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0년 9월 23일 |
경상도
동래도호부 동평면 두모포리 (현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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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6년 10월 14일 (향년 66세) |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면 청호리 (현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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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진주 강씨 |
이명 | 강호연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554호 |
상훈 |
1986년 대통령표창 추서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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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90년 9월 23일 경상도 동래도호부 동평면 두모포리(현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에서 아버지 강영숙(姜永淑, ? ~ 1936.)[2]과 어머니 경주 이씨 이문순(李文順)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0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 하와이 카우아이(Kauai) 섬 할리하카(Halihaka)로 이주하였다. 1909년 2월 1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설립되자 산하 할리하카지방회에 가입하였고, 같은 달 12일 할리하카지방회 사찰로 선임되어 회장 박수선, 부회장 최정섭 등 간부진을 보좌하였다. 1909년 6월 12일 서기로 선출되어 회장 김요한, 부회장 정운경, 총무 김백수(金白洙)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이 즈음에 호놀룰루 공동회(共同會)의 국권침탈 반대 운동에 공감하여 공동회에 50전을 기부하였다. 1909년 7월에는 카우아이섬 마카웰리(Makaweli) 소재 융희학교(隆熙學校)에 50전을 기부하였다.1909년 말에 귀국한 뒤 전라남도 무안부 이로면 쌍교동(현 목포시 죽동)에 본적을 두고 터를 잡아 물산 중개업에 종사하며 객주 노릇을 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였다가 윤치호· 양기탁 등과 함께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1915년부터 장일환· 서광조· 백영무(白英武)·이보식(李輔植) 등과 함께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할 준비에 착수하였는데, 장일환과 백영무는 중화민국 화폐를 위조하여 자금을 확보한 뒤 간도에 토지를 구입하여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자고 주장하자 이에 이러한 방식은 발각될 우려가 크다며 반대하여 끝내 그 계획을 그만두게 하였다. 이후 배민수(裵敏洙)· 김형직[3] 등의 동지를 포섭하였고,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新韓國報)』[4]를 국내로 밀수입하여 동지들에게 배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7년 3월 23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비밀결사 조선국민회가 비로소 정식으로 출범하자, 전라도 구역장(區域長)에 취임하였다.[5] 이후 조선국민회의 실행 세칙에 따라 대한인국민회 및 재외동포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이어 나가면서 『신한국보』를 밀수입하여 사람들에게 배포하는 한편, 전라남도 및 전라북도 지역에서 회원을 모집하여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면[6] 장좌리 무만마을 출신의 조옥초(趙玉肖)와 양경수(楊敬洙) 등 2명을 정회원으로,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면 장좌리 무만마을 출신의 김사현(金思鉉)과 김영준(金永俊), 전라북도 옥구군 성산면 내흥리[7] 거척마을 출신의 이수현(李守鉉) 등 3명을 준비회원으로 각각 포섭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후 조선국민회에서 군자금 수합 및 무기 구입을 진행하던 중 조직의 실체가 탄로나 1918년 2월 평양경찰서에 체포되었고, 2월 9일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신한국보』를 밀수입하여 반일사상을 선전하였다는 일에 대해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었고, 이에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아[8]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18년 11월 11일 출옥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강호연'이라는 이름으로 정명여학교[9]에서 한문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동지 서광조의 아버지 서상봉, 곽우영 등 기독교 장로와 집사 서화일(徐化壹), 박여성(朴汝成)[10], 박복영, 배치문, 양병진(楊炳震), 오도근(吳道根), 일본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학생 남궁혁(南宮爀), 휘문의숙 학생 김영주(金榮周), 미곡상 박상렬· 박상술·박상오(朴相五) 3형제 등 목포양동교회 신자 및 학생들과 연계 하에 기독교 중심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군중 동원 및 태극기 등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919년 4월 7일 밤부터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 경고문, 조선독립신문 등을 배포한 뒤 이튿날인 4월 8일, 목포 기독교청년회원과 목포공립상업학교[11]· 영흥학교[12]·정명여학교·목포공립보통학교[13] 학생, 시민들을 모아 목포부 남교동·죽동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9일에도 목포부내 여기저기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졌으나, 일본 제국 경찰이 남교동 시장 일대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면서 시위가 중단되었고 주동자와 참여자들이 속속 검거되었다. 이 와중에 피신에 성공하였지만, 1919년 6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벌금 80원을 선고받았다.[14]
이후 4년간 피신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23년 1월 24일, 경상북도 대구부 명치정1정목(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1가) 31번지에 은신하던 것이 일본 제국 경찰에 탐지되어 곧 체포되었다. 그리고 대구경찰서에 이송되어 취조를 받았고, 이어 목포부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1923년 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협박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15]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다만, 1923년 8월 21일에는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16]
1924년 2월 3일 출옥한 뒤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목포무산청년회에 가입했다. 1924년 9월 22일 오후 8시 목포부 사립희성(希聖)유치원에서 열린 임시총회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17], 배치문 등 7명과 함께 보천교 성토에 관한 안을 제출하여 본 안건이 가결되도록 관철하였다. 같은 해 9월 30일 오후 8시 목포부 사립희성유치원에서 목포무산청년회가 개최한 보천교 성토 연설회의 연사로 참여하여 300여 명의 방청객들 앞에서 '보천교와 민중의 해독[普天敎와 民衆의 害毒]'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이후 목포부에서 곡물 중개, 여객선 운항, 해산물 수출 등에 종사하며 상인 단체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1년 11월 5일 목포물산수탁조합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35년 7월에는 목포문옥(問屋)[18]조합 간부로서 매매 감시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두에서 곡물을 거래할 때 두량(斗量) 사용을 권장하고 악덕 장사치들을 단속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에는 무안군 지도면[19] 선도리에 연금되기도 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면[20] 청호리에 거주했고, 1956년 10월 14일에 사망했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본래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에 안장되었으나 1995년 11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경성대학교 인문문화학부 역사문화학전공 명예교수 한규철은 여동생 강나무(姜羅武, 1906.2.29. ~ 2006.)[21]의 아들이다. 즉, 강석봉 지사는 한규철 교수의 외삼촌이다.[22]
- 한규철 교수가 직접 편집한 것으로 추정되는 위키백과 강석봉 항목을 참조하는 것도 좋다.
[1]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 수형인명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1923년 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경상도
동래도호부 사천면 신초량리(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2]
전라도
나주목
무안현
목포진 쌍교촌(현
전라남도
목포시
북교동) 출신이다.
1923년 1월 29일 동아일보 기사에 강석봉의 원적지가 이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3]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의 아버지이다.
[4]
『국민보』라고도 하며,
1923년 1월 29일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이를 『한민신보(韓民新報)』라고 일컫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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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현
보성군
벌교읍
[7]
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내흥동
[8]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 수형인명부
[9]
현
목포정명여자고등학교
[10]
박여성과 동명이인이다.
[11]
현
목상고등학교
[12]
현
영흥고등학교
[13]
현 목포북교초등학교
[14]
1919년 6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수형인명부.
1919년 6월 14일 형사사건부에는 징역 1년으로 오기되어 있다.
[15]
1923년 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수형인명부
[16]
1923년 8월 21일 형사사건부
[17]
1924년 9월 26일 시대일보 기사
[18]
일본어로 とんや(톤야)라고 읽으며, 도매상, 객주 등의 뜻을 가진다.
[19]
현
무안군
지도읍
[20]
현
무안군
일로읍
[21]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23권 2172쪽에는 1907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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