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5 19:07:06

알키비아데스(대화편)

1. 개요2. 등장인물3. 줄거리
3.1. 알키비아데스 13.2. 알키비아데스 2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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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라톤의 대화편. 1, 2가 있으며 1편의 부제는 '인간 본성에 관하여', 2편의 부제는 '기도에 관하여'이다.

2. 등장인물

3. 줄거리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가 나누는 대화만으로 모든 내용이 채워져 있다. 1, 2 모두 이 점은 동일하다. 등장인물 역시 1, 2 모두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2명뿐이다.

3.1. 알키비아데스 1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찾아가 자신만이 그를 끝까지 따라다니며[2] 쫓아다녔지만 다른 구애자들처럼 말을 건네지는 않았던 점이 아리송할 것이라 하며 이는 사실 자기 마음 속의 다이몬[3]이 말 걸기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한다. 또한 이제는 다이몬의 가로막음이 사라져 이렿게 말을 걸게 되었고 이는 다이몬이 이제는 오히려 대화를 권장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한편으론 그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데다가 출신 성분도 좋고, 아테네를 다스리는 페리클레스의 후견을 받아 늘 구애하는 이들에게 으스대며 고압적으로 굴어 결국 나가 떨어지게 하는데에 익숙하기에 자신이 그를 쫓아다니면서도 아부는 커녕 말 한마디 걸지 않은 것이 궁금할거라고 추측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실제로 그렇다고 긍정하며, 제발 왜 그랬는지, 지금 자신에게 온 목적은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소크라테스는 한번 말을 시작하면 상당히 길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성격 급한 알키비아데스는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한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정치에 나서 권력을 획득하고픈 욕망이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자신이 없으면 그 야망을 성취할 수 없을것이라 단정하며 이를 위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마 다이몬이 알키비아데스 안의 정치적 욕망이 싹틀 때까지 헛된 대화를 나누지 않도록 가로막은 것 같다고 추측한다.[4]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말문을 열기 전보다 더욱 이상해 보인다고 하며 그런 소크라테스의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익숙한 장황한 아부는 못할테지만 자기 질문에 대답만 잘 하면 이를 내보이겠다고 하며 문답에 성실할 것을 약속받는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연단에 나서서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하려는 것에 관해 잘 알고 있는지를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이 아테네 시민들보다 정치에 관해 더 잘 안다고 답변한다. 소크라테스는 알고 있는 것에는 남들에게 배운 것이랑 스스로 찾아낸 것 두가지가 있는데 두가지 경우 모두 한때는 모르고 있던 것 아니냐고 묻는다. 만일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배우거나 탐구하고자 할 의지가 없지 않았겠냐는 것이다.[5] 알키비아데스는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하려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묻는다. 글쓰기인지, 악기 연주인지, 예언술이나 의술인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알키비아데스는 그것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 그밖의 나랏일에 관해 숙의하는 일이라고 답변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는 언제 전쟁을 해야 할 지, 어떤 이가 전쟁 혹은 동맹 상대로 적합할지를 말하는 거냐고 반문하며 레슬링을 할 때 대진 상대와 시기를 잘 다루는 것을 신체단련술에 맞는 것이라 부르며 체육교사가 이에 전문가이고 악기 연주에 관해 이러한 기술을 시가술에 맞는 것이라 부르는데 그렇다면 전쟁과 평화에 대해 그러한 것은 무엇이라 부르냐고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한다.

소크라테스는 그것도 모르면서 민회에 조언을 하러 나서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단언하며 우리가 전쟁을 하고 당할때 무엇을 구실로 하는지를 생각해보라 힌트를 준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는 정의와 불의라고 답변하고 소크라테스는 이에 만족하며 그럼 정의로운 일을 하라 조언할 것인지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라 조언할 것인지를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어려운 문제인데, 정의롭지 못한 이들도 자신의 정의라고 억지를 부리곤 하기 때문이라고 답변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또한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 아름답지 못한 일이기에 그렇기 때문이라 하며 알키비아데스가 하려는 일은 정의에 걸맞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6]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알키비아데스가 정의를 알고 있기에 정치에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서려 했던 거냐면서 자신도 정의에 관해 배워야겠으니 가르쳐준 선생을 소개시켜달라 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놀린다고 여기며, 자기가 스스로 탐구도 못할줄 아냐고 반문한다. 소크라테스는 앞서 얘기했듯 정의를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존재한다면 분명 스스로 탐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답하며 그런 시기가 존재했는지 묻는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어린아이였을 시절부터 정의를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상기시키며[7] 그 시점보다 이전이지 않겠냐고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정의를 모른다고 생각했던 시기를 제대로 대지 못하고 다시 누군가에게 배운 것이라고 변명한다. 소크라테스가 그래서 그 선생이 누구냐고 묻자 알키비아데스는 다수 대중이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알키비아데스에게 다수 대중은 좋은 스승이 아니라고 일갈한다.[8] 그들은 정의는 커녕 체스 수도 잘 못 두는 어리석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비록 체스 게임같은 하찮은 가르침을 줄 수는 없을 지라도 다수 대중은 더욱 훌륭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항변한다.[9] 예를 들어 자신은 그리스어를 다수 대중에게 배웠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것에 관해 알아야 하고 이견 없는 동의를 보여야 한다면서[10] 그 점에 있어서 다수 대중은 언어 교육의 훌륭한 선생이 맞다고 답한다.

하지만 어떤 것이 사람인지에 관해서는 다수 대중이 훌륭한 선생이 될 수 있으나, 그 사람이 건강한지 아픈지에 관해서는 이에 대한 앎을 가진 의사들을 제외하면 형편없는 교사라고 반박한다. 하물며 정의와 불의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호메로스 서사시들이나 지속되는 전쟁들만 봐도 이견이 갈리다 못해 의견차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는데에 혈안인데 다수 대중이 정의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에 말문이 막혀 자신이 정의에 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정의에 관해 잘 모른다는 점은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알키비아데스 본인이 한 말인 점을 상기시키며 그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서 민회에 나가 그것들에 관해 조언하려 한 것이냐고 비판한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렇지만 아테네 시민들이 자기보다 못하기 때문에 상관 없다고 항변한다. 그들은 정의보다는 손익만을 따진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정의와 손익의 관계를 한번 따져보자고 한다. 그리고는 알키비아데스가 이로움에 관해서도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정의로운 것과 이로운 것은 겹칠 수도 있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나 아니나 다를까, 방금전의 논변을 또 하지만 않으면 충분히 자신이 안다고 단언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알키비아데스의 태도에 화가 난 소크라테스는 헌 옷을 버리듯이 논의를 자기 마음대로 버리려 하느냐며 자꾸 그렇게 논변을 버려가며 회피하려 들면 앞서 물어본 모든 것들을 한가지 물음으로 물어볼 수 있다고 경고한다.[11] 그렇지만 어차피 아까처럼 이로움에 관해서도 모른다는 답변이 나올 것이 뻔한데다가 알키비아데스가 같은 논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이로움과 정의로움이 동일한지 아닌지의 여부를 대신 물어본다.

자신감을 잃은 알키비아데스는 과연 설명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주저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민회에 나가서 설득하는거나 자신에게 설명하는 거나 차이가 없지 않냐면서 어서 생각을 밝혀보라고 재촉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를 거부하고 소크라테스가 직접 논증하라고 짜증낸다. 소크라테스는 차근차근 알키비아데스에게 논답을 걸면서 주제를 이어나간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것과 아름다운 것은 같은지 아닌지를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정의로우면서 추한 일은 본 적이 없는 걸로 안다고 하며 이로움과는 달리 정의로운 것은 곧 아름다운 것이 맞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다음으로,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은 동일한지에 관해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아름답지만 나쁜 것도 존재하고 추하지만 좋은 것도 존재한다며 아름다움과 좋음은 겹칠 수 있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말한 아름답지만 나쁜 것은 곧 전투에서 동료를 구하다가 죽는 것, 그리고 추하지만 좋은 것은 전투에서 동료를 져버리고 도망간 이들이 오히려 살아남는 것을 의미하냐고 묻고 알키비아데스는 바로 그거라고, 전자는 용기의 관점에선 아름답고 생명에 관점에선 나쁘며 후자는 그 정반대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지만 용기와 죽음은 다른 문제라고 지적하며 알키비아데스가 든 사례는 동일한 관점에서 동시에 아름답고 나쁜 것은 아니지 않냐고 반론한다. 그리고는 아름다움과 좋음의 동일성을 증명하기에 앞서, 좋은 것과 나쁜 것 중 무엇을 선택할 거냐고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당연히 좋은 것을 선택할 것이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뒤이어 그렇다면 용기와 비겁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지를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당연하게 비겁한 자로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답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비겁은 극단적으로 나쁜 것이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그 정 반대인 용기는 곧 좋은 것 아니겠냐는 주장 역시 편다. 그러니 알키비아데스가 든 사례는 용기의 관점에서는 좋지만 생명의 관점에서는 나쁜 사례이며 이와는 별개로 아름다움 그 자체와 용기 그 자체는 서로 동일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소크라테스는 논의를 확장시켜, 아름답게 행하는 사람들은 곧 잘 행하는 자이고 잘(좋게) 행하는 이들은 곧 행복한 이들이며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곧 아름답게 행했기 때문이니 아름다운 것이 곧 행복함을 가져다주는, 즉 이로운 것이 아니냐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의로운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니 알키비아데스가 아까 한 주장과는 달리 정의로운 것과 좋은 것들은 곧 이로운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에 납득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으며 시시각각 바뀜에 혼란스러워 한다. 소크라테스는 손가락의 개수처럼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라면 그럴 일 없지 않겠냐면서 혼란스러운 이유는 곧 알키비아데스가 정의에 관해 아직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또한 하늘 위로 올라가는 기술이나 배를 모는 기술처럼 모른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기술은 역시 혼란스러울 일 없고 이에 관한 앎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에게 그 일을 맡길 거라고 하며 알키비아데스가 정의에 관해 알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라는 점을 꼬집는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가 보이고 있는 추태와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은 이러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12] 옳고 그름에 관한 무지야말로 모든 나쁜 것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극단적인 무지, 즉 옳고 그름에 관한 무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생각없이 정치판에 뛰어들려 한 것이냐며 알키비아데스를 힐난한다. 그렇지만 자네만 그런건 아니고 대부분의 정치가들 역시 비슷한 것 같다고 하며 주제를 전환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자기 후견인인 페리클레스는 옛날부터 아낙사고라스를 비롯한 현자들과 교류해왔고 나이가 든 지금도 여러 소피스트들과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하며 페리클레스는 예외적으로 현자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앎을 지니고 있다면 이를 다른 이에게 가르칠 수도 있어야 할텐데 페리클레스의 자식들[13]과 알키비아데스의 상태를 보면 자식들과 피후견인한테 덕을 가르치는 데에는 실패한 것 같아보이고 그럼 페리클레스에게 덕을 배운 이가 누구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에 답을 하지 못한다.

소크라테스는 그건 그렇고, 지금의 무지한 상태로 남을 것인지 덕을 단련할 것인지를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덕을 갈고 닦는 편이 좋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다른 정치가들도 자신과 비슷한 무지한 이들이라면 이대로 달려들어도 상관 없지 않냐고 주장하며 한 번 심사숙고 해보겠다고 답한다. 앎은 몰라도 선천적 자질 만큼은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무능한 정치인들만을 경쟁상대로 여길 것이냐며 경악한다. 알키비아데스는 당연히 아테네 정치에 참여하면 아테네 정치인들과 맞붙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의문을 가지지만 소크라테스는 적들의 지도자가 아닌 동료 병사들을 경쟁 상대로 여기는 것은 영웅의 사고방식이 아니지 않냐고 힐난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정치가들이 적이 아닌 동료라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적은 어떤 이들인지 묻고 소크라테스는 스파르타의 국왕과 페르시아 제국 황제 아니겠냐고 답한다.

오만한 알키비아데스는 외국의 군주들 역시 아테네 정치가들과 별 차이 없어보인다고 반론한다. 소크라테스는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자신을 돌보는 것이 해가 되지는 않는다며, 그런 최선을 다하지 않으려는 생각은 나쁘다고 일깨운다. 거기에 더해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군주들이 보잘 것 없다는 생각 역시 틀렸다고 지적하며 논변을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자질은 고귀한 태생과 올바른 양육에서 오는데 스파르타의 왕들은 헤라클레스의 후손이고 페르시아 황제들은 아케메네스의 후손이니 이들은 결국 제우스의 후손[14] 아니냐고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 또한 아이아코스의 후손이라며[15] 혈통 면에서는 꿇리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다이달로스의 후손[16]이라며, 그렇지만 우리의 집안은 중간에 상당히 오랜 기간 평민이었으나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군주들은 제우스 시절부터 주욱 왕통을 이어왔다고 차이를 지적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니 자신의 선조들로 적국의 왕들을 무턱대고 눌러보려 하지 말고 가문의 위세와 교육 수준에서 비교해보자고 한다. 그리고는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에서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왕비의 정숙을 철저히 감시하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이들이 가르치게 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페르시아에서는 태자가 일곱이 되면 승마술을 가르치고 열 넷이 되면 나라에서 가장 지혜로운 이, 정의로운 이. 절제있는 이, 용기있는 이를 사부로 붙여 조로아스터교의 교의와 제왕학, 그리고 올바른 성품을 가르친다고 강조한다. 소크라테스는 반면에 페리클레스가 알키비아데스를 가르칠때는 식솔 중 가장 늙고 쓸모없는 이 한 명만을 가정교사로 둔 점을 강조한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페르시아인의 부유함과 호화로움, 스파르타인의 절제와 용기를 이기기 힘들 것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인들은 부유하기도 한데[17], 페르시아인들의 부는 이보다도 더해 크세노폰이 전해주기를[18] 왕비의 허리띠를 아주 넓고 풍요로운 고장과 빗댈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서 부유한 영토들과 비견될 정도의 장신구를 지니고 있는 페르시아의 아메스트리스 황후는 훨씬 가난한 알키비아데스가 그리스인이 그나마 가지고 있는 강점인 돌봄과 지혜도 가지지 못한 채 페르시아에 대적하려 든다면 굉장히 놀랄 것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스파르타의 왕비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라며, 제발 만용을 부리지 말고 너 자신을 알고 덕을 갈고 닦을 것을 간청한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렇다면 어떠한 돌봄을 해야 하냐고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자신 역시 이에 관해서는 알키비아데스와 같이 배울 필요가 있다고 한다.[19] 하지만 자신의 후견인이 신인 점 하나만은 알키비아데스보다 낫다면서 신의 인도를 받으며[20] 같이 우리가 찾고자 하는 훌륭함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탐구해보자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우리는 어떠한 면에서 훌륭해지고 싶어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일을 처리하는 데에 훌륭함을 배우고 싶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 일은 말을 다루거나 배를 다루는 것에 관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 뻔한데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또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사람들이란 곧 분별있는 사람들일텐데 신발 만드는 데에는 분별있고 옷 만드는 데에는 그렇지 않은 갖바치들은 같은 사람이 나쁘기도 훌륭하기도 한 경우인데 알키비아데스가 말한 아름답고 훌륭한 이들도 비슷하게 나쁘기도 한 이들이냐고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당연히 그건 아니고 자신이 말한 이들은 나라에서 다스릴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한 것이라고 해명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럼 그가 다스리는 이는 짐승인지 사람인지, 사람이면 어떠한 종류의 사람인지를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우리가 나라에서 생활하는 방식처럼 자기들끼리 협력하기도 하고 서로를 다루기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 다룬다는 말이 갑판장이나 연주 지휘자처럼 누군가를 부린다는 뜻이냐고 묻고 알키비아데스는 그게 아니라 나라에서 삶을 영위하며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해명한다.

소크라테스는 항해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앎을 선장의 기술이라고 부르고 노래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앎을 합창단 선생의 앎이라고 부르듯, 그렇다면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다스릴 줄 알게 만드는 앎을 한마디로 줄이면 무엇이라 말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에 숙고를 잘 하는 것이라고 부르겠다고 답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선장들의 앎도 배를 타는 것에 있어서는 숙고를 잘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며 우리가 찾는 앎은 어떠한 점에서 숙고를 잘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나라를 더 훌륭하게 관리하고 지키는 점에서라고 답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나라는 무엇이 생기고 없어져야 더 나아지고 좋은 보살핌을 받는 것이냐고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구성원 간에 좋아함이 생기는 한편 미워함과 반목함이 없어질 때 그러하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말한 것은 곧 생각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냐고 물은 후, 긍정의 대답을 듣자 수에 관한 생각의 일치를 불러오는 것은 산수이고 길이, 넓이, 무게 등에서의 생각의 일치를 불러오는 것은 측정술인데 그렇다면 알키비아데스가 말하는 생각의 일치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부모가 아들을 좋아하고, 형제는 형제와, 아내는 남편과 생각의 일치를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여자는 남자의 일인 무장 전투술을 배울 필요가 없고 남자는 여자의 일인 길쌈을 배울 필요가 없는데 서로를 모른다면 생각의 일치가 있지는 않을테고 그렇다면 좋아함 역시 없지 않느냐고 묻고 알키비아데스는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며 이를 긍정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각자가 제 역할을 할 때에는 좋아함이 깃들지 않으니 나라가 잘 경영되지 못하는 것이냐고 묻고 알키비아데스는 그건 아니고 각자가 제 일을 하더라도 좋아함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처한 모순에 의문을 가지며 각자가 제 일을 하는 것은 정의로운 것인지를 묻는다. 알키비아데스가 그렇다고 답하자 정의로운 것을 할 때에 서로를 상대로 좋아함이 깃드는 것이냐고 묻고 알키비아데스는 이번에야말로 확신을 가지고 그렇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다시 한번 알키비아데스가 생각하는 좋아함과 생각의 일치란 무엇인지 설명해보라고 요구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자신도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혼란스러워하며 절망에 빠진다. 소크라테스는 만일 나이가 들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으면 분명 나쁜 일이었겠으나 알키비아데스의 나이대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위로한다. 알키비아데스는 무지를 깨달았으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묻고 소크라테스는 질문에 대답을 하면 된다고 답하며 자신을 돌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로 대화 주제를 옮긴다.[21]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돌보는 것과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돌보는 것이 같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같은 것 아니냐고 되묻지만 소크라테스는 반지는 손에 속하는 것이고 신발은 발에 속하는 것인데 반지와 신발을 돌본다고 손과 발을 돌보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신발을 돌보는 갖바치 기술은 발을 더욱 낫게 만들어주긴 하지만 발 자체를 돌보는 기술은 아니니 무언가 자체를 돌보는 기술과 무언가에 속하는 것을 돌보는 기술은 다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수긍한 알키비아데스에게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닌 우리 그 자체를 돌보는 기술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묻지만 알키비아데스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일단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서야 그 기술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말하며 자체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찾아보자고 한다.[22]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분위기를 환기시켜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그리고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서로 말을 사용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말은 곧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이고 키타라와 키타라 연주자가 서로 다르듯 우리 자신과 말은 서로 다른 것이겠다고 주장한다. 사용하는 이와 사용되는 것은 언제나 다르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키타라 연주자는 연주에 키타라를 사용하듯이 손과 눈 역시 이용하는데 육체 역시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니 사람 그 자체와는 다르고 육체와 도구들을 다스리는 영혼이 사람의 본질 아니겠냐고 한다. 거기에 더해, 영혼만이 사람인게 아니라 육체와 영혼이 함께 사람의 본질인지 여부를 탐구해보자면 어느 한쪽이 다스림에 참여하지 않는데 어떻게 육체와 영혼이 같이 다스릴 수 있느냐고 이를 부정한다.

그러니 말을 나누는 것 역시 영혼과 영혼이 말을 도구 삼아 이야기 나누는 것이고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를 남긴 이는 영혼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바 없지 않냐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의술이든 농업술이든 체육술이든 그 자체만으로는 영혼을 알지 못하니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절제를 만들어주는 앎이 아닌 비천한 손재간으로 취급받는다고 한다. 또한 신체를 돌보는 이 돈을 돌보는 이 역시 자신을 돌보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속한 무언가를 돌보는 것에 불과하고 누군가의 육체에 반해 사랑에 빠진 이 역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에 속하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그렇기에 육체를 사랑하는 이 상대방의 아름다움이 시들면 쉽게 떠나는데 혼을 사랑하는 이는 상대방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기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렇기에 자신만이 알키비아데스를 진심으로 사랑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고 다른 구애자들은 그의 육체만을 사랑했기에 그렇게 아부를 떨다가도 나이가 차니 금방 떠나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그가 아테네 민중들의 애인이 되어 망가지지 않을까 걱정되어서라고 하며 민중들을 조심하고 배워야 할 것을 배우기 전까지는 정치 진출에 신중하라고 조언한다.[23] 알키비아데스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을 돌보아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의 본질은 영혼임을 다시 상기시킨 후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를 다시 한번 들여보자고 한다.[24] 그러면서 만일 자기 자신을 봐야 할 때에는 거울과 비슷한 것들을 봐야 하는데 보는 수단인 에는 가장 훌륭한 부분인 눈동자에 자기 자신이 반사되어 거울처럼 비쳐보인다고 알려준다. 즉 눈이 자기 자신을 볼 때는 눈을 들여다봐야 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부분인 눈동자를 봐야 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를 확장시켜 영혼도 자신을 알려면 영혼을 봐야 하며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신적인 부분인 앎과 분별의 영역을 들여다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한편으로는 거울이 눈동자보다 더욱 깨끗하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듯이 신적인 부분인 앎과 분별보다 신 그 자체가 더욱 자신을 잘 보여준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곧 절제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데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 턱은 있겠냐고 하며 농부, 의사, 체육 교사들이 자신은 모르지만 자신에게 속하는 것 역시 잘 안다고 했던 것 또한 잘못 동의했던 것 같다고 시정한다. 그리고 자신을 모르면 자신에게 속한 것과 다른 사람의 것 역시 모를테고 이런 이는 나라의 것도 모르니 정치가도 가장도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을 모르는 이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또한 모를테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쁜 행동을 할테니 곧 비참해질 것이라고도 한다.[25] 즉 절제가 없는 이는 행복 또한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 역시 개인처럼 훌륭함 없이는 아무리 부국강병하더라도 소용 없으니 훌륭한 정치가라면 무릇 시민들에게 훌륭함을 나눠줘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훌륭하지 않으면 그게 가능할 리 없으니 정치가를 추구하는 이들은 권력보다는 정의와 절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낸다.

소크라테스는 더 나쁜 이는 더 나은이에게 지배받는 것이 더욱 적당하니 훌륭함은 자유인에게 적당하고 나쁨은 노예에게 적당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알키비아데스에게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알키비아데스는 자유인에게 적당한 상태가 아닌 것 같다고 절실히 깨달았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겠는지 아느냐고 묻고 알키비아데스는 그러니 앞으로 정의를 갈고 닦겠다고 다짐한다.

3.2. 알키비아데스 2

알키비아데스가 신에게 기도를 드리러 가는데 소크라테스가 끼어들어 무언가를 빌 때 자신도 모르게 나쁜 것을 빌 수도 있으니 기도는 신중해야 한다고 말린다. 그 사례로 오이디푸스 왕이 있는데 그는 테베에서 쫓겨난 뒤 아들들이 자신을 봉양하지 않고 권력 다툼에 골몰하자 격분하여 결국 자식들이 공멸하기를 빌었다면서,[26] 이토록 사람들은 나쁜 상황에서 이를 해결할 방법을 빌 수 있음에도 더 나빠지길 원하곤 한다는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에 동의하지 못하고 미친 사람이나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뿐, 건강한 상태에 있는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논의를 본격적으로 이어나가기 전, 미친 것과 분별있는 것이 정반대라고 생각하느냐며 관련 개념의 정의부터 시작한다. 알키비아데스가 그렇다고 말하자 그럼 세상에 무분별한 사람, 분별있는 사람, 그리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이 존재하냐고 묻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세상에 무분별한 사람과 분별있는 사람이 존재하고 양쪽 다 아닌 중간 상태의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미친 상태가 분별 있음의 반대라고 했으니 미침과 무분별은 동일한 거겠다고 묻고 알키비아데스는 역시 그렇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럼 이에 세상에 분별 있는 사람은 소수고 무분별한 사람이 다수인데[27] 무분별한 이가 미친 이와 동일하다면 세상에 미친 사람이 대다수란 소리 아니냐고 반박한다. 그래서는 세상이 유지되기는 하겠냐는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아니면 뭐냐고 가르쳐달라 요청하고 이에 소크라테스는 눈병은 병이지만 병 걸린 이가 다 눈병 걸린 건 아니라고 답한다. 비슷한 식으로 장인이라고 다 목수거나 갖바치인 것 역시 아니고 미친 사람 또한 무분별하긴 하지만 무분별하다고 다 미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분별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미친 이는 무분별한 이들 중 가장 심각한 부류이고 그것보다 덜 한 이는 바보같은 이,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악의 없고 단순한 사람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무분별과 분별이 대체 무엇인지 한번 따져보자고 한다.[28] 소크라테스는 분별을 무엇을 행햐고 말해야 할지를 아는 것으로 정의내리고 무분별을 이 둘에 관한 앎이 없는 상태라고 주장한다. 알키비아데스가 이에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무분별한 이는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행동하곤 하지 않냐고 묻는다. 그러니 만일 분별, 즉 옳고 그름에 대한 앎이 없으면 비록 오이디푸스처럼 분노에 빠져 미치지 않았더라도 본인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좋지 않은 것을 빌 수 있으니 기도를 할 때에 신중해야 하지 않냐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예시로 만일 신이 전 그리스, 혹은 이에 만족하지 않으면 전 유럽의 참주 자리를 준다고 하더라도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면 부귀영화의 의미가 없으니 쓸모가 없을테고 아니면 그 참주 자리가 나쁘고 해롭게 사용된다면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겠으나, 그렇지 않은 이가 많음을 든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참주 아르켈라오스 1세가 소년애인에게 암살당하고 그 소년애인은 참주 자리에 올랐으나 자리에 오른 지 사나흘 후에 역시 암살당했다는 것이다.[29] 소크라테스는 여기 아테네에도 도편추방이나 사형을 감수하고 장군직을 탐내는 사람이 많이 존재하며, 어떤 이들은 자식을 잃었을 경우 슬픔에 휩싸여 차라리 애초에 자식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거면서도 자식이 생기기를 기도하기도 한다고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이들은 자신이 했던 기도를 종종 취소하고 다시 빌거나 나중에 자신의 기도 때문에 팔자에 없는 고통을 겪고 나서야 자기가 아니라 신을 탓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거기에 더해, 어떤 작자 미상의 시인은 좋은 것은 빌든 말든 내려주고 끔찍한 것은 빌더라도 막아달라는 기도를 올렸는데 이러한 기도야 말로 훌륭하고 안전한 기도 아니냐고 평한다.

알키비아데스는 무지가 얼마나 나쁜 결과를 내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했으나 그래도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에게 좋은 것을 빌고 나쁜 것은 빌지 않을 정도는 되지 않겠냐고 반문하며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좋은 것에 대한 무지는 나쁜 것이 맞지만 좋은 무지도 있다면서 알키비아데스를 반박한다.[30] 소크라테스는 트로이 전쟁 신화의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친모 클리타임네스트라 살해한 사건을 예로 들며, 그는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에 관한 분별이 없었기에 패륜을 저질렀으니 그가 지닌 종류의 무지는 나쁜 것이 맞으나 만일 그가 자기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해 살인에 실패했으면 그러한 종류의 무지는 나쁜 일을 막는 데에 기여했으니 좋은 무지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특정한 종류의 무지는 오히려 유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논의를 더욱 확장시켜, 가장 좋은 것에 대한 앎, 즉 분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지닌 앎은 이롭지 않고 오히려 해롭다고 주장한다. 분별이란 무엇을 말하고 행해야 할 지 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실제로 알아야 하는데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도 분별이 없으면 하잘것 없지 않냐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전쟁을 할 줄 아는 이가 얼마나 오래 전쟁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정책에 조언할 줄은 알 되 어떤 정책이 더 좋은지와 언제 행하는 것이 좋은 지를 모르는 이는 하잘것 없을 뿐이라고 한다. [31] 그리고 거기에 더해 알거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할 때 이로움이 함께해야 유용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분별한 다수의 사람들은 지성없이 판단만을 신뢰하기에 자신의 행동으로 이득보다는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고 그러니 가장 좋은 것에 대한 앎, 즉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지 못한다면 다른 앎은 이롭기보단 오히려 해롭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니 어떤 다른 앎보다도 옳고 그름에 대한 앎을 일순위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연설에 설득되어 나쁜 것을 빌고는 나중에 물러달라고 할 일 없도록 경계해야겠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기도는 스파르타 사람들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묵한 스파르타인[32]들은 신중하게 말조심을 하며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신들은 다른 폴리스들의 호사스럽지만 무분별한 제의보다는 스파르타인들의 말조심을 더욱 좋아하기에 그들의 기도를 더욱 들어준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 일리아스에 묘사한 바를 따르면 트로이의 프라이모스 왕이 승리를 기원하며 신들에게 장엄한 제사를 지냈지만 트로이가 이미 신들에게 찍혔기 때문에 전혀 소용이 없었다며, 아무리 성대한 제사도 신들에게 미움받는 상황에서는 쓸모없는데 신들은 당연하게도 화려한 선물과 제의보다는 기도하는 이의 정의와 분별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니 기도를 할 때에는 영혼에 올바름을 지니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자존심[33]을 미루어 보면 스파르타인들의 기도를 따라할 리 없는데 그런 경우에는 신들과 인간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르쳐줄 제대로 배우기 전까지 기다리는게 나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기엔 일단 눈 앞에 끼어있는 안개, 즉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의견을 걷어내고 나서야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있겠다고 진단한다. 알키비아데스는 가장 좋은 것에 대한 앎을 확보하는 그때로 기도를 미루겠다고 다짐하고 소크라테스야말로 자신에게 신들과 인간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이라 칭송하며 화관을 머리에 둘러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알키비아데스를 대중의 잘못된 유혹으로부터 구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며 이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4. 여담

고대로부터 플라톤 진본으로 여겨져왔고 특히 1편의 경우 플라톤 철학 입문서로 손꼽혀온 대화편이나 현재는 1, 2 전부 위작 논란이 있다. 2는 어휘와 내용에서 플라톤 이후 기원전 3세기의 흔적이 발견되고 논변의 수준이 플라톤 진본으로 인정받는 대화편들보다 떨어져 사실상 위작으로 확정났고 1 역시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캐릭터성, 중후기에 가까운 어휘사용, 다른 진본 대화편 주제들을 짜집기하여 지었을 가능성 때문에 현재는 위작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위작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저자의 플라톤 철학 이해도가 상당히 높고 그 나름의 맛이 있어 쓸모 없는 책은 절대 아니라고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34]

1이 분량이 더 많고 내용도 충실하며 플라톤의 다른 여러 대화편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의 의견이 비교적 선명하게 잘 표현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입문서로서 적절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초기부터 후기까지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에서 나오는 의견이 그냥 제시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이러한 점이 위작설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여러 대화편에서 나왔던 얘기를 다시 한 번 제시하고 있을 뿐[35]이기 때문에 처음 보는 입문자가 아닐 경우 큰 감흥이 있기 어렵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또한 향연에서 나왔던 알키비아데스는 극적으로 등장해서 강렬한 캐릭터성을 보여줬는데에 반해 여기서의 알키비아데스는 대화편의 주연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얌전한 학생에 가까워 문학성도 플라톤 진본에 비하면 떨어진다.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의 여러 요소를 상당히 잘 종합한 특급 해설서로 인정받으나 그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1편의 경우, 진본이라고 가정할 시 중기 대화편으로 추정된다. 형식적으로는 초기 대화편 특유의 아포리아로 끝나지 않고 다루는 주제가 초기 후반에서 중기에 해당하는 주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암학당 번역자인 성균관대 김주일 교수는 만일 위작이 아닐 경우 내용 상당수가 겹치는 < 국가>와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1]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등장인물이자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배신자로 유명한 그 역사인물 알키비아데스 본인이다. 실제로도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소년애 상대로, < 향연>, < 프로타고라스> 등 다른 플라톤 대화편에서도 얼굴을 비친다. 알키비아데스의 매국 행위는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하는 데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2] 대화편 시점 알키비아데스는 막 성인이 된 나이로 소년애 대상이 되는 기간을 벗어나 구애가 없어졌다. [3] 신령. 소크라테스는 <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 여러 대화편에서 자기 안의 다이몬이 이따금 어떤 행동을 하려 할 때 막곤 한다고 말하곤 했다. [4]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철학에 관해 설파하려 하는데 알키비아데스의 출세 욕망은 그 동기가 될 수 있다. [5] < 메논>에 등장하는 배움에 관한 인식론적 논의와 매우 유사한 대목이다. [6] 도덕적인 정치술을 논하는 부분으로 < 고르기아스>와 유사한 주제를 다룬다. [7] 다른 아이가 부당한 행동을 하면 주저없이 삿대질하며 정의롭지 못하다고 힐난했다고 한다. [8] 국가 등지에 나오는 아테네 민주주의 비판과 철인정치 이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9] 알키비아데스는 명문가 출신이지만 대표적인 민중파 페리클레스의 후견을 받고 자랐고 페리클레스 사후 니키아스와 함께 민중파 정치인의 대표로 뽑힌 친 직접민주주의 진영의 사람이었다. 다만 훗날 스파르타로 망명간 후 과두정을 찬양한 바 있다. [10] 어떤 것에 이견이 존재한다면 아직 모르는 상태 아니냐는 것이다. [11] 이 '한가지 물음'이 대화편 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12] < 프로타고라스> 등 플라톤 초기 대화편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덕합일 주장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13] < 프로타고라스>에서는 페리클레스가 자식농사에 실패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14] 스파르타의 경우 자신들이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직접 자부하였으나 페르시아의 경우 그리스측 신화에서 아케메네스가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고 설명한다는 점을 말한 것으로 실제 역사와는 차이가 존재한다. [15] 알키비아데스의 집안은 아테네에서 유서깊은 명문가이다. [16] 소크라테스는 석공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고대 그리스 석공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다이달로스에서 찾았다. [17] 리산드로스의 개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전 이후 스파르타인들은 기존의 검소한 관습을 잃어버리고 탐욕에 물들었다. 이렇듯 이 단락에서 소크라테스가 하는 페르시아와 스파르타 찬양은 반어적인 면이 존재해, 이보다는 덕과 지혜에 의거한 정치가 더욱 훌륭하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8] 대화편 내에서는 크세노폰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페르시아 여행이라는 맥락상 아나바시스의 저자 크세노폰을 다룬 것이라고 해석하는 설이 대세이다. 다만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은 소크라테스 사후에 있던 일로 이 대화편의 배경이 플라톤 대화편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실 역사와 어긋나는 가상의 시대상황임을 알 수 있다. [19] 소크라테스는 항상 무지한 이를 자청해왔다. [20] 마음 속의 다이몬 이야기처럼 소크라테스 내면의 영감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21] 알키비아데스가 자신이 스파르타나 페르시아 군주들과 다를 바 없다는 만용을 버리고 소크라테스와 훌륭함이란 무엇인지 탐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로 주제가 넘어가는 지금까지의 논의는 < 국가>와 매우 전개가 유사하다. [22] 이데아론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이데아와 관계없이 사람의 본질이란 무엇인가(후술할 논의에 의하면 영혼)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23] 대화편 도입부의 소크라테스의 행동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아테네 직접민주주의 비판이 드러난 대목이다. [24]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가 지덕합일을 넘어 윤리학적 영역으로 확장되는 모습은 이 대화편만의 특징이다. [25] 지덕합일 사상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26] 오이디푸스를 다룬 그리스 비극들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대에 전해져오던 변형된 이야기거나 플라톤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27] 플라톤 사상 특유의 아테네 민주주의 비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28] 광기와 무분별을 구분하는 논의는 다른 플라톤 대화편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부분으로 위작설의 근거가 된다. 기원전 3세기의 아르케실라오스와 회의적 아카데미아 학파가 키니코스 학파의 광기와 무분별 동일설을 비판하는 논증을 펼쳤는데 위작설이 사실일 경우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9] 아르켈라오스 암살 사건이 있던 기원전 399년은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한 해이자 기원전 404년에 죽은 알키비아데스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시점이다. 이 대화편이 실제로 있지 않았던 가상의 사건을 다룬 것임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30] 좋은 무지와 나쁜 무지의 구분은 다른 대화편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주제이기도 하고 플라톤 사상과는 동떨어진 면이 있어 위작설의 근거가 되곤 한다. [31] 그리고 그런 옳고 그름을 모르는 지엽적인 전문가들이 지성 없는 판단만을 신뢰하며 서로 자신이 옳다고 우기고 거기 더해 정치 선동꾼들이 설치는 정치 체제는 하잘것 없다는 말도 덧붙인다. [32] 스파르타인들은 라코닉 화법이라고 불리는 특유의 과묵한 촌철살인 화법으로 유명했다. [33] 투키디데스 플루타르코스 등의 역사가들이 묘사한 실 역사속 알키비아데스는 천재적이지만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사람이다. [34] 정암학당 번역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의 윤리학적 확장, < 파이돈>보다 더욱 명확한 영혼-육체 이원론의 근거 제시 등 <알키비아데스 1>의 독창적인 부분 때문에 비록 위작이 맞을 지라도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하였고 플롯과 문학적 비유의 수준으로 미루어보아 플라톤 진본에 가까울 것으로 추측하였다. [35] 예를 들자면, 무지와 배움과 관련된 인식론적 논의는 < 메논>, 정치와 도덕, 정의의 관계를 논하는 부분은 < 국가>와 < 고르기아스>, 이원론적 영혼관을 다룬 부분은 < 파이돈>과 겹친다. 또한 <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연상되는 혼 돌보기 강조, < 카르미데스>처럼 앎과 절제를 연관시키는 부분 등 여러 다른 대화편들과 유사한 대목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