이다.
대동여지도는 초간된 신유본(辛酉本)과 재간된 갑자본(甲子本)의 2종류가 전하는데, 부산대학교 도서관 소장 대동여지도는 181년(철종 12)에 간행된 신유본에 속한다. 전체의 내용은 완벽하나 제1첩의 지도유설 2면과 수선전도(首善全圖)에 해당되는 도성도 1면은 필사되어 있다. 필사된 부분에서 오류가 발견되지만, 목판의 인쇄상태와 채색 솜씨, 그리고 보존상태 등이 양호하며 필사된 3면을 제외하고는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3점과 꼭 같다.
지도가 기밀 사항이라 다수를 인간(印刊)할 수 없었던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대체로 5~6부 정도 인출되었다고 볼 때, 부산대학교 도서관 소장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직접 인간한 모본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가진다.
대동여지도는 초간된 신유본(辛酉本)과 재간된 갑자본(甲子本)의 2종류가 전하는데, 부산대학교 도서관 소장 대동여지도는 181년(철종 12)에 간행된 신유본에 속한다. 전체의 내용은 완벽하나 제1첩의 지도유설 2면과 수선전도(首善全圖)에 해당되는 도성도 1면은 필사되어 있다. 필사된 부분에서 오류가 발견되지만, 목판의 인쇄상태와 채색 솜씨, 그리고 보존상태 등이 양호하며 필사된 3면을 제외하고는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3점과 꼭 같다.
지도가 기밀 사항이라 다수를 인간(印刊)할 수 없었던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대체로 5~6부 정도 인출되었다고 볼 때, 부산대학교 도서관 소장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직접 인간한 모본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가진다.
8. 기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대동여지도가 제작된 시기가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도시철도가 들어서기 2년 전이라는 점을 들어 동서양의 기술적 격차를 체감시켜주거나, 더 나아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해에 컬러사진이 나왔다는 등 대동여지도를 폄하하는 게시글이 떠돌아 다니기도 한다. # 대동여지도는 조선의 지리학의 큰 족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동 서양의 과학 공학 격차와 서세동점의 시기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예시 중 하나이다.
조선의 영토를 한반도에 국한하는 것으로 표시하고 있으며, 간도, 대마도와 독도는 없다.[13][14] 이 때문에 일본 제국이 대동여지도를 밀었고, 생몰년도가 불분명한 김정호를 위인으로 내세웠다는 주장이 2023년 현재 세간에 돌고 있다. 게다가 김정호 옥사설을 퍼뜨렸고, 대동여지도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였던 최남선이 친일 반민족행위자였고, 조선총독부에서 원본 목판을 매입해 보관하였던 사실 등과 결합하여 대동여지도는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이전의 조선 역사를 무시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주장이 상당히 힘을 받고 있다. 다만 일제가 조선어 독본에 실어 가면서 대동여지도와 김정호를 띄운 것은 선전 목적이 맞다 할 수 있지만, 최남선의 변절과 그가 목판 소각설, 김정호 옥사설을 발표한 시기는 일차하지 않아서 대동여지도가 일제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그것이 최남선의 주도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기는 부족함이 있다. 2023년 4월, 윤석열 대통령 방일 이후에 일본에 있던 판본 중 하나가 국내에 대여 전시된다는 뉴스기 뜨자, 대동여지도는 우리 건데 왜 대여냐, 독도가 없는 지도를 내세우는 것은 대일 굴욕 외교의 연장이 아니냐며 뉴스 게시판이 들끓고 있는데, 상기 여러 사실을 참고해 판단할 일이다.
일본의 한 고서점에서 동여도의 주요 정보가 포함된 대동여지도 판본이 발견되어 문화재청이 환수하였다고 한다. # 이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준비 기간을 거친 후, 2023년 5월 16일부터 7월 2일까지 '다시 마주한 우리 땅, 돌아온 대동여지도' 전시회를 열었다. 기존의 대동여지도 위에 동여도의 정보 일부를 기록한 판본으로, 가까이서 판본 실물을 볼 수 있었다. #
[1]
나머지 2부는 각각 하버드 대학교와 위스콘신 대학교 밀워키 캠퍼스 도서관에서 보관 중이다.
[2]
가치가 너무 높아서 측정불가라는 판정을 받은 안중근 의사 유묵 경천을 최고 감정가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공식감정가는 값을 매길수 없어서 0원으로 책정되었으므로 공식감정가 순위에서는 제외된다.
[3]
현대로 치면 전방의 GP와 주요 군사기지를 데이터로 입력해서 지도를 만들고 다닌다고 해보자. 출입을 허락할리도 없으며 그대로 체포되어 징역살이 할 것이다.
[4]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7명 가운데 하나인 김관근 목사의 셋째 아들이다.
[5]
북한 땅에 남겨놓은 문화재를 옮기는 과정에서 아내와 딸을 잃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6]
완벽한 세계 지도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글.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구는 평면에 펼칠 수 없다.
[7]
대표적으로 영조시절 정상기가 제작한
동국대전도가 있으며, 이 동국대전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8]
예를 들어
전라도
낙안군 북서쪽을 보면 벌교천 수계와 산으로 가로막힌 지역(외서면으로 추정)에 보성강으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하나 보이는데, 지도에는 보성 문덕면 쪽에서 보성강과 합류한다고 나오나, 실제로는 순천 송광면에서 합류한다. 다만 물줄기는 비가 많이 오거나 새로 제방을 쌓는 등 조금만 변화가 일어나도 바뀌기에 당시의 물줄기는 그러하였을 수 있다.
[9]
가령 길주 부분이 실제보다 좀 더 튀어나와 있고, 중강진 부근도 실제와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섬들은 정보가 부족해 일부 중요한 섬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원(圓)에 가깝게 묘사하였다.
[10]
서울 지도만 하더라도 대동여지도와 1911년
경성부 전도를 비교해보면 그 정밀도에서 차이를 알 수 있다.
[11]
특히
1910년대 후반에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지도는 그 정밀성에서 오늘날의 지도와 별로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 지도는 현재에도 중요한 근현대지도 자료로 쓰인다.
[12]
사실 엄밀히는 100% 완벽한 구형은 아니기 때문에 거의라는 말을 붙였다.하지만 구형에 굉장히 가깝다고 볼 수는 있다.
[13]
독도는 생략할만 하나, 당시 우리 땅으로 인식하였던 간도가 일부도 아니고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간도는 1907년에야 청에 넘어갔다.
[14]
간도라는 명칭이 기록에 등장한 건 대동여지도가 제작된 이후다.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을 우리 땅으로 인식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조선시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다 걸리면 처벌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