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2 11:56:57

계림대도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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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역대 계림주대도독4. 함께 보기

1. 개요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 계림주 대도독부 또는 신라 대도독부 나당연합군 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 신라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설정했던 명목상의 행정구역 및 통치 기관이다.

2. 역사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는 옛 백제 지역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해 백제 지역 통치를 계획했다. 백제 잔존세력은 부흥운동을 전개하며 저항하였지만 결국 분쇄되었고 백제 땅은 이후 고구려 멸망, 나당전쟁 이전까지는 당나라의 실질적 지배를 잠깐 받았다.[1]

이 때 당나라는 신라 지역에도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663년)하는데, 백제와 달리 신라는 아직 건재했기에 이는 이북 5도와 비슷하게 이름만 있는 명목상의 조치에 불과했다.[2] 이는 사실상 '웅진주도독' 부여융과 '계림주대도독' 문무왕이 동격으로 당나라 장수의 주재 아래 취리산 회맹(665년)을 맺었으니, 결국 신라도 이미 멸망한 백제와 동급으로 당나라에게 규정된 것이고, 또 신라도 장차 백제처럼 될 수 있다는 협박인 셈이었다.

그러나 계림도독부는 옛 고구려의 땅을 통치하기 위해 만든 안동도호부나 백제 땅의 웅진도독부와 달리 실체가 없는 명목상의 기관이었고 당나라 나당전쟁에서 패하면서 사실상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계림주도독의 작위는 명목상의 작위로 성덕왕까지 승계됐다. 나당관계가 개선된 692년, 신문왕 사후 효소왕이 즉위할 때 무측천 황제가 사신을 보내 효소왕을 ‘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 신라왕(輔國大將軍行左豹韜衛大將軍 鷄林州都督 新羅王)’으로 책봉한 것이다.

그러다가 733년 발해의 당나라 침략 때 신라가 당을 도와 발해를 공격하자 나당 간 관계가 회복되었고 이후 명목상의 작위도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로 발해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는데 당현종 고왕 대조영에게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이란 작위를 내렸던 것으로 이는 신라의 경우와 유사하게 신흥국가였던 발해를 협박 및 회유하기 위해 홀한도독부(忽汗都督府)을 명목상으로만 설치한 것이었다.

3. 역대 계림주대도독

대수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김법민 663년 ~ 681년 문무왕
2 김정명 681년 ~ 692년 신문왕
3 김이홍 692년 ~ 702년 효소왕
4 김흥광 702년 ~ 733년(?)[3] 성덕왕

4. 함께 보기



[1] 옛 백제 땅의 전체가 당나라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고 웅진 주변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663년까지 백제부흥군을 토벌하던 당시 신라가 옛 백제 영토를 어느 정도 흡수했기 때문. [2] 비슷한 예로 당나라는 실제로 지배력이 닿지 않는 일본도 일본 서부의 역사적 지명 츠쿠시에서 따온 츠쿠시도독부(筑紫都督府:축자도독부)를 명목상 설치하기도 했다. 다만 츠쿠시도독부 관련 기록은 왜국 측에서 중국식 도독부를 설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3] 733년 발해가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자 신라가 당을 도와 발해를 공격했다. 이에 당은 성덕왕에게 개부의동삼사 영해군사의 작위를 제수했는데 이때부터 계림주도독의 작위가 기록에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