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23:53:59

경복궁 기별청

기별청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font-size:0.6em"
현무문
천하제일복지천
오운각 옥련정
벽화실 청와대 관저
청와대 본관 청와대 녹지원 춘안당 융문당
칠궁 양정재 수궁(구 관저터) 융무당 태화궁
지희실 경농재(관풍루) 대유헌 경무대
청와대 위민관,헬기장
수궁 청와대 춘추관
마장 관가문 희맹공신단
금화문 팔도배미
청와대 영빈관,경호실
추성문 금위군직소 춘화문 춘생문
신무문 수문 계무문 광무문 춘도문 수문
숙문당 수문장청 군사방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각감청 관문각
건청궁
서녹산 어구 동녹산
태원전 영사재 대왕대비전 세답방
순화궁 세답방 중궁전 세답방 종각
빈궁 세답방 공묵재 왕대비전 세답방 가회정 보현당 남여고 육우정 녹직처소 내재실
동장고 통화당 순화궁 외소주방 숙경재 서진설청 선원전 동진설청 경안당
순화궁 내소주방 진전 소주방 진전 생물방 화락당 나인처소
회안전 문경전 서장고 향원정 만화당 벽혜당(왕대비전 생물방) 대향당 나인처소
정훈당
함화당 집경당 전기등소 만경전 건기당(왕대비전 내소주방) 요광당(왕대비전 외소주방) 어린이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나인처소
숙설소 영훈당
공상청 빈궁 생물방 상궁처소 다경합 건복합
회광당(빈궁 내소주방) 광원당(빈궁 외소주방)
원역처소 흥복전 중궁전 수방 대왕대비전 수방 제수합 영보당 벽월당(상궁처소)
중궁전 침방 대왕대비전 침방
제관방 원역처소(접견소) 장방(기무처) 영사처소 아미산 자미당 자경전 집희당(대왕대비전 내소주방) 춘소당(대왕대비전 침방) 취운당(대왕대비전 수방) 나인처소
침채고 예춘당(대왕대비전 생물방) 벽로당(상궁처소) 웅향당(상궁처소)
함정당(대왕대비전 외소주방) 계응당(상궁처소)
임향당 나인처소
국별장직소 함원전 건순각
인지당 나인처소 보월당(상궁처소) 자운당(상궁처소) 나인처소
경회루 함홍각
교태전 원길헌
복희당(대전 생물방)
국출신직소 흠경각
양의문 대전 내소주방 난지당(대전 외소주방) 대소대금방(나인처소)
무겸직소 응지당 강녕전 연길당
북소위장직소 경성전 연생전
수문 파수각 향오문
영추문 수문장청 내각( 규장각) 검서청( 규장각) 대전장방( 내시부) 천추전 사정전 만춘전 자선당 비현각 장방 수문장청 건춘문
습회당 협오당 장원당 중궁전 수랏간 왕대비전 수랏간 등촉방 등촉방 장방 관리사무소
군사방 수정전 별감방 군사방
초관직소 장무관직소 입심억석( 내의원) 주원( 사옹원) 수정문 사정문 오상방 원역처소 세자궁 수랏간
훈국군번직소 침의청( 내의원) 약방( 내의원) 내반원( 내시부) 협의문
융무루ㅓ
근정전 계인문
융문루
통장청 문기수청 춘방
서소위장직소 의약청( 내의원) 영화문 계방
옥당
( 홍문관)
검서청( 규장각) 대전 수랏간 계조당 훈국군번처소 초관처소
누국 당후( 승정원) 정원( 승정원) 숭양문 월화문 근정문 일화문
일영대 선전관청 빈청
기별청
유화문
수각

덕양문
수각
봉선문 별군직청 주차장
영제교
춘방책고대청 상의원 면복각
신당 덕응방 북마랑 흥례문
전사청 연고 내사복시 거달처소 중마랑 동마랑 용성문 어도 협생문 계방 오위도총부
우마랑 국립고궁박물관 좌마랑 내구 연지 수문장청
매표소
군사방
수문장청
매표소
남소부장청 동소부장청
견마배청 남마랑 군사방 초관처소
영군직소
측사
측사 충장장청
서십자각 수문 광화문
( 월대)
수문 동십자각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기별청
景福宮 奇別廳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세종로)
건축시기 1867년 (창건 추정)
2001년 (복원)
파일:기별청.png
<colbgcolor=#bf1400> 기별청[1]
1. 개요2. 역사3. 특징4. 여담

[clearfix]

1. 개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곳[2]

흥례문 서쪽 행각에 있으며 유화문의 북쪽에 있다.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인 승정원에서 매일 발행했던 ‘ 조보(朝報)’를 만들던 곳이다. 조보는 일종의 신문으로 지금의 관보같은 역할을 했다. 과거시험 날짜나 신하들이 올린 상소 및 그에 대한 의 답변, 그리고 조정 인사 이동과, 외국 소식, 심지어 날씨까지 적히는 등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매체였다. 조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보 문서 웹툰 《조선왕조실톡》의 163화를 참조.

조보를 적은 종이를 ‘기별지(奇別紙)’라 했다. 기별지를 내는 곳이 바로 ‘기별청(奇別廳)’이다. 기별청 뿐 아니라 조보를 담당하는 몇몇의 관리들 역시 직책에 기별이란 이름이 붙었다. 매일 아침마다 각 관청에서 조보를 베껴 쓰라고 보낸 서리들을 ‘기별서리(奇別書吏)’라 했으며 지방에 조보를 배달할 전령을 ‘기별군사(奇別軍士)’라 했다.

즉, 엄밀히 말하면 관청기구의 이름이며 건물의 이름이 아니다. 당연히 다른 궁궐에도 기별청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 사라졌고, 현재는 복원해 둔 경복궁의 기별청만이 존재한다.

현판 글씨는 예서체로, 서예가 현암 정상옥 선생(玄庵 鄭祥玉, 1946~)이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吳玉鎭, 1935~2014)이 새겼다.

2. 역사

언제 처음 세웠는 지는 모른다. 조선 전기에도 조보가 있었으니 그 때도 기별청은 있었겠지만 지금 자리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1868년( 고종 5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현 자리에 지은 듯 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 시기인 1892년(고종 29년) 4월에 딱 한 번 나온다. 하지만 이것도 기별청 건물을 다룬 게 아니고, 도목정사[3] 때에 농간을 부린 죄인 김두형을 문책하던 중 기별청에서 일했다는 진술로만 등장한다. # 승정원일기》에는 정조와 고종 시기를 합쳐 기별청이 3번 나오는데, 정조 때는 경복궁이 없었고, 고종 때의 내용은 《 조선왕조실록》과 같다. 그러니 공식 기록에 경복궁 기별청에 대한 내용은 저 이외에는 없다.

1894년( 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조보가 사라지고 근대식 관보가 생겼다. 이 때 기별청이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관보를 발행했는지, 아니면 기별청에서 계속 관보를 내었는지는 모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경복궁에서 열리면서 흥례문 및 주변 행각과 같이 헐렸다. 그리고 공진회 개최 1년 뒤인 1916년에는 일제가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 기별청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졌다.

8.15 광복 후인 1990년대 대한민국 정부에서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고, 2001년 10월 26일에 흥례문과 같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특징

  • 실내는 북쪽의 방 2칸과 남쪽의 마루 2칸으로 나누어진다.
  • 지붕은 맞배지붕, 처마는 홑처마이다. 공포는 초익공 양식으로 되어있으며 창방과 도리 사이에 소로를 놓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쌓아 마감했으며 용두는 올리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4]으로 칠했다.
  • 정면의 바깥 면 2칸은, 칸 중간에 중인방을 두고 위에는 을 두고 아래엔 창문을 둔 모습이다. 다만 왼쪽과 오른쪽 칸의 모습이 다르다. 왼쪽 칸의 중인방 아래는 전부 이나, 오른쪽 칸은 중인방 아래에 문선을 두어 문선 가운데 안에만 문이고 양 옆은 으로 마감한 형태이다. 그리고 중인방의 높이도 오른쪽 칸이 왼쪽 칸보다 더 낮다. 왼쪽 칸에 현판이 달려있다.
  • 남쪽 측면(유화문 방향)의 바깥 면 2칸도 역시 칸 가운데에 중인방이 있고 그 위를 으로 마감한 모습이다. 정면 방향의 칸은 중인방 아래에 문이 달려있으나 옆 칸은 벽이다. 북쪽 측면( 근정전 방향)의 바깥 면도 남쪽 측면과 구조가 유사하나 모든 칸의 중인방 위, 아래가 다 벽이다.
  • 뒷면( 국립고궁박물관 쪽에서 바라볼 때)의 바깥 면 2칸은, 하단부에 사고석과 벽돌을 쌓은 뒤 그 위에 몸체를 구성한 모습이다. 얼핏 보기에는 주변의 흥례문 근정문의 행각과 비슷한 형태이나 자세히 보면 약간 다르다. 칸 중간에 중인방과 문선을 두고 문선 사이에 창을, 나머지는 전부 벽으로 마감했다.

4. 여담

  • 관리들과 양반들은 기별지를 받아야 조정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서울 거주자들은 매일같이 소식을 전달받았지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며칠이나 몇 주 치, 또는 한 달 치를 한꺼번에 받았다. 그래서 소식이 늦어지면 “왜 소식이 없지? 기별이 없지?”하며 기다렸고, 그러다 어느새 소식과 기별이 동의어가 되었다. # 여기서 나온 표현이 ‘기별이 왔느냐’, ‘간에 기별도 안 간다’[5]이다.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정말로 저 기별이 이 '기별(奇別)'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3] 都目政事. 매년 2회 또는 4회씩 이조 병조에서 행하던 인사행정. [4] 부재 끝 부분만 화려하게 칠하는 단청. [5] 먹은 음식량이 적어 뱃속에 소식이나 갔겠냐(음식이나 도달하겠냐)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