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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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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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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조
高(句)麗王朝
기원전 37년 ~ 668년
<colbgcolor=#000><colcolor=#c5b356> 국성 고씨
창건자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마지막 군주 보장왕 (642년 ~ 668년)
국호 고구려 (기원전 37년 ~ 427년)
고려 (427년 ~ 668년)
군주 직함 , 태왕, 성왕(기원전 37년 ~ 668년)
통치 국가 고구려 (기원전 37년 ~ 668년)
1. 개요2. 계보도
2.1. 태조 이전2.2. 태조 이후2.3. 평양 천도 이후
3. 연표4. 왕호
4.1. 휘형4.2. 장지형4.3. 훈적형4.4. 기타4.5. 불명
5. 번외
5.1. 《 신찬성씨록》 등장 제후왕5.2. 고려조선군왕
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와 28명의 군주를 가진 나라였다. 평균 재위 기간은 25년으로 한국사 역대 왕조 중 가장 긴 편이었다. 참고로 이로부터 700여 년 뒤의 왕조인 조선 군주의 평균 재위 기간이 19년 2개월인 걸 생각해보면 매우 놀라운 재위 기간이다.

다만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3대의 계보가 상당히 비현실적인 것을 보았을 때 이 사이에 누락된 군주가 더 있었거나 신라나 백제의 초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건국 및 초기 연대에 약간의 왜곡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그렇다면 평균 재위 기간은 조금 깎일 여지가 있다.[1] 아무튼 후대의 고려 조선보다 훨씬 오래 존속했으면서도 군주의 수가 고려보다 적고 조선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군주들의 평균 수명이 비교적 길었거나 왕권의 안정성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다수의 고구려 군주들의 시호가 완전하게 전하지 않으며, 광개토태왕의 경우를 보건대 완전한 시호는 꽤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2] 광개토태왕의 경우에는 그나마 광개토태왕릉비가 남아 있어서 완전한 시호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흔히 국왕이 묻힌 장지(葬地)의 지명으로 그 국왕을 호칭했다. 삼국사기
秋九月, 大后于氏薨. 大后臨終遺言曰, “妾失行, 將何面日, 見國壤於地下. 若羣臣不忍擠於溝壑, 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 遂葬之, 如其言. 巫者曰, “國壤降於予日, ‘昨見于氏歸于山上, 不勝憤恚,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是用植松七重於陵前.
가을 9월에 태후 우씨(大后于氏)가 죽었다. 태후가 임종함에 유언하기를,
“내가 도의에 어그러진 행동을 하였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國壤)을 뵙겠는가? 만일 여러 신하들이 차마 구렁텅이에 빠뜨리지 못하겠다 여긴다면 나를 산상왕릉 옆에 장사지내 주기 바란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말대로 장사지냈다. 무당(巫者)이 말하기를,
국양께서 저에게 내리시어 말씀하기를, ‘어제 우씨가 산상(山上)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와 싸웠다. 돌아와 생각해 보니 낯부끄러워 차마 국인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무엇으로 좀 나를 가리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삼국사기 권제17 고구려본기제5 동천왕 8년(234년)

라고 해서 고국천왕을 '국양', 산상왕을 '산상'이라고 그 묻힌 곳을 들어 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광개토태왕이 묻힌 '국강상'은 당시 수도이던 국내성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서에 나타나는 고국원왕의 '고국원', 고국양왕의 '고국양'과 같은 곳으로 보인다. 고국원왕의 또 다른 호칭이 바로 '국강상왕'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국내성에 도읍하던 당시에는 국내성 인근을 가리켜 '국강(國崗)'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평양으로 도읍이 이전한 뒤에는 옛 수도라는 의미에서 '고국원(故國原)'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3] 군주가 묻힌 곳으로 군주를 호칭하는 방식은 훗날 고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표적으로 세종을 그 능인 영릉(英陵)이라고 부른 것이 있다.[4][5]

삼국시대가 정복 국가 시대이고 특히 고구려가 그러한 성향이 두드러진 만큼 정복 군주가 상당히 많았는데, 고구려의 대표적인 정복 군주로 동명성왕, 대무신왕, 태조대왕, 미천왕, 광개토태왕, 장수왕 등이 있다. 이 중 한국 역사에서 꼽히는 대표적인 정복 군주가 바로 광개토태왕.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37년으로 보고 있고, 한국 학계의 대다수는 이 설을 따르고 있다. 북한과 한국 소수 학설에서는 일부 고구려 일부 역사가 삭제되었다고 주장하며, 고구려 건국 연도를 기원전 300년 근처로 보고 있다. 당나라의 한 장수가 언급한 고구려 900년설을 따른 것. 실제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년인 기원전 37년 이전부터 옛조선의 땅에 고구려라는 집단이 존재했다는 중국측 사료는 많이 있다. 그래서 기존에 토착 세력인 고구려 집단 혹은 초기왕국을 부여에서 이주한 추모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왕위를 쟁취한 시점이 기원전 37년이며 이때를 고구려 건국년으로 보는 것이다. 다만 일본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기원전 37년설을 따르기도 하고, 위키백과 등에서 그렇게 서술되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신뢰성 문제로 실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태조대왕 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이는 백제 건국을 생각하면 지나친 고구려 역사 축소다.[6]

대부분의 고대 국가들이 그랬듯이, 왕위를 계승하는 형태에서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대무신왕 때부터 산상왕 때까지는 형제간에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지만, 산상왕 때부터 점차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의 기틀이 안정됨에 따라 특별한 일이 없다면 대개 고구려의 왕위는 부자간에 계승되기 시작했다.[7]

여담으로 현재 고구려 왕실의 후예를 자처하는 것이 바로 횡성 고씨로 전국에 약 6,000여 명 정도 살고 있다. 추모성왕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중시조는 고구려의 마지막 군주인 보장왕의 아들 고인승인데 바로 고구려부흥운동 때 잠깐 군주로 추대됐던 고안승의 형이라고 족보 전승에 언급된다. 고인승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기타 왕족들처럼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고 강원도 횡성으로 도망쳤으며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족보로만 따진다면 초대 군주 고주몽의 21대손이자 고구려 군주들 중 가장 유명한 광개토대왕의 9대손이 된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따르면, 고인승은 추모의 26대손이 된다.

2. 계보도

주로 《 삼국사기》와 《 삼국유사》 기록에 따른 가계도로, 일부《 후한서》, 《 위서》 등 중국 측 사서의 계보를 기입했다.

2.1. 태조 이전

고조선 왕조 해모수 1. 추모 2. 유류 도절
해명
우씨
3. 무휼 5. 애루
하백 유화 호동
재사 6.
4. 색주
여진
백제 온조왕 백제 왕조

재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리명왕의 아들이나,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대주류왕의 3세손, 즉 손자라고 추정했다. 이유는 그래야 광개토태왕릉비에서 광개토대왕 추모성왕의 17세손이라고 쓰인 것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 유리명왕의 현손자, 대무신왕의 증손자가 된다. 다만 17세손은 직계가 아닌 방계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어서 여러모로 애매하다.

태조대왕의 즉위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다.
  • 47년에 태어나서 53년부터 146년까지 총 93년을 재위했으며 심지어 165년에 사망해 무려 118세를 살았는데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
  • 6대 군주인데 왜 시호가 '태조'인가?
  • 2대 군주 유리명왕부터 5대 군주 모본왕은 《 삼국유사》에 '해씨'라고 나오는데 왜 6대 군주 태조대왕부터는 '고씨'라고 기록되었나? 이에 대한 해석은 해씨 고구려설 항목 참조.

현대 학계에서는 기원전 1세기 중반에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에 맞다고 보지만, 계루부 내에서 주몽계와 유리명왕계가 별개로 존재하였고 165년 주몽계인 신대왕 이후에야 주몽계로 일원화된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기원전 1세기~2세기 중후반까지 계보는 분가인 백제 왕조와 마찬가지로 일계가 아니었는데 일계로 조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백제 초고왕계와 고이왕계 모두 부여 왕조가 기원인 것으로 추정되듯이, 유리명왕 또한 부여에서 온 것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 초고왕계-고이왕계가 그랬듯이 주몽계-유리명왕계도 부여에서 분가된 집안 출신으로 유력시된다.

문제는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까지 고구려의 여러 왕들의 존재가 삭제된 듯한 정황이 있다는 것이다.
  • 중국 기록에만 나오는 주몽-여달- 여율-막래의 계보

사서에 나오는 기록을 종합하면 유리명왕과 대무신왕 사이에 여율이라는 왕이 있었고[8] 53년 대무신왕의 아들 모본왕이 살해당한 뒤 70년대~90년대 사이에 태조대왕이 세는나이 7살에 즉위, 121년 태조대왕 사망(중국 기록), 145년 태조대왕의 동생/서자인 차대왕 즉위(삼국사기), 146년 태조대왕의 적자 막근&막덕 살해, 165년 태조대왕의 동생/서자/손자인 신대왕 즉위가 된다.

학계에서는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의 실제 나이가 삼국사기보다 훨씬 아래라고 보고 있는데, 신대왕은 주몽계로 추측되기 때문에 유리명왕-재사-신대왕의 계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건국 연대 문제를 고려하면 고대인의 세대교체 특성상 신대왕은 주몽의 증손자보다는 더 밑 세대의 후손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9][10]

2.2. 태조 이후

6. 7. 수성 추안
막근
막덕
8. 백고 9. 남무
발기
10. 연우 11. 우위거 12. 연불 13. 약로 14. 상부
돌고 15. 을불 16. 사유 17. 구부
18. 이련 19. 담덕
달가
일우
소발
명림홀도
예물
사구
계수
인고

2.3. 평양 천도 이후

19. 담덕 20. 거련 조다 21. 나운 22. 흥안
23. 보연 24. 평성 25. 양성 26. 대원
27. 건무 환권
공주
대양 28. 보장 복남 보원
임무
덕남
덕무
연정토 안승
왕자
안학
승우
공주
승우
고익과 장수왕의 정확한 관계는 불명이나, 장수왕의 즉위를 고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이 왕족인 고씨이고 장사(長史)라고 표기된 점을 볼 때 왕과 가까운 친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연표

순서 왕호 재위 기간 비고
<<졸본(홀본)부여 시대>> BC 37년 ~ AD 3년 (39년)
1대 동명성왕(東明聖王) 고추모
고주몽
BC 37년 ~ BC 19년 9월 (18년) 파일:external/www.koreapark.org/CyberTour_img01.jpg
추모왕(鄒牟王)
추모성왕(鄒牟聖王)
동명왕(東明王)
태조(太祖)
<<국내성 고구려 시대>> 3년 ~ 427년 (424년)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고유류
고유리
BC 19년 9월 ~ 18년 10월 (37년) 파일:유류왕.jpg
유리왕(瑠璃王)
유류명왕(孺留明王)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고무휼 18년 10월 ~ 44년 10월 (26년)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
북국신왕(北國神王)
4대 민중왕(閔中王) 고(해)색주 44년 10월 ~ 48년 (4년)
5대 모본왕(慕本王) 고(해)애루 48년 ~ 53년 11월 (5년)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고궁 53년 11월 ~ 146년 12월 (93년) 파일:태조대왕.jpg
국조왕(國祖王)
7대 차대왕(次大王) 고수성 146년 12월 ~ 165년 10월 (18년)
8대 신대왕(新大王) 고백고 165년 ~ 179년 (14년)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고남무 179년 ~197년 (18년) 파일:고국천왕.jpg
국양왕(國襄王)
10대 산상왕(山上王) 고연우 197년 ~ 227년 (30년)
11대 동천왕(東川王) 고우위거 227년 ~ 248년 (21년) 동양왕(東襄王)
12대 중천왕(中川王) 고연불 248년 ~ 270년 (22년) 중양왕(中壤王)
13대 서천왕(西川王) 고약로 270년 ~ 292년 (22년) 서양왕(西壤王)
14대 봉상왕(烽上王) 고상부 292년 ~ 300년 (8년) 치갈왕(雉葛王)
15대 미천왕(美川王) 고을불 300년 ~ 331년 (31년) 파일:external/pds23.egloos.com/a0053134_4f94614a2e080.jpg [11]
호양왕(好壤王)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고사유 331년 ~ 371년 (40년) 파일:external/pds23.egloos.com/a0053134_4f94614a2e080.jpg [12]
국강상왕(國岡上王)
/ 전사
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고구부 371년 ~ 384년 (13년)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해미류왕(解味留王)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 고이련 384년 ~ 391년 (7년) 국양왕(國壤王)
19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고담덕 391년 ~ 412년 10월 (21년) 파일:external/www.kculture.or.kr/pic_kwanggaeto_01.jpg
영락 태왕(永樂太王)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평양성 고려 시대>> 427년 ~ 668년 (241년)
20대 장수왕(長壽王) 고거련 412년 10월 ~ 491년 12월[13] 파일:요양 고씨 장수왕 영정.gif
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 고나운 491년 12월 ~ 519년 명치호왕(明治好王)
22대 안장왕(安臧王) 고흥안 519년 ~ 531년
23대 안원왕(安原王) 고보연 531년 ~ 545년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
향강상왕(香岡上王)
안강상왕(安岡上王)
24대 양원왕(陽原王) 고평성 545년 ~ 559년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양강왕(陽崗王)
25대 평원왕(平原王) 고양성 559년 ~ 590년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
평강왕(平崗王)
평국왕(平國王)
26대 영양왕(嬰陽王) 고대원 590년 ~ 618년 평양왕(平陽王)
27대 영류왕(榮留王) 고건무 618년 ~ 642년
- 대양왕(大陽旺) 고대양 - 보장왕의 부친
보장왕 추존
28대 보장왕(寶臧王) 고보장 642년 ~ 668년 마지막 군주라 시호가 없음.
<< 고구려부흥운동 시기>>
- 보덕왕(報德王) 고안승 669년 ~ 671년 부흥 운동 때 추대
보덕국 군주 재위

4. 왕호

고구려 군주의 공식 시호가 멀쩡하게 남아있는 용례는 '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이 유일하다. 여기서 '국강상'은 태왕이 묻힌 장지명으로, '광개토경 평안'은 태왕의 공을 기리는 훈적형 왕호[14], '호태왕'은 공식 존호나 시호 끝에 붙이는 ~신대왕, ~선제, ~명제 등과 같은 미칭으로 파악된다. 호태왕의 칭호는 호우명 그릇에서도 나타난다.

삼국사기》나 《 일본서기》에 전승되는 고구려 군주들의 여러 가지의 이명들이 위에 언급된 양식의 일부가 파편적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는 단서가 된다. 다만 국초부터 제정되어 통용된 양식으로 보이지는 않고 일부 왕호는 당대에 쓰이지 않고 후대에 별칭으로 전해지거나 추봉된 왕호로 보이기도 한다.

4.1. 휘형

말 그대로 휘, 이름 그대로 지칭한 왕호를 일컫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동명성왕을 추모성왕, 주몽왕 등으로 표기한 것이나 유리명왕을 유류왕, 대무신왕을 대주류왕 등으로 일컫은 것 등이 있다. 또한 마지막 군주인 보장왕 역시 나라가 망하고 존호가 전하지 않기에 이름으로 불린다.

4.2. 장지형

군주가 묻힌 곳을 부르는 발상은 묘호나 능호와 비슷한데 건국 시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가장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왕호 양식이다.

민중왕, 모본왕은 민중원, 모본원 등에서,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등은 특정 하천에서, 소수림왕은 소수림에 묻힌 것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국강상성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부터 고구려 평원왕에 이르기까지 전해진 이명들 역시 대부분 묻힌 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4.3. 훈적형

대무신, 광개토, 평안, 장수, 문자, 명치 등등 고구려 중기, 광개토대왕 이래로 기록에 등장하는 왕호로 생애의 훈적(업적)을 기린 것으로 추정된다.

4.4. 기타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경우나 영양왕, 영류왕, 대양왕[15] 등 역시 일정한 기준이 있었을 것으로는 보이지만 추정이 어려운 왕호들도 있다.

4.5. 불명

왕명 추정 군주 비고
고여율
(高如栗)
유리명왕 《위서》에만 계승이 확인됨. 다만 《 북사》에서는 유리명왕의 다른 명칭이기 때문에 오기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대흥왕(大興王) 영양왕 일본서기》에 '스이코(推古) 천황 13년 4월 (전략)
고려국 대흥왕이 일본국 천황이 불상을 만든다는 것을 듣고, 황금 300냥을 공상(貢上)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구려후 추 동명성왕, 유리명왕 한서 왕망전과 후한서 고구려 열전에 등장.
삼국사기에는 구려후 추가 아닌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가 등장.

5. 번외

5.1. 신찬성씨록》 등장 제후왕

신찬성씨록 3장 "제번" 편 참조
왕명 비고
연전왕(延典王) 호태(好台)[16]의 7세손으로, 코마노 아소미(高麗朝臣, こまのあそみ)씨의 선조
연나왕(延挐王) 고구려 원라군(元羅郡)의 저왕(杵王)의 9세손으로
카우노 후히토(高史, かうのふひと)씨의 선조
안류왕(安劉王) 카후치노 미타미노 오비토(河内民首, かふちのみたみのおびと)씨의 선조
능기왕(能祁王) 시마키노 후히토(島岐史, しまきのふひと)씨의 선조
안강상왕
(安岡上王)
안원왕의 다른 명칭. 코마노 오비토(狛首, こまのおびと)씨의 선조
구사기왕
(久斯祁王)
키후미노 무라지(黄文連, きふみのむらじ)씨의 선조
여안기왕
(汝安祁王)
동명성왕의 20세손으로 타카위노 미야츠코(高井造, たかゐのみやつこ)씨의 선조
일사복귀왕
(溢士福貴王)
오호코마노 무라지(大狛連, おほこまのむらじ)씨의 선조
복귀왕(福貴王), 복귀군(福貴君)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이름 앞부분의 일사가 탈착형(...)인 걸 보면 별명이나 칭호나 관직명이나 자에 해당하는 듯.[17]
안장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안장왕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 되는 셈.[18]
해당 성씨는 《신찬성씨록》의 다른 곳에서 고구려의 신하인 이리사사례사(伊利斯沙礼斯)의 후손으로 나온다.
부련왕(夫連王) 코마노 미야츠코(狛造, こまのみやつこ)씨의 선조. 위의 일사복귀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보륜왕(宝輪王) 마리시노 키미(鋺師公, まりしのきみ)씨의 선조
수모기왕
(須牟祁王)
추모왕(鄒牟王)의 다른 명칭일 가능성이 있음[19]. 코마소메베(狛染部, こまそめべ)씨와 코마히토(狛人, こまひと)씨의 선조

독음이 달린 포스트.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이미 성씨가 일본화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하고 길다. 이는 고대 일본에서는 성씨를 우지(氏)카바네(姓)로 구분했기 때문인데, '우지'에 해당하는 부분을 현대의 성씨로, '카바네'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문의 유래나 등급으로 보면 편리하다. 연전왕 항목의 코마노 아소미씨를 보면 '코마'가 '우지'에 해당하고, '아소미'가 '카바네'에 해당한다.

'우지'와 '카바네' 사이에 있는 조사인 '노(の)'로 구분하면 된다. 안류왕 항목의 카후치노 미타미노 오비토씨는 굉장히 긴데 '우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정확히 말하자면 '미타미'이고, '카바네'에 해당하는 부분은 '오비토'이다. 그럼 앞의 카후치는 왜 붙었나 하면 백제에서 유래한 미타미노 오비토씨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지리명을 붙인 것이다. 반면에 수모기왕 항목의 코마소메베씨와 코마히토씨는 '카바네'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우지'만 있어서 성씨가 짧다. 또 특기할 만한 성씨는 연나왕 항목의 카우노 후히토씨인데 '카우'는 '고(高)'를 그냥 일본식으로 음독한 것에 불과하다(정확히는 현대가 아닌 고대 일본의 한자 발음이다). 즉 '고씨'를 그대로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코마(狛)'라는 단어가 고구려계 성씨에 굉장히 많이 쓰인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고구려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이름 뒤에 '기(祁)'가 붙은 군주가 많은데 이는 이름의 일부라기보다는 존칭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 한국어에서 '기'나 '지'를 이름 뒤에 붙여 존칭하는 용법은 삼국 공통으로 두루두루 나타난다. 또한 수모기왕의 '수모' 부분의 훈은 '스무'로 시조 추모왕의 훈과 같기 때문에 추모왕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을 가리키는 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左京
高麗朝臣 好台[20]七世孫延典王
豊原連 上部王虫麻呂
福当連 前部能婁
御笠連 従五位下高庄子
出水連 後部能皷兄
新城連 高福裕
男捄連 高道士
高史 元羅郡杵王九世孫延挐王
福当造 前部志発
河内民首 安劉王[21]
後部薬使主 大兄憶徳
従五位下王仲文[22]
高助斤
従五位下高金蔵[23]
右京
長背連 出自高麗国主鄒牟[24]也 天国排開広庭天皇[25]御世。率衆投化。美体大。其背巾長。仍賜名長背王
難波連 好太王
島岐史 能祁王
島史 和興
狛首 安岡上王
高田首 多高子使主
高安下村主 大鈴
後部王 長王周
山城国
黄文連 出自高麗国人久斯祁王也
高井造 出自高麗国主鄒牟王廿世孫汝安祁王也
狛造 出自高麗国主夫連王也
八坂造 出自狛国人之留川麻乃意利佐也
大和国
日置造 伊利(和)須使主(伊利須意弥)/男麻弖臣[26]/兄許呂使主[27]
鳥井宿祢
栄井宿祢
吉井宿祢
和造
日置倉人
島本 伊理和須使主
摂津国
桑原史
桑原村主同祖
万徳使主
出自狛国人漢也
高安漢人 小須須
河内国
大狛連 伊利斯沙礼斯
溢士福貴王

5.2. 고려조선군왕

대수 명칭 재위기간 비고
초대 요동주도독 조선왕(遼東州都督 朝鮮王) 보장(寶臧) 677년 - 681년 말갈족과 연계해 고구려부흥운동을 시도했으나 폐위
촉 땅에서 유배 중 사망
2대 고려조선군왕(高麗朝鮮郡王) 보원(寶元) 686년 - ? 보장왕의 손자
?대 고려조선왕(高麗朝鮮郡王) 미상 8세기 초반 당현종의 봉선제에 참여
?대 조선왕(鮮郡王)[28] 련(連) 8세기 초반 보장왕의 손자
보장왕의 증손녀인 고씨부인 묘지명에서 등장.
- 고려조선군왕(高麗朝鮮郡王) 이정기 781년 참칭한 것으로 추정[출처]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가 보장왕과 그 후손들에게 주었던 군왕 직위다. 677년 요동주도독 조선왕으로 임명된 보장왕운 681년 말갈족과 연계해 부흥운동을 시도했으나, 발각되면서 당으로 소환당해 촉 지역으로 귀양갔다가 사망하게 되었다.

이후 686년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이 고려조선군왕으로 임명했으나 장안에 머물게 했고, 698년 충성국왕으로 임명해 요동으로 파견하려 했으나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724년, 당 현종이 태산에서 거행한 봉선의식에서 고려조선왕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며, 당대 금석문인 고씨부인묘지명에서는 보장왕의 아들 고련이 조선군왕을 역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6. 여담

  • 삼국사기》의 태조대왕의 재위 기간과 생몰년이 매우 길다. (94년 재위, 119세) 따라서 사학계에서는 다른 인물의 즉위기록이 섞였거나, 신화적 기록이 가미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후 군주인 차대왕, 신대왕 또한 '형제'로 기록되어 있으면서 지나치게 나이 차이가 많다.
  • 다만, 태조대왕의 사례를 제외하더라도 고구려 왕가 집안에 장수 유전자라도 있었는지 군주들의 평균 수명이 상당히 긴 편이다. 장수왕은 기록 검증이 가능한 한국사 군주+지도자 통틀어 가장 오래 산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며[30], 미천왕, 고국원왕, 문자명왕 등 실질적 재위 기록의 교차 검증이 가능한 왕들도 3~40년에 달하는 재위 기간을 자랑한다. 심지어 안장왕, 안원왕,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 등도 환갑쯤은 가뿐히 넘겼다. 사람의 수명에는 유전자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타고난 장수 유전자가 있었던 것은 거의 맞아 보인다.
  • 시호가 굉장히 직설적인 군주들이 많다. 미천하게 살다가 왕위에 오른 미천왕, 땅을 넓혀서 광개토대왕, 오래 살아서 장수왕. 영양왕 같은 경우는 대하 사극 연개소문에서 영양'제'로 나와주시는 바람에 안그래도 웃긴 시호가 더 코믹. 잘보면 동, 중, 서천왕 시리즈도 꽤 규칙적인 작명센스를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몇몇 군주의 경우는 장지명에 따라 시호가 지어져있기 때문이다. 숲(소수림)이 근처에 있으면 소수림왕, 중천의 들에 장사지냈으니 중천왕. 이런 식으로 시호를 붙였다. 게다가 시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도 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보이는 시호와 《 삼국유사》, 《 삼국사기》의 시호가 많이 차이난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31]
  • 고구려 말기에 보장왕의 아들이라는 약광이 일본에 귀화하여 고려씨(코마씨)를 내려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현무약광(玄武若光)'이라는 자가 고려약광과 동일 인물이라면, '현무'가 외척을 의미하기 때문에 약광이 고씨 왕족이 아니라는 가설도 있기는 하다. 물론 '현무'라는 말을 반드시 외척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외척으로 해석할 경우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약광이 보장왕의 아들이거나 고씨 왕족이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고구려 왕실 인사에 대한 사료가 원체 부족해서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록에 남지 않으니 그냥 군주가 된 사람들에 대한 기록만 남아있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다른 왕족이 언급되는 수준. 가령 태자 내정자였다가 요절한 고조다라든가,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고구려를 갈아엎어버린 고발기라든가. 현재까지도 코마 신사는 약광의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계보를 보자면, 약광[32][33] ··· 코마 오키마루 (高麗興丸)[34] - 코마 아키츠 (高麗明津)[35] ··· 코마 후미야스(高麗文康)[36]
  • 대중매체에서 가장 많이 나온 왕은 역시 고구려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광개토대왕이다. 드라마, 소설, 게임, 만화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등장했다. 다만, 드라마나 영화 같은 영상 매체로 한정한다면 보장왕이 더 많다. 아무래도 4~5세기 광개토대왕 시기보단 동아시아 전체를 입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6~7세기 삼국시대 말기를 영상화 한 드라마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시대 말기의 기록은 다른 삼국시대 기간보다 기록도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라 영상화 하기도 쉬운 편이다.

7. 둘러보기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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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달리 고고학적 건국 연대가 사서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 확인되며,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광개토대왕을 사서(13세손)와 달리 동명성왕의 '17세손'이라 기록했기 때문에 건국 연대 오류보다는 초기 왕들의 재위기간과 세대 오류에 더 가깝다. 계보는 삼국 중에서 제일 정확하지만 연대 오류가 심각한 신라와, 연대 오류는 그렇다 쳐도 초기부터 후기까지(후기는 일본서기 왕계가 삼국사기/삼국유사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이 무령왕릉 비석으로 밝혀졌다) 왕계 오류가 잦은 백제와 다른 부분. [2] 이는 고려 시대 조선 시대의 군주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려 태조의 시호는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인데 후대로 내려갈수록 후대 군주들이 두 글자씩 덧붙인 것이다. 이 긴 시호를 줄인 것이 신성왕(神聖王) / 신성대왕이다. 아니면 묘호만 써서 태조라고 부르거나 군주가 묻힌 능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3] 羅神, <有關高句麗王號制度的幾點推測(고구려 왕호 제도에 관한 몇 가지 견해)>,《고구려 광개토왕과 동아시아》, 한국 고대사 학회, 2012년 참조. [4] 예를 들어 훗날 세종 시절의 일을 이야기하려거든, "영묘조(英墓祖)때 있었던 일인데…" 하는 식. [5] 다만 이는 세종의 묘호가 아들의 묘호와 시자(諡字)가 '세(世)'로 겹쳐,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폭넓게 사용된 면이 크다. 보통 -묘조(-廟祖)로 지칭하는 건 묘호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 선조→선묘) [6] 현행 한국 국사 교과서는 대무신왕의 이름까지도 등장하기는 한다. [7] 이렇게 왕위 계승 형태가 변동되는 과정에서 군주의 형제들이 왕위를 노리고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8] 구려후 추가 유리명왕이고 여율이 여진이라는 설이 있는데, 해당 가설대로라면 유리명왕은 12년에 사망하고 12~18년이 여율의 치세가 된다. [9]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광개토대왕을 주몽의 17세손(16대손)이라고 기록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대로라면 신대왕은 주몽의 7대손이 된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 건설 당시 고구려는 소수림왕 대 고구려 왕계를 조작한 뒤이기 때문에 17세손이 사실인지 회의적이라는 것이 문제.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차대왕과 신대왕의 항렬이 같은 게 맞다면 더 윗세대일 것이다. [10] 백제 초고왕계도 백제가 2세기 중후반에 건국된 것이 확인되면서 주몽의 아들이 기원전 1세기에 백제를 건국했다는 건 거짓말임이 밝혀졌지만, 동시에 주몽의 먼 후손임은 맞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몇 세대가 삭제된 것으로 추측된다. [11] 해당 벽화는 미천왕을 그린 벽화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내용은 안악 3호분 문서 참조. [12] 해당 벽화는 고국원왕을 그린 벽화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안악 3호분 문서 참조. [13] 79년 치세. 나이는 97세. [14] 일각에서는 '"평안'" 부분을 임금의 휘, 본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5] 보장왕의 추존된 아버지. [16] 광개토대왕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인 '호태왕(好太王)'과 관련있는지는 불명. 일본어 기준으로 '台'는 '토(と)'로 읽고 '호(好)' 자체도 시호에 많이 포함되는 글자여서 다소 불명확. 일단 호태가 고구려왕이었다고는 기록되어 있다. [17] 수서》 기준의 고구려 관등으로 '소사자'의 다른 이름인 '을사(乙奢)'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18] 하지만 군주가 되기에는 세력이 너무 미미해서(어머니 신분이 천했거나 혹은 정쟁 등으로 왕위 계승 자격을 잃었거나) 혹은 군주가 되기도 전에 요절해버려서 기록에서 빠졌을 수도 있다. 조선 후기 족보에도 일찍 죽은 아들을 족보에 싣지 않은 사례가 많은데, 조선 후기 선산 출신의 무관이었던 노상추는 자신의 일기에 어린 아들 하나가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고 적은 기록이 있지만 정작 노상추의 집안인 《선산 노씨 족보》에는 그 아들의 이름은 커녕 존재도 수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래의 부련왕이 복귀왕의 아들이라 기록된 걸 보면 요절한 것 같진 않다. 한씨 미녀 설화가 거짓이 아닌 사실이라면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아들일 수도 있다. [19] 《신찬성씨록》의 훈에 의하면 추모는 '스무'라고 읽는다고 되어 있다. [20] 왕(王)이라고는 하는데 광개토대왕의 다른 표기인 호태왕(好太王)과는 일단 미묘하게 다르다. [21] 호칭에 왕(王)이 들어가있지만 신분은 국인(国人), 즉 신하다. [22] 法名東楼。 [23] 法名信成。 [24] 一名朱蒙。 [25] 謚欽明。 [26] 栄井宿祢。 [27] 日置倉人。 [28] 조선군왕의 약칭으로 추정된다. [출처] 馮立君, 2016, 唐代朝鮮郡王考, 中國古中世史硏究 42 [30] 고대에 비해 의학이 발달한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도 장수왕보다 오래 산 지도자는 아직까지 없다. 한국사의 정치 지도자 중 장수왕 다음으로 장수한 사람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 대통령이다(92세). [31] 물론 이 차이라는 것도 한문 표기 방식의 차이라는 것일 뿐이고. 한 사람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다른 한자를 써서 적는 것은 고려 시대까지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32] 보장왕의 아들로 추정. [33] 일본명은 '코마노 코키시 쟛코'(高麗王若光). [34] 약광의 57대손 [35] 약광의 58대손. [36] 약광의 60대손으로 현재 코마 신사의 궁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