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06:26:43

기황후(드라마)/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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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장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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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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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등장인물 및 특별출연은 등장인물 문서 참고.
[ 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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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기황후 OST Part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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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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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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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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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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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
201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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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
2014.02.24
[ 관련 문서 ]
||<tablebgcolor=#DE995D><table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00> 등장인물 ||<width=25%> 방영 전 논란 ||<width=25%> 방영 후 논란 ||<width=25%> 명대사 ||<width=15%> 오류 ||


1. 개요2. 1화 - 5화3. 6화 - 10화4. 11화 - 15화5. 16화 - 20화

1. 개요

MBC 드라마 기황후의 오류에 관한 문서이다.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복장이나 헤어스타일의 고증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적인 부분도 틀리거나 창작한 부분이 굉장히 많다.

2. 1화 - 5화

  • 공녀들을 채찍질 하는 탑자해를 고려의 세자 왕유가 말리자 당기세가 세자를 보고 자신들의 '볼모 신세'라고 하며 하찮게 여기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고려의 왕은 원나라 내 황족 서열에서 제법 서열이 높은 존재였다.[1] 따라서 아무리 고려가 원의 지배하에 있다고 해도 황실의 친인척이었기 때문에 당기세라 하더라도 고려의 세자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 연철의 둘째 아들의 이름은 '타르카이'로 한자로 표기할 경우 '탑자해(塔刺海)가 아니라 '탑랄해(塔剌海)'다. 비슷한 글자인 剌(발랄할 랄) 刺(찌를 자)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예로 질병인 콜레라의 일본식 명칭이 '호열랄(虎列剌, 코레라)'이었는데 한국에서는 한자를 헷갈려 '호열자(虎列刺)'로 불렸다.
  • 첫 화에 당기세가 쏜 석궁으로 기양(후일의 기황후)의 어머니[2]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기황후의 어머니는 이 시기에 죽은 적이 없다. 기황후의 어머니는 고려의 문신이자 청주목사(淸州牧使)였던 이행검(李行儉)의 딸로서 딸 기씨가 원나라의 황후가 된 후 황제를 졸라 죽은 아버지 기자오를 영안왕으로 추숭해 준 덕에 생전에도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이라고 불리며 부귀영화를 누렸다.[3][4]
  • 세자의 숙부이자 심왕(瀋王) 왕고(王暠)가 등장하는데 직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고려의 왕과 동일한 왕작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매번 등장할 때마다 고려의 조복을 입고 고려 왕에게 세자의 행위를 일러바치는 등 마치 고려의 신하인 것처럼 묘사된다. 심왕 자리 자체가 명예직에 가깝고 왕고가 고려의 왕위를 탐낸 건 분명 사실이지만 딱히 작중에서의 묘사처럼 마치 고려 왕의 신하인 것처럼 머리를 숙여야 하는 위치는 아니었다.
  • 태평왕(太平王) 연철(엘테무르)이 황태제 타환이 고려 땅에서 죽으면 그 책임을 물어 고려의 사직을 없애고 원나라에 편입시킨다는 계획을 세우는데 실제 역사 속 연철은 고려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전직 정동행성의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이었던 '장백상(將伯祥)'과 우문군(佑文君)이었던 '양재(梁載)'의 주청으로 발생했던 입성책동 당시 고려의 충혜왕이 원나라의 우승상 겸 태사였던 연철에게 상소를 보냈고 이에 연철은 입성책동 계획 자체를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5] 물론 연철이 좋은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고 당시 원나라의 현 황제인 문종(투그테무르)이 형인 쿠살라에게 반강제로 양위하려고 시끄럽던 시기였다. 당장에 연철은 막북 지역에서 쿠살라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었으니[6] 고려의 입성 문제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연철 쪽에서 고려의 입성에 대해 의논한 게 없었던 만큼 연철은 아예 고려 자체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황태제를 호송하는 인원으로 백안(바얀)이 등장하는데 상당히 젊은 외향을 띄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인물인 메르키트 바얀은 드라마 속에서 카리스마 있는 노인으로 등장하는 연철보다도 나이도 많고 관직 생활도 더 오래했다. 연철은 원나라 무종(카이산)이 황자일 시절에 그를 10년 간 보필했고, 무종이 즉위했을 때 정봉대부(正奉大夫) 겸 동지선휘원사(同知宣徽院事)로 관직을 시작했다. 그에 반해 백안은 원나라의 2대 황제인 성종(테무르)을 모시고 카이두를 정벌하러 간 적이 있으며 올라사(斡羅思)와 시반(失班) 등이 주아차둔(察八兒)의 땅으로 달아나자 추격해 붙잡은 공로로 바가투르(용사)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아무래도 연철 다음으로 등장한 권력자가 백안이다보니 젊은 나이겠거니 해서 설정한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연철이 더 젊게, 그리고 백안이 더 늙게 묘사되어야 맞다. 그리고 타환이 대청도에 있을 시기에 백안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임명된데다 부얀디긴(卜顏的斤)[7]과의 혼인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타환을 따라 대청도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했다.
  • 대청도로 유배를 오게 된 타환(토곤)의 나이는 외관상으론 배우 지창욱의 외모에 따라 거의 20대-30대에 가까워 보이는데 실제 대청도로 왔을 당시의 타환은 딱 '10살'이었다. 타환이 태어난 게 1320년 4월 병인일인데, 대청도로 유배를 온 것은 1330년 4월의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증을 맞춘다면 타환이나 비슷한 나이의 승냥이나 모두 아역배우들이 맡아야 하고, 왕유는 15살[8]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아역배우가 맡아야 한다. MBC 사극들에서 아역배우가 초반부를 맡다가 성인배우들이 중-후반부를 맡는 경우가 많았음에도 왜 기황후에서는 처음부터 성인배우들이 맡았는지 의문.
  • 황태후가 어린 영종(이린지발) 황제를 극진히 간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역사적 사실을 보면 굉장히 아이러니한 광경이다. 명종(쿠살라)의 두 번째 아내이자[9], 영종의 어머니였던 바부샤(八不沙) 황후는 남편이 죽은 후 다시 복위한 문종(투그테무르) 황제에게 남편의 명복을 빌게 해달라는 간청을 했고, 문종은 바부샤의 부탁을 받아들여 제사(帝師)[10]로 하여금 여러 명산과 신궁에서 제례를 행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별도로 바부샤 황후에게 비단 200필을 내렸으나 문종의 아내인 부다시리(드라마 속 황태후) 황후는 환관인 바이주(拜住)와 짜고 바부샤 황후를 살해했다.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당 장면을 보면 <어린 황제의 친어미를 죽인 악독한 여자가 어린 황제를 극진히 간호하는> 괴상한 장면임을 알 수 있다.
  • 작중에서 승냥이의 부친인 기자오는 고려에서 황태제를 죽이려는 음모를 대충 눈치채곤 황태제를 목숨 걸고 지켰으나 결국 증거 인멸을 위해 눈과 혀가 뽑힌 뒤, 고려군을 이끌고 황제를 시역(弑逆)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된다.[11] 물론 실존인물인 기자오는 무관으로서 카다안의 침입 당시에 공을 세운 뒤 정6품 총부산랑(摠部散郞)[12]이 되었다가 선주(宣州)[13]의 수령(守令)으로 지내다가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드라마를 위한 각색이라고는 하나, 관직운만 좀 없을 뿐, 멀쩡히 잘 살다가 죽은 인물을 비참하게 죽인 셈.

3. 6화 - 10화

  • 타환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일은 연철이 사망한 이후다. 문종의 편을 들었던 연철은 (자기가 죽인 걸로 세상에 알려진) 명종의 아들인 타환이 황제가 되는 것을 상당히 경계하였고, 당시 천문을 관측하는 태사(太史)들 또한 '타환이 즉위하면 천하가 크게 혼란해질 것'이라며 즉위 진행을 말렸다. 게다가 황태후 부다시리는 다음 황제는 타환이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었다. 때문에 연철은 타환의 즉위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본인이 죽은 뒤에야 타환이 황제가 되었다. 따라서 해당 작품 전반기에 연철이 최종보스로 등장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서 활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연철과 관련된 모든 에피소드는 전부 허구라고 할 수 있다.
  • 작중에선 연철과 황태후가 마치 경쟁자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일단 문종(투그테무르)이 연철을 아꼈으며 연철 본인도 문종에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문종의 비(妃)였던 부다시리와도 잘 지냈다. 문종 사후 국정은 실권을 쥔 연철이 주청을 올리면 대리로 청정(聽政)을 하고 있던 황태후가 재가하는 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둘은 경쟁사이라기보단 오히려 죽이 잘 맞는 사이였다고 할 수 있다.
  • 타환 살해에 실패한 백안과 탈탈, 그리고 왕유가 돌궐과의 전쟁터로 보내지는데 당연히 당시엔 돌궐이 존재하지 않았다. 돌궐이 제국을 세워 중원을 위협한 시기는 6세기에서 8세기 사이의 일이고, 원나라 말기인 14세기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원나라와 근접한 부족 형태의 세력으로는 오이라트(瓦剌)가 있는데 오이라트는 쿠빌라이 아리크부카 사이의 후계 전쟁, 이른바 '톨루이 내전' 시기에 코로스(綽羅斯), 토르구트(土爾扈), 되르베트(杜尔伯), 코이드(辉特) 부족이 뭉쳐 '되르벤 오이라트(四衛拉特)'라는 연합체를 형성한 뒤 아리크부카를 지지했으나 결국 아리크부카가 패배하면서 원나라에 항복하였고 이후 별다른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래저래 원나라와 서쪽 변방에 있는 모종의 세력과의 전쟁은 나올 수 없는 전개다.[14]
  • 타환과 타나실리의 혼례식에 황태후의 머리에 길쭉한 장식이 있는데, 이른바 족두리의 유래로 알려진 복탁(Богтаг)[15]이다. 하지만 완전히 잘못 고증된 모습이다.

    파일:복탁_비교.png

    드라마 기황후에서 연출된 복탁(좌)과 실제 복탁의 모습(우)[16]

    파일:기황후_1화_복탁.png

    드라마 기황후 1화에 등장한 엑스트라들이 착용한 복탁


    복탁은 기본적으로 머리 위에 얹는 모자(帽子)이며 모자를 고정 해주는 원통형의 관체(冠体), 관체 아래에 달려 뒷머리를 가리는 천 조각인 피복(披幅), 관을 고정하는 끈인 유대(紐帶), 귀를 가려주는 주렴에 해당하는 엄이수주(掩耳垂珠), 관 자체를 꾸미는 관모장식(冠帽装饰), 관 꼭대기를 장식하는 관정장식(冠顶装饰)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17] 복탁은 몽골의 여성들이 꾸밀 수 있는 최고의 사치품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18] 주로 대례식이나 큰 연회가 있을 때 주로 착용했다. 즉, 드라마 속 황태후가 착용한 복탁은 제대로 요소를 갖춘 것도 아닐 뿐더러 저렇게 착용하면 고개를 숙일 때, 모자의 무게 때문에 앞으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오히려 1화에 등장했던 기황후의 책봉식 장면이나 해당 화(8화)에 등장하는 만세를 외치는 현지인 엑스트라들이 착용한 복탁이 훨씬 고증에 맞다.
  • 왕유가 이끄는 별동대와 돌궐군과의 전투가 벌어지는데 돌궐인들을 무슨 야만인처럼 묘사해 놨다. 6세기에서 8세기에 있었던 돌궐 제국의 군사들은 찰갑으로 중무장한 중기병대를 이끌고 다나며 중원을 위협할 만큼 문명화 되어 있었으며 군사력이 강력했고, 오이라트 연합 역시 칭기즈 칸에게 복속한 이후 쭉 몽골 제국에 협력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무장에 있어서는 원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돌궐인들을 이끌고 있는 연비수의 아버지 이름이 '바토루'로 나오는데, 실제 발음은 '바가투르'에 가깝다. 바가투르는 튀르크와 몽골에서 붙여지던 꽤나 역사적인 칭호로서 주로 엄청난 전공(戰功)을 세운 인물에게 주어졌고, 일 칸국이나 티무르 제국에서는 군주의 집무 상 칭호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바가투르는 말 그대로 호칭에 가깝기 때문에 해당 드라마처럼 이름 같이 부르진 않았다.

4. 11화 - 15화

  • 타나실리가 궁녀가 된 기양을 시켜 궁녀 박씨가 가진 용종(龍種)을 낙태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데 팥꽃나무 꽃을 말려 빻은 가루를 음식을 통해 꾸준히 박씨에게 먹이려고 하였다. 이 때 서상궁이 미리 황후에게 "임산부가 아니면 아무런 독성이 없다" 라고 하는데 틀린 설명이다. 한의학에서 원화(芫花)라고 부르는 팥꽃나무 꽃은 주로 축수(逐水)[19]나 척담(滌痰)[20], 담음벽적(痰飮癖積)[21]의 효능이 있고 협통(脇痛)[22], 옹종(癰腫)[23], 학모(瘧母)[24] 등을 치료할 때 사용한다.

    하지만 팥꽃나무 꽃에는 다프닌(Daphnin)[25]과 메제레인(Mezerein)[26] 성분이 있어서 생으로 섭취할 시 독소가 입이나 식도, 위 등에 궤양을 일으키거나 피부에 수포를 일으킨다. 한의학에서도 오용하거나 남용할 경우 헛구역질 구토, 복통 설사 발진이 발생한다고 설명하고 있다.[27] 때문에 타나실리가 박씨와 함께 장기간 팥꽃나무 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장기적으로 먹었을 경우, 서상궁의 장담처럼 그저 소피(오줌)만 자주 볼 정도가 아니라 피부는 발진으로 뒤덮이고 설사로 인한 복통에 시달리다가 둘 다 나란히 함께 저승에 갈 수도 있었다.

  • 기양이 무수리임에도 타환에게 불려가 차를 따르는 일을 하는데 사서에 따르면 기씨는 원래 휘정원사(徽政院使)였던 투만데르(禿滿迭兒)가 눈여겨 봤기 때문에 처음부터 '주공차음(主供茗飲)', 즉 황제가 차를 마실 때 수발을 드는 궁녀로 발탁되었다. 때문에 사실 무수리로서의 에피소드는 허구라고 할 수 있다.
  • 연철의 회상 장면에서 명종 황제가 드라마 속 타환만큼이나 힘이 없는 나약한 존재로 묘사되는데 매우 잘못된 오류다. 명종 쿠살라는 인종 시기에 재상 테무데르(鐵木迭), 황태후 아나이시실리(阿納失失里), 간신 쉴리먼(識烈門)의 모함으로 주왕(周王)이라는 사실상의 명예직을 받고 운남성 일대로 쫓겨났을 때도 오히려 무종(원)의 옛 신하들을 규합해 힘을 길렀고 본인 진영의 내분으로 인해 서쪽 알타이 산맥 쪽으로 이동했을 때도 오히려 차아타이(察阿台) 등 서북쪽의 제왕(諸王)들이 주왕 쿠살라를 따랐다. 진종(이순테무르)이 사망한 후 권신 도락샤(倒剌沙)가 옥새를 안 넘기고 버티자 결국 연철이 군사를 일으킨 뒤 "무종 황제의 두 아들(쿠살라, 투그테무르)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회왕(懷王)이었던 투그테무르를 옹립하고 상도(上道)에 머무르고 있던 도락샤를 물리친 뒤 옥새를 되찾았고 연철이 옹립했던 투그테무르가 황제(무종)가 되었다. 하지만 그 때 쿠살라가 군을 이끌며 대도를 향해 이동했고 이에 연철은 쿠살라를 모시러 북으로 갔고 투그테무르는 황제 자리를 쿠살라에게 넘긴다는 발표를 한 후 새로 옥보(玉寶)를 파고 황태자가 되었다.[28] 그러나 황제가 된 지 몇 개월도 안 돼서 쿠살라는 갑자기 숨을 거뒀고, 스스로 황태자가 되었던 투그테무르가 다시 황제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명종(쿠살라)은 확실한 자신의 세력이 있었고 인망도 높았으며 막강한 군사력까지 가지고 있어서 천순제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랐던 투그테무르가 얼른 다시 황제 자리를 내놓고 자신은 황태자 신분으로 돌아갈 정도였다. 따라서 드라마 속의 명종 황제는 대단히 왜곡된 모습인 것이다. 또한 명종 황제는 사망했을 때 나이가 고작 30살에 불과했다.[29] 따라서 작중에서처럼 늙어 보이는 건 오류라고 할 수 있다.
  • 황태후가 식사자리에서 왕유에게 차를 따라주는데, 놀랍게도 황태후가 든 찻주전자나 왕유가 든 잔이나 모두 19세기 빅토리아 풍의 유럽 도자기다.

    파일:기황후_찻주전자.png

  • 좋은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제대로 연출하지 못해 시청자들이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넘긴 부분도 존재한다. 타환이 왕유를 견제하려고 기양이 읽어준 두보(杜甫)의 시를 읊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바로 '애왕손(哀王孫)'이란 시다.

    {{{#!folding [ 애왕손 전문 펼치기 · 접기 ]
長安城頭頭白烏
장안성 머리의 머리 흰 까마귀

夜飛延秋門上呼
밤에 날아와 연추문[30] 위에서 울고

又向人家啄大屋
또 인가를 향해 날아가 큰 집을 쪼아대니

屋底達官走避胡
집 안의 관리들은 오랑캐를 피해 달아나네

金鞭斷折九馬死
금채찍은 끊어지고 많은 말들은 죽었고

骨肉不待同馳驅
피붙이들은 함께 달아나지 못했구나

腰下寶玦青珊瑚
허리 아래에 옥패와 푸른 산호를 찬

可憐王孫泣路隅
가련한 왕손은 길가에서 울고 있네

問之不肯道姓名
누구인지 물어도 이름을 말하려 하지 않고

但道困苦乞為奴
그저 곤하고 괴로우니 노비로 삼아달라 하네

已經百日竄荊棘
백일이 넘게 가시밭길로 도망치고

身上無有完肌膚
몸은 피부가 성한 곳이 없구나

高帝子孫盡隆準
고제의 자손은 코가 우뚝하다던데

龍種自與常人殊
왕의 씨는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다르구나[31]

豺狼在邑龍在野
이리들은 도읍에, 용은 들판에 있으니

王孫善保千金軀
왕손은 천금같은 몸을 잘 보전하라

不敢長語臨交衢
사거리에서 감히 길게 말하지 못하니

且為王孫立斯須
왕손을 위해 잠시 서 있으리라

昨夜東風吹血腥
어젯밤 동풍에서 피비린내가 났고

東來橐駝滿舊都
동족에서 온 낙타가 옛 도읍에 가득하다

朔方健兒好身手
북쪽 변방의 남자들은 신수가 좋다던데

昔何勇銳今何愚
지금은 어찌 그리 우둔한가[32]

竊聞天子已傳位
훔쳐 들으니 천자께서 양위[33]하여

聖德北服南單于
거룩한 덕으로 북쪽의 남선우를 복종시켰으나

花門剺面請雪恥
화문이 얼굴을 그어[34] 설욕해 주길 청한다고 하니

慎勿出口他人狙
다른 이가 엿듣지 않게 말을 조심하라

哀哉王孫慎勿疏
애처로운 왕손은 삼가 소홀이 하지 말라

五陵佳氣無時無
오릉[35]의 상서로운 기운은 없던 때가 없었노라 }}}

이 시는 안록산의 난 당시 장안성을 탈출한 현종 내지는 살아남은 황족 중 하나를 보고 슬퍼하며 쓴 시다. 즉, 반역을 한 이로 인해 황족이 고통 받는다는 내용이기 때문에 드라마 속 타환의 상황과 비슷한 내용이 담긴 시인데 해당 드라마에서는 그저 기양이 밤에 읽어주는 장면, 그리고 타환이 잘난 척 하려다가 버벅거리다가 망신만 당하는 장면으로 소비되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의미가 담긴 시를 굳이 넣었던 건지 알 수 없을 지경.[36]


* 방내관이 기양과 상소문을 끼워넣는 작전을 세우면서 비밀스럽게 작성된 문서를 '북정(北征)'이라는 책에 끼워둘 거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북정은 위에서 언급된 두보의 시로써 꽤 내용이 많은 장문시에 속한다. 그러나 별도의 북정이라는 서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 '두시(杜詩)'라는 두보의 시를 모은 서책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북정이라는 별도의 책이 묘사된 건 오류로 볼 수 있다.[37]
  • 왕유와 타환이 축국 시합을 벌이는데 심판을 맡은 독만 태감이 들고 있는 깃발은 무려 오프사이드 깃발이다. 일단 오프사이드 자체가 1883년 잉글랜드 축구협회(FA)에서 선수들이 골문 주변에서 죽치고 있는 걸 막기 위해 만든 규율이다. 깃발 또한 그 이후에 만들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원나라 시대에는 등장할 수 없는 물건이다.

5. 16화 - 20화

  • 왕유가 서역의 요령술사(妖靈術師)[38]들의 기술을 빌려 붉은 먹물로 진짜 글자를 숨기고 나머지 글자는 비밀 먹물로 작성해 다른 사건에 대한 투서로 위장한 뒤[39] 비가 올 걸로 예상되는 날에 게시했는데 투서가 비를 맞자 거짓말처럼 검은 먹은 사라지고 붉은 먹으로 쓴 '명종 황제의 혈서가 나타나면 연철의 3대가 몰락한다(明宗皇帝血書出燕鐵三代沒落)'라는 문자가 드러나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말도 안 되는 장면이다.

    일단 물에 젖으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먹물 자체가 존재하질 않으며[40], 종이에 묻은 먹은 물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번지기 때문에 글씨가 적힌 종이가 비를 맞으면 검은 먹물이고 붉은 먹물이고 죄다 번져서 식별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따라서 먹물의 존재는 물론이고 물에 젖었는데도 새 종이에 붉은 글씨만 쓴 것 같은 CG 티가 팍팍 나는 해당 장면은 절대 나오기가 힘들다. 차라리 붉은 글씨를 쓴 뒤 그 글씨 위에 초칠을 하고[41] 다른 글자는 그대로 써 흘러내리게 해서 드러내던가, 혹은 붉은 먹물로 글을 쓰고 오징어 먹물로 위장 글자를 쓴 뒤 장기간 게시해 서서히 붉은 글자가 드러나게 하는[42] 등의 방법을 쓰는 게 빗물 맞았다고 깨끗하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마술 먹물보단 훨씬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 연철이 괴문서 사건에 대한 반격으로 타환을 옥죄고, 용상에 앉아 자신의 아들인 당기세에게 자신이 한 일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식으로 설명하는데 그 말은 동양이 아닌 함무라비 법전 모세오경 출애굽기에서 먼저 등장한 말이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43][44] 차라리 공자가 했다는 '이직보원(以直報怨, 원한은 공정하게 갚으라)'[45]이라는 말이 시대상으로도 맞고 연철이 말하는 '공정한 보답'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도 잘 드러내줬을 것으로 보인다.
  • 황태후가 왕유에게 서하 공주와의 혼례를 주선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서하는 이미 칭기스 칸 시기에 멸망했고, 칭기스 칸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서하인들을 공격하던 중 낙마로 부상을 입고는 분노해 "내 죽음을 알리지 말고, 서하인을 한 사람도 남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는 바람에 철저하게 몰살 당했다. 그나마 칭기스 칸 사후 임시 대칸에 오른 톨루이가 교역로 유지를 위해 카라호토 성(黑水城)을 남겨두었고 거기에 살던 서하인들만 목숨을 건졌기 때문에 이들은 색목인으로 살거나 몽골인으로 흡수되었고 서하 황실의 경우, 양종의 딸인 이씨(李氏)가 칭기스 칸의 부인인 '차카 카툰(察合 皇后)'이 되었기 때문에 몽골 황실과 혈통이 일부 섞였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원나라는 고대 중국의 탕목읍(湯沐邑)[46] 제도를 받아들였고 공주들의 칭호에도 창국(昌國), 조국(趙國), 노국(魯國), 운국(鄆國) 등 봉토의 이름이 붙었으며 황제의 누이는 장공주(長公主), 딸은 공주(公主)로 구별해 불렀고, 만약 봉토가 없는 공주들은 그냥 자신의 이름으로 불렸다.[47] 그리고 서하 지역은 과거에 서하중흥행성(西夏中興行省)이 존재했으나 세조 28년인 1287년에 감숙행성에 병합되었다. 따라서 황태후가 왕유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서하 공주와의 혼례를 주선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황태후가 명종 황제의 혈서로 연철을 궁지에 모는 계획에 열심히 참여 중인데 이미 한 번 언급되었지만, 명종이 죽은 후 다시 황제에 올랐던 것이 바로 황태후의 남편인 문종 황제였다. 그로 인해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문종의 복위에는 연철의 공이 가장 컸다. 때문에 황태후가 계속해서 연철을 적대시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타환을 고무시키기 위해 "명종 황제께서 굽어 살피시어" 라는 표현을 쓰고 명종 황제의 저주를 운운하며 연철에게 트집을 잡는 건 상당히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 왕유의 부하들이 황궁에 잡입하면서 최무송이 환관 복장을 입고 있는데 수염(...)난 모습 그대로 등장한다. 환관은 어린 시절부터 거세를 하기 때문에 수염이 나질 않으며 이는 환관을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다.
  • 연철이 바둑을 두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원나라에서는 이미 바둑의 묘수풀이 기술을 집대성한 '현현기경(玄玄棋經)'이라는 책이 집필될 정도로 바둑이 유행한 사실이다. 다만, 드라마에서 나오는 바둑알은 무슨 자연석을 대충 깎은 것처럼 생겼다.

    파일:기황후_바둑씬.png

    하지만 이미 원나라의 영토인 운남행성에서 당나라 시기부터 운자(雲子)라고 불리는 고급 바둑알을 생산하고 있었다. 운자는 마노 호박, 붕사, 홍단분(紅丹粉)[48] 등을 빻아 배합한 뒤 한 알씩 제작했으며 백색돌은 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우나 투명하지 않으며 약간 황색 또는 청록색을 띠는 특징이 있고 흑색돌은 칠흑처럼 윤기가 나며, 빛에 대고 보면 반투명하고 바둑알 주변에 일종의 벽록색 또는 청색의 광채가 난다. 현대에도 운자는 운남성의 대표적인 특산품이며 바둑계에서도 고급 바둑알에 속한다. 당연히 바둑이 유행했던 원나라 황실에서도 바둑돌을 쓰려면 운남행성의 특산품인 '운자'로 뒀지 저런 조약한 바둑돌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 5세기 말에 만들어진 걸로 추정되는 쪽샘지구 44호분에서 발견된 바둑알도 자갈이지만 크기와 형태가 일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미 원나라보다 훨씬 오래된 국가에서도 일정한 형태의 돌을 바둑돌로 사용했는데 세공 기술이 발전한 원나라에서 굳이 울퉁불퉁한 자연석에 가까운 바둑돌을 쓸 이유가 없다.
  • 연철과 바둑을 두던 왕유가 "대승상의 지금의 권력은 황제의 할아버지인 무종 황제를 배신해서 얻은 것이라 들었다. 대승상께서는 무종 황제와 같은 실수는 하지 마십시오"라는 발언을 하는데 당연히 틀렸다. 무종의 계승에 대한 순서를 보면 아래와 같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세조(쿠빌라이)의 손자인 성종이 죽고 아유르바르바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형인 무종(카이산)을 황제로 세움


    무종은 자신이 죽으면 제위를 동생인 아유르바르바다에게 물려주는 대신 동생이 죽으면 자신의 아들(쿠살라와 투그테무르)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약속을 했음


    황제가 된 인종(아유르바르바다)은 당연히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고, 형의 장남인 쿠살라(훗날의 명종)를 명분에 지나지 않는 주왕(周王) 자리를 내리고 후계에서 배재함


    쿠살라는 분노해 군대를 이끌고 대항했으나 실패해 차가타이 칸국으로 달아남


    연철, 인종이 사망하자 "황제 자리는 마땅히 무종 황제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고 주장하며 원나라 내에 있던 회왕(懷王) 투그테무르를 받들고 쿠데타를 일으킨 뒤 투그테무르를 제위에 앉힘. ( 문종 황제)


    차가타이 칸국으로 망명했던 쿠살라가 군을 이끌며 귀환했고 문종과 연철은 황제 자리를 쿠살라에게 넘겼고 ( 명종 황제) 문종은 스스로 태자로 내려감


    명종 황제가 몇 개월 안 가서 급사하자[49] 태자였던 문종이 다시 복위했음


    문종은 죽기 전에 형의 아들 중 하나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유언함.


    연철은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명종의 둘째 아들인 린칠반(훗날의 영종)을 황제로 추대하고 했으나 장남인 타환은 귀양을 보냈으나 영종은 몇 개월 후 사망함


    연철은 황태후의 아들인 엘테구스(燕帖古思)를 황제로 삼으려 했지만 황태후가 문종의 유지를 이유로 거절한 뒤 명종의 또 다른 아들인 타환을 황제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만 "예전에 명종 황제가 타환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했다"는 이유를 들며 거부


    연철이 사망한 후 타환이 돌아와 황제가 됨}}}

    즉, 타환의 할아버지인 무종 황제를 배신한 것은 무종의 동생인 인종 황제였고, 연철이 무종의 손자인 타환을 귀양 보낸 일은 있으나 연철은 무종의 다른 손자인 린칠반을 황제로 옹립했기 때문에 딱히 배신을 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왕유가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보이지 않는 적을 경계하라는 의미를 담아 "황제의 할아버지인 무종 황제는 동생을 너무 믿어서 배신을 당했고 그 아들인 명종 황제와 문종 황제가 고초를 겪었다고 들었다" 라고 언급했으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면서도 말하려는 목적에도 부합했을 것이다.
  • 연철과 협상해 기양을 데려간 왕유가 부하들을 시켜 은밀히 서역에서 들여온 홍주(紅酒), 즉 적포도주를 구매하는 장면이 묘사되며 본인 입으로도 연철에게 "서역에서 들여온 귀한 술"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원나라 황실 입장에서 포도주는 그리 귀한 게 아니었다. 원나라 시기에 포도주는 마유주와 함께 궁정에서 쓰는 중요한 술이었다. 왕원량(汪元量)이 지은 호주가구십팔수(湖州歌九十八首)와 증정호산류고(增订湖山类稿) 2권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세조 시기에 장수인 차칸(察罕)이 남송의 영토인 형주 강릉의 남동쪽과 양라보(陽邏堡)[50]를 공격하면서 큰 공을 세우자 포도주 2병을 하사했고 좌승상이었던 사천택이 남송을 공격하던 중에 병으로 몸져 눕자 위로의 의미로 포도주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남송 소제 일행이 대도에 왔을 때, 연이은 잔치를 베풀었는데 제 4차 연회를 광한전(广寒殿)에서 연회를 베풀 때 포도주가 나왔는데 '포도주의 붉은색이 짙었다(葡萄酒酽色如丹)'라는 기록도 있고 "소제 일행이 수라간(御厨)에 포도주를 달라고 요청하자 얼마 안 가서 일행은 중양절을 맞이할 때 포도주를 국화잔에 잔뜩 부어 마실 수 있었다" 라는 기록도 있다.

    즉 포도주는 이미 원나라에서는 인기가 있는 술이었고, 굳이 수입산이 아니라더라도 (소제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원나라 내에서 비축이 가능할 정도로 '자체생산' 중이었으며 심지어 진상품이기도 했다.[51] 따라서 왕유가 적포도주를 사려고 했으면 굳이 서역 상인을 만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시장에서 구매하거나 황실에 머물렀으니 수라간에 달라고 요청하면 되는 일이었다.
  • 탈탈이 연철이 마실 술을 독주로 바꿔치기 하기 위해 당기세가 떨어뜨린 열쇠를 발로 밟아 본을 뜬 장면이 있었고 나중에 그것을 백안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밑창이 그냥 생고무판(...)이다. 당연히 원나라 시대에는 고무라는 게 없었고 몽골인들이 신고 다닌 신발은 구탈(鞋)이라고 불렸는데 당연히 아래 밑창엔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천과 가죽을 덧대었다. 비싼 돈 들여 해외에서 촬영하는 드라마인 주제에 소품 준비가 형편없다는 게 드러나는 부분.

    파일:20240630_025717.png
  • 연철이 황궁 내에 게르를 설치하는 걸 두고 백안이 비상시국을 선포하는 거냐며 놀라는 장면과 황태후가 명종 황제도 게르가 세워진 날 다음에 승하했다고 놀라는 장면이 있는데 당연히 허구에 가까운 얘기다. 게르는 몽골의 전통 가옥으로서 말 그대로 거주지라는 의미만 있을 뿐이지 황궁 안에 게르를 짓는다고 해서 그게 비상시국을 선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례로 마르코 폴로 원 세조가 제너두(Xanadu)[52]에 있는 대리석 궁전(Marble Palace)[53]과 깊은 숲속에 위치한 대나무 궁전(Cane Palace)을 오가면서 지냈는데 여름이 지나고 대도로 돌아가면 대나무 궁전은 즉시 해체했다고 기록했다. 이 나무 궁전은 사천 등 대나무가 풍부하게 나는 곳에서 공수했으며 형태였다는 기록으로 보면 바로 게르의 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게르는 목재가 희귀한 초원에서 만들었던거라 기둥에 걸치지 않는 등의 관습으로 목재를 아꼈지만 세조는 여름이 시작되면 지었다가 여름이 끝나고 대도로 복귀하면 즉시 부쉈던 것으로 보아 몽골인의 시각에서는 나름 사치로운 생활을 향유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기황후 식의 논리라면 원 세조는 여름마다 비상시국을 선언한 셈이 된다(...). 그리고 명종 황제 건의 경우는 연철이 군을 이끌고 오는 명종을 맞이하기 위해 이동했기 때문에 이동식 게르라고 하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 몽골인들은 초원에 살았던 탓에 수산물을 보거나 맛볼 일이 거의 없었다. 특히 몸이 길죽하고 수염이 돋아 있으며 다리가 많은 새우는 오늘날에도 먹는 것이라기 보단 벌레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원나라 황실에서도 새우를 먹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연회 장면이 나올 때마다 새우가 등장한다. 몽골인들의 전통요리는 그들의 생활 방식에 맞춰 양고기와 말고기 위주였고 원나라의 만찬을 묘사하려면 고기 요리 위주로 등장하는 게 맞다.[54]
  • 연철이 자신의 부족을 옹기라트(弘吉剌)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연철은 킵차크(欽察) 출신이다. 원나라의 역사서인 원사의 열전에 뻔히 나오는 내용임에도 오류를 냈다.
  • 연철이 자신의 집으로 옮겨간 뒤 감두탕(甘豆湯)을 마시며 바꿔치기 된 독을 치유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감두탕이 해독 작용이 뛰어나 오랜 세월 사용된 것은 사실이나 연철만이 감두탕을 마신다는 독만 태감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감두탕은 검은콩과 감초, 그리고 제니(薺苨)[55]를 혼합해 차로 우린 것인데 현대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해독제 = 감두탕>으로 여겨질 정도로 애용되었다. 중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의학 서적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도 사용법이 나와 있을 정도로 오래 사용되었고 동의보감이나 제중신편(濟衆新編) 등 한반도의 의학서에서도 기재되어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해독법이었다. 따라서 나라의 중요한 인물인 연철이 독을 먹고 쓰러졌다면 가장 먼저 황궁 내 태의원(太醫院)[56] 소속의 태의들이 감두탕부터 먹였을 가능성이 높다.[57][58]

[1] 원 세조가 죽고 원 성종이 즉위했을 때 고려 충렬왕의 입지를 보자면 서열은 7위, 연회 내에서의 서열은 4위, 그 밖에도 다루가치들이 충렬왕에게 술 한잔을 받을 때는 일단 공손히 절을 한 뒤 두 손으로 받아야 했다. 그리고 엄연히 황실 일원이었기 때문에 쿠릴타이의 참여도 가능했다. [2] '옥분'이라는 가명을 가지고 있으며 기자오의 첩실로 등장한다. [3] 고려에서 행해진 기씨들의 만행에 영안왕대부인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4] 같은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아예 영안왕대부인의 생신 연회를 핑계 삼아 원나라가 공민왕을 모욕하는 에피소드까지 존재한다. [5] 이 기록은 고려사에만 있고 원나라의 기록에서는 보이질 않는다. [6] 물론 쿠살라는 이후 갑자기 사망했고, 원나라 내에서는 문종과 연철이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7] 쿠빌라이의 막내 서자인 쿠르투(闊出) 태자의 손녀다. [8] 1315년(충숙왕 2년) 2월 생이다. [9] 첫 번째 아내는 몔라디(邁來迪)로써 타환을 낳던 중 사망했다. [10] 황제의 스승이라는 의미이며 보통은 황실 내 종교행사를 주관하는 지체 높은 고승이나 도사를 이르는 말이다. [11] 타환이 연철에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시역의 원인을 고려인들에게 전가했다. [12] 군사업을 담당하는 총부의 관리를 의미한다. 조선의 병조좌랑(兵曹佐郞)과 동급. [13] 오늘날의 북한 선천군이다. [14] 타환 통치 시기에 광서성 등에서 요구(徭寇)들이 변방을 침략하고 관원들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요구는 바로 노역을 하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탈주한 뒤 도적이 된 이들을 말한다. 즉 외적이 아니라 내적(內敵)인 셈. 차라리 연철 일가의 폭정의 부작용을 표현하려고 헀으면 외적인 것보다는 이쪽이 더 나았을 것이다. [15] 러시아어로는 보카, 중국어로는 고고관(罟罟冠)이라고 불린다. [16] 인종의 황후였던 라드나시리 카툰이다. [17] 오른쪽 사진에 해당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 [18] 한국에서도 가체가 금지되자 족두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19] 물이 찬 종기에서 물을 빼는 것. [20] 가래를 뱉어내게 하는 것. [21] 몸 속에 뭉친 진액을 풀어주는 것 [22] 옆구리의 통증으로서 주로 이나 담낭, 신장 등에 문제가 생길 때 발생한다. [23] 피부나 근육에 생기는 화농성 종창 [24]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비장이 붓고 뱃속에 덩어리가 생기는 증상이다. [25] 서양닥나무 껍질에 많이 들어있는 식물 독소 성분이다. 피부에 닿으면 수포가 생기고 섭취 시 궤양을 일으킨다. [26] 주로 식물의 수액에서 발견되는 독성 디테르펜 에스테르이다. 섭취 시 궤양과 복통, 설사 등을 일으킨다. [27] 특히 항이뇨작용이 있는 감초와 혼합해 복용할 경우, 메제레인 성분으로 인한 이뇨와 설사가 몸 밖으로 제대로 배출되지 못하는 수가 있어서 자칫 중독으로 인해 다른 내장, 특히 신장의 기능이 망가질 수도 있다. 작중에서도 낙태를 유도하기 위해 궁녀 박씨에게 팥꽃나무 꽃이 들어간 음식을 먹이면서 감초탕을 함께 올리는 것으로 나온다. [28] 이 시기 황태자의 인장은 분실된 상태였다. [29] 원사 본기에 사망 나이가 30살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30] 장안성의 서문이다. [31] 당나라 황실은 혈통 상 한나라와는 관련이 없었으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한나라 황손들의 특징을 자신들에게 비유하기도 하였다. [32] 당나라에 충성하던 가서한(哥舒翰)이 동관(潼關)에서 안록산의 군대에 패배한 걸 의미한다. [33] 당나라의 현종 숙종에게 양위한 걸 의미한다. [34] 유목민족들이 복수를 다짐하거나 애도할 때 얼굴에 상처를 낸 것을 의미한다. [35] 당나라의 선황제들이 묻힌 무덤을 의미한다. [36] 답시로 왕유가 읊은 시 역시 두보가 쓴 '춘망(春望)'으로 애왕손과 동일하게 두보 자신이 안록산의 난으로 장안성에 억류된 와중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오는 걸 보고 감회에 젖어 쓴 시다. '나라가 무너져도 산과 강은 그대로고(國破山河在)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하네(城春草木深)'라는 첫 구절이 유명하다. 이 시 또한 고려의 왕위를 잃고 볼모가 된 왕유의 신세를 잘 나타내기 때문에 적절한 선정이었고 잘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37] 물론 두보의 시 중에서 북정을 따로 뽑아서 풀이나 해석을 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되면 서적의 이름은 두시북정주해(杜詩北征註解)나 북정시주(北征詩注) 등이 되어야 맞다. [38] 물론 이 표현도 맞지 않다. 고대 중국에서 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냥 술사(術士) 내지는 요술사(妖術師)로 우리가 익히 아는 표현으로 불렀다. [39] 한 남자 아이가 실종되자 그 아비가 울고불며 찾았는데 아들을 납치한 범인이 협박문을 보내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아비가 집 밖에 못 나오게 막았다. 아비는 그 말을 지켰으나 결국 아들은 살해됐고 범인은 체포되어 연경으로 끌려오던 중 아들의 아비가 내려친 철퇴에 머리를 세 번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한 일이 발생했고 이 아비의 가문은 이미 몰락했으나 범인을 살해한 죄에 대한 형벌은 내려지지 않았으니 시시비비를 가려달란 얘기가 담겨 있었다. [40] 현대 시대에 개발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물이 닿는다고 사라지는 먹물은 효용성이 없다. 오히려 물이 묻어도 번지지 않고 남아 있는 먹물이 훨씬 유용하다. [41] 종이에 초를 칠하면 글자가 물이나 접촉으로 인한 손상에서 좀 더 오래 견디는 효과가 있다. [42] 오징어 먹물은 약간 붉은 빛이 돌며 일반 먹물과는 달리 글자를 쓰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글자의 색이 점점 옅어지면서 나중에는 글씨가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희미해지거나 없어진다. [43]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애굽기 21장 24-25절) [44] 함무라비 법전의 해당 부분은 해당 문서 참조. [45]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노자가 했다는 "이덕보원(以德報怨, 원한은 은덕으로 갚으라)"이라는 말에 대해 어찌 생각하냐고 묻자 공자는 "그럼 은덕은 뭘로 갚으려고? 원한은 공정하게 갚고, 은덕은 은덕으로 갚는 것이다(以直報怨, 以德報德)" 라고 답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46] 원래는 말 그대로 탕을 갖춰 목욕을 하고 자신의 몸을 가꿀 수 있는 작은 개인 땅 정도를 의미했으나 나중에는 제후들이나 공주들에게 내려 조세를 거둘 수 있게 하는 봉토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47] 대표적으로 영녕왕(永寧王)이었던 뭉케(卯澤)에게 시집간 쿤지다이(完者台) 공주가 있다. [48] 사산화삼납(Red Lead)이라고도 불리는 물질로 불꽃놀이용 산화제 및 촉매로 사용되고 과거엔 옹기에 바르는 유약으로도 사용되었으나, 가열하면 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요샌 유약으로는 잘 사용되진 않는다. [49] 이 때문에 원나라 내에서는 문종과 연철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50] 오늘날의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신저우구 양뤄 거리다. [51] 이 때 생산된 포도주가 얼마나 많았는지 산거신화(山居新话)에는 지원(至元, 원 세조 시기)과 대덕(大德, 원 성종 시기)에 진상된 포도주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이 때가 원나라가 쫓겨나고 명나라로 교체된 시기였다. [52] 황제가 여름 동안에 머물렀던 상도(上都)를 의미한다. [53] 수많은 홀과 방에 모두 금박을 입히고 새와 짐승, 꽃과 초목을 새겨넣었다는 것으로 보아 매우 화려한 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54] 드라마 신돈에서는 영안왕대부인의 생일 자리에서 부원배들이 공민왕을 비웃으며 마유주를 마시고 대충 토막내서 삶은 말고기를 뜯는 장면이 나온다. 이쪽이 훨씬 사실에 근접하다. [55]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모싯대의 뿌리를 말한다. 주로 해독제와 거담제로 사용되었다. [56] 세조(쿠빌라이)는 의학 쪽에도 관심이 컸기 때문에 원나라가 건립되자 인구조사를 통해 의호(醫戶), 즉 의료계에 종사할 인원들을 확보한 뒤 특혜를 주기도 했고 기존의 의료담당 부서였던 상의감(尙醫監)의 기능을 확대하고 태의원으로 명칭까지 바꿨으며 의술만을 배우는 전문 학교인 의학(醫學)까지 만들었다. [57] 물론 제중신편에서 만독을 해독하려면 감초와 검은콩을 각각 5돈(약 20g)씩 물에 달여먹으라고 되어 있다. 암살에 대한 조심성이 많던 기황후 속 연철은 하루에 감두탕을 5번 씩 마셨으니 독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좀 더 강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방법을 연철만 알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 [58] 감두탕은 그 이름처럼 감초(甘)와 검은콩(豆)만 들어갔지만 작중에서는 쥐똥나무 열매를 넣는다고 설명한다. 만약 고증이랍시고 넣은 거면 틀린 것이 되지만 연철의 나이가 많아서 강장제의 의미로 넣었다고 하면 사실 문제가 없기도 하다. 쥐똥나무 열매는 당뇨 고혈압, 지혈이나 식은땀을 멈추게 하는(지한) 효능과 함께 강장제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