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1-18 23:40:34

장일환(1886)

파일:장일환.jpg
성명 장일환(張日煥)
생몰 1886년 2월 1일 ~ 1918년 4월 9일
출생지 평안남도 평양부 황금리
사망지 평양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장일환은 1886년 2월 1일 평안남도 평양부 황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숭실학교를 졸업했고, 운송업, 광산업 등의 사업을 해 상당한 재산을 보유했다. 1913년 여름 안창호 등의 후원에 힘입어 평양에서 청산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노력했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미국선교사 길목사와 함께 평양에서 연화교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1914년경, 그는 평양에서 숭실학교와 신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선독립청년단(朝鮮獨立靑年團)을 조직하고 <청년단지(靑年團誌)>를 발행해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1914년 9월 미국 하와이에 방문한 장일환은 독립운동가 박용만과 함께 항일투쟁의 방안을 협의했고, 1915년 4월 귀국하여 서광조, 강석봉 등과 함께 평양에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하기로 협의하고 1917년 3월 3일 평양시에 소재한 이보식(李輔植)의 자택에서 배민수(裵敏洙), 백세빈(白世彬) 등과 함께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하고 본인은 회장에 피선되었다. 조선국민회는 구미세력의 동양진출과 더불어 점차 제국주의화하는 일본이 장차 동양침략 즉 중국에로의 침략을 위한 패권쟁탈이 머지않다고 보고 이를 적기로 이용하여 자주독립을 달성하려 했다. 또한 박용만이 이끄는 하와이 국민회와 긴밀한 연계를 해 국내외의 연락기구 설치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

조선국민회의 활동은 근거지 구축과 조직확대 및 교육활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근거지 구축은 조선국민회의 결성 초기단계에서 계획했던 방안으로 간도지역에 토지를 구입하고 회원으로 규합한 동지를 이주시켜 장래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하려던 것이었다. 보다 두드러진 활동은 조직확대와 회원모집 등을 통한 세력 강화였다. 즉 국내조직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 평양에 근거를 두고, 경상도·전라도·황해도지역에 지부 성격의 구역장을 설치하고 각 지역에 연고가 있는 회원을 배치하였다. 경상남도 보성군 출신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오병섭(吳柄燮)을 경상도 구역장에, 전남 목포 출신으로 하와이에서 국민회원으로 활동하다 귀국한 강석봉을 전라도 구역장에 임명했다. 그 결과 전라도 목포, 경상도 보성 일대에 조선국민회 지회가 마련되었다.

한편 조선국민회는 회원을 비밀리에 미주로 파견하려 계획했으며, 중국지역으로의 기반확대를 위해 안동에 외국통신원을 배치하였는데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백세빈(白世彬)이 이를 맡았다. 아울러 북경에도 1명의 통신원을 배치, 북경지역과도 연계를 계획하였다. 1917년 7월에는 간도지역과의 연락통신을 위해 추가로 노선경(盧善敬)을 서간도로 파견했다. 조선국민회는 조직기반을 확대해 가는 한편 회원간의 단결을 강화시키고 장차의 독립쟁패기회에 대비하여 무력준비계획도 수립해 두었다.

배민수, 김형직, 노덕순 등은 손가락을 자르고 ‘대한독립’이라는 글귀를 혈서로 적었으며, 어떤 이는 ‘決死’라고 적었다. 아울러 중국 각지의 무관학교에 회원을 입학시킬 것을 계획하고 1차로 배민수를 중국 무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중국 지역으로 파견했으며, 무기구입 및 군자금조달을 위한 계획도 별도로 세웠다. 조선국민회의 중심인물들은 우선 무기를 구입키 위한 자금마련의 방안으로 각지의 유지를 물색한 후 회원으로 가입시킨 뒤 그에게 군자금을 출자케 하여 그 자금의 일부로 권총을 구입하려 했다. 그리고 <국민보(國民報)>를 배포해 한국인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시키려 했다.

그러나 1918년 2월 9일 조직이 발각되면서, 장일환은 동료 25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모진 고문으로 두개골과 대퇴부가 으스러졌고, 결국 1918년 4월 9일 평양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후 북한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이 조선국민회 회원이었던 것을 빌미로 삼아 조선국민회가 김형직의 주도하에 결성되었으며,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놓은 역사적 사변"으로 평가하면서 장일환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북한과 연계된 독립운동가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역시 조선국민회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했고, 장일환은 북한과 대한민국 모두에게서 외면당한 채 오랫동안 잊혀졌다. 그러다가 1990년에야 비로소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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