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00: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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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상3. 플라톤의 대화편
3.1. 개요3.2. 등장인물3.3. 세부 차례3.4. 줄거리
3.4.1. 고르기아스와의 문답3.4.2. 폴로스와의 문답3.4.3. 칼리클레스와의 문답
3.5. 주요 내용3.6.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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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Γοργίας / Gorgias

기원전 485년 ~ 기원전 380년

시칠리아의 렌티니 출신으로 프로타고라스와 함께 1세대 소피스트이자 수사학자.

2. 사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을 주장했다고 여겨진다. 그에 따르면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후에 뭔가가 있었다고 해도 그건 인간이 알아챌 수 없는 것이고, 만약 그걸 인간이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거나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을 그가 썼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는데,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아리스토텔레스가 후세에 쓴 그에 대한 이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의 유명한 글 중 몇 개가 있는데 헬레네 찬양도 유명하다. 이는 헬레네를 그리스인들이 비난하는 것에 대해 논파할 목적으로 쓴 글인데, 그에 따르면 헬레네는 1. 신들의 엄청난 힘에 의한 것이거나, 2. 파리스 등의 힘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거나, 3. λόγος의 힘에 설복했거나, 4. 사랑의 신의 행위였다.

1과 4의 경우 인간은 신은 거역할 수 없으므로 헬레네를 비난할 수는 없다. 2의 경우도 헬레네는 당해낼 수 없는 힘에 져서 끌려간 것이다, λόγος, 즉 논리, 말, 논변, 이치 등에 설득이 되었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말은 갸우뚱하게 들린다. 그러나 고르기아스의 주장에 따르면 설득과 같은 λόγος 의힘은 정말로 강력하다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 인간이 진실된 앎, 지식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얼마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행동은 앎이나 지식이 아닌 의견(δόξα)의 영향을 크게 받는데, 이 의견은 완전한 앎이 필요 없고 λόγος의 힘으로, 수사학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 천문학자들이 가정과 가정으로 논쟁을 거듭하면서 확인할 수 없는 물체에 대한 의견을 로고스의 힘으로 개진할 때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또, 법정에서의 싸움 역시 훌륭한 로고스의 기술을 통해 마치 역전재판처럼, 배심원이나 심판관 역할을 하던 고대 그리스의 청중들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었다. 또, 철학자들끼리의 싸움에서도 로고스의 기술로 빠르게 빠르게 몰아붙이면서 상대가 당황해 말이 궁한 상태에 잠시라도 빠지게 하면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렇게 로고스의 힘으로 의견에 영향을 강하게 끼쳐 버리면 인간의 영혼은 그에 설복된다. 로고스의 힘은 이토록 강력하고 인간은 대항하기 어렵다. 이것이 고르기아스의 주장이다.

이같은 고르기아스의 주장은 팔라메데스 옹호에서 한층 풍부한 일면을 보인다. 로고스, 수사학은 이토록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그것은 오히려 로고스나 수사학이 진정한 진리나 앎, 지식과 동떨어져 있을 경우에만 해당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정한 앎, 지식, 진리를 알고 있다면 결코 로고스나 수사학이 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말이나 로고스 같은 것들은 결코 사실, 사물, 실재 존재하는 것에 대한 완벽한 재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수준은 앎[1], 지식의 수준이 아니라 의견[2]의 수준이다. 로고스는 이 의견의 수준에 거부하기 힘든 강한 영향력을 끼친다. 이러한 로고스는 잘 만들어내면 잘 만들어낼수록 좋으며, 로고스 사이에는 우열 관계가 있다. 로고스로서 보다 더 우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시에 사용해야 하고,[3] 또 실제 일어난 사례를 잘 인용해야 한다.

고르기아스는 수사학에 능했던 모양이며 이로 인해 소피스트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의 수사학적 논변과 철학적인 조예를 동시에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로 'On what is not'(비존재에 관하여)에서는 총 세 가지 논제를 통해 인간의 존재 능력에 대한 회의를 나타낸다.

그것은
1) 존재란 있을 수 없다.
2) 설령 존재가 있어도, 그것을 지각할 수 없다.
3) 설령 존재를 지각할 수 있어도, 그것을 (타인에게)설명할 수 없다.
로 나뉜다.

우선 논항 1)에 대하여 고르기아스는 세 가지 상태, [A] 존재가 실존하는 경우, [B] 비존재가 실존하는 경우, [C] 존재 혹은 비존재가 실존하는 경우를 가정하였다. 우선 [A]의 경우가 참이라면 그것은 [a] 영원불멸하거나 [b] (무에서) 발생했거나 [c] 영원불멸하고 동시에 (무에서)발생한 것이다. 이 경우 [a]가 참이라면 만물은 영원불멸하고, 따라서 출발점이 없이 영원히 존재해 왔다. 그것은 한계가 없는(아페이론;ἄπειρον) 상태일 것이나, 실제로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물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다. 따라서 [a]는 거짓이다. 또한 [b]가 참이라면 이는 만물이 무에서 유로 상태가 변화하는 창조 과정을 거친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파르메니데스 제논 같은 엘레아학파에 의해 부정된 사실이므로 [b] 또한 사실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c]는 둘 다 말이 안 되는 [a], [b]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A]를 가능케 하는 모든 조건이 부정되었으므로 존재가 실존할 수는 없다.

물질에 대해서는 엠페도클레스처럼 사물이 계속 흘러나가는데 물체의 다양한 구멍에 맞고 안 맞고가 있어서 인식이 된다고 여겼다.

3. 플라톤의 대화편

3.1. 개요

<고르기아스>는 플라톤의 초기[4] 대화편 중 하나이다. 부제는 ' 수사학에 관하여'. 정치 윤리와 연설 선동[5]의 문제를 다룬 대화편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술에 대항해 도덕적인 정치를 주장한다.

3.2. 등장인물

대화장소 칼리클레스의 집

등장인물
칼리클레스[6]
소크라테스
카이레폰[7]
고르기아스
폴로스[8]

3.3. 세부 차례

447a~d 소크라테스 일행이 칼리클레스의 집을 방문하다.
447c~461c 고르기아스와 나눈 대화
461c~481b 폴로스와 나눈 대화
481b~527e 칼리클레스와 나눈 대화

3.4. 줄거리

3.4.1. 고르기아스와의 문답

어느 날 고르기아스가 묵고 있는 칼리클레스의 집에 소크라테스가 방문한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에게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한마디로(의사, 화가와 같이) 답해달라 요청한다. 이에 폴로스가 나서 고르기아스는 앞선 연설로 지쳤으니 자신이 대신 말해주겠다 제안한다. 하지만 폴로스의 대답은 소크라테스를 만족시키지 못한다.[9] 이에 고르기아스가 직접 나서 소크라테스는 논의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묻고 고르기아스는 수사학(rhetorike)[10]를 가르친다고 답한다. 이에 소크라테스가 직조술은 천, 음악은 작곡에 관련이 있듯 수사학은 무엇과 관련이 있냐고 묻자 고르기아스는 말과 관련 있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가 의술을 배우면 병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고 체육을 배우면 몸 상태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수사학은 의술과 체육 등등을 포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는 것 같다, 즉 모든 말과 관련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묻는다. 거기에 더해 수사학이란 말을 능숙하게 하는 기술의 일종이 아니냐고 추측하자 고르기아스가 이에 수긍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의술을 알면 건강을 말하는 데에 능숙해지고 체육을 알면 몸을 말하는 데에 능숙해지니 이 또한 부족한 설명이라고 비판한다. 고르기아스는 이에 수사학은 의술, 체육과는 달리 행동과 수작업과는 관련 없고 말 그 자체와 관련 있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여러 기술중에 활동의 비중이 큰 것도 있지만 말의 비중도 큰 것도 있다며 후자 중엔 수학, 기하학, 장기 두기 등이 있는데[11] 수사학이 이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주장하고 고르기아스도 동의한다. 그렇다면 수학이 수에 관여하는 것처럼 수사학은 무엇에 관여하는지 묻는 질문에 고르기아스는 인간의 일 가운데 가장 크고 좋은 것에 관여한다고 답한다.[12] 소크라테스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당시 유행하던 권주가의[13] 가사를 인용하며 의사, 체육 선생, 사업가가 고르기아스의 주장에 딴지를 걸 수 있을것 같다고,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기술이 가장 훌륭한 것에 관여하는지 변호하겠냐고 묻는다.[14] 고르기아스는 이에 자신의 기술, 즉 설득시키는 기술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자유를 지키고 사회적으로는 남을 다스리며 의사, 체육 선생, 사업가 모두 수사학을 통해 노예처럼 부릴 수 있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설득을 수사학의 핵심으로 지목하고 이번에도 수학을 알면 사람들에게 수에 관해 설득시킬 수 있고 체육을 알면 몸에 관해 설득시킬 수 있다고 지적하며 가르치는 기술들은 모두 '설득의 장인'이니 수사학은 이들과는 다르게 무엇에 관한 것을 설득시킬 수 있냐고 묻는다. 고르기아스는 법정 등지에서 군중 대상으로 정의와 비정의에 관해 설득하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럴 것 같았다고 말한 뒤 고르기아스가 내린 정의에 만족하고 수사학의 성질을 탐구하는 논답을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설득에는 배움(앎)을 주는 설득과 배움 없이 확신만을 가져다 주는 설득이 있다고 말하며 수사학이 가르치는 설득은 둘 중 어느 것에 가깝냐고 묻는다. 고르기아스는 후자라고 답하며 그렇다면 수사학을 통한 설득은 옳코 그름을 군중에게 가르칠 수 없고 그저 설득시킬 뿐 아니냐는 소크라테스의 의문에도 사실이라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성벽 축조를 해야 할 땐 연설가가 아닌 건축가의 의견을 들을테고 전쟁을 할 땐 연설가가 아닌 장군의 의견을 존중할 텐데 연설가와 수사학이란 기술의 필요성이 무엇이냐고 묻는다.[15] 고르기아스는 이에 수사학의 힘이 무엇인지 낱낱이 보여주겠다면서 그러한 사업들은 모두 전문가가 아닌 테미스토클레스 페리클레스와 같은 연설에 능한 정치가가 추진하고 의결시킨 것이라는 현실 속 사례들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수사학은 정치의 핵심 기술이고 다른 분야에서도 (그 분야에 대한 앎 없이도) 전문가보다 더욱 군중들을 잘 설득시키고 심지어 전문가보다도 더 전문가다워 보이게 속이는 것도 가능한 기술이라[16] 말한다. 그렇지만 수사학은 승부를 정당하게 다루듯 사용해야지 잘못 사용하면 안 되며 만일 수사학을 잘못 사용해 해를 끼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체육을 배운 자가 폭행을 저질렀을 때 이는 폭행범의 잘못이지 체육이란 기술과 체육 스승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수사학과 수사학 강사의 잘못이 아니란 말도 덧붙인다.[17]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잠시 고르기아스에게 논의를 계속할지 의사를 묻는다. 고르기아스는 자신은 상관없지만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논답을 듣고 있던 카이레폰과 칼리클레스는 오히려 대화를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이어진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연설가(모르는 이)가 수사학을 통해 군중들(모르는 이들) 눈에 전문가(아는 이)보다 더욱 아는 이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이 수사학 아니냐고 묻자[18] 고르기아스는 아니 그럼 다른 기술을 익힐 필요가 없으니 무척 편리해지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잠시 제쳐두고[19] 고르기아스의 모순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수사학이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는 확신만을 가져다준다면 수사학을 배운다고 해서 정의와 비정의를 알지는 못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고르기아스는 자신에게 오면 수사학을 배우면서 같이 정의와 비정의에 관한 앎을 배울 수 있다고 장담한다.[20] 목공 일를 배운 이는 목공에 능하고 의술을 배운 이는 의료에 능한데 그렇다면 정의와 비정의에 관한 일을 배운 자는 정의와 비정의에 능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당신은 아까 수사학이 정의와 비정의에 관련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렇다면 수사학을 배운 자는 정의와 비정의에 능해 정의로운 이가 되어야 하는데[21] 그렇다면 수사학을 배운 이는 불의를 행하려 하지 않을 것 아니냐는 논리를 세우자 고르기아스는 수긍한다.[22]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수사학을 잘못 사용해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이것과 모순 아니냐 되물으며 논증을 더 버틸 자신이 있으면 계속 하고 아니라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그만하자고 말한다.

3.4.2. 폴로스와의 문답

그러자 고르기아스의 추종자인 폴로스가 발끈하며 논쟁에 참여한다. 소크라테스가 교묘하게 말을 돌리고 고르기아스의 자존심을 자극하며[23] 의도적으로 모순에 빠트린 것 아니냐 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이에 폴로스가 고르기아스를 충분히 대변할 능력이 있다면 (고르기아스에게 배운) 연설적 말하기 대신에 짧은 대답으로 문답해 달라 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고르기아스가 가르치는) 수사학이란 전문 기술이 아닌 일종의 아첨술로, 요리술과 의술이나 치장술과 체육의 관계처럼 수사학은 정치술을 가장한 속임수일 뿐이다.

폴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욱해 훌륭한 연설가들이 하찮은 아첨꾼에 불과하냐고 따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연설가들이 자신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긴 하지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하지는 못하며 나라에서 가장 작은 힘을 행사할 뿐이라 여긴다고 답한다. 폴로스는 참주와 같이 큰 힘을 행사하는 자들을 나약하다고 할 수 없다고 코웃음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무식한 이가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며 폴로스가 수사학이 아첨술임을 반박하지 못하면 수사학을 이용하는 연설가나 참주들은 좋은 것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 맞고 그렇다면 자네 말대로[24] 참주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자들이네? 라고 반문한다. 말문이 막힌 폴로스는 화를 내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에 개의치 않고 참주들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반박해 보라고 권유한다. 폴로스가 자신이 최선이라 여기는 것을 하는 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 아니냐 따지자 소크라테스는 행위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닌 행위의 목적(좋은 것)을 원해 하는 것 아니냐 하며[25] 참주들이 (사실은 더 나쁜) 행위가 최선이라 생각하며 이를 한다면 이는 행위의 목적인(그들이 원하는) 좋은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한다.

열받은 폴로스는 소크라테스가 불의를 행하는 것보단 당하는 것을 더 즐길 것 같다고 비야냥대고 소크라테스는 그렇다고 시인하며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오히려 당하는 이들보다 비참하고 가여우며 자신은 차라리 당하는 쪽이 낫다 여긴다고 말한다. 그리고 폴로스에게 단검을 들고 다니며 사람 목숨을 해칠 힘을 가지고 있다고 으스대는 자의 사례를 들며 이를 옹호하겠냐고 묻고 폴로스는 그런 행위는 처벌받을 행위기 때문에 좋게 여기지 않는다고 답한다. 폴로스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행위를 좋은 것이자 큰 힘을 행사하는 거라 여기는 것을 확인한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이득이 되는 행위가 아닌 정당한 행위가 더 좋은 것이라 여긴다 한다.

폴로스는 어린아이도 이를 논박할 수 있겠다면서 부정의한 자가 행복한 사례로 마케도니아의 아르켈라오스 1세[26]의 사례를 들며 아테네 사람들중에 그를 불행하다 할 자가 얼마나 있겠냐고 화려한 언변으로 따진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게 아니니 아테네 시민들을 거짓 증인으로 세우지 말고 자기 자신을 증인으로 세우라 요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이어간다. 폴로스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사형당하는 게 편안하게 살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참주보다 덜 비참할 수 있냐고 비웃지만 소크라테스는 위협과 비웃음으로 일관하지 말고 옳고 그름을 따져달라 다시 한번 요청한다. 그리고 불의를 행하는 쪽이 불의를 당하는 쪽보단 더 부끄럽지 않냐고 묻는다. 폴로스는 이에 긍정한다.[27] 소크라테스는 훌륭함이 좋음과 즐거움에 의해 규정되고 부끄러움은 나쁨과 고통에 의해 규정된다고 정의내리며 더욱 부끄러운 것은 더욱 나쁘거나 더욱 고통스럽기 때문이어야 하는데 불의를 행하는 것이 고통스럽진 않으니 더 나쁘기도 해야 하지 않냐고 물으며 폴로스를 납득시킨다.[28] 또 처벌을 통해 악행을 응징받는 것은 의료가 몸을 치료하듯 혼을 치료받는 행위이고 대가 치름을 통해 나쁜 일을 한 자는 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러므로 불의를 당한 자가 가장 덜 나쁜 상태고[29] 불의를 처벌받은 자가 두번째로 나쁜 상황이고 불의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은 자가 가장 비참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만일 적이 자신의 잘못을 처벌받을 것 같으면 온 힘을 다해 이를 막아서 그를 비참한 상태로 냅둬야 한다는, 상식적으론 역설적인 말로 자신의 주장을 강조한다.

3.4.3. 칼리클레스와의 문답

그러자 이번에는 칼리클레스가 어이없어하면서 토론에 끼어드는데, 소크라테스는 이에 자신은 철학이 말하는 것을 따르고 있을 뿐이니 만일 자신이 잘못된 것을 주장하고 있다면 반박해 달라 한다.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가 서로 대립하는 자연의 정의와 법적 정의를[30] 교묘하게 이용해 폴로스를 논쟁에서 패배시켰을 뿐이라 치부하며 대중 연설가 같은 천박한 짓을 그만하라 비난한다. 그에게 도덕과 같은 법적 정의는 그저 약자들이 집단으로 공모해서 만든 인위적인 세뇌일 뿐[31]이고 진정한 자연의 정의는 강한 자가 지배하고 약한 자는 빼앗기는 것이다. 칼리클레스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도덕을 세뇌받아 오며 절제와 공정 등을 익히지만 진정 강인한 이 사회 통념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연의 정의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한다.[32] 칼리클레스가 보기에 불의를 행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은 그저 인위적인 법적 정의일 뿐이고 소크라테스가 이 부끄러움이 자연의 정의에서 비롯된 것처럼 속여 폴로스를 기만했을 뿐이다.

또 칼리클레스는 철학에서 벗어나 더 큰일을 하면 소크라테스도 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철학을 폄하한다. 칼리클레스와 그 동료들의 눈에 철학은 실생활에 쓸모없는 것으로 청소년기에 하기엔 적당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철학에 빠져있는 것은 성인이 옹알이를 하는 것과 같으며 먹고사는 것을 등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르기아스나 폴로스가 토론에서 패배한 건 그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있을 뿐으로 연설가들이 소크라테스의 철학 토론에서 진 것처럼 철학자는 정치가들의 주 무대인 법정에서 제대로 변론을 하지 못할 거라 주장하며 소크라테스도 법정에서 자신을 제대로 변론하지 못하고 사형당할 수 있으니 이제라도 철학보단 정치와 같은 쓸모 있는 기술을 익히라고 경고한다.[33]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의 솔직한 주장을 호평하며 자기 자신을 시험할 기회이자 칼리클레스의 친구들 사이에서 도는 주장을 반박할 기회라 여기며 논의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늘 그렇듯 가장 강한 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의하려 시도한다. 우선 대다수가 한 사람보다 자연적으로 강하지 않냐고 물으며 그렇다면 (칼리클레스가 약자라 주장한) 대다수가 만든 법이 자연의 정의이고 대다수가 주장하는 정의가 자연의 정의 아니냐 물으며 법적 정의와 자연의 정의가 대립함을 의심한다. 그리고 이가 부정되자 그렇다면 가장 강한 자는 가장 슬기로운 자 아니냐 하며 그렇다면 신발 장인은 신발 제작에 한해서는 가장 슬기로우니 신발을 분배할 권리가 있냐고 묻는다.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말실수를 꼬투리 잡고 맨날 의사나 제화공만 들먹인다면서[34] 자신이 말하는 강한 자는 나랏일에 슬기롭고 용감한 자들이라 정의 내린다.

소크라테스는 나랏일에 슬기롭고 용감하다는 자들이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능력은 어떠한지 묻는다.[35] 그들이 자기 자신을 절제하고 쾌락과 욕구를 다스릴 수 있는지의 여부를 든다. 칼리클레스는 어이없어하면서 자기 자신을 절제하는 이는 법적 정의에 굴복한 우둔한 이들일 뿐이며 진정 강한 이 자신의 쾌락을 거침없이 추구하는 자라 말하며 자신의 주장을 반복한다. 그 정도 능력이 안 되는 무능한 이들이 질투와 시기심으로 절제와 정의를 칭송하며 이를 강요한다고 하며. 소크라테스는 이에 쾌락에 관한 논증을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말하는 설화들을 인용하며[36] 칼리클레스를 설득해 보려 하나 칼리클레스는 쾌락 없는 삶은 돌이나 시체나 다름없다고 여기며 무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번엔 끊임없이 몸을 긁어대는 사람은 행복한 거냐며 좋음과 쾌락은 다른 것이라 주장해 보나 칼리클레스는 그런 이들 또한 행복하다며 말하며 고집을 꺾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이번엔 칼리클레스가 생각하는 좋음[37]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쾌락과 좋음은 다른 것임을 증명해 보인다.[38] 칼리클레스는 이에 언제 몸을 긁어대는 이들도 행복하다고 말했냐는 듯 말을 뒤집어 좋은 쾌락과 나쁜 쾌락이 있음을 자신은 모르는 줄 아냐면서 소크라테스를 힐난한다.[39]

칼리클레스가 쾌락과 선이 다름을 인정하자 소크라테스는 일사천리로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쾌락과 좋음이 다르다면 좋음이 쾌락에 우선함을 칼리클레스에게 동의시킨 후 소크라테스는 좋은 즐거움과 나쁜 즐거움이 있다면 즐거움에서 선악을 구분해 낼 기술과 그 전문가가 있지 않겠냐고 하며 고르기아스의 수사학이 그 기술에 해당하는지 따져보면 수사학에 기반한 정치가의 삶이 좋은지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철학자의 삶이 좋은지 알아낼 수 있을 거라 하며 본격적으로 수사학과 정치가의 삶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우선 수사학은 아첨술인지 여부의 문제로 돌아가서 소크라테스는 악기 연주와 비극 공연, 시 낭송 등을 영혼의 아첨술로 들면서 정치 연설 또한 정치 참여 민중을 대상으로 한 시 낭송처럼 그저 영혼에 즐거움을 줄 뿐인 아첨술이 아니냐고 한다. 칼리클레스는 이에 아첨술에 해당하는 정치 연설도 있지만 테미스토클레스 페리클레스의 연설처럼 정말로 도움되는 훌륭한 연설도 있다고 반박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따져보기 전에 우선 모든 훌륭한 기술은 짜임새와 질서를 가져다 준다고 정의하며 집이나 선박에 짜임새와 질서가 없다면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몸의 짜임새와 질서를 건강, 혼의 짜임새와 질서를 준법과 절제라 하며 쓴 약을 먹는 것이 몸에 좋은 것처럼 쾌락을 절제하는 것이 혼에 좋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칼리클레스가 예로 든 정치가들이 연설을 통해 이렇게 영혼에 짜임새와 질서를 가져다 주는지 묻는다.

칼리클레스는 지금까지 어울려 준 것도 고르기아스의 요청 때문이라며 더 이상 소크라테스에게 휘둘리기 싫다는 듯 논답을 거부한다. 소크라테스는 하는 수 없이 자문자답의 형식으로 지금까지의 논답을 정리한다. 그리고 영혼에 짜임새를 가져다주는 절제가 곧 좋음이며 절제하는 이는 정의와 용기, 경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주장한다. 또 절제가 곧 선이기 때문에 행복하기 위해선 쾌락을 추구하기보단 절제를 추구해야 하고 절제와 나눔, 우애는 사람 사이뿐만이 아니라 자연과 신, 인간을 묶는 세계 질서라고 부르며 절제의 가치를 우주적 질서로 확장시킨다.[40]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폴로스가 불의를 당하는 것이 행하는 것보다 낫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고르기아스가 올바른 연설가는 정의를 알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말하며 다시 철학과 정치술의 우위를 따지는 논쟁에 들어선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앞서 주장한 것들을 기반으로 다시 한번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부끄럽다 하며 수사학과 정치술이 칼리클레스의 말처럼 불의를 저지르거나 당하는 상황에서 이를 막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따져본다. 칼리클레스는 예예 당신이 맞습니다 하면서 건성으로 답변한다. 소크라테스는 서로 비슷한 이들끼리 친구라는 속담을 상기시키며[41] 사악한 통치자들[42]의 친구는 그들과 비슷한 이들이고 결국 그런 나라에서 큰 힘을 행사하며 불의를 당하는 것을 막는 것은 그런 사악한 통치자와 비슷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불의를 당하는 것을 막을 순 있어도 (더 부끄러운 일인)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를 질문한다.

칼리클레스는 부정의한 통치자를 닮게 되는 것이 통치자처럼 영혼을 사악하게 만드는 일임에는 동의하나 그렇게 모방하는 이가 그렇지 않는 이를 죽이고 약탈할 수 있다고 하며 소크라테스에게 다시 철학을 버리고 정치술을 익힐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정치술이나 수사학이 위험에 처한 자를 구해주는 기술이라면 이는 (칼리클레스가 정치인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조타술이나 무기 제작술도 동일하다면서 그저 잡기술에 불과한 구조술 말고 참된 선을 추구하라 조언한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정치가로 성공한다는 것은 통치자와 닮아야 하는, 즉 성미에 맞는 말만 좋아하는 대중의 본성과 비슷해져야 하는 것임을 들며 과연 그것이 진정 좋은 것인지 묻는다. 엘리트주의자이면서도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민중파인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쉽사리 동의하지 못하고 떨떠름해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괘념치 않고 자신에게 정치 입문을 권유하기 전에 우선 칼리클레스 자신이 민중을 훌륭하게 만드는 업적을 세운 적 있는지를 물은 후 테미스토클레스 페리클레스 같은, 칼리클레스가 예시로 든 예전 정치가들이 진정 훌륭한 정치가였는지를 따지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페리클레스가 말년에 사형 선고 받을 뻔한 것이나 테미스토클레스 도편추방당한 것은 민중들을 훌륭하게 만들지 못하고 더 야만적으로 만들었다는 증거[43]밖에 되지 않고 만일 그들이 소몰이꾼이었다면 자기 일에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 한다. 또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항구와 성벽을 세우는 데에 공헌한 국가의 훌륭한 하인이었다는 점은 인정하나 진정 사람들을 훌륭하고 덕있게 만들지는 못했고 이는 소피스트들이 자기가 가르친 학생에게 말솜씨로 뒤통수 맞는 것과 같다고 평가한다[44]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에게 다시 한번 철학자의 삶을 살건지 정치가의 삶을 살 건지 묻지만 칼리클레스는 그럼에도 정치가로서 힘을 추구하겠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법정에서 불의를 안 당할 것 처럼 자신하는 것 같다고 비꼰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의 하나뿐인 진정한 정치가이고 마치 요리사가 의사를 '쓴 약을 먹여서 사래들게 한다'고 무고하듯 자신도 아첨하는 정치가들에게 비슷하게 무고를 당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수사학이라는 아첨술을 통해) 부정의한 것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도울 수 있다면 꿋꿋이 그 길을 가겠다고 자부한다.[45]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후에 혼이 심판받는 설화[46]를 통해 칼리클레스에게 불의를 행하지 말라고 권고하며 논의를 마친다.[47][48]

3.5. 주요 내용

플라톤의 대화편이 으레 그렇듯, 처음에는 아주 일상적인 장면에서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죽마고우 카이레폰과 함께 칼리클레스 집에 도착하였지만 잔치에는 늦고 만다. 그의 집에는 고르기아스와 폴로스도 함께 있었는데 소크라테스가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이들은 다시 답변을 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르기아스, 폴로스, 칼리클레스 순으로 대화를 진행해 나간다.

447c~461c에 해당하는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의 주요 문답은 다음과 같다.
問 1 직조술은 의복 제작에 관련이 있고 음악은 작곡에 관련이 있듯이 수사학도 어떤 것에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수사학은 실제로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答 1 연설과 관련 있다.

問 2 수사학은 모든 연설에 관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예를들면 어떻게 해야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지 설명해 주는 연설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사학은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있게 하는데 의술과 체육과 같은 기술 또한 환자의 상태에 대해 말하는 활동이나 몸의 상태에 대해 말하는 활동을 하므로, 수사학만이 유일하게 말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아 보인다. 따라서 의술과 체육과 같은 기술을 수사학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뭔가?
答 2 수사학의 활동과 권위는 말하기에 달려있는 반면 예를 들어 설명한 의술과 체육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問 3 여러 기술 중에는 그 활동의 비중을 제작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말하기를 조금밖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있고, 아예 말하기의 배중이 없는 침묵 상태에서도 그 기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회화와 조각과 같은 기술이 있는데 이것들은 수사학과 무관한가?
答 3 그렇다.

問 4 여러 기술 중에는 말하기의 비중이 큰 수학, 기하학, 장기 두기가[49] 있다. 당신은 아마 이 기술과 수사학을 동일시 하지 않을 것이데, 그 이유는 말하기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서는 동일하지만 '무엇에 대한 말하기'인가에 따라 서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가령 수학은 '홀수와 짝수'에 대해 말하고, 천문학은 '태양과 달, 별의 운행'에 대해 말한다. 이렇듯 수사학 또한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答 4 수사학은 인생에서 가장 중대하고 가장 좋은 일들에 대해서 말한다.

問 5 시인에 따르면 가장 좋은 것은 건강, 외모, 부 순이라고 한다. 의사와 체육 교사는 건강을 만들어내고, 사업가는 부를 만들어내듯 당신 또한 무언가 좋은 만들어 낼 텐데, 그것이 무엇인가?
答 5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만들어 낸다.

問 6 그 힘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答 6 그것은 바로 설득이다. 설득으로 의사와 체육 교사, 사업가를 노예로 부려 그들이 만들어 내는 건강, 부를 얻을 수 있다.

問 7 설득 또한 수사학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자를 설득하며 수학자는 수를 이해시키기 위해 설득한다. 이것들의 설득과 수사학의 설득은 '무엇에 대한 설득'인가에 따라 서로 구별된다. 수사학의 설득은 무엇에 대한 설득이라고 생각하는가?
答 7 정의과 불의에 대한 설득이며 주로 법정이나 집회장에서 하는 것이다.

問 8 설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것 같다. 한 가지는 지식 없이 확신을 가져다주는 설득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지식을 가져다 주는 설득이다. 수사학의 설득은 어떤 종류의 설득인가?
答 8 수사학의 설득은 확신을 가져다주는 설득이다.

問 9 나라에서 전문가 선발을 하고자 할 때 그 분야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지, 연설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는다. 전문가 선발뿐만 아니라, 성 축조안, 부대 배치, 요충지 점령과 같은 문제 또한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한다. 수사학은 나라에 어떤 조언을 할 수 있는가?
答 9 실제로 아테나이에 성벽을 축조하고 항구를 건설하도록 조언한 사람은 테미스토클레스와 페리클레스이지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보다시피 문제의 결정에는 연설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問 10 연설가는 옳음과 그름에 대한 지식이나 전문 지식을 모르더라도 설득의 묘안을 생각해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처럼 보이게 하는 것 같다. 아니면 그러한 지식은 필수적이라 생각해 수사학을 배우기 전에 미리 배우거나 당신이 가르쳐주는가?
答 10 만약 그런 것을 모른다면 나에게 수사학을 배우면서 그런것들 또한 배우게 될 것이다.

問 11 목공술을 배운 사람은 목수이고 의술을 배운 사람은 의사이듯이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아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을 배운 연설가는 옳은 사람이다. 옳은 사람은 부정의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전에 당신은 연설가가 만약 수사학을 부정의하게 사용한다면 그 기술을 부정의하게 사용한 제자를 처벌해야지 그를 가르친 스승은 처벌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주장은 연설가가 부정의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 아닌가? 또한 答 7에서 정의와 불의에 대한 설득이라고 답했을 때에도 정의와 불의 모두에 대한 설득이라고 하니, 고르기아스, 당신에게 배운 제자는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을 배웠고, 그 연설가는 옳은 사람이고, 옳은 사람은 부정의한 행동을 하지 않다고 했는데 이전에 자네가 답했던 것과 생각해 보니 이는 앞뒤가 안맞지 않은가?
答 11 고르기아스는 침묵하며 퇴장한다.

3.6. 발췌

"칼리클레스, 나는 오늘날 아테나이에서 나야말로 진정한 통치술을 실천하려 시도하는 하나뿐인 진정한 정치가라 확신하네."
521d~e
"그러니 자네는 내가 시키는대로, 우리의 논의가 말해주듯, 자네가 도착하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행복을 누리게 될 그곳으로 나를 따라오게. 사람들이 그러고 싶다면 자네를 우습게 보고 바보 취급 하며 망신시키도록 내버려두게. 아니, 그들이 치욕스럽게 자네 따귀를 때리도록 내버려두게. 자네가 진실로 미덕을 연마하는 신사라면 자네는 어떠한 끔찍한 일도 당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함께 미덕을 연마한 뒤에야 우리는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되면 정치에 입문하거나, 적절한 주제에 관련해 조언할 수 있을 걸세. 그때는 우리가 지금보다는 더 훌륭한 조언을 할 수 있을 테니까."
527c~d

[1] episteme. [2] doxa. 과거에는 "억견"이라고 번역되기도 했었다. [3] 고르기아스는 적시라는 개념을 가장 먼저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4] 아직 이데아론이 무르익기 전의 대화편이라 초기로 분류되나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 대해 심층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장을 펼치고 메논, 에우튀데모스, 메넥세노스 등 중기 대화편으로 분류되는 대화편과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것으로 보기도 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 초기 대화편의 아포리아가 보이지 않고 소크라테스의 적극적인 자기 주장으로 끝맺는다는 점 또한 중기 대화편으로 분류할 수 있는 근거이다. [5] 당시엔 연설이 현대의 대중매체와 같은 역할을 했다. [6] 정치가로 성공하고 싶어 하는 20대 중후반의 청년. 후대의 학자들은 이 대화편 속 그의 논변에서 프리드리히 니체가 연상된다는 평가를 내린다. [7] 소크레테스의 죽마고우이자 소크라테스 추종자 [8] Polos '망아지'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남자. 시칠리아 아크라가스 출신의 젊은 수사학 교사로, 고르기아스의 숭배자 중 한 명이다. 수사학이야말로 권력 쟁취의 관건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대화편 등장인물 중엔 가장 젊은이로, 상당히 성급히고 버릇없는 성격으로 묘사된다. [9] 고르기아스의 직업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도 전에 가치 판단부터 시작하는 모습으로 소크라테스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폴로스의 성급한 면모를 드러내는 부분이자 고르기아스가 가르치는 수사학의 성질을 에둘러 비판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10] 혹은 연설술로도 번역된다. [11] 현대 기준으론 납득이 안 갈수 있는 부분이지만 행동이나 수작업과 거리가 먼 분야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고대 그리스는 아직 책과 글이 보편화되지 않아 구술과 연설로 많은 학술 활동을 펼쳤다. [12] 고르기아스 또한 제자 폴로스처럼 수사학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 전에 가치 판단부터 내리는 성급한 면모를 보인다. [13]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건강, 두 번째로 훌륭한 것은 육체의 미, 세 번째로 훌륭한 것은 재산이라는 내용 [14] 고르기아스의 대답이 자신의 의도와 빗나갔으니 제대로 대답해 달라는 말. [15] 진정한 앎을 가져다주지도 않는 말 기술이 나라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는지? [16] 수사학이 정치 분야 외에도 이용 가능한 폭 넓은 분야긴 하지만 오히려 범위와 영역이 혼란스럽단 점이 수사학을 전문 기술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17] 수사학에 가해지는 도덕과 사회 통념의 비판을 의식하는 듯한 발언이지만 앞서 했던 정의와 비정의 이야기와 모순이라 고르기아스를 논쟁에서 패배시킨다. [18]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단 사안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 대중을 설득시키는 게 중요한 아테네 민주주의 체제 비판이 드러난 부분. [19] 이 문제는 폴로스와의 논쟁 중 다시 쟁점이 된다. [20] 분명 앞에선 어떤 분야의 지식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수사학이라고 했음에도 이렇게 주장한 것은 고르기아스가 수사학과 도덕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체면과 도덕관념을 의식한 행위이다. [21] 지덕합일 [22] 거기다 아까는 자신이 도덕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장담하기까지 했다. [23] 고르기아스가 질문에 잘못 부정하면 덕과 정의를 모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일부러 잘못된 대답을 하도록 유도한 것 아니냐 한다. [24] 폴로스는 참주와 같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25] 노동을 하는 이유는 고생을 하기 위함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함임을 예시로 든다. [26] 노예의 몸에서 태어난 서자 왕족이었으나 자신의 삼촌과 사촌, 이복형제들을 모조리 죽여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즉위 후엔 도로와 요새, 군비를 정비하고 아테네와 동맹을 맺는다. [27] 폴로스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 나쁜 행위라고 여기진 않아 고르기아스보다는 사회 통념과 도덕을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만 완전히 부정하진 않아 불의를 행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이는 고르기아스의 사회 통념을 따르는 태도와도, 도덕을 약자의 인위적 관념일 뿐이라 평가절하하고 아예 거부하는 칼리클레스의 태도와도 구분되는, 도덕을 배웠지만 세상이 도덕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보일 법한 위선적 태도이다. [28] 폴로스가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나쁨과 부끄러움이 완전히 다른 범주임을 더욱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했다. [29] 치료받은 자보다 애초에 아프지 않은 자가 더 나음을 든다. [30] 당시 소피스트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던 퓌시스(자연의 정의)와 노모스(법적 정의)의 문제를 끌어온 것이다. [31] 국가의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가 만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칼리클레스와는 같은 맥락인 듯싶으면서도 정반대인 주장이다. [32] 도덕적으로 듣기에 껄끄럽고 대화편 내에서도 억지를 부리다 소크라테스에게 반박당하지만 2000년 후의 프리드리히 니체가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 이념 헤게모니의 폐혜를 느끼고 모든 도덕과 통념을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 보자며 칼리클레스의 주장과 매우 유사한 사상을 만들어 낸 것을 생각해 보면 절대 허투루 볼 의견은 아니다. [33] 고르기아스의 집필 시기는 플라톤의 1차 시칠리아 방문 이후로 추정되며 소크라테스의 사형 이후이다. 칼리클레스가 예언을 했다기 보단 플라톤이 실제 스승의 최후를 반영해 집필했을 가능성이 높다. [34] 실제로 다른 대화편에서도 소크라테스가 예시로 많이 드는 것들이라 알키비아데스(대화편)에서도 알키비아데스가 이를 언급한다. [35] 고르기아스의 주제와는 관련 없지만 로버트 달을 비롯한 현대 정치학자들은 모든 인간은 남을 통치하는 능력을 몰라도 스스로를 통치하는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에 동의하며 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반이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국가 등 다른 대화편에서 철인 정치를 주장한 플라톤과의 차이점을 엿볼 수 있다. [36] 사람의 혼은 항아리와 같고 쾌락에 탐닉하는 혼은 밑빠진 독과 같다.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밑빠진 독은 더욱 끊임없이 채워야 해서 고통스럽다. [37] 칼리클레스에게 좋음이란 즐거움(=쾌락)이고 이는 앎이나 용기와는 다른 것이다. [38] 1. 좋음과 나쁨은 (마치 건강과 질병처럼)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목마름이나 배고픔을 해소시킬 때는 (갈증이나 배고픔 같은) 고통이 있을 때만 즐거움이 있지 않느냐 2. 용감하고 슬기로운 자가 비겁하고 무지한 자보다 같은 상황에서 고통을 더 느낄 때도 있고 반대로 비겁하고 무지한 자가 같은 상황에서 더 즐거워할 때도 있지 않느냐를 근거로 든다. [39] 소크라테스의 발언 중간에 칼리클레스가 실없는 소리 그만하라면서 계속 좋지 않게 굴자 고르기아스가 나서서 자꾸 그러지 말고 논의를 끝마치라고 부탁한다. 고르기아스는 플라톤 대화편에 나온 대화 상대들 그리 나쁘지 않은 인물로 묘사되고 소크라테스와의 논쟁에서도 신사적 태도로 일관한다. 플라톤이 고르기아스를 적어도 인간적으론 나쁘지 않게 보았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40] 즉 칼리클레스가 말한 대로 자연의 정의가 절제나 정의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와 정의의 덕목이 곧 자연의 질서임을 주장한다. 윤리적 가치를 세계의 기본 질서로 확장시키는 부분이 성리학의 중용이나 대학이 떠오르는 부분이다. [41] 재밌는 점은 소크라테스는 다른 대화편 뤼시스에서도 이 속담을 인용하나 탐구 끝에 비슷한 것 끼리는 친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낸다. [42] 폭정 독재도 이에 포함되나 민중의 중우정치 역시 사악한 통치의 예시로 들며 칼리클레스가 민중파인 점과 아테네의 예시를 주로 드는 점으로 인해 중우정치와 포퓰리즘이 주된 예시로 뒤에서 언급된다. [43] 정의는 온순함이라는 호메로스의 시구를 인용한다. [44] 고르기아스는 자신을 소피스트라고 칭하지 않았고 칼리클레스도 소피스트를 하잘것없다 비난한다. [45] 거기에 더해 소크라테스 자신이야 말로 아테네에서 처음으로 참된 정치를 추구하는 정치가라 주장한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철인정치론에서의 이상적인 철인왕이 소크라테스와 같은 이임을 드러내는 부분. [46] 인간은 사후에 축복받은 자들의 섬 혹은 타르타로스로 가게 되는데 이 판결은 증언이나 두르고 있는 옷(부유함)이 아니라 생전의 행보에 따른 혼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정치가들 상당수는 생전의 악행들로 혼에 생채기가 나있어 타르타로스로 가 있을 것이다. [47] 그러면서 논의에서 나온 결론들을 정리하는데 1.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저지르는 것이 더 부끄럽다. 2. 사람은 훌륭해 보이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실제로 더 훌륭해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3. 나빠진다면 쓴 약으로 치료를 받듯 응징받아야 하고 그렇게 응징받는 것이 원래 정의로운 것 다음으로 좋다. 4. 모든 아첨은 피하는 것이 좋고 수사학이나 다른 모든 행위들은 언제나 정의로운 것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48] 여담으로 니체는 기독교를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고 비판했는데 플라톤적 도덕규범을 효과적으로 설파하기 위해 초자연적 설화를 인용한 이 부분에서 플라톤적 가치를 유일신 신화를 통해 설파하는 기독교와 비슷해 보인다. [49] 소크라테스는 이들의 기술이 말하기의 비중이 크다고 생각하는데 오늘날에 생각하면 그 괴리감이 있어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