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3:53:25

교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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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군기. 교황 해군 선수기

라틴어: Exercitus Civitatis Ecclesiae
이탈리아어: Esercito dello Stato della Chiesa
영어: Army of the Papal States

1. 개요2. 역사
2.1. 교황군 창설 전2.2. 중세 시대2.3. 근세 초기 시대2.4. 근세 후기, 혁명 시대2.5. 근대 시대
3. 교황군의 잔재-현대의 교황군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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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군은 중세 시대 이래 교황이 통치하는 교황령이 보유하였던 군사력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스테파노 2세 프랑크 왕국 피핀 3세에게 옛 동로마 제국 라벤나 총독부 영지를 기증받아 교황령을 건국한 이래로도 한동안 교황은 군사력이 전무했으나, 중세 이후 여러 가톨릭 국가들의 영향을 받으며 군대를 조직하였다.

2. 역사

2.1. 교황군 창설 전

상술했듯 교황령 건국 이후로도 교황의 군대는 따로 조직되지 않았다. 평화를 숭상하는 그리스도교 보편교회의 지도자인 교황이 군대를 이끌고 누군가를 직접 무력 정벌하는 상황이 보기 좋지 않을 뿐더러, 교황이 실제로 통치하는 범위는 현대의 라치오 주 일대 정도고 나머지 영토는 교황의 봉신들이 봉건제로 다스리는 영토라 군대를 조직할 만한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교황은 군사력이 아닌 파문을 주 무기로 삼아 종교적, 정치적으로 적국을 뒤흔드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군사력이 꼭 필요한 상황은 있었다. 로마 제국 시대부터 빈발하던 로마 교외 지역의 도적단 토벌이나 바르바리 해적과의 교전 등의 전투 상황에서는, 로마 시 민병대가 출격했다.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교황에게 종속된 군대가 아닌 로마 시를 지키기 위해 자율적으로 뭉친 민병대였으나, 로마 시를 통치하는 이가 교황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 교황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이들로 교황과 로마를 지키기는 충분치 않았다. 846년 바르바리 해적이 로마 시 근교까지 침범해 성 베드로 성당을 불태우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민병대를 가지고는 무찌르기 어려운 적군은, 외국 동맹군을 동원하여 맞섰다. 849년에 바르바리 해적이 로마를 다시 공격하자 나폴리, 가에타, 아말피 세 지역의 군대를 빌려 오스티아에서 격퇴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교황은 용병도 사용했다.

2.2. 중세 시대

최초의 교황군이라 할 수 있는 군대는 중세 초중기에 로마의 전통 귀족들이 제공한 자원군이다. 이들은 모두 기사 계급이었으며, 오르시니 가나 콜론나 가와 같은 명성 높은 가문들에서 12명 이상의 지도자가 선출되어 기사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교황령이 전쟁 상황에 놓였을 때 용병 및 외국 지원군과 함께 행동했으며, 사기는 높았지만 수가 적었다.

이들을 기반으로 하여 [1049년]], 레오 9세가 최초로 교황군을 창설했다. 기존의 로마 귀족 기사대에 로마 민병대를 합치고, 용병을 반영구적으로 고용하여 보병, 중기병, 석궁병 등의 편제를 갖추었다. 또 테르니, 스폴레토, 안코나, 페루자 등에서 징집한 봉신들의 군대도 교황군으로 간주하였다. 기존의 교황령 군사력을 종합한 정도이나, 전과 같이 전쟁이 시작되면 집합하고 전쟁이 끝나면 해산하는 형태가 아니라 상설 군대로 개편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1072년에는 독일 용병 기사대가 생겼으며, 주로 슈바벤 지역에서 왔다고 하여 수에비 기병대라 불렀다. 이후 교황군은 교황을 위협하는 세력들, 주로 시칠리아의 노르만인들에 대항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인노첸시오 2세 시기의 시칠리아 왕국과의 전쟁이었는데, 여기서 교황군은 패배했다. 1144년에 후임 교황 루치오 2세 시칠리아 왕국 루지에로 2세에게 패하자, 기회를 노린 귀족들이 원로원을 창설하고 교황에 반기를 들어 로마 시가 로마 코뮌으로 독립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기존에 보병을 담당하던 로마 민병대가 이탈하면서 교황군은 중기병 경기병을 고루 편제한 기병대로 재편되었다.

아비뇽 유수가 시작될 때에도 교황군은 살아남았고 근위병 일부를 제외하면 교황령에 남았는데, 교황이 아비뇽에서 프랑스 왕국에 예속되어 세속 권력을 잃으면서 점차 규모가 줄었다. 1320년 즈음부터는 아예 과거와 같은 임시 군대의 형태로 돌아갔다. 한동안 활동이 없던 교황군은 1353년, 인노첸시오 6세의 명으로 스페인 추기경 에지디오 알보르노즈의 지휘 아래 교황령 재정복에 참여했다. 교황이 오래동안 아비뇽에 잡혀 있으면서 교황령의 봉신들이 실질적으로 독립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들을 다시 복종시키는 작전이었다. 3년 간의 작전 끝에 교황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2.3. 근세 초기 시대

1454년, 로디 조약[1]과 이탈리아 동맹[2]이 체결되어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일시적 평화가 찾아오자 이 틈을 타 교황들은 교황군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교황군의 중심 부대는 교황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6개 부대로 구성된 800명의 기사와 200명의 보병이었다. 또 더 많은 부대가 필요할 때는 다양한 곳에서 용병을 추가로 고용했다. 이탈리아 전역에 콘도티에리[3] 열풍이 불 때, 로마냐 움브리아, 그리고 아브루초 일대에서 8천에서 1만 명 가량의 보병을 징집해 교황군 보병으로 삼아 용병과 같이 활용했다. 이는 이탈리아 동맹을 체결할 때 회원국들이 약속한 보유 병력 수 한계를 훨씬 뛰어남는 숫자였다. 기존 교황군의 주력이 상시 고용 용병대였던 것에 비하면 마침내 제대로 된 상비군 체제가 성립한 것이었다.

16세기 교황군의 1개 연대는 10개의 중대로 120~150명 횡대로 이루어졌으며, 최대 5.4미터에 달하는 길이의 장창으로 무장한 장창병과 초기 형태의 머스킷 으로 무장한 총병이 교대로 배치되었다. 즉, 15세기 최후반에 최고 대세 전술로 떠오른 파이크 앤 샷[4]을 채택하였다.

기병대는 예전과 같이 중기병과 경기병이 고루 편제되었다. 중기병은 흉갑기병 형태로써, 브로드소드와 초기형 권총으로 무장하였다.

또 이 시기에 처음으로 포병대가 창설되었다. 일반적인 야포는 물론 곡사포 박격포를 모두 갖추었다.

상비군이 들어서면서 로마 귀족들 중 지휘관을 뽑던 관습이 사라지고, 교회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위가 신설되었다. 15~16세기에 이 직위는 대부분 교황의 조카가 맡았다. 갈리스토 3세는 조카 피에르 루이지 보르자, 비오 2세는 안토니오 피콜로미니, 식스토 4세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임명한 것이 예시이다.

1503년에 유명한 '전사 교황' 율리오 2세가 즉위하면서, 교황군은 이탈리아 전쟁에 참가해 많은 전투를 치렀다. 율리오 2세는 교황군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기는데, 바로 스위스 근위대의 창설이다. 그가 동맹국이던 스위스에 근위병 파병을 요청하면서 1506년 1월 22일 스위스 용병 150명이 로마에 입성하면서 스위스 근위대가 창설되었다. 율리오 2세는 이들에게 '교회 자유의 수호자'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이탈리아 전쟁 기간 동안, 교황군은 체사레 보르자 잔당 재정복, 아냐델로 전투, 긴가트 전투 등에서 승리하였으나 라벤나 전투 등에서 패하기도 하였다. 이때 교황군이 개입된 대표적인 참사가 바로 사코 디 로마다. 신성 로마 제국 휘하 란츠크네히트가 급료를 체불당하고 지휘관까지 잃자 폭도로 변해 날뛰면서 로마로 진군하기 시작했는데, 교황군 주력군은 로마 민병대와 협공하려 이들과 간격을 두고 추격했으나 클레멘스 7세와 시민들의 무기력함이 겹쳐 로마가 순식간에 함락당하는 바람에 로마가 역사에 남을 약탈을 당할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후 이들이 6개월이나 로마를 점거하는 동안 교황군은 손을 쓰지 못했다. 단, 이 사코 디 로마에서 로마에 주둔한 교황군 휘하 스위스 근위대가 전멸을 감수해가며[5] 교황을 지켜내면서 스위스 근위대가 교황군에 영구히 편제되는 계기가 되었다.[6]

이후 충격을 조금씩 극복한 교황령이 16세기 말에서부터 17세기 중반까지 교황령 재정복을 할때 동원되었으며 1641년 우르바노 8세가 교황령 내 카스트로 공국을 칠때 동원되어, 라고 스쿠로 전투에서 카스트로 공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프랑스-베네치아-북이탈리아 공국들의 동맹군에 대패하였으나 끈질긴 공격 끝에 1649년 카스트로 공국을 무너뜨림으로서 교황령의 최대 판도를 이룩했다.

2.4. 근세 후기, 혁명 시대

르네상스 시대까지 끝나고, 교황이 전쟁을 벌일 일이 없어지면서 교황군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특히 1700년에 발발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벌어진 전투가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추기경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친프랑스 중립을 선언했던 클레멘스 11세를 굴복시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측은 야전원수 다운 백작 휘하에 별동대를 파견하여 교황령을 침공, 페라라 일대[7]를 공격하고 포를리와 코마키오를 포위했다. 이에 마르실리 장군 휘하 교황군 25,000명이 방어에 나섰으나 제국군에게 패배하고 교황이 굴복하여 신성 로마 제국 측이 내세운 스페인 국왕 후보 카를 대공[8]을 스페인 국왕으로 승인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루 클레멘스 11세를 비롯한 교황들은 교황군이 유지비에 비해 별 쓸모 없다고 생각하여 군축을 진행, 18세기 중반 즈음에는 각 요충지의 수비대를 제외하고는 야전을 할 만한 부대는 모조리 해체되었다.

이는 18세기 말, 혁명의 시대에 교황에게 직격탄으로 되돌아왔다. 1797년, 프랑스의 떠오르는 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기를 굳힌 후, 교황령에 선전포고한 것이다. 이때 프랑스는 1789년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으로 공화정이 된 상태였는데, 반가톨릭을 내세워 교황과 사이가 무척 나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을 제압하기 위해 전쟁을 결의했다. 클로드 빅토르 장 란 두 장군이 별동대 9,000명을 받아 교황령 국경을 넘었다. 이에 비오 6세는 다급히 교황군을 소집하고 민병대까지 더해서 7,000명의 군대를 모아 요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파엔차 전투에서, 교황군은 세니오 강을 끼고 포격을 가해 프랑스군 수십 명을 죽였으나 프랑스군이 대대적으로 도하를 감행하자 알아서 무너지는 추태를 보였다. 프랑스군 사상자는 총 100여 명이었고 교황군은 800여 명 나왔다. 추가로 1,200명이 사로잡히고 야포 14문이 노획당했다. 클로드 빅토를 남하하여 안코나를 쳤는데, 안코나 수비대는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결국 비오 6세는 톨렌티노 조약을 통해 항복하였다. 막대한 전쟁 배상금은 물론 라치오 일대를 제외한 영토를 모조리 빼앗겼다.[9] 아비뇽 유수 이래 유지되던 아비뇽 교황령도 빼앗겻다. 로마의 예술품들이 프랑스군에게 무제한 약탈당한 사실도 유명하다. 프랑스군은 이것도 모자라 1798년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장군의 지휘 아래 로마를 재공격했다. 2월 11일에 로마가 프랑스에게 점령당했고, 프랑스군은 공식적으로 교황군의 해체를 발표했다. 교황은 시에나를 거쳐 피렌체의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교황군 산하 란치아 스페차타[10]가 끝까지 교황을 보호했으나, 결국 1799년 프랑스군이 밀어닥치자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고 교황도 사로잡혀 프랑스로 유배를 가야 했다.

2.5. 근대 시대

1801년, 새 교황 비오 7세는 귀족 근위대를 신설했다. 이전에 비오 6세를 마지막까지 지켰던 란치아 스페차타 부대원들과 귀족 자원자[11]들을 합쳐서 중기병 연대 1개를 편성했다. 주 임무는 교황의 신변 호위와 새 추기경에게 주케토[12]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1804년,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에 교황이 갈 때 교황을 파리까지 호위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1808년에 프랑스의 압력으로 해체되었으나, 1815년 워털루 전투로 나폴레옹 1세가 최종적으로 몰락하자 재건되었다.[13] 이후 교

1848년 3월 23일,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발발한 당일, 교황 비오 9세는 장관령을 내어 '교황령의 방어와 안보 유지, 그리고 이탈리아 국민군과의 공동 행동'을 목적으로 야전군 재창설을 선언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출신의 조반니 두란도와 그의 마시모 다제글리오가 지휘관을 맡아, 기존의 근위대를 위시로 한 1개 기병연대에 이탈리아인 보병 연대 3개, 스위스 기병 연대 2개, 포병대 3개와 2명의 전문 공학자를 포함한 공병대 1개 중대, 기병연대와 별개로 600여 명의 총기병대가 편성되었다. 총원 7,500여 명이었다. 얼마 후엔 안드레아 페라리가 이끄는 볼로냐 출신의 로마 대학 대대라는 민병대가 참가했으며 리비오 잠베카리도 1,200명의 추가 병력을 이끌고 참여했다.

군대를 재건할 때부터 '이탈리아 국민군과의 공동 행동'을 목적으로 선언한 만큼 이들은 친사르데냐적 성향을 띄었으나, 4월 13일에 추기경 특별위원회가 교황에게 반오스트리아 연합에서 탈퇴할 것을 권고했고, 교황은 4월 29일에 논 세멜 훈화를 내어 이탈리아 통일 반대 의사 및 교황군은 오직 교황령 방어에만 전념할 것임을 밝혔다. 그러자 조반니 두란도 장군은 항명을 선언하고 독단적으로 교황군을 이끌고 북상, 6월 10일에 비첸차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와 맞붙어 패전하고 말았다.[14]

교황군이 이탈리아 통일 열풍에 흔들리는 사이 1849년, 로마에서 주세페 마치니가 폭동을 일으켜 로마 공화국을 수립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로마 공화국은 교황군이 아닌 프랑스 원군이 진압하였다. 프랑스 군대가 교황령에 들어오고 가에타로 피난했던 비오 9세가 로마로 돌아온 후, 교황군은 해체되었고 로마 수비는 프랑스군이 전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교황령 자체 군사력도 필요성을 교황과 프랑스가 체감하면서 1849년 말, 전 교황군 총기병대원들을 다시 모아 교황령 헌병대를 창설한 것을 시작으로 1850년대에 다시 교황군을 모집했다. 기존 근위대 중 귀족 근위대를 제외한 일반 근위대를 재편하여 만든 팔라티노 근위대, 통칭 팔라딘이 창설되었고, 보병 위주로 모집되었다. 그렇지만 1850년대의 교황군은 주로 치안 유지만을 담당했으며, 실제 국방 임무는 교황령 서부 및 라치오 지방은 프랑스군이, 안코나를 위시로 한 교황령 동부는 오스트리아군이 담당했다.

1859년, 비오 9세는 급변하는 정세에 맞추어 교황군 재창설을 선언했다. 이번의 교황군은 전 유럽에서 모인 가톨릭교도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졌다.[15]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발발하면서 교황령 동부를 지키던 오스트리아군까지 모조리 동원되었는데,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하는 바람에 교황군 조직이 끝나기도 전에 교황령 동부가 무주공산이 되었고 1860년에 사르데냐 왕국이 이 지역을 침공했다. 교황령 무기장관[16]을 맡고 있던 드 메로드 추기경[17]은 알제리 정복전에서 명성을 얻은 프랑스 장군 크리스토프 드 라모리시에르를 교황군 총사령관으로 임용하고 전 가톨릭 교구에 모병 및 모금 캠페인을 전개했다. 그 결과 상당한 군자금과 20,000여 명의 병력이 모였다. 이탈리아인이 6,000명으로 제일 많았고 그 뒤로 오스트리아인 5,000명, 아일랜드인 3,000명, 프랑스인, 독일인, 폴란드인, 벨기에인, 스위스인, 네덜란드인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군제는 오스트리아군 군제를 도입했으며, 그에 따라 병사들은 국적별 대대로 편성되었다. 가장 수가 많은 보병대는 프랑스인과 벨기에인들로 이루어졌다. 독일인들은 헌병대에, 오스트리아인들은 기동보병대[18]에 배속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성 패트릭 대대를 만들어, 근위대를 제외한 일반 교황군 중 최정예 부대로 자리매김했다.

1860년 9월에, 교황군은 드 라모리시에르와 그의 부관 조르주 피모당의 지휘 아래 사르데냐 왕국군을 요격하기 위해 나아갔다. 하지만 9월 18일에 벌어진 카스텔피다르도 전투에서 분투했지만 2배를 넘는 수의 사르데냐 왕국군에게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피모당이 전사했고, 마르케 움브리아를 비롯한 교황령 동부를 전부 잃어 교황령은 라치오 일대로 축소되었다. 교황군을 돌파한 사르데냐 왕국군은 남하, 테아노에서 양시칠리아 왕국을 무너뜨린 주세페 가리발디와 접선하여 영토를 양도받고 교황령을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 전역 통일에 성공했다. 1861년 이탈리아 왕국 건국이 선포되었는데, 이들이 로마를 수도로 선포하면서 교황령의 안보 위기가 한층 심화되었다.

한편 패배의 충격으로 드 라모리시에르는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교황과 무기장관 드 메로드 추기경은 그를 유임시키고 그에게 군대 재조직을 맡겼다. 그리고 야전을 맡을 지휘관으로 새로 독일인 헤르만 칸츨러와 이탈리아인 조반니 사피를 임용했다. 드 라모리시에르는 알제리 전쟁 때 자신의 경험을 살려, 새 군대를 주아브로 재편하였다. 이로써 교황군의 새 주력부대는 교황군 주아브가 되었다. 프랑스인-벨기에인 보병대와 성 패트릭 대대가 주아브에 배속되었다. 1861년에 주아브로의 재편이 완료되었다.

1864년, 프랑스 제2제국 이탈리아 왕국 간에 '9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왕국은 국왕의 거성을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옮겨 교황령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고, 로마를 수비하던 프랑스군이 1866년까지 철수하기로 하면서 교황령은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였다. 이에 교황령은 2차 모병-모금 캠페인을 열어 병사와 무기를 모았다.[19] 이는 또 다시 호응을 얻어,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물론 영국이나 미국, 캐나다 등 신대륙에서도 입대 희망자가 도착했다. 이 시기 교황군은 활발히 인력 증강을 하면서 교황령 일대의 도적단과 통일주의자[20]를 토벌하는 작전을 벌였다. 1865년에는 과도한 강경 성향을 우려한 프랑스의 권유로 무기장관 드 메르드 추기경이 해임되고 교황군 사령관 헤르만 칸츨러가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1866년에는 프랑스인이 대거 입대하여 남프랑스인들을 모은 앙티브 대대가 편성되었다. 1867년 기준으로 교황군은 총 13,000여 명에 야포 30문을 보유하였다. 60% 가량은 헤르만 칸츨러의 지휘 아래 국경을 방어했고 40% 가량은 사피의 지휘 아래 로마를 방어했다.

1867년 11월, 교황이 제일 우려하던 인물인 가리발디가 1만이 넘는 의용군을 조직하여 교황령을 침공했다. 수년 간 헤르만 칸츨러의 지휘 아래 조직화된 교황군이 프랑스군[21]과 함께 출격하여, 로마 인근의 멘타나에서 가리발디를 맞았다. 멘타나 전투에서 교황군은 가리발디에게 인생에 몇 안되는 참패를 안기며 교황령을 방어해냈다. 덕분에 향후 3년 간,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를 넘보지 못했다.[22]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정세가 급변했다. 교황령과 이탈리아의 전쟁 시 프랑스의 개입을 보장하던 프랑스 수비대가, 본토가 위험해지자 철군한 것이다. 절치부심한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령 점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를 간파한 칸츨러는 9월 초, 교황령 서북부에 5천에 달하는 교황군을 분산 배치했는데, 남하하는 세력이 가리발디 의용군이면 맞서 싸우되 이탈리아 왕국군이면 로마로 퇴각하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12일에 나타난 군대는 불행하게도 라파엘 카도르나가 이끄는 6만 5천 명의 이탈리아 왕국군이었다. 당초의 명령대로 교황군은 차례로 퇴각하면서 로마로 집결했다. 14일에 이탈리아군 선발대가 로마에 당도했고, 17일에 본대가 당도했다. 이탈리아 왕국 측은 교황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테니 항복하라고 제안했으나, 교황과 칸츨러는 이를 거부했다. 이탈리아 왕국 측은 19일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전면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비오 9세는 이탈리아군의 형세를 보고 패배하였음을 직감했으나, 교황의 기백을 보이고 세계에 교황령이 평화롭게 항복한 것이 아닌 이탈리아의 탄압에 짓밟힌 것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전투에 임하라고 지시했다. 19일에 공격 지시가 떨어졌고 20일 새벽부터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포격이 감행되었다. 이미 칸츨러가 성벽을 보강한 바 있어 성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으나, 끝내 포르타 피아 성문 일대의 성벽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무너진 곳에 이탈리아군 최정예 베르살리에리가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를 주아브가 틀어막았는데, 베르살리에리를 상대로 2배가 넘는 전사자를 강요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이 차츰 밀려들어오자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교황령 수뇌부는 오전에 항복했다. 입성한 이탈리아 왕국군이 제일 처음 내린 조치가 바로 교황군의 해산이었다. 이로써 교황군은 성좌와 함께 한 오랜 역사를 마감하였다.

3. 교황군의 잔재-현대의 교황군

교황군의 주력 부대들은 줄줄이 해체되었다. 외국 자원봉사자들은 프랑스 선박에 실려 고국으로 귀향하도록 조치되었고, 이탈리아인 교황군 병사들은 모조리 반역죄로 기소되어, 로마에서부터 피에몬테 지역의 페네스트렐레 감옥까지 걸어서 보내져, 열악하고 고된 감옥살이를 당해야 했다. 프랑스 출신의 앙티브 군단과 주아브 일부는 그대로 프랑스로 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해 프로이센 왕국군과 싸웠다.

교황군 중 존속이 허락된 부대는 오직 스위스 근위대, 귀족 근위대, 팔라티노 근위대와 헌병대 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바티칸 유수 기간 동안 교황의 신변 보호에 동원되었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이 맺어지며 바티칸 시국이 건국되자, 이 중 스위스 근위대가 바티칸 시국의 군대로 인정되었다. 그 외의 부대는 수가 줄어들어 군대라기보다는 철저히 근위대로 남았다. 그런데 역사상 딱 한번 이들이 다시 증강된 적이 있었다. 바로 1943년에 있었던 나치 독일군의 로마 점령 때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비록 공산주의 물결에 대한 견제와 라테라노 조약 때문에 한동안 파시즘 세력에 눈을 감았으나, 2차대전 전부터 나치를 비판하고 유대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보호할 것을 바라는 성명을 내는 등 나치와 적대적 관계로 돌입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가 마침내 로마를 점령하자, 비오 12세는 여러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한편 직접 바티칸 시국 영토 내에 유대인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성 베드로 성당을 위시로 한 본 영지 내에 477명, 여름 별장인 카스텔간돌프에 3,000여 명을 숨겨주었다. 이를 고까워 한 나치가 위협해오자, 교황군 증강을 명령해 일시적으로 스위스 근위대는 300명 이상, 팔라티노 근위대는 2,000여 명까지 늘어났다. 이들은 일부는 독일군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창으로,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고 독일군과 대치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후 다시 수효를 줄였다.

1958년 요한 23세가 즉위하고 1962년ㅔ서 1965년까지 진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가톨릭 교회와 바티칸 시국은 빠르게 현대화되어갔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1970년, 바오로 6세는 귀족 근위대, 팔라티노 근위대, 헌병대 세 부대의 해산을 선언했다. 귀족 근위대와 팔라티노 근위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헌병대는 국무원 산하로 이동하여 바티칸 헌병대가 되어 경찰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이로써, 교황군의 유산을 이어받은 부대는 정말로 스위스 근위대만 남았다. 이들은 오늘날에도 바티칸 시국의 군대로써 기능하고 있다.

4. 관련 문서



[1] 롬바르디아의 로디에서 체결된 평화 조약. 교황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이탈리아 반도 내의 주요 세력들이 참여했다. 스포르차 가문의 밀라노 공국 상속 인정과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간의 국경 확정, 그리고 이탈리아 전역에서의 25년 휴전이 주 내용이었다. [2]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간의 공수동맹. 1455년에 교황령과 나폴리 왕국이 가입했다. [3] 이탈리아 특유의 대규모 용병 회사를 일컫는 말. 근세 초기의 이탈리아 소국들은 콘도티에리를 고용해 자국군처럼 사용했다. 마키아벨리가 집중 비판한 용병이 이들을 뜻하는데, 마키아벨리의 비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민병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당대 이탈리아 최고의 무력 집단이었다. [4] 장창병을 보병의 주력으로 삼아 방진을 취하게 한 후 총병들이 장창병의 엄호를 받으며 사격하는 전술. 초기에는 총병은 보조적인 역할이고 장창병 방진이 전진하여 돌파하는 형태를 띄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총병의 비중이 높아지고 총병의 사격이 전투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 총병의 비중이 갈 수록 높아지다 총검 혁명이 터지면서 파이크 앤 샷은 전열보병 전술로 대체되었다. [5] 로마가 함락당했을 때 남았던 근위병 189명 중 147명이 전사했다. [6] 단, 클레멘스 7세 본인 대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간섭으로 스위스 근위대를 일시 해체했다가 다음 교황인 바오로 3세가 다시 스위스 근위대를 모집하고 영구 계약을 맺었다. [7] 현대의 에밀리아로마냐 주 동부. [8] 후의 카를 6세 황제. [9] 이 땅들은 치살피나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에게 위탁되었다. [10] 이탈리어어로 부러진 기병창 또는 해체된 부대라는 뜻으로, 소속 용병대가 해체될 수준의 격전 속에서도 살아남는 정예 용병들을 모은 용병단을 일컫는다. [11] 교황의 형편이 녹록지 못하여 유지비를 스스로 부담할 자신이 있는 귀족 자원자들만 모았다. [12] 일반적으로 주교 하면 떠오르는, 정수리에 얹는 동그란 빵모자. [13] 실제로는 1814년에 이미 재결성되어 교황을 호위하고 있었고, 공식적인 재건 법령이 발표된 것이 1815년이었다. [14] 직후 그는 스스로 직무 3개월 정지 처분을 내렸고, 끝내 사임하였다. 항명에 대한 처벌도 받아야 했으나,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군에 유리하게 행동한 것을 참작받아 명예롭게 퇴진하여 이탈리아 왕국 건국에 참여하게 된다. [15] 유명한 주세페 가리발디의 의용군을 비롯하여, 이 시기 이탈리아는 최첨단 사상들이 맞붙은 전장이었기 때문에 의용군 부대가 상당히 많았다. [16] 현대의 국방장관에 상응하는 직. [17] 벨기에 출신 성직자로, 성직자가 되기 전에 벨기에군과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복무한 전력이 있었다. [18] 이탈리아어로 베르살리에리라고 한다. 기병이 부족했던 근대 이탈리아의 사정으로 인해 탄생한 특유의 정예 경보병대로, 빠르게 이동하여 사격으로 적의 측후방을 기습하는 역할이었다. 사르데냐 왕국군 소속 베르살리에리는 기계화보병대로 바뀌어 현대 이탈리아군에도 편제되어 있다. [19] 교황령에는 무기 공장이 없어, 구매나 기증으로밖에 무기를 구할 수 없었다. [20] 이탈리아 통일주의자들은 민족주의는 물론 교황령이 금하던 자유주의와 반가톨릭주의를 강하게 띄고 있어 교황령의 주적이었다. [21] 1866년에 전면 철수했었으나, 1867년 초에 가리발디가 의용군을 모으며 전 유럽에 교황령 침공을 알리자 다시 교황령에 원군을 보냈다. [22] 단, 이에는 인계철선 역할의 프랑스 수비대가 배치된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