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명나라 시기의 조복 |
1.1. 춘추전국
(당대의 그림이 아닌 후대의 그림)
1.2. 한
고구려가 현도군에서 매년 조복을 받아갔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고구려의 조복도 같은 양식이었던 듯하다.
1.3. 당
당대 객사도. 당고종의 아들 장회태자 현의 무덤에 그려진 것으로 장회태자의 장례식에 참석한 조정 신료와 이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2. 고려
고려의 경우 문헌에 세부자료가 자료가 남지는 않았으나 송나라 영향을 받은 듯하다. 불화 등 그림 속 묘사를 통해 복원
3. 송
4. 명과 조선
명(왼쪽)과 조선(오른쪽), 엄밀히 말하면 본 그림은 조복이 아닌 제복이다. 하지만 색을 제외한 양식은 같다. 조복은 삼이 적색이다.
금관과 조복 차림의 흥선대원군
위 그림의 조선 조복들은 후기 복식으로 조선 초기의 조복은 명나라와 유사하다.[1]
5. 일본?
일본은 조복 관련 자료가 좀 애매한데, 나라 시절 중국에서 전해진 복식에 기원하였다.
기록에 남은 양식에서 보듯이 상의의 모양새와 패옥 등은 당나라의 영향[2]을, 바지의 모양새는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
여러 양식이 혼합된 데다가 독자적으로 예법과 의식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탓에 점차 쇠퇴하였다. 그리하여 후대로 갈수록 조복이 조잡하고 단순해졌으며 헤이안 시대 중반쯤 되면 호우코(布袴)와 소쿠타이(束帯)가 조복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당에서 온 사람이 이를 보고 "당나라의 일상복을 입고 예의를 갖춘 조복이라고 한다." 하고 평한 기록이 있다. 사신에게는 소쿠타이가 아무리 높게 봐줘야 당나라의 관복인 단령처럼 보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