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6 22:18:17

RC 데포르티보 데 라 코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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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 시즌 참가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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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 데포르티보 데 라 코루냐
RC Deportivo de La Coruña
정식 명칭 Real Club Deportivo de La Coruña, S.A.D.
애칭 Blanquiazul (청색과 백색), Turcos (터키사람들)
창단 1906년 3월 2일
소속 리그 세군다 디비시온 (Segunda División)
연고지 갈리시아 주 라 코루냐 (La Coruña)
홈 구장 에스타디오 아방카-리아소르 (Estadio ABANCA-Riazor)
(34,600명 수용)
회장 티노 페르난데스 (Tino Fernández)
감독 호세 루이스 마르티
주장 알렉스 베르간티뇨스
공식 웹 사이트 및 소셜 미디어 파일:Deportivo.png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 파일:유튜브 아이콘.png
우승 기록
프리메라 리가 (1부)
(1회)
1999-2000
세군다 디비시온 (2부)
(5회)
1961-62, 1963-64, 1965-66, 1968-69, 2011-12
코파 델 레이
(2회)
1994-95, 2001-02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3회)
1995, 2000, 2002
UEFA 인터토토 컵
(1회)
2008
클럽 기록
최고 이적료 영입 세르히오 곤살레스
(2001년, From RCD 에스파뇰, 1790만 €)
최고 이적료 방출 플라비우 콘세이상
(2000년, To 레알 마드리드 CF, 2500만 €)
최다 출장 프란 곤살레스 - 550경기 (1988-2005)
최다 득점 디에고 트리스탄 - 95골 (2000-2006)

1. 소개2. 경기장3. 역사
3.1. 창단3.2. 암흑기3.3. 역사를 바꾼 렌도이로3.4. 1990년대: 수페르 데포르3.5.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하보 제네레이션3.6. 2000년대 중후반: 베이비 데포르3.7. 2010년대: 강등과 잔류 사이
4. 거쳐간 선수
4.1. 창단~0년대4.2. 2000년대
5. 근황6. 라이벌
6.1. 갈리시아 더비란?6.2. 독특한 갈리시아6.3. 정체성의 충돌6.4. 막상막하가 지속되는 추세6.5. 함께 노래하고, 싸우는 유일한 더비
7. 선수단8. 기적 메이커

1. 소개

정식 명칭은 레알 클루브 데포르티보 데 라 코루냐. 흔히 데포르티보 혹은 데포르로 불린다. 스페인 서북부 지역 갈리시아의 항구 도시 아 코루냐를 연고로 하며 홈 구장은 리아소르다.

지금이야 스페인 1부 리그와 2부 리그를 넘나드는 약체에 불과하지만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경험해 본 9개 클럽 중 하나이다.

한 때 레알 마드리드의 영원한 천적이자 캄프 누에서 바르샤를 4:2로 격파할 만큼 화끈한 공격력을 보유한 팀이었다. 또한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아스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바이에른 뮌헨, 유벤투스 그리고 AC 밀란 등등 당대 최고의 강팀들을 상대로도 홈과 원정 가릴 것없이 승리를 거두며 유럽에서도 존재감을 나타냈다. 결코 명문은 아니었지만 신흥 강호 내지 당대 빅 클럽으로 불리기엔 손색이 없었다.

팬들이 매우 열정적이다. 연간 회원권(소시오) 숫자는 스페인 프로 구단 통틀어 10위~15위 정도를 기록하고 있는데 하위권치곤 좋은 편. 무엇보다 스페인은 원정 응원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나라인데 그럼에도 어디로 원정을 떠나든 데포르티보의 팬들을 항상 찾아볼 수 있다. 1부와 2부를 넘나드는 최근에도 그렇다. 자타공인 스포르팅 히혼과 함께 스페인에서 가장 열정적인 팬덤을 가지고 있는 구단이다.
한국의 팬 커뮤니티는 https://cafe.naver.com/deporcorea 요즘은 활동이 뜸한 편이다.

2. 경기장

리아소르(Riazor)

리아소르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레알 마드리드)와 누 캄프(바르셀로나)를 비롯해 비센테 칼데론(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메스타야(발렌시아) 그리고 산 마메스(아슬레틱 빌바오)와 함께 스페인에서 가장 유서 깊은 경기장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정식 명칭은 에스타디오 무니시팔 데 리아소르(Estadio Municipal de Riazor)지만 현재는 스폰서십 계약으로 에스타디오 아방카-리아소르(Estadio ABANCA-Riazor)이다. 현지 언론이나 팬들은 여전히 리아소르라 부른다. 2015년 새로이 전광판을 설치하며 수용 인원이 34,611석에서 32,660석으로 줄었다.

1906년에 개장했으나 당시에는 운동장말고 아무런 시설이 없었다. 1944년이 되서야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들어갔고 이후 각종 시설들이 들어섰다. 구단에서는 리아소르의 기원을 1944년으로 보고 있으며 1944년 10월 28일 발렌시아 전을 리아소르의 첫 경기라 명시한다. 이후 1982 스페인 월드컵을 대비해 또 한 번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쳤고 월드컵 당시 3경기를 리아소르에서 치렀다. 90년대 초중반에도 한번 대대적으로 구장을 보수했다.

2015년 6월 출리오 페레이로가 아 코루냐의 새로운 시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어마어마한 데포르티보 팬이다. 시장이 바뀐 후로 휴식기인 여름마다 크고 작게 구장을 보수하는 중이다. 육상 트랙을 인조잔디로 대체, 낡은 좌석 교체, 대형 전광판 설치, 지붕 교체 등등 축구 전용 구장으로 탈바꿈했다. 2020년 정도엔 알리안츠 아레나처럼 외부를 장식할 것이라고 한다.

데포르티보는 한 때 홈 극강으로 불릴 만큼 리아소르에서 쉽게 패하지 않았고 원정 팀에게 리아소르는 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리아소르를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너뜨리지 못했고, 02/03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과 준우승팀인 AC 밀란과 유벤투스 또한 이 곳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맛봐야 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장엄함도, 누 캄프의 웅대함도 갖추고 있지 못한 이 자그마한 구장은 오직 32,660명의 관중 만을 수용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마력'을 지니고 있다. 리아소르가 갖고 있는 이 마력의 원천은 바로 '가족이나 다름 없는 12번째 선수들'이다. 누 캄프만큼의 대군은 아니지만, 클럽을 향한 애정으로 넘쳐나는 소수 정예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리아소르 구장을 '철옹성의 요새'로 불리우게끔 만든다. 물론 요즘엔 이런 거 없다.

3. 역사

3.1. 창단

1906년 창단되어 스페인 왕실로부터 최초로 레알 칭호를 부여받았다. 셀타 비고와 함께 갈리시아를 대표했지만 스페인 내에선 오랜 시간 무명 구단으로 취급받았다.

1941년부터 1957년까지 프리메라 리가의 일원이었으나 중하위권을 맴도는 팀에 불과했다. 이 시절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레전드 중 하나인 루이스 수아레스가 데포르티보 유스를 거쳐 1군에서 잠시 활약했다.

3.2. 암흑기

1980년대 아 코루냐는 인구 20만 남짓의 중소도시였다. 쉽게 말해 뚜렷한 산업 기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먹고 살기 바쁜 어촌이었다.

데포르티보는 아 코루냐를 대표하는 구단이었으나 오랜 시간 트로피 하나 없이 하부 리그만 전전했으니 당연히 시민들은 데포르티보에 큰 관심이 없었다. 1982년 월드컵 유치로 홈 구장 리아소르를 대대적으로 보수했으나 데포르티보의 성적이 나빠 적자만 거듭하니 결국은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결국 지방 정부에서도 내다버린 존재가 되어버렸고 당장 해체를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아 코루냐 시민들이 데포르티보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가 있다. 스페인이 축구에 미친 나라다. 그럼에도 1980년대에 아 코루냐에선 롤러 하키 구단인 HC Liceo의 인기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 참고로 HC Liceo는 당시 스페인 리그와 컵, 유럽 및 세계 선수권까지 롤러 하키계에서 들 수 있는 트로피는 모두 들었던 강호였다.

3.3. 역사를 바꾼 렌도이로

축구에 미친 스페인에서 롤러 하키 구단보다 인기가 떨어졌던 무명 구단 데포르티보. 그러나 1988년 아우구스토 세사르 렌도이로가 부임하면서 말도 안되는 기적이 시작된다.

아우구스토 세사르 렌도이로는 여느 다른 구단주들처럼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렌도이로는 아 코루냐 출신으로 약학을 전공한 후 약학 아카데미의 교수이자 시 의원에 불과했다. 쉽게 말해 슈가 대디가 아니었다. 그러나 렌도이로는 구단 경영인으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구단 경영에 있어 100년에 1번 나올까말까하는 천재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다. 앞서 언급했던 롤러 하키 구단 HC Lieco의 공동 설립자이자 구단주를 지냈었고 스페인 리그와 컵, 유럽 대회 및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시켰다. 때마침 시 의회에서는 세금만 축내던 데포르티보의 구단주를 몰색하던 중이었고 렌도이로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낙점받았다. 렌도이로는 데포르티보가 당장 해체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기에 몇 번을 고사하다 주위의 계속된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승낙한다.

렌도이로는 1988년 부임한 이후 데포르티보는 3년 만에 프리메라 리가로 끌어올렸다. 20년 만에 프리메라 리가로 복귀한 것이었다. 렌도이로 구단주는 "바르샤, 마드리드, 우리가 왔다!(¡Barça, Madrid, ya estamos aquí!)"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데포르티보를 프리메라 리가 우승팀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주위에선 당연히 말도 안되는 헛소리로 치부했고 강등 걱정이나 하라며 비웃기 바빴다.

그러나 렌도이로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1992년 여름 그는 데포르티보의 역사를 바꾼 두 건의 영입을 성사시키니 바로 베베투 마우로 실바였다. 당시 베베투와 마우로 실바는 이미 브라질 대표팀에 발탁되었을 정도로 남미에선 유명세를 떨치는 선수들이었다. 반면 데포르티보는 내세울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무명 구단에 불과했다. 렌도이로는 베베투와 마우로 실바를 직접 만나기 위해 몸소 브라질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갈리시아는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브라질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해 두 선수의 마음을 잡는데 성공한다.

3.4. 1990년대: 수페르 데포르

렌도이로의 지극정성 끝에 영입한 베베투와 마우로 실바, 기존 핵심 선수였던 미로슬라프 듀키치, 프란 곤살레스, 파코 리아뇨 그리고 아르세니오 이글레시아스 감독[1]의 수비 축구를 앞세워 데포르티보 승격한 지 2년 만에 바르셀로나와 최종 라운드까지 우승 경쟁을 펼치는 강팀으로 변모하게 된다.

92-93 시즌: 프리메라 리가 3위 등극. 클럽 역사상 첫 유럽 무대 진출. 베베투는 29골로 프리메라 리가 득점왕 등극. 클럽 역사상 첫 득점왕 배출.

93-94 시즌: 프리메라 리가 준우승. 발렌시아와의 38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종료 직전 미로슬라프 듀키치가 페널티킥을 실축. 우승 목전에서 바르셀로나에게 타이틀을 헌납.

94-95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 클럽 역사상 첫 타이틀 획득. 그와 동시에 두 시즌 연속 프리메라 리가 준우승. 스페인의 신흥 강호로 급부상.

95-96 시즌: 데포르티보, 유럽 컵 위너스 컵(현재 UEFA 컵 통합) 4강 진출. 그러나 유럽 무대 병행과 일부 주전 선수들의 노쇠화로 인해 리그는 9위로 마감. 베베투는 데포르티보를 떠나 브라질로 컴백. 전성기를 열렀던 아르세니오 이글레시아스 감독은 자진 사임 및 은퇴.

96-97 시즌: 프리메라 리가 3위. 베베투의 후계자로 700만 유로에 영입된 히바우두가 시즌 21골을 기록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킴.

1997년 여름: 이적 시장 마감일에 바르셀로나 히바우두의 바이아웃 2550만 유로를 지불하며 그 유명한 '히바우두 사건'을 일으킴. 히바우두 중심으로 97/98 시즌을 구상하던 데포르티보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치명타. 데포르티보-바르셀로나 간의 관계 또한 급속도로 악화.[2]

97-98 시즌: 히바우두 잃은 데포르티보는 프리메라 리가 12위로 추락. UEFA 컵에서도 1라운드 탈락.

3.5.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하보 제네레이션

98-99 시즌: 하비에르 이루레타 취임. 데포르티보를 새로운 팀으로 리빌딩하기 시작. 프리메라 리가 6위 등극 & UEFA컵 진출권 획득.

99-00 시즌: 구단 역사 상 첫 프리메라 리가 우승. 자우밍야, 로이 마카이, 빅토르 산체스, 마누엘 파블로 등이 '하보 제너레이션' 구축.

2000년 여름: 렌도이로, '유로 데포르티보' 정책 선언. 후안 카프데빌라,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 디에고 트리스탄 등의 영입에 4,000만 유로 가량 투자.

00-01 시즌: 프리메라 리가 준우승. 챔피언스 리그 8강.

01-02 시즌: 프리메라 리가 준우승. 챔피언스 리그 8강. 21골로 디에고 트리스탄 리그 득점왕.

02-03 시즌: 프리메라 리가 3위. 챔피언스 리그 16강. 29골로 로이 마카이 리그 득점왕.

2003년 여름: 천문학적인 부채로 인해 긴축 정책 선언. 로이 마카이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

03-04 시즌: ' 리아소르의 기적'을 일으키며 사상 첫 챔피언스 리그 4강 진출. 프리메라 리가 3위.

3.6. 2000년대 중후반: 베이비 데포르

04-05 시즌: 프리메라 리가 8위.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탈락. 하비에르 이루레타 감독 성적 부진으로 자진 사퇴.

05-06 시즌: 프리메라 리가 8위. '유망주들의 아버지' 호아킨 카파로스 감독을 중심으로 리빌딩 시작. 전술적·정신적 지주 발레론의 부상으로 후반기 하락세.

2006년 여름: 렌도이로, '베이비-데포르티보' 정책 선언. 자유계약 선수, 명문 클럽 유스팀 선수들 위주로 리빌딩 단행.

06-07 시즌: 후반기 옅은 스쿼드를 실감하며 13위로 시즌 마감. 선수 및 구단 운영진과 관계가 틀어진 호아킨 카파로스는 자신 사퇴.

2007년 여름: 미구엘 앙헬 로티나 취임. 멕시코 신성의 안드레스 과르다도 영입에 700만 유로에 영입.

07-08 시즌 전반기: 20라운드까지 19위에 머물며 유력한 강등 후보로 선정.

07-08 시즌 후반기: 21라운드 바야돌리드 전 이후 5-2-2-1 포메이션으로 파격적인 변화를 단행. 세비야 FC(홈) 승리, 발렌시아 CF(원정) 무승부, FC 바르셀로나(홈) 승리, 레알 마드리드 CF(홈) 승리를 비롯해 수직 상승세를 달리며 8위로 시즌 마감. 인터토토 컵 통해 UEFA 컵 진출.

2008년 여름: 07-08 시즌을 통해 크게 성장한 필리페 루이스 안드레스 과르다도를 중심으로 진정한 '베이비-데포르'로 거듭남.

08-09 시즌: 프리메라 리가 7위. UEFA 컵 32강 진출.

09-10 시즌: 프리메라 리가 10위. 전반기 4위~6위를 맴돌며 밝았던 시즌 전망. 2010년 1월, 팀의 핵심 과르다도 필리페가 동반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후반기 급격히 추락.

2010년 여름: 팀의 핵심 필리페 루이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 몰락의 서막

10-11 시즌: 프리메라 리가 19위. 20년 만의 강등. 미구엘 앙헬 로티나 감독 자진 사퇴.

3.7. 2010년대: 강등과 잔류 사이

2011년 여름: 호세 루이스 올트라 취임. 세군다 리가로 강등에도 불구하고 더 뜨거워진 팬들의 성원. 쏘시오(연간 회원)의 수가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 & 세군다 리가 통틀어 10위. 한편 안드레스 과르다도, 디에고 콜로토, 라우레 그리고 아란수비아까지 핵심 선수들의 잔류 선언.

11-12 시즌: 세군다 리가 1위 & 승격. 세군다 리가 최다 승점 & 연승 기록 경신.

12-13 시즌: 프리메라 리가 18위. 구단 역사 상 처음으로 한 시즌에 감독이 2번 교체. ( 호세 루이스 올트라 도밍고스 파시엔시아 페르난도 바스케스). '할 수 있다(Sí se puede!)'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페르난도 바스케스 부임 후 브루누 가마의 맹활약에 힘입어 연승 행진을 달리기도 했으나 최종전 레알 소시에다드에게 0:1로 패하면서 강등 확정. 발레론의 마지막 시즌.

2013년 여름: 강등에 따른 극심한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 3부 리그 다이렉트 강등 위기. 말이 3부 리그지 데포르티보라는 구단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사건.

2013년 겨울: 투표 결과로 티노 페르난데스가 새로운 구단주로 취임.

13-14 시즌: 세군다 리가 리가 2위 & 승격

2014년 여름: 티노 페르난데스 구단주, 의견 차이로 인해 승격을 이끈 페르난도 바스케스의 갑작스런 해임. 과거 사라고사를 이끈 빅토르 페르난데스 선임.

14-15 시즌 전반기: 승격팀 치곤 나쁘지 않은 행보. 하지만 계속된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강등권으로 추락. 빅토르 페르난데스 경질.

14-15 시즌 후반기: 15년 4월, 데포르티보의 황금기를 이끈 빅토르 산체스 부임. 최종전 캄프 누에서 0:2에서 2:2 극장을 만들어 내며 기적 같은 잔류.

15-16 시즌: 리그 15위. 전반기 최우수 감독으로 선정된 빅토르 산체스. 라 리가 구단 중 최소 슈팅 허용 및 바르셀로나와 함께 최소 패를 기록하며 꾸준히 중상위권에 랭크. 그러나 후반기 들어 전술적 한계, 빅토르 산체스와 일부 선수 불화로 하락세.

2015년 여름: 선수단 불화를 이유로 빅토르 산체스 경질. 지난 날 에이바르의 기적을 이끈 가이스카 가리타노 선임. 불화를 일으킨 선수들을 방출하는 대신 빅토르 산체스를 경질하면서 큰 논란을 일으킴.

16-17 시즌: 리그 16위. 성적 부진으로 2월 27일 가이스카 가리타노 경질. 2월 28일 페페 멜 선임.

17-18 시즌: 리그 18위. 구단 역사상 최악의 시즌. 2번의 감독 교체 단행했으나 35라운드 바르셀로나 전 2:4 패배로 강등 확정.

18-19 시즌: 리그 8경기 무승으로 4월 6일 나초 곤살레스 경질. 호세 루이스 마르티 선임. 리그 6위로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 말라가 CF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플레이오프 결승행. 마요르카와의 1차전 2:0 승리.

4. 거쳐간 선수

4.1. 창단~0년대

창단 이후부터 90년대 후반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했던 주요 선수들

루이스 수아레즈: FC 바르셀로나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레전드로 유명한 스페인 국적의 미드필더. 데포르티보 유스 출신으로 53/54 시즌 한 시즌 몸담은 후 이적했다. 데포르티보에서 선수 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활약했다.

아만시오 아마로 :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인 아만시오 아마로는 데포르티보에서 데뷔했다. 데포르티보에서 네 시즌을 뛰었고 승격에 크게 일조했다. 이를 지켜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직접 지목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시킬 만큼의 재능이었다. 이후 금빛 화산 디 스페타노와 함께 활약했다.

프란 곤살레스: 레알 마드리드의 이적 제의까지 거절하며 축구 인생 모두를 데포르티보에 바친 레전드. 데포르티보 유스 팀 출신으로 1988년 1군 승격되어 2005년까지 17년 동안 활약했다. 데포르티보의 10번이자 주장으로서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스피드가 아닌 테크닉, 패스에 의존하던 재간둥이 스타일의 윙어였고 스페인 대표로 유로 2000 출전 및 A매치 16경기 2골을 기록했다.

은퇴 후엔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코칭을 배우고 있으며 아들 니코 곤잘레스는 FC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망주 중 한명이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위약금 파문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데포르티보를 강등으로 내몰 뻔한 사건 이후로 다수의 팬들이 그에게 등을 돌린 상태. 그의 공로는 인정하지만 좋아하진 않는다는 반응이 주다. 애증의 존재로 전락한 셈.

미로슬라프 듀키치: 세르비아 국적으로 90년대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하나였다. 구 유고 연방 및 세르비아에서도 레전드로 평가받는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듀키치의 페널티킥(El penalti de Djukic)으로 매우 유명하다.[3]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1997년부터 2003년까진 발렌시아에서 활약하며 두 클럽의 전성기를 함께 했다.

은퇴 후엔 세르비아 U-21 대표팀, 세르비아 성인 대표팀을 비롯해 스페인의 바야돌리드, 발렌시아, 에르쿨레스, 코르도바의 지휘봉을 잡았다. 감독 능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편이다.

파코 리아뇨: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데포르티보의 골문을 지켰던 골키퍼. 스페인 대표팀 경력은 없지만 전성기 시절엔 상당히 뛰어났던 수문장이었다. 92/93 시즌과 93/94 시즌 무려 두 시즌 연속 프리메라 리가 최우수 골키퍼(사모라 상)로 선정되었다. 특히 93/94 시즌 38경기에서 오직 18골만 내줬는데 이는 프리메라 리가 역사상 최소 실점이다. 아직까지도 깨지고 있지 않는 기록.[4]

베베투: 호마리우와 투톱으로 뛰면서 94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아기 안기 세레모니로 한국에서도 유명하지만 데포르티보 레전드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데포르티보 소속으로 131경기 출장 86골을 기록했다. 베베토의 조상은 데포르티보의 연고지인 갈리시아 출신이었다. 활약도 활약이지만 갈리시안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팬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데포르티보 팬들의 가슴 속엔 호마리우보다 위대한 스트라이커.

마우로 실바: 레돈도, 과르디올라와 함께 90년대 프리메라 리가 수비형 미드필더 삼대장. 왕성한 스태미너와 투철한 프로 정신으로 만 37세까지 데포르티보의 중원을 든든히 받쳐줬다. 전투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는 평. 여기에 라 리가에서 가장 많이 공을 뺏으면서 가장 적게 뺏기는 선수라는 칭찬도 들었을 정도로 볼을 다루는 능력이나 패스 능력도 좋은 편. 마켈렐레가 한창 레알 마드리드에서 무쌍 찍을 때도 마우로 실바보다 아래라는 평가를 들었을 정도니까 당연한 평가라 볼 수 있다.[5] 데포르티보 출신으로 자타공인 유일한 월드 클래스 선수.

다만 공격 축구를 사랑하는 브라질의 특수성으로 94 월드컵 주역임에도 젊은 시절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전문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의 중요성이 늘어난 최근 재조명 받는 중. 2018년 구단 공식 투표를 통해 데포르티보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뽑혔다.

보로: 1993년부터 1996년까지 데포르티보의 수비 주축으로 활약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발렌시아에서 보냈지만 전성기는 데포르티보 시절이라 할 수 있다. 데포르티보에서의 활약으로 94 스페인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선수 은퇴 이후 고향팀인 발렌시아오 돌아가 코치 및 감독 대행으로 활동 중이다.

도나토: 브라질 출신의 중앙 수비수 및 수비형 미드필더이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활약한 후 1993년 여름 데포르티보로 이적했다. 데포르티보로 이적한 후 전성기를 맞이하며 스페인으로 귀화해 12경기 3골을 득점했다. 유로 96 당시 스페인의 10번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말년엔 중앙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해 데포르티보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우승 당시 만 36세임에도 29경기 3골을 터트렸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투철했다. 02/03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고 아 코루냐에 거주 중이다.

클라우디오 바라간: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했던 스트라이커. 베베투와 함께 투톱을 이루며 구단의 첫 황금기를 이끈 주역 중 하나다. 은퇴 이후 엘체의 수석 코치 및 감독직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스페인 2부 리그 구단들의 지휘봉을 꾸준히 잡고 있다.

하비에르 만하린: 1993년부터 1999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한 공격수 및 윙어. 득점력은 떨어졌으나 스피드가 뛰어난 선수로 상대 진영에 혼란을 가져다주는데 능했다. 스페인 U-20 대표팀부터 성인 대표팀까지 차근차근 밟은 엘리트로 유로 96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또한 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 금메달을 따낸 코비 세대의 일원이다. 은퇴 후 데포르티보 유소년 코치 및 2군 수석 코치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알코르콘의 수석 코치다.

파코 헤메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했던 중앙 수비수. 데포르티보 시절엔 유망주 혹은 로테이션 맴버로 활약했다. 1998년 여름 사라고사로 이적한 후 전성기를 구가하며 스페인 대표팀에도 발탁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다. 은퇴 이후 여러 구단들을 전전하다가 라요 바예카노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선보이며 주가를 올렸다.

누레딘 나이베: 1996년부터 2004년까지 8년 동안 데포르티보의 중앙 수비를 책임졌다. 터프한 수비의 대가로 당대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하나였다. 모로코의 축구 영웅으로 A매치 115경기 4골을 기록했고 2번의 월드컵에 출전 경력도 있다. 아프리카로 범위를 넓혀도 역대 베스트 11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선수. 아시아에서 홍명보의 위상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플라비우 콘세이상: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했던 중앙 미드필더. 마우로 실바와 함께 데포르티보의 중원을 이끌며 99/00 시즌 우승을 견인했다. 이후 거액의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지만 폭망했다. 브라질 대표팀 소속으로 44경기 4골을 비롯해 2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했다. 마르코스 세나가 플라비우 콘세이상과 자주 비교되었다.

무스타파 하지: 90년대 모로코의 판타지 스타. 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맹활약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했지만 적응 문제 및 경쟁자가 하필 자우밍야였기 때문에 별다른 족적을 남기진 못했다.

자우밍야: 브라질 출신의 희대의 테크니션. 화려한 발재간으로 큰 명성을 떨쳤는데 호나우지뉴가 떠오를 당시 제2의 자우밍야라고 불렀을 정도. 우리가 호나우지뉴를 통해 봤던 화려한 테크닉들은 이미 자우밍야가 먼저 했었다. 1997년 히바우두의 대체자로 영입되어 2004년까지 리아소르를 누볐다. 가장 큰 업적은 바로 99-00 시즌 데포르티보의 라 리가 우승을 이끌었던 것. 화려한 개인기 외에도 뛰어난 플레이메이킹, 클러치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무엇보다 큰 경기에 매우 강했다.

그러나 01/02 시즌 기점으로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게 된다. 자우밍야가 나이가 많기도 했고 발레론이 플레이메이커로서 더 이타적, 안정적이었기 때문. 이루레타 감독은 자우밍야를 로테이션 맴버로서 상황에 따라 왼쪽과 중앙에 골고루 기용하고 싶어했다. 본인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훈련 도중 이루레타 감독에게 박치기를 시전하며 사실상 축구 인생이 끝나버렸다. 특히 월드컵 직전에 벌어진 사건이라 여파가 더욱 컸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 감독이었던 펠리페 스콜라리는 자우밍야의 행동에 매우 유감을 표했고 엔트리 발표 직전 히카르두 카카를 대신 선발했다. 또한 데포르티보에선 02/03 시즌 쫓겨나듯 오스트리아 리그로 임대를 떠나야만 했다.

은퇴 이후 데포르티보 실내 풋살팀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최근엔 브라질에서 거주 중. 하비에르 이루레타 감독과는 화해를 했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파울레타: 포르투갈 부동의 원톱 파울레타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2년 동안 활약했다. 우승 멤버지만 존재감은 적었다. 로이 마카이에 밀려 철저한 후보였다. 2000년 여름 디에고 트리스탄이 합류하면서 보르도로 이적.

4.2. 2000년대

99/00 시즌 우승부터 2000년대 초중반 데포르티보를 거쳤던 선수들

리오넬 스칼로니: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한 멀티 플레이어. 주 포지션은 오른쪽 측면 수비, 윙어였으나 수비형 미드필더도 가능했다. 04/05 시즌을 끝으로 프란 곤살레스와 마우로 실바가 은퇴한 후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05/06 시즌 호아킨 카파로스 감독 및 구단 운영진과 불화를 빚었고 결국 리빌딩의 일환으로 시즌이 끝난 후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세리에 A의 라치오, 아탈란타에서 활약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소속으로 2006 월드컵에 참가한 적이 있다.

데포르티보를 떠난 후에도 이탈리아에서 꾸준히 경기를 관전하러 올 정도로 애정이 대단하다. 일찌감치 지도자에 대한 열망이 있었는데 데포르티보의 감독이 되는 것은 나의 꿈이라고 여러번 밝혔다. 호르해 삼파올리의 수석 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받은 후 아르헨티나 감독 대행을 거쳐 현재 감독을 맡고 있다.

마누엘 파블로: 유스 출신이 아님에도 1998년부터 2016년까지 무려 18년을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한 레전드. 2000년대 초반 20대 초반에 카푸, 사네티와 함께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01/02 시즌 정강이가 두 동강 나는 중상을 당하며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 투철한 프로 정신을 바탕으로 만 40세까지 현역으로 뛰었다. 현재 데포르티보에서 유소년 코치로 일하는 중.

엔리케 로메로: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한 레프트백. 20대 중후반에 이르러 기량이 만개한 대기만성형 선수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프리메라 가를 대표하는 풀백이었다. 특히 99/00 시즌 데포르티보의 우승 이후 좌측의 엔리케 로메로, 우측의 마누엘 파블로가 이끄는 측면 수비는 프리메라 리가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6] 2002 한일 월드컵에도 참가해 한국 전을 비롯해 3경기를 풀타임으로 소화했다. 유로 2004도 참가가 유력했으나 어처구니 없는 부상으로 기회를 날렸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다치거나 뱀에게 물리는 등 기이한 부상을 당하며 동료였던 조안 카프데빌라에게 자리를 내줬다.

빅토르 산체스: 레알 마드리드, 라싱 산탄데르를 거쳐 1999년 여름 데포르티보에 입성한 후 루이스 피구, 호아킨 산체스와 함께 꾸준히 라 리가 최고의 우측 자원으로 평가 받았다. 면도날 크로스와 속 시원한 중거리 포는 빅토르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2006년 데포르티보를 떠나 파나티나이코스로 이적, 그 후 세군다 리가의 엘체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 당시 헤타페의 감독이었던 미첼의 수석 코치로 세비야, 올림피아코스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작년 여름 미첼과 결별한 후 감독직을 구하다가 강등 위기에 직면한 데포르티보로 9년 만에 돌아왔다. 감독 경력이 없었음에도 팬들은 빅토르가 팀을 강등에서 구해낼 것이라 굳게 믿었다. 빅토르는 14/15 시즌 데포르티보를 잔류시킨 후 15/16 시즌 데포르티보를 잔류시키며 팬들의 믿음에 보답했다. 그러나 구단 운영진과 불화로 일방적으로 경질당했다.

세사르 마르틴: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데포르티보에 몸담았던 중앙 수비수. 스페인 청소년 대표팀의 모든 연령대를 거친 엘리트였고 장차 데포르티보의 핵심이 될 수비수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나이베트가 생각보다 오래 기량을 유지했고 설상가상으로 안드라데가 영입되며 로테이션으로 굳혀졌다. 03/04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 포르투 전에서 데쿠에게 뒤늦은 태클로 페널티킥을 내주며 데포르티보 팬들을 눈물 짓게 만들기도 했다. 스페인 대표팀 소속으로 12경기 3골을 기록했고 유로 2004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로이 마카이: 데포르티보의 99/00 시즌 우승 당시 최전방을 책임졌던 공격수. 그러나 00/01 시즌과 01/02 시즌엔 디에고 트리스탄에게 밀려 오른쪽 윙으로도 출전하는 등 데포르티보 생활이 항상 순탄치는 않았다. 그러다 트리스탄이 부상으로 신음하던 02/03 시즌 폭발하기 시작했다. 리그에서만 29골을 터트리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또한 스페인 클럽의 무덤이라 불렸던 알리안츠 아레나 원정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데포르티보의 역사적인 승리를 이끌었다.[7]

슬라비사 요카노비치: 구 유고 연방 출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99/00 시즌 우승 맴버다. 마우로 실바, 플라비우 콘세이상이 볼란테로 출전한 가운데 로테이션으로서 쏠쏠하게 활약했다. 한 시즌만 뛴 후 첼시로 이적했다.

디에고 트리스탄: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활약했던 스트라이커. 데포르티보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당대 스페인이 내놓은 무결점 스트라이커. 지금도 스페인에선 게으른 천재의 대명사로 언급될 정도로 타고난 재능은 남달랐다. 특히 01/02 시즌 보여준 임팩트는 3대 빅 리그 공격수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꿀릴 것이 없었다. 맹활약에 힘입어 2002 월드컵에는 스페인의 10번으로 참가했다.

월드컵 도중 당한 부상 이후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평소에 훈련을 게을리했고 부상을 당한 후에도 계속해서 늦은 밤까지 파티를 즐기는 등 자기 관리에 실패하며 04/05 시즌 이후로는 완벽히 퇴물로 전락했다. 재능은 재능인 것이 퇴물로 전락한 후에도 리보르노와 웨스트 햄을 통해 빅 리그를 전전했다. 데포르티보와 끝이 나빴지만 최근 리아소르나 훈련장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왈테르 판디아니: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했다. 타겟형 스트라이커로 골문 안에서 존재감이 돋보였던 선수. 다른 능력은 애매했지만 헤더로 득점하는 능력 하나는 최고였다. 항상 머리를 밀고 다닌 것도 있고 헤더가 좋다보니 오래전 사커라인에선 황금 대가리로 불리곤 했다. 00/01 시즌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파리 생제르망 전에서 후반전 교체 투입되어 머리 3골 헤트트릭을 작렬하며 4:3 기적같은 역전승을 만들며 스타덤에 올랐다.[8] 하지만 디에고 트리스탄, 로이 마카이 때문에 솔샤르처럼 수퍼 서브로 활용되었다. 주전으로 나선 때는 03/04 시즌밖에 없었고 이 때 정점을 찍었다. 16강 유벤투스 원정에서 1골, 8강 AC 밀란 전에선 리아소르 기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주로 페널티 박스 안에서만 노는 선수라 지원 사격이 좋지 않으면 덩달아 부진했다. 쉽게 말해 혼자서 골을 만들지 못했던 선수라 클럽에서나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나 크게 중용받지 못했다.

프란시스코 몰리나: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데포르티보의 골문을 지켰다. 유로 2000 노르웨이 전 저지른 실수로 인해 스페인 국대와는 인연이 없었으나 라 리가에선 언제나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였다. 은퇴 직후 빠르게 감독직에 도전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조안 카프데빌라: 데포르티보에서 2000년부터 2007년까지 7년 동안 활약했다. 엔리케 로메로에게 밀려 오랜 시간 로테이션에 그치다가 05-06 시즌부터 뒤늦게 포텐이 폭발해 06-07 시즌에 이르러선 라 리가 최고의 레프트 백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시에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도 입지를 넓혀가며 유로 2008 2010 월드컵 우승 당시 주전 선수였다. 득점력이 수비수치고 상당히 뛰어났다. 데포르티보를 떠난 후에도 꾸준히 리아소르에 방문해 팬들과 경기를 관전하고 있다.

알도 두셰르: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한 수비형 미드필더. 아르헨티나 U-17 대표팀부터 U-20 대표팀, U-23 대표팀까지 엘리트로 만 18세에 아르헨티나 1부 리그 소속 뉴웰스 올드 보이스의 주전 자리를 꿰찼을 정도. 만 19세에 포르투갈의 명문 스포르팅으로 이적해 좋은 활약을 펼쳤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아르헨티나 청소년 대표팀을 고루 거쳤던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던 만큼 일찌감치 마우로 실바의 후계자로 낙점받았다. 물론 기대만큼 성장하진 못했지만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기량이 완성되며 리그 정상급 수비형 미드필더까진 찍어봤다. 비슷한 시기에 아르헨티나 대표팀에도 발탁되어 5경기를 소화했다. 당대 아르헨티나 중원이 에스테반 캄비아소,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라 그렇지 요즘 같았으면 꽤나 중용되었을 선수. 사실 두셰르가 유명해진 것은 2002 월드컵 직전인 01/02 시즌 데이비드 베컴의 발등을 부러트렸기 때문이다.[9]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 백만 데포르티보 팬들의 근원, 상징 그리고 혼 그 자체였던 레전드. 플레이메이커 시대에 스페인이 내놓은 대답으로 사비, 이니에스타 이전 세대의 미드필더 중 가장 창조적이고 패스가 뛰어난 선수였다.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세군다 리가 최우수 공격형 미드필더상을 타며 데포르티보의 승격을 견인했다.

로베르코 아쿠냐: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한 중앙 미드필더. 90년대~2000년대 중반까지 파라과이 대표팀의 핵심, No.10이자 주장까지 맡았다. 사라고사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 1100만 유로, 당시로선 적지 않은 이적료로 데포르티보로 영입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부상, 컨디션 저하로 한 시즌 10경기를 소화했던 적이 단 1번도 없었다. 데포르티보 입장에선 희대의 먹튀.

조르제 안드라데: 2002년부터 2007년까지 5년 동안 데포르티보 수비의 핵심이었다. 전성기 시절엔 뛰어난 운동 신경을 갖춘 정상급 수비수였다. 2007년 자유 계약으로 유벤투스로 이적했으나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2년 동안 4번의 공식 경기에만 출전했다.

포르투갈 대표팀의 주전 수비수로 51경기 출전한 바 있다. 2002 월드컵, 유로 2004에 참가했다. 2006 월드컵은 무릎 부상으로 불참했다. 베테랑 루이스 피구, 코스티냐, 파울레타가 2006 월드컵을 끝으로 은퇴 및 대표팀을 떠나면서 누누 고메스와 함께 포르투갈의 주장단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본격적으로 부상으로 신음하던 시기라 그다지 존재감은 없었다.

알베르트 루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활약했던 왼쪽 윙어 내지 스트라이커. 03/04 시즌 스트라이커에서 왼쪽 윙어로 포지션 변경 후 포텐셜이 제대로 폭발하며 유럽 축구계를 대표하는 신성으로 떠올랐다. 세리에 A의 신성이 카카였다면 라 리가의 신성은 알베르트 루케였을 정도. 리아소르의 기적 당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AC 밀란을 침몰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스페인 대표팀으로는 2002 월드컵 유로 2004에 출전한 경력이 있다. 2006 월드컵 조별 예선 리투아니아 전에 중거리 슛으로 스페인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내는 등 2000년대 중반 스페인 최고의 왼발 잡이로 떠올랐으나 뉴캐슬 이적 후 이적한 후 계속된 잔부상애 신음했고 기량이 빠르게 쇠퇴했다. 말라가에서 10-11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파브리시오 콜로치니: 04/05 겨울 이적 시장을 통해 영입되어 07/08 시즌까지 활약했다. 붙박이 주전이었고 꾸준히 좋은 활약을 펼쳤다. 마지막이었던 07/08 시즌엔 유망주, 퇴물로 구성된 4백 라인을 이끌고 엄청 고생했다. 눈물없인 볼 수 없었던 시즌. 전반기 내내 콜로치니의 사자후 주요 타겟이었던 필리페 루이스가 눈부신 성장세를, 마누엘 파블로는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후반기엔 다행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전반기만 하더라도 19위를 찍던 데포르티보는 후반기에 한 때 7위까지 치고 올라갔는데 콜로치니의 하드 캐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결과 데포르티보의 후반기 성적은 11승 2무 6패, 후반기로만 따졌을 때 4위였다. 2008년 여름 여러 명문 클럽들의 오퍼를 받았으나 가장 많은 이적료를 제시한 뉴캐슬로 이적했다.

알베르트 로포: 데포르티보에서 2006년부터 2011년, 2014년부터 2016년까지 활약했다. 에스파뇰 황금 유스 세대의 일원으로 데포르티보로 이적 당시 리그 정상급 센터백이었다. 스페인 대표팀에 콜업도 받았으나 출전은 못했다. 당시 발렌시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비롯해 여러 명문 클럽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더 좋은 조건으로 이적할 수 있었으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데포르티보엥 선수들이 여럿 포진해있었고 무엇보다 에스파뇰 시절 동료였던 세르히오 곤살레스, 조안 카프데빌라의 설득으로 데포르티보 행을 결심했다. 데포르티보에서 꾸준히 수비 핵심으로 활약했으나 발밑이 상당히 투박하다는 점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필리페 루이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4년 동안 데포르티보에 몸담았다. 안드래스 과르다도와 함께 무너져가던 데포르티보를 중상위권으로 끌어올렸던 구세주. 원래 수비력이 부족하다는 평이 많았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미구엘 앙헬 로티나 지도 하에 수비력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08/09 시즌을 기점으로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레프트 백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정상급 기량을 유지했음에도 클럽 인지도 때문에 평가가 상당히 박하다.

안드레스 과르다도: 무너져가던 데포르티보를 잠시나마 끌어올렸던 멕시코의 국민 스타. 데포르티보에서 2007년부터 2012년까지 5년 동안 활약했다. 국가대표팀 선배이자 FC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고 있던 라파엘 마르케스의 적극 추천으로 데포르티보에 입단했다. 당시 세계적인 유망주 중 하나였기에 데포르티보 팬들의 기대는 엄청 났다. 과르다도의 입단식엔 무려 3,000명의 팬들이 몰려왔고 멕시코 전역에 생중계되었을 정도.

기대만큼 성장하진 못했지만 필리페 루이스와 함께 2000년대 후반 데포르티보의 상징이었다. 과르다도-필리페로 이어지는 데포르티보의 왼쪽 라인은 프리메라 리가에서 최고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10] 10/11 시즌 강등에도 불구하고 잔류하는 충성심을 보여줬고 11/12 시즌 맹활약으로 데포르티보의 승격에 크게 일조하며 아름답게 이별했다.

5. 근황

티노 페르난데스가 구단주로 부임한 후 2014년부터 데포르티보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성공한 비즈니스맨 출신 답게 사업 수완이 뛰어나다. 그로인해 재정이 안정을 되찾았다.

팬들과 소통을 중요시한다. 티노 페르난데스는 구단주이기 앞서 데포르티보가 무명일 때부터 좋아했던 열혈 팬이다. 그래서 구단주지만 같은 팬의 입장에서 선수들과 팬들이 가까워 질 수 있는 각종 행사를 라 코루냐 시나 일반 기업들과 협력해 자주 열고 있다. 또한 페이스북, 유투브,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구단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팬들과 한 층 가까워지다보니 평균 관중수도 지난 시즌들에 비해서 상당히 많아진 편이다. 최근에는 홈 경기가 있을 시 라 코루냐 교외에 거주하는 팬들의 교통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셔틀 버스 시스템을 도입했다. 구단주로서 열정이 대단하다.

그러나 축구 내적인 면에서 있어선 합격점을 주기 힘들다. 축구를 좋아하지만 축구를 잘 모른다. 스포팅 디렉터에게 권한을 위임하는데 문제는 축구를 모르니 스포팅 디렉터가 유능한지 무능한지 구분도 못한다. 가장 큰 문제는 감독 선임과 경질인데 계속해서 검증도 안된 감독이나 선수단 구성과 상반되는 축구 철학을 추구하는 감독을 선임한다. 페르난도 바스케스, 빅토르 산체스의 의문스러운 경질에 자신의 오른팔이자 구단의 스포팅 디렉터는 급기야 작년 10월 돌연 사임했다.

6. 라이벌

역사를 통틀어 봤을 땐 같은 갈리시아 지역을 연고로 하는 구단들과 라이벌이 형성되어 있다. 가장 큰 라이벌은 셀타 비고가 있다. 과거엔 페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루고같은 갈리시아 소규모 구단들도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데포르티보와 격차가 워낙 벌어진 관계로 사실상 라이벌 의식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셀타 비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행여나 앞서 언급한 소규모 클럽들의 서포터라도 데포르티보 셀타 비고 중 한 클럽을 응원하는 경우가 대부분. 쉽게 말해 갈리시아 축구계는 데포르티보 셀타 비고가 양분하고 있다는 뚯이다.

이 외에 데포르티보의 라이벌로는 발렌시아가 있는데 이는 발렌시아가 데포르티보의 역사에 항상 걸림돌 같은 존재였기 때문. 93/94 시즌 데포르티보는 발렌시아에게 무승부를 거두며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코 앞에서 놓쳤고 10/11 시즌엔 최종 라운드에서 발렌시아에게 패배하며 20년 만의 강등을 확정지었다. 데포르티보와 발렌시아가 프리메라 리가 4강을 형성했을 시절에는 발렌시아 팬들 역시 라이벌 의식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사그러든 상태다.

6.1. 갈리시아 더비란?

셀타 비고 그리고 갈리시아 더비

데포르티보는 갈리시아 북부를, 셀타는 갈리시아 남부를 대표하는 구단이다. 갈리시아의 맹주인 두 구단이 자존심을 걸고 다투는 더비.

스페인어로는 Derbi gallego(갈리시아 더비)로, 갈리시아어로는 O noso derbi(우리들의 더비)라고 칭한다. 스페인에서 거칠기로 소문난 더비 중 하나다. 스페인 경찰청은 매번 위험도 높은 경기로 지정해 추가 인력을 투입한다.

두 클럽이 하부 리그를 전전했던 1980년대에도 심심하면 화염병이 날라다녔을 정도. 오히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 때가 더 살벌했다.

90년대 후반부턴 선수들끼리의 기싸움이 매우 심해졌다. 데포르티보는 수페르 데포르로, 셀타는 유로 셀타로 불리며 비슷한 시기에 두 구단 모두 황금기를 맞았기 때문. 당연히 두 클럽을 스타 플레이어끼리 자존심 대결이 펼쳐질 수 밖에 없었다. 당대 라 리가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데포르티보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자우밍야차르[11]로 불리며 셀타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 알렉산데르 모스토보이가 바로 주인공. 실제로 둘은 경기장에서 여러번 충돌했다.

6.2. 독특한 갈리시아

갈리시아는 스페인에서 가장 스페인답지 않은 지방이다. 일단 기후부터 스페인 내륙과 완전히 다르다. 갈리시아는 가을부터 봄까지, 여름을 제외하곤 수시로 비가 내린다. 스페인의 다른 지방과 달리 화창한 날씨를 보기 힘들다. 뜨거운 태양 아래 포도 농장이나 올리브 농장이 넓게 펼쳐진 풍경은 갈리시아에 없다고 보면 된다. 대신 강원도를 연상시키는 크고 작은 산들, 울창한 숲,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가 펼쳐져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스페인과 많이 다르다.

언어 또한 스페인어와 차이점이 있다. 카탈루냐어처럼 갈리시아어가 존재하며 교육 과정, 관공서에서도 쓰인다. 심지어 갈리시아어로만 송출하는 방송국도 있다.

6.3. 정체성의 충돌

앞서 언급했듯 갈리시아는 지역색이 매우 뚜렷하다. 이런 가운데 데포르티보는 갈리시아 북부를 대표하는 동시에 스페인 중앙 정부에 우호적이다. 데포르티보가 레알이라는 칭호를 가장 먼저 받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반면 셀타는 갈리시아 남부를 대표하며 갈리시아인으로서 정체성이 더 짙은 편이다. 그렇기에 셀타 팬들은 셀타가 진정하게 갈리시아를 대표하는 구단이라 자부한다. 동시에 셀타 팬들은 데포르티보를 갈리시아 축구계에서 지워내고 싶어한다. 오직 셀타 자신만이 갈리시아라는 정체성을 대표하길 원하는 것.

셀타의 홈 유니폼은 전통적으로 하늘색인데 하늘색은 갈리시아를 상징하는 색이다. 최근 데포르티보가 원정 유니폼을 갈리시아기의 모양을 본따서 디자인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셀타 팬들은 '터키놈들이 갈리시안 코스프레하네.'라며 대차게 까는 중이다.[12]

셀타 응원가 중에는 '스페인에 데포르티보는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밖에 없다.'가 있을 정도. 한편 데포르티보 팬들은 '데포르티보는 6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 셀타는 타이틀 하나도 없는 근본 없는 클럽이다.'라며 깐다.

6.4. 막상막하가 지속되는 추세

무명 클럽인 시절엔 서로 치고 박는 양상이었으나 두 클럽의 간격이 벌어진 것은 90년대 이후부터다. 셀타는 90년대 들어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어디까지나 유럽 대항전 진출이 목표인 다크 호스에 불과했다. 반면 데포르티보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꾸준히 거쳐가며 리그 우승을 다투는 클럽으로 변모했기 때문.[13]

그로인해 셀타는 거의 25년이란 세월을 데포르티보에게 얻어터지며 살게 된다. 이 시기에 근소하게 우세했던 역대 전적도 따라잡히게 된다.

데포르티보는 셀타를 두들겨 패는 동안 6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모든 부분에서 셀타를 압도하게 된다. 한편 셀타는 황금기를 맞이했음에도 트로피를 단 1개도 얻지 못했고 03/04 시즌과 06/07 시즌 2번이나 강등을 당했다.

더군다나 03/04 시즌 데포르티보는 셀타의 홈인 발라이도스에서 5:0 대승을 거두며 셀타의 강등을 부추겼다. 11/12 시즌 셀타는 또 다시 홈에서 2:3로 패했다. 근데 이 경기가 보통 경기가 아니었기에 셀타 팬들에겐 크나큰 치욕으로 남아있다. 일단 94분 극장골로 역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데포르티보의 2부 리그 우승 & 승격 확정을 홈에서 지켜봐야했기 때문.

이런 이유로 데포르티보 팬들이 셀타를 혐오하는 정도가 10이라면 셀타 팬들이 데포르티보를 혐오하는 정도는 10 혹은 훨씬 이상이라 보면 될 듯. 유독 셀타 팬들이 더 격하게 반응한다.

최근 들어선 셀타가 더비를 승리를 장식하고 있다. 연이어 좋은 감독 선임, 알짜배기 선수 영입, 적절히 터지는 유스 등등 셀타 보드진이 지난 10년 동안 공들인 결과가 나오고 있는 중이다.

6.5. 함께 노래하고, 싸우는 유일한 더비

지역색이 뚜렷한 스페인은 국가 외에도 각 지역별로 지역가가 있다. 경기 시작 전에 갈리시아 지역가를 함께 떼창하는데 이 순간만큼은 정말 하나가 된다. 그러나 지역가가 끝나면 하나고 뭐고 없고 욕설이 난무하는 등 완전 남남이 되는 진기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최근 들어서 갈리시아 지방 정부는 아빠는 데포르 팬, 아들은 셀타 팬 같은 테마로 훈훈한 더비 홍보 영상을 만들어 험악한 분위기 형성을 막고 있다.

7. 선수단


8. 기적 메이커

말도 안되는 결과를 자주 연출한 구단 중 하나다. 대표적으로 리아소르의 기적, 센테나리아소(Centenariazo)라 불리는 2002 코파 델 레이 결승, 리아소르 징크스가 있다.

센테나리아소(Centenariazo) 2002 코파 델 레이 결승: 01/02 시즌 레알 마드리드 데포르티보는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에서 모두 순항을 거듭한 와중에 코파 델 레이 결승까지 진출. 당연히 언론에서는 두 클럽의 트리플 크라운 가능성을 제기했던 상황이었다.

2002년은 코파 델 레이가 시작한 지 100년이 딱 100년이 되던 해였다. 스페인 축구 협회는 코파 델 레이 100주년을 기념해 2002 코파 델 레이 결승은 스페인 국왕이 머물고 있는 마드리드에서 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결승 장소가 다른 곳도 아닌 레알 마드리드의 홈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 선정되며 논란이 불거졌다. 스페인 축구 협회는 코파 델 레이 결승은 제3의 경기장에서 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라고 본인들이 명시했지만 이를 대놓고 어긴 것. 굳이 마드리드에서 열려야했다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홈 구장인 비센테 칼데론에서 열려야 공정했다.

논란에 쐐기를 박았던 사건은 바로 결승 날짜였다. 보통 코파 델 레이는 시즌이 끝난 후나 4월 정도에 치러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뜬금없이 3월 6일로 앞당겨졌다.

말이 코파 델 레이 100주년이지 사실 플로렌티노 페레스의 계획된 쇼였다. 2002년은 레알 마드리드의 창단 100주년이기도 했고 3월 6일은 바로 레알 마드리드의 창단일이었다.

다시 말해 2002년 3월 6일은 레알 마드리드가 창단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플로렌티노 페레스는 2002 코파 델 레이 결승을 성대한 홈 파티로 장식하는 동시에 자신이 추진한 갈락티코 정책의 성공을 전세계에 알리기 원했던 것. 말도 안되는 상황에 여러 스페인 구단들이 스페인 축구 협회가 레알 마드리드에게 강한 압력을 받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했지만 스페인 축구 협회는 여론을 무시한채 결승을 강행했다.

강팀이 약팀 에이스를 빼내오는 것이야 축구 시장의 원리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명백히 원칙과 규정을 무시한 결승전이었다. 과연 상대가 바르셀로나였다면 강행할 수 있었을까?

2002년 3월 6일 저녁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페인 국왕 부부를 비롯해 전세계 축구 귀빈들이 자리했다. 경기장 외부부터 내부의 사소한 인테리어 하나까지,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을 자축하는 것처럼 꾸며놨었다. 트로피 역시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 그리고 100주년을 기념해 새로운 디자인으로 설계되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에 맞춰져 있었던 상황. 그러나 90분이 지난 후 스페인 국왕에게 트로피를 건네받은 선수는 레알 마드리드의 주장 페르난도 이에로가 아닌 데포르티보의 주장 프란 곤살레스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코파 델 레이 역사에 찬란하게 이름을 남기고자 했지만 클럽 역사에 상처만 남겼을 뿐, 데포르티보가 레알 마드리드에게 세기의 망신을 선사하는 순간이었다.

스페인에선 AC 밀란에게 4:0 대승을 거둔 리아소르의 기적 보다도 2002 코파 델 레이 결승을 더 높게 평가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느 다른 코파 델 레이 결승과는 달리 워낙 상징적이었고 역사라곤 1도 없던 구단이 스페인 최고 구단을 꺾는, 특히나 막대한 외부 자본이 투입되지 않고 오로지 구단 운영진의 열정, 선수들의 간절함 그리고 팬들의 성원이 아우러져 이룩한 성공의 정점이었기 때문이다.

리아소르 징크스: 1992년부터 2009년까지 레알 마드리드는 데포르티보의 홈 구장 리아소르에서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6무 12패. 흥미로운 점은 데포르티보가 몰락한 이후인 04/05 시즌부터 08/09 시즌까지 매번 이제는 징크스가 깨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되려 연패를 당한 것. 당연히 1992년부터 2009년까지 리그, 컵 통틀어서 상대 전적도 데포르티보가 앞선다. 데포르티보는 1995 수페르 코파, 2002 코파 델 레이 결승, 04/05 시즌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 적이 있기 때문. 괜히 바르셀로나가 레알 마드리드의 영원한 라이벌이라면 데포르티보는 영원한 천적이다.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다.
[1] 데포르티보 유스 출신으로 데포르티보에서 선수 및 감독 생활을 한 구단의 레전드 [2] 히바우두는 렌도이로가 직접 지켜보고 영입한 선수였다. 히바우두가 영입될 당시 바르셀로나는 지오반니를 영입했는데 렌도이로는 히바우두가 지오반니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라며 극찬했다. 재밌게도 지오반니는 바르셀로나에서 일찌감치 방출된 후 변방 리그를 전전했던 반면 히바우두는 바르셀로나로 이적해 세계적인 선수로 자리매김했으니 렌도이로 입장에선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이 사건 이후 렌도이로는 절대 핵심 선수를 바르셀로나로 팔지 않았다. 알베르트 루케나 필리페 루이스가 좋은 예 [3] 93/94 시즌 데포르티보는 바르셀로나와 우승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데포르티보는 1위, 바르셀로나는 당시 2위였다. 바르셀로나는 무조건 이긴 후 데포르티보가 무승부 내지 패배하길 바래야만 했던 상황. 데포르티보는 발렌시아를 상대로 예상 외로 고전을 거듭했다. 패색이 짙어지는 가운데 경기 종료 직전 0:0 상황에서 베베투가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우승이 걸린 최종 라운드, 그것도 경기 종료 직전에 기적같은 기회가 찾아왔던 것. 원래 페널티 전담 키커였던 베베투는 부담감 때문인지 다른 선수에게 양보했고 결국 듀키치가 키커로 나서게 됐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나 싶었으나 듀키치의 킥은 너무나 정직했고 결국 데포르티보는 우승을 코앞에서 놓쳤다. 지금도 듀키치는 스페인에서 페널티킥하면 나쁜 의미로 많이 언급되는 선수다. [4] 15/16 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얀 오블락이 최소 실점을 갱신할 수 있을까 기대를 모았지만 오블락도 38경기 18실점으로 마무리했다. [5] 정확히는 마켈렐레는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다. 단, 마우로 실바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6] 절대 과장이 아닌 것이 레알 마드리드의 호베르투 카를로스나 미첼 살가도는 공격적인 능력은 뛰어났으나 수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반면에 데포르티보의 엔리케 로메로와 마누엘 파블로는 적절한 공격적 재능에 수비력까지 갖춘 자원들이었다. 더해 데포르티보는 99/00 시즌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홈에서 5:2 대승을 거둘 정도로 공격적인 팀이었고 어느 팀보다 풀백을 오버래핑을 잘 활용했던 팀이기도 했다. [7] 데포르티보는 스페인 구단들 중 최초로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승리를 거둔 팀으로 기록된 것. 당시 스페인에선 상당한 화제거리였다.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도 못했던 일을 언더독 데포르티보가 해냈기 때문. 더군다나 당시 레알 마드리드-데포르티보-바르셀로나 사이의 라이벌 의식도 컸던 상황이란 것을 감안해야한다. 아직까지도 바르셀로나는 바이에른 뮌헨 원정에서 승리가 없다. 레알 마드리드도 13/14 시즌에 가서야 징크스를 깨트렸다. [8] 전반전 스코어는 0:3이었다. [9] 잉글랜드는 최고의 스타가 월드컵 출전이 불투명한 상황에 놓인 것도 화가 나는데 하필 가해자가 아르헨티나 국적이라 분노는 두 배가 되었다. 디에고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은 물론 전쟁을 벌였을 정도니까. 잉글랜드 언론은 두셰르를 맹비난하는 기사를 하루가 다르게 내보냈고 두셰르도 여기다 대놓고 사과 안한다며 불을 지폈다. 일단 두셰르가 공을 먼저 건드렸으나 누가 봐도 거친 태클이긴 했다. 이 사건 때문인지 몰라도 데이비드 베컴은 라 리가 진출 후 유독 아르헨티나 출신들과 다툼이 잦았다. 리오넬 스칼로니, 파블로 아이마르 등등 [10] 2009년 2월 AS는 내국인 베스트 11, 외국인 베스트 11을 선정했고 외국인 베스트 11에 두 선수가 이름을 올렸다. 참고로 오른쪽 라인은 리오넬 메시와 다니엘 알베스 [11] 러시아어로 황제라는 뜻. 모스토보이는 당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중 하나였고 당시 그의 위상을 아주 잘 나타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2] 셀타 팬들은 데포르티보 팬들을 터키놈 or 터키년이라 깐다. 데포르티보 팬들은 셀타 팬들을 포르투갈놈 or 포르투갈년이라 깐다. [13] 셀타에서 오랜 시간 활약하면서 이름을 날린 선수로는 알렉산데르 모스토보이, 발레리 카르핀, 이아고 아스파스 외엔 찾기 힘들다. 반면 데포르티보는 마우로 실바, 베베투, 미로슬라프 듀키치같은 개국공신들만 나열해도 셀타를 압도하는 수준이다. 이후 자우밍야, 로이 마카이, 빅토르 산체스, 디에고 트리스탄, 조안 카프데빌라, 마누엘 파블로 그리고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 등등 최근 아스파스가 아무리 잘한다지만 이들에겐 어림도 없는 클래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