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NASA Astronaut Corps란?
NASA Astronaut Corps, 우리말로 NASA 우주인단 또는 우주 비행단은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배출한 우주 비행사들을 일컫는 말이다.군대식 용어이지만 실제로는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출신까지 포함하여 지칭한다.
주의할 것은, X 실험기 시리즈라던가 여러가지 해괴망측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지구 상공 100km까지 올라갔다 온 테스트 파일럿들도 은근히 있기 때문에 역대 기수와 첫 우주비행의 연도가 맞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기수별로 배출된 연도와 실제 활동 시작 연도는 약 2~3년의 차이가 있다. 우주비행사 훈련을 수료한 후에도 트레이닝은 더 하드코어하게 계속되며, 실제 우주에 올려보내기 전에 백업 승무원이나 지상연락관(일명 CAPCOM"Capsule Communicator") 임무로 일을 계속해서 배우기 때문.
NASA 최초의 우주인단인 NASA Astronaut Group 1기는 소련에게 스푸트니크 쇼크로 헤드샷을 맞고 국가의 자존심이 박살나며 NASA가 설립되자마자 조직된 머큐리 계획의 7인을 일컫는데, 당시에는 전원이 미군 현역 비행장교 출신이었다. 앨런 셰퍼드를 필두로 거스 그리섬, 존 글렌, 스콧 카펜터, 월리 시라, 고든 쿠퍼, 디크 슬레이튼이 그 구성원이었다. 하지만 앨런 셰퍼드의 첫 우주비행 얼마 전 보스토크 계획의 필두였던 유리 가가린의 우주 비행이 세계를 뒤흔들며 콩라인화...
이후 제미니 계획~ 아폴로 계획의 멤버들이 된 2기부터는 현역에서 물러난 제대군인들이 일부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면 닐 암스트롱이 있다. 암스트롱은 해군 전투조종사 출신으로 6.25 전쟁에도 참전하고 열심히 싸우다 격추되기도 하는 등 고생하였고 전쟁이 끝나자 예비역으로 편입하였으며, NASA의 전신인 NACA(미 국가항공자문위원회) 소속의 연방공무원으로 테스트 파일럿 커리어를 시작한 케이스다.
아폴로 계획의 주축이 된 5기까지의 멤버들은 대개 전투조종사를 거쳐 테스트 파일럿을 하던 군인들이었다.[1] 예외적으로 4기에서는 파일럿 교육은 군에다 위탁교육을 실시하는 대신 학위 기준을 박사로 높여버리며 민간인 과학자들을 뽑았다.[2] 하지만 파일럿 경험이 전무한 민간인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여겨졌는지 5기는 다시 전문 조종사들을 뽑았다.[3] 6기에서 다시 작정하고 민간인 과학자들을 뽑았는데, 이들은 이후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의 핵심이 되기도 한 미션 스페셜리스트의 시조가 되었다. 그 다음 기수인 1969년의 7기에서는 특이하게도 몽땅 공군에서만 뽑아버리는 일이 나오기도 했다. 정확히는 공군이 NASA와 별도로 유인 우주 프로그램인 USAF Manned Orbiting Laboratory를 진행했다가 프로그램이 캔슬되고 선발된 인원들 중 일부가 NASA로 편입된 것.[4][5]
2. Chief Astronauts
Chief Astronauts, 우리말로 번역하면 선임/수석 우주비행사라는 직위가 있다. 군대로 치면 주임원사 정도 되는 보직인데, 실제로 우주에 나가기보다는 대개 언론 홍보나 우주 비행사들의 최선임으로서 현역 우주비행사들의 건강과 복지, 훈련을 점검하는 보직이다. 이렇게만 적으면 그냥 얼굴 마담 직위로 보이지만 실제 우주비행사들과 NASA의 윗 분들 사이의 조정자 역할, 그리고 NASA 국장의 고문 역할을 수행하기에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실제 각군 주임원사가 하는 역할과 비슷한 면이 있다. 다만 그렇다고 특정 미션에서 누구를 넣고 빼는 결정 권한을 지닌 것은 아니며 이에 대해서는 윗선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이 직위의 시작은 우주로 나가지 못하게 된 디크 슬레이튼을 NASA에서 붙잡기 위해 둔 임시 보직이었으며, 2대 앨런 셰퍼드까지는 우주에 나가지 못하는 불쌍한 베테랑들[6]이 가는 홍보성 한직의 인상에 가까웠다. 참고로 제미니~아폴로 시절의 수석 우주비행사가 디크 슬레이튼에 앨런 셰퍼드는 '무언가 홍보 담당자'인 것으로 아는 경우가 있지만 실상은 이 시절 슬레이튼의 직함은 우주비행사들의 직속 상관인 승무원 담당 디렉터였고, 셰퍼드가 수석 우주비행사였다. 승무원 담당 디렉터는 우주인들의 훈련과 교체의 직접 책임자였기에 디크 슬레이튼은 미션의 성격이나 훈련 상황에 따라서 주임원사처럼 우주인단에 손을 댈 수 있었고[7], 반대로 당시 수석 우주비행사의 주 역할이 외부 홍보이기에 앨런 셰퍼드는 홍보 담당으로 일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는 많은 우주 체류경력을 가진 베테랑들이 전체 NASA 소속 우주인들의 대표자 역할로서 목소리를 내는 이름에 걸맞은 보직이 되었고 그래서 현재 이 직위는 현역 은퇴 전 우주비행사가 마지막으로 가는 자리가 아닌 현역 우주비행사가 맡는 반장 느낌에 가까워졌다. 이 직위를 맡다 다시 현역으로 우주에 오르는 경우도 많은데 이 부분은 최근만의 경향이 아닌 2/4대 수석 우주비행사인 앨런 셰퍼드나 3대 토머스 스태퍼드, 5대 존 영 때도 그러하였으니 유구한 역사를 지닌 셈이다.[8]대개는 파일럿들이 이 보직에 임명되었지만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이 보직을 역임한 페기 윗슨은 수석 우주비행사를 지낸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미션 스페셜리스트로 기록되었다. 이 직위에 오른 것은 굉장한 위업이다. 페기 윗슨은 최초의 여성 ISS 사령관이었다.
3. 직급
NASA 우주비행사들의 직급은 시대마다 달라진다.머큐리 계획 때는 1인승이었기 때문에 딱히 직급이랄 것도 없었지만, 제미니 계획 이후로는 우주비행사들이 많아지면서 짬밥이나 비행 경력, 근무평가에 따라 직급을 구분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2인승 제미니 미션에서의 우주비행사는 미션 사령관[9]과 파일럿으로 구분되었으며, EVA 등의 여러 미션은 파일럿이 맡았다.[10] 3인승 아폴로 7호부터는 미션 사령관 뒤로 사령선 파일럿, 그 다음이 달 착륙선 파일럿이었다.[11] Skylab 미션에서는 사령관 다음이 시니어 파일럿, 파일럿이었고[12],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서는 사령선 파일럿 다음이 도킹 모듈 파일럿이었다. 뭐, 이 쪽은 달 착륙 대신 소유즈와의 도킹을 위한 일회성 미션이었으니... 이후 1980년대부터의 우주왕복선 미션에서는 STS-1부터 4까지는 사령관과 파일럿만이 탑승하여 테스트 비행을 수행했고, STS-5부터 본격적으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할 미션 스페셜리스트 여럿이 우주선에 탑승하게 된다. 이외에 갖가지 이유로 동승하는 비정규 우주비행사는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라고 따로 불렀다.[13]
반면 소련/ 러시아는 사령관 밑의 직급이 엔지니어였다. 오늘날 ISS에서의 승무원 직급은 미국식이 아니라 러시아 방식을 따르고 있다.
4. 기록과 사건, 사고
군 출신 우주비행사들은 흔히 파일럿들만 뽑힌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조금 어폐가 있는데, "우주선 조종사"는 정말 파일럿만 뽑히는게 일반적이지만 연구원, 혹은 선외임무 수행자인 "미션 스페셜리스트"는 아니다. 오히려 민간 출신들이 더 많으며, 게다가 요즘에는 이 미션 스페셜리스트 위주로 우주임무가 돌아가고 조종사들은 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는만큼 전혀 근거 없는 말이다. 다만 아직까지 파일럿은 모두 조종사 장교 출신 중에서 배출되었다. 참고로 정식 우주인이 아닌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 직급에서는 토머스 존 헤넌 육군준위(CWO-4)가 우주에 올라간 적이 있다.4.1. 1기 "Mercury Seven"
최초의 NASA 우주인단. 다른 이름으로는 'Original Seven'으로 불린다. 2기 New Nine보다 화려함은 뒤쳐지지만 아폴로 계획을 위한 머큐리 계획과 제미니 계획, 그리고 아폴로 계획까지 꾸준히 활약한다. 미국 최초의 우주인인- 앨런 셰퍼드 - Freedom 7을 타고 미국 최초로 우주로 올라갔다. 궤도비행이 아닌 탄도비행이었기에 진정한 우주비행으로 보기에는 미묘한 면은 있다. 이후 귀에 병이 생겨 지상근무를 전전하였으나 최신 수술을 받고 일선으로 복귀, 아폴로 14호를 타고 달 착륙을 성공한다.
- 거스 그리섬 - Liberty Bell 7로 2차 탄도비행을 성공시킨 두 번째 미국 우주인. 제미니 계획에서는 샌드위치 사건으로 유명한 제미니 3호에서도 활약했다. 아폴로 계획에서는 최초로 우주로 올라갈 사령관으로 내정되었으나 훈련도중 화재로 순직하였고 이 미션은 후에 아폴로 1호라 부르게 된다.
- 존 글렌 - Friendship 7으로 미국 최초의 궤도 비행을 성공했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 상원의원을 거쳐 대선후보 경선에도 출마했다. 그렇게 우주와 인연을 끊나 했지만 77세의 나이로 비록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라고는 해도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다시 우주로 가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 디크 슬레이튼 - 원래대로라면 Delta 7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궤도 비행을 할 예정이었으나, 심장 이상이 발견되어 이 미션은 취소된다. 이후 행정직인 수석 우주비행사를 거쳐 NASA 승무원 부서 이사를 맡아 제미니와 아폴로 계획을 뒷받침했다. 이후 NASA의 우주 계획을 생각하면 머큐리 세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인물. 하지만 우주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심장 문제가 사라지자 다시 비행 자격을 취득하여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우주로 올라간다. 이후에는 우주왕복선 계획에도 참여한 NASA의 레전드.
- 스콧 카펜터 - 디크 슬레이튼을 대신하여 Aurora 7이라는 이름의 우주선을 타고 두 번째 궤도 비행을 하였다. 이후 사고를 겪어 비행자격을 잃어 더 이상의 우주비행은 할 수 없었고 NASA에서도 조기 퇴직하였으나 NASA 말기에는 우주유영 훈련 프로그램 개발을 하였고, NASA 퇴직 이후에는 심해 탐사와 해양연구가로 일생을 보냈다.
- 월리 시라 - 수 시간 이상의 우주비행 가능성 시험을 위해 Sigma 7을 타고 세 번째로 궤도 비행을 했다. 이후에도 제미니 6A 미션과 아폴로 7호 미션에 참여했다. 아폴로 1호 참사끝에 재개된 최초의 아폴로 계획인 아폴로 7호 미션을 성공시키며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성공시켰다. 이 아폴로 7호가 사실상 그의 마지막 NASA에서의 미션이었다.
- 고든 쿠퍼 - 호출명 Faith 7. 마지막 머큐리 미션을 장식했다. 이후 제미니 5호로 우주를 한 번 더 갔다오고, 아폴로 13호의 초기 사령관으로 내정되었으나 제미니 시절부터의 훈련 불성실을 이유로 우주인단 동기이자 당시 상관이었던 디크 슬레이튼은 이를 백지화했고, 아폴로 10호 백업을 마지막으로 NASA를 떠나고 이후 아폴로 계획을 비판하며 NASA와 척을 지는 관계가 된다. 그를 대신한 것은 역시 동기이자 당시 수석 우주비행사였던 앨런 셰퍼드였고, 우여곡절끝에 아폴로 14호를 타게 된다.
4.2. 2기 "New Nine"
가장 화려한 업적을 남긴 기수. 제미니 계획과 아폴로 계획의 중추가 되었고, 이후 Skylab과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 우주왕복선에도 참가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이 속해 있다. 아래에 다룰 8기가 우주왕복선 시대에 다양한 기록을 세운 기수라면 2기는 아폴로 계획의 중추로서 역사에 화려하게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에드 화이트나 엘리엇 시처럼 사고로 생명을 잃은 안타까운 사례도 있었다.- 존 영 - 제미니 3호, 10호, 아폴로 10호, 아폴로 16호, 우주왕복선 STS-1, STS-9. 무려 통산 우주비행 6회의 대업적을 남겼다.[16] 아폴로 16호의 사령관으로 달에 착륙. 첫번째 우주왕복선 사령관 임무로 '의회 영예 우주 메달'을 수상.
- 제임스 맥디비트 - 제미니 4호, 아폴로 9호. 최초로 달착륙선을 조종했다.
- 에드 화이트 - 제미니 4호, 아폴로 1호. 미국인 최초로 우주유영을 하였으며, 아폴로 1호의 화재 사건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후 '의회 영예 우주 메달' 추서.
- 피트 콘래드 - 제미니 5호, 11호, 아폴로 12호, Skylab 2호. 아폴로 12호의 사령관으로서 달에 착륙한 세번째 인류. 첫번째 Skylab 미션인 Skylab 2호 사령관 임무로 '의회 영예 우주 메달' 수상.
- 엘리엇 시 - 제미니 9호 예정이었으나 우주 비행 전 항공 사고로 사망.
- 토머스 스태퍼드 - 제미니 6A호, 9A호, 아폴로 10호,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 아폴로의 마지막 사령관으로서 '의회 영예 우주 메달' 수상
- 프랭크 보먼 - 제미니 7호, 아폴로 8호. 달 궤도에 처음으로 날아간 아폴로 8호의 사령관으로서 '의회 영예 우주 메달' 수상. 1968년의 TIME지 ' 올해의 인물'로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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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러블 - 제미니 7호, 12호, 아폴로 8호, 13호. 통산 우주비행 4회. 아폴로 13호의 사령관으로서 '의회 영예 우주 메달' 수상. 달 궤도에 두 번이나 날아간 단 세 명의 인류 중 유일하게 달에 착륙하지 못한 사람.[17] 역시 1968년 TIME지 올해의 인물.
그리고 가정사에 있어 우주인단의 모범인 사람[18] - 닐 암스트롱 - 제미니 8호, 아폴로 11호. 통산 우주비행은 단 2회로 생각보다 적다. 그러나 그 2회가 전부 레전드 급이다. 제미니 8호 미션에서 사상 최초로 아지나 무인 표적과의 궤도상 도킹을 성공시켰고, 제미니 8호의 기계고장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스핀 사고를 겪어 NASA 역사상 처음으로 비상상황에 놓였지만 침착한 대처를 통해 제미니 8호를 무사히 귀환시켰다. 그리고 별도의 설명이 불필요한 인류 최초로 달 유인 착륙 아폴로 11호의 사령관으로서 역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겼다. 당연하게도 '의회 영예 우주 메달' 수상.
9명 중 7명이 미국의 '의회 영예 우주 메달'을 수상하였다. 지금까지 수여된 28명 중 사망사고로 사후 추서된 17명[19]을 빼면 11명인데, 이중 6명이 2기 출신임을 볼 때 얼마나 엄청난 업적을 남겼는지 알 수 있다.
4.3. 3기~7기
NASA 우주인단 3기 14명은 거의 대부분 제미니-아폴로 시절에 현역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제미니 계획 후기와 아폴로 계획 전반부에서 경험을 쌓아 후반부에 가면 사령관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예외가 있다면 아폴로 12호의 트러블 메이커로 유명(?)한 앨런 빈으로서 아폴로 계획에서는 사령관을 맡지 못하였으나 본인이 그 전에 맡았던 프로젝트이자 아폴로 계획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Skylab 3호 사령관으로 우주에 올라 갔다.3기 최대의 유명인사는 바로 아폴로 11호의 버즈 올드린과 마이클 콜린스. 3번 우주에 올라간 데이비드 스콧과 유진 서넌을 꼽을 수 있다. 당장 문서가 있는 우주비행사만 해도 돈 아이즐리, 윌리엄 앤더스, 데이비드 스콧, 러스티 슈바이카트, 리처드 고든 등 아폴로 초중기 우주비행사들 대부분이 해당된다. 그렇지만 3기 역시 죽음의 손길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는데, 인원이 늘어난 만큼 희생도 컸다. 로저 채피는 아폴로 1호 사고로, 찰스 바셋과 테드 프리먼, C.C. 윌리엄스는
NASA 우주인단 1~3기가 아폴로 계획을 위해 갈려들어간 인원이라면 4기부터 7기는 주로 그 이후 시대인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나 Skylab, 그리고 우주왕복선 초기를 이끌었다.
4기와 5기는 아폴로 계획 중후반의 실무 우주비행사로 활약한다. 아폴로 계획 후반은 본격적인 과학 탐사를 계획하였기에 4기는 현역 군인 또는 테스트 파일럿 출신에서 선발한 것이 아닌 과학자들로 뽑았다. 4기에서는 아폴로 15호의 지질학적 사고 수준을 높이는 데 공헌하고 이후 과학계의 버프를 받아 아폴로 17호로 달에 간 해리슨 슈미트, 그리고 리처드 개리엇의 부친으로 유명하며 Skylab 계획에 참여한 오웬 개리엇이 한국인에게는 낯익은 이름이다. 이와 달리 다시 파일럿 중심으로 뽑은 5기는 아폴로 계획의 마당쇠로서 그들 없이는 계획의 중후반부가 돌아가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아폴로 13호의 프레드 헤이즈와 잭 스와이거트, 14호의 스튜어트 루사/에드 미첼, 15호의 알프레드 워든/제임스 어윈, 16호의 켄 매팅리/찰스 듀크, 17호의 로널드 에반스까지 13호 이후부터는 사령관을 제외하면 전부 NASA 우주인단 5기로 채우고 있다. 이렇게 아폴로 계획에 갈려나간 우주비행사를 제외한 4/5기 우주인단은 Skylab부터 우주왕복선 초기 미션을 소화해냈다. 물론 프레드 헤이즈나 켄 매팅리처럼 아폴로와 우주왕복선 모두를 탄 5기 우주비행사도 존재한다.
6기와 7기는 아폴로 계획 또는 이전과는 인연이 없고 기록의 8기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우주왕복선 초기 미션에서 사령관과 미션 스페셜리스트로서 활약하며 우주왕복선하면 떠올리는 우주비행사 체계를 완성했다. 4~7기는 NASA 우주인단 소속 중 한 명(교통사고로 사망한 에드 기븐스)을 제외하면 업무 또는 미션 도중 사망한 사람이 없었다.
4.4. 기록의 8기
한편 아폴로 계획이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로 한 시대를 마무리한 뒤 차세대 우주선인 스페이스 셔틀을 개발하던 1970년대 중반까지 NASA는 우주 비행사를 추가로 채용하지 않았다. 사실 MOL에서 편입한 우주비행사들도 뛰어볼 미션이 없어서 공밀레만 돌리는데 당연하지. 그 후 셔틀이 개발되며 1978년 뽑힌 8기에서는 한번에 최대 7명까지 실어나르는 셔틀 시대의 개막에 맞춰 여성들이 들어왔고 아시아계도 들어왔으며 그간 배출되지 못한 인원이 몽땅 나왔다. 그에 따라 온갖 진기록이 쏟아졌는데, 주요 기록으로는...- 샐리 라이드 - 최초의 미국 여성 우주 비행사이자, 역사상 최초의 동성애자 우주 비행사.[20]
- 주디스 레스닉 - 최초의 유대인 우주 비행사.
- 캐스린 설리번 - 미국 여성 우주 비행사로서 최초의 EVA 수행.
- 애나 피셔 - 최초의 육아 휴직자.[21]
- 엘리슨 오니즈카 - 최초의 아시아계 우주 비행사
- 가이언 블루퍼드 & 로널드 맥네어 - 각각 최초, 두 번째 아프리카계 미국인 우주 비행사.[22]
- 프레더릭 그레고리 -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의 우주왕복선 파일럿이자 선장.
- 노먼 태거드 - 러시아 로켓 소유즈로 올라간 최초의 미국인
- 섀넌 루시드 - 미국인 여성으로서 최초의 장기간 우주체류. 자식이 딸린 어머니로서 최초의 우주 비행사 선발.
- 로버트 깁슨 & 리아 세든 - 최초의 현역 우주 비행사 간 결혼
- 밥 스튜어트 - 최초의 육군 출신 우주 비행사. 그간 군 출신 우주 비행사들은 전부 공군, 해군, 해병대 출신이어서 육군은 묘하게 암울한 처지였다. 정작 공군 우주 비행사 상당수를 키워준 미국육군사관학교는 한동안 자기네 육군 아이들은 보내지 못했던 처지. 이후 밥 스튜어트는 육군 준장까지 지냈다.
이들 중 레스닉, 오니즈카, 맥네어, 그리고 8기를 수료한 파일럿 딕 스코비는 STS-51-L 미션에서 희생되었다.
4.5. 특수부대 출신 우주비행사
10기의 멤버인 윌리엄 맥마이클 셰퍼드[23]는 네이비 씰 출신으로서 우주 비행사 훈련을 수료하였다. UDT 특기를 살려 STS-51-L 챌린저 폭발사고 이후 잔해 수색작업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우주인 명예 훈장을 받았다.
17기 출신의 이탈리아 국적 미션 스페셜리스트 파올로 안젤로 네스폴리는 이탈리아 육군 특전대 출신으로 러시아와 미국의 우주인 프로그램을 모두 경험했다.
19기 출신의 크리스토퍼 존 캐시디는 네이비 씰 잠수정부대 출신으로서 우주 비행사 훈련을 통과하고 우주에 나갔다. 우주인은 생각도 않고 있었던 전형적인 특수부대원이었지만 윌리엄 셰퍼드와의 만남에서 감명을 받아 NASA에 원서를 썼다고.
21기 우주비행사 후보생 앤드루 리처드 모건은 미국육군사관학교와 국방의학전문대학원 출신의 레인저 수료자로 합동특수작전사령부 소속 의무관으로 복무하다 중령 계급으로 21기 우주 비행사 훈련을 수료했다.
22기 우주비행사 후보생 조너선 영 김(Jonathan Yong Kim, Jonny Kim)은 한국계 미국인 2세로, 2002년 미 해군에 입대, 네이비 씰 3팀에서 의무병 및 저격수로 이라크 전쟁에 참전, 은성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24] 그 후 2009년 간부사관 과정에 입교, 군의관 과정을 선택해 2016년 하버드 의전원에 입학하여 응급의학과 군의대위로 복무 중 2017년 22기 우주비행사 후보생으로 선발되었다. 아르테미스 계획을 위해 약 2년간 훈련을 했고 2020년 1월 10일 아르테미스 우주비행사 훈련과정을 수료하여 한국계 최초로 달을 밟는 사람이 될 예정이다.[25]
4.6. NASA 우주비행사 출신 미군 장성
1987년 배출된 12기 파일럿 케빈 패트릭 칠튼이 역대 미군 출신 NASA 우주비행사 중에는 최고 계급까지 진출한 인물이다. 공군 대장까지 올라서 미국공군우주사령부와 STRATCOM 사령관을 지냈다.
하지만 3성까지 진급한 인물은 칠튼을 빼면 겨우 셋 뿐이다. 토머스 스태퍼드, 리처드 트룰리, 수잔 헴스가 그 셋. 그러나 애초에 장성까지 진급한 사람이 십수명 뿐임을 생각하면 오히려 3성을 단 사람이 넷이나 나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일수도 있다. 사실 군인이 NASA에서 전문 우주비행사로 근무한다는건 우주전이 일반화되지 않은 오늘날에는 군인으로서의 생명은 거의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 커리어와 우주비행사 커리어를 병행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나머지 중에도 제임스 맥디비트(공군준장)은 달에는 못 갔지만 최초로 달 착륙선을 테스트했던 아폴로 9호의 사령관이었고, 조 엥글(공군소장)과 리처드 트룰리(해군중장)가 우주왕복선 개발에 크게 기여했던 것을 감안하면 문 레이스 이후의 우주비행사들 중에는 로널드 세가(공군소장), 로이 브리지스(공군소장), 찰스 볼든(해병소장), 밥 스튜어트(육군준장), 케빈 패트릭 칠튼(공군대장), 수잔 헴스(공군중장) 6명 뿐이다. 헴스의 경우 여군으로는 유일무이한 인물.
대체로 NASA와 연계된 일거리(?)가 많은 공군 장성들이 대부분이지만, 육군과 해병대에서도 한명씩 나왔고, 해군에서도 세 명이 나왔다.
4.7. 쌍둥이 우주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Scott_J_Kelly.jpg | |
마크 켈리 | 스콧 켈리 |
역사상 전무후무한 형제 우주인[28]이자 쌍둥이 우주인. 모두 해군 출신으로 16기를 수료했으며, 마크는 현재 퇴역했고 스콧은 현역이다. 마크의 아내는 애리조나 총기난사 사건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중상을 입은 개브리엘 기퍼즈 前 연방 하원의원으로, 마크는 미리 예정되어 있었던 STS-134 미션을 끝으로 아내의 간호를 위해 동생이 아직 현역으로 뛰는데도 퇴역을 결정하고 총기 규제 운동과 병간호에 앞장서고 있다. 스콧은 STS-51-L 챌린저 참사 이후 21년 만에 실시된 바버라 모건의 우주 원격 수업이 있었던 STS-118 미션에서 수업 보조(?)로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우주에서의 장기 체류시 인간의 신체 변화를 탐구하기 위한 1년 장기체류 미션인 Expedition 44에 선발되어 2015년 3월 말부터 ISS에 체류 중으로, NASA에서는 1년 후 유전적으로 동일 인물인 마크와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기대(?)하는 중. 이외에 16기에는 켈리가 한명 더 있는데 그 켈리[29]까지 혈연관계인 건 아니라고. 또한 마크는 미국상선단사관학교 출신[30]인데, 우주비행사 중엔 1966년 2월 28일 T-38 추락사고로 순직한, 제미니 9호에 탑승할 예정이었던 엘리엇 시 이후 처음이다.
마크 켈리는 이후 2020년 미국 양원·주지사 선거에서 애리조나 주 연방 상원의원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2021년 1월 3일부터 상원의원이 되었다.
이외에 16기는 35명이 우주 비행사 훈련을 수료하며 역대 최대 규모의 기수로 기록되었다.
4.8. 막장 드라마
16기 미션 스페셜리스트였던 리사 노왁은 17기의 파일럿 윌리엄 오펄레인과 사랑4.9. 장비 분실
EVA사에 길이 남을 흑역사의 주인공들
좌측 하이디마리 스테파니신-파이퍼(Heidemarie Stefanyshyn-Piper)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으로, 미 해군 심해잠수사 출신, 가운데 스티븐 보언( Stephen Gerard Bowen
4.10. 외모?
인류 최고치의 스펙을 가진 엘리트라는 스타성과 나오는 SF영화의 영향 때문에 기대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으나 큰 기대는 금물이다. 우주인이 될만한 스펙을 쌓으려면 최소한 30대 후반, 대부분 4~50대는 되어야 하며 군인출신이나 공부에 몰빵한 공돌이, 공순이가 대부분이다. 어쩌다 본판이 좋더라도 일상스케쥴 자체가 하드코어 하기 때문에 치중할 시간은 거의 없다.우주진출 초기인 냉전시대 때는 체제선전 성격이 강하여 국가 차원에서 우주 비행사들을 데려다가 파티나 강연 뺑뺑이를 돌리며 신경쓰게 하고, 경쟁 열기가 식은 셔틀 시대 초반만 하더라도 NASA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들은 여성이란 타이틀 선전을 위해 역시 중요한 과업으로 요구 받아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은 우주 비행사들의 꾀죄죄하다는 말을 듣지 않을 정도의 청결을 유지하는 선에 유지되고 있다.
4.11. 대학별 배출 랭킹
2013년 기준 NASA 우주비행사 목록[35]대체로 NASA 우주비행사들은 군인 출신이 많은지라 미국해군사관학교, 미국공군사관학교가 우주비행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이다. 이들을 제외한 민간 대학에서는 MIT가 30명 이상을 배출하여 가장 많고, 그 뒤로 스탠퍼드 대학교, 퍼듀 대학교 등이 뒤를 잇는다.
4.12. 우주인들의 배우자들
우주왕복선과 ISS 이후에는 한 해에 우주로 올라가는 우주인 숫자가 많아졌기에 우주인 개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 역시 우주덕이 아닌 이상에는 딱히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우주 경쟁이 치열하던 때의 NASA 우주인들은 그저 군인이자 공무원이 아닌 연예인 뺨치는 유명인이었다. NASA와 미국 정부에서도 우주인들을 영웅이자 우주 경쟁의 아이콘으로 적극적으로 우주인들을 치켜 세웠기에 그들은 원했건 그렇지 않았건 늘 주목을 받았다.문제는 우주인들이 거의 연예인 취급을 받다보니 그 가족들까지 주목을 받게 된 점이다. 특히 우주인들의 배우자들은 NASA로부터 자신과 가족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주의를 당부받고, 남편들에 대한 내조와 심기 경호까지 맡아야 했다. NASA에서 주관하는 여러 행사에 불려 다니며 스스로를 원치 않게 노출해야 했고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고 NASA와 미국 국민들이 바라는 이미지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심지어 사고로 다른 우주인 가족에게 불행이 닥칠 때 그 뒷수습까지도 함께 해야 했다.
서로 이웃이기도 했던 이들 우주인의 아내들은 Astronaut Wives Club, 줄여서 Astrowives라는 동네 모임이자 우주인단에 대한 비공식 지원 모임을 만들어 때로는 남편들의 뒷담화를 늘어 놓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서로를 위로하며 버티며 우주인의 아내로서 갖춰야 할 행동 양식을 재확인했다. Astrowives는 우주인단 1기 7인의 배우자들의 모임이었지만 2기 우주인들의 부인들 역시 비슷한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이들은 우주 경쟁에서 소련에 열세인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하고 반대로 당시 보수적인 사회가 경계한 소비주의를 억누르는 근검절약을 실천하는 모범 주부로서의 역할을 강요받았다. 남편들이 쉐보레 콜벳을 타고 다니며 땅 위의 속도 경쟁을 즐길 때 부인들은 실용성이 강조된 왜건을 몰며 나라가 바라는 내조하는 아내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당시 NASA 우주인들의 부인들이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강요받았으며 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미국 드라마로도 방영된 Astronaut Wives Club, 그리고 지구에서 달까지의 에피소드인 The Original Wives Club를 통하여 일면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공적인 자리에서 배우자의 입장을 고려한 행동을 하는 것은 높은 직위에 있는 남편, 유명인 남편을 둔 아내라면 다들 하는 일이지만, NASA 우주인들의 부인들은 이 자리에 맞게 준비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저 위험한 일을 하는 군인(또는 군 출신)의 부인일 뿐인 이들에게 갑작스레 유명인의 아내로서 행동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커다란 정신적인 부담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언제 남편이 순직할지 모른다는 스스로의 공포와 싸우고 실제로 주변의 다른 우주인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직접 지켜봐야 했으며 그 와중에도 남편의 임무 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심기를 경호하고 자녀들을 돌봐야 했다. 이럼에도 NASA에서는 억대 연봉은 커녕 그냥 일반적인 군인/공무원의 월급만 주었으니 생활이 윤택하지도 않았다.
원치도 않은 공인으로서의 행동을 강요받고 남편의 주변에 죽음이 늘 함께하는 환경에 마음 졸이며 사는데 수입은 박봉이며, 군인이자 스피드 홀릭인 남편은 자기 속도 모르고 나라에 대한 충성과 자기 일만을 강조한다. 이렇게 살다 지친 아내들의 선택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 이혼이다. 아무리 미국이 이혼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국가라고 해도 NASA 우주인들 가정의 이혼율은 꽤 높은데, 우주 경쟁 시절을 이끈 NASA 우주인단 1, 2기를 살펴보면...
- 스콧 카펜터: 은퇴 후 이혼
- 고든 쿠퍼: 은퇴 후 이혼
- 존 글렌: 결혼 생활 유지
- 거스 그리섬: 순직
- 월리 시라: 결혼 생활 유지
- 앨런 셰퍼드: 결혼 생활 유지
- 디크 슬레이튼: 은퇴 후 이혼
- 닐 암스트롱: 은퇴 후 이혼
- 프랭크 보먼: 결혼 생활 유지
- 피트 콘래드: 은퇴 후 이혼
- 짐 러블: 결혼 생활 유지
- 제임스 맥디비트: 은퇴 후 이혼
- 앨리엇 시: 순직
- 토머스 스태퍼드: 은퇴 후 이혼
- 에드 화이트: 순직
- 존 영: 현역 이혼
이들 이외에도 아폴로 시절을 보낸 네임드 우주인들 가운데서도 가정이 파탄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우주인단 3기만 해도 버즈 올드린, 앨런 빈, 유진 서넌, 월터 커닝햄, 돈 아이즐리[37], 리처드 고든, 러스티 슈바이카트, 데이비드 스콧이 배우자와 은퇴 후 갈라섰는데, 3기 14명 가운데 순직자가 3명이니 이를 제외하면 파경 사례가 혼인을 유지한 사례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셈이 된다. 5기에도 프레드 헤이즈같은 은퇴 후 이혼 사례가 있다.
우주왕복선 계획을 지지하며 현역 연장을 선언하는 바람에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야 했던 존 영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현역을 은퇴한 뒤 파경을 맞았는데, 그나마 남편이 현역이었던 우주 경쟁 시절에는 사회 분위기와 남편에 대한 배려로 불만을 속으로 삭여야 했지만 은퇴 이후에는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가 곪아 터지고 자기 중심적인 속도광형 성격이 많은 남편과의 성격 차이가 더욱 커진 것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는 닐 암스트롱같은 우주인의 레전드 가운데 레전드조차 피해갈 수 없었던 문제였다.
결혼 생활을 끝까지 이어나간 경우도 굴곡은 많았다. 존 글렌처럼 우주로 올라간 뒤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정치계에 투신하여 NASA와 상대적으로 짧게 엮인 경우도 있었지만[38] 월리 시라는 일 보다 가정을 택하여 NASA의 조기 퇴직을 선택했고, 프랭크 보먼은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 부인의 알코올 의존증을 겪으며 가정을 위해 NASA와 거리를 두었다. 정말 못 볼 꼴을 다 본 짐 러블의 경우 부인인 마릴린 러블이 보통 멘탈갑이 아니기도 했지만 고등학생 시절부터 교제하던 사이라 부부간의 유대감이 깊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5. 오리온 시대의 인원 감축
한번에 7명씩 마구마구 실어나르던 우주왕복선이 모두 박물관에 들어가며 NASA는 우주비행사들의 세대교체 문제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 이전까지 STS-107 사고 이후 2004년에 선발된 19기가 마지막 셔틀 세대로, 이들 이후의 20기(2009년 선발)부터는 러시아에서 소유즈를 타고 다니며 ISS 엑스퍼디션을 뛰거나 지상에서 로켓이나 우주선 개발에 참여해야 한다. 문제는 불곰네가 소유즈에 끼워줄 자리는 한 자리 마련하기도 굉장히 벅차다는 것. 한 자리 태워주는데 7천만불씩 삥뜯어가니 예산 없어서 고생하는 NASA는 떡실신(...) NASA는 우주왕복선 이후의 차세대 우주선인 오리온 다목적 유인 우주선과 이를 발사할 SLS를 위해 최선을 다해 있는 돈 없는 돈 쥐어짜서 갈아넣고 있지만[39], 최초의 유인 비행은 빨라야 2010년대 후반에나 가능할 것이며, 초반 지구 궤도나 ISS 도킹 미션이 지나면 예정된 지구 근처 궤도의 소행성 착륙, 그리고 달 착륙 미션이 될 때는 이 20기와 21기가 주력으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이들에 대한 지원을 위해 NASA는 결국 셔틀에만 익숙하던 선배들을 대대적으로 명퇴(...)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일단은 로스코스모스나 ESA에 파견근무하는 형식으로 일자리를 유지해보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오리온 역시 4인승에 불과한지라 이들도 나중에 오리온에 탑승할 자리가 많이 보장될런지는 미지수이다.[40] 그리하여 2013년 선발되어 훈련에 들어간 21기의 멤버 수는 8명에 그쳤다.6. 관련항목
[1]
그래서 이들은 선발 당시 학위가
석사까지만 요구되었다. 우주인단 3기 버즈 올드린은 박사 학위자였는데 이것 때문에 오히려 약간의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
이들 중 지질학자
해리슨 슈미트가 아폴로 17호에서 달을 밟게 된다.
[3]
이들은 아폴로 후기 미션과 Skylab, 우주왕복선 개발 단계까지 함께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 엥글과
프레드 헤이즈.
[4]
이 프로그램은 미 공군의 주도로 이뤄졌다 뿐이지 공군에서만 인원을 선발한건 아니고 해군 쪽에서도 뽑긴 했다. 군적상으론 해군인데 공군에게 월급받는 아이러니한 상황. 왜 공군이 NASA와 별개로 이런 짓을 했냐면,
살류트 프로그램에서 소련이 군사적 목적의 우주정거장을 도모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미군에서 맞불을 놓기 위해
제미니 계획의 남은 모듈을 갖고 계획한 것. 이후 이는 예산 문제로 백지화되었고 NASA에서 이 인원들 중 자기네 조건에 만족되는 이들을 낼름 받아갔다. 지금도 NASA와 별개로
미국공군우주사령부에서는 갖가지 기괴한 짓거리를 하며 세계를 관찰하고 있다.
[5]
이처럼 미국에서 NASA만 우주 비행사를 뽑은 것은 아니다. 머큐리 이전,
유리 가가린의 우주 비행이 알려지기도 전인 1958년 여러 방위산업체와 NACA(NASA의 전신인 국가항공자문위원회), 공군 측에서 합동으로 계획한
MISS(Man In Space Soonest)라는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 선발 계획이 있었으나 이는 NASA가 설립되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유리 가가린 크리가 뜨자 이들의 처지도... 이때 뽑힌 우주 비행사 후보들 중 NASA의 35세 이하 연령기준을 만족한 단 한명만이 NASA에 합류하는데, 그가 바로
닐 암스트롱.
[6]
디크 슬레이튼은 원인불명의 심장질환으로 머큐리 계획에서 우주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라운딩 당했으며, 앨런 셰퍼드도 귓병으로 10년 이상 지상에서만 돌다가 겨우 아폴로 14호로 달에 갈 수 있었다. 일단 아폴로-소유즈 도킹 프로젝트에서 디크 슬레이튼도 우주에 갔다오긴 했지만...
[7]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 중 누가 먼저 달을 밟을 것인지를 깔끔하게 정리한 인물도 바로 이 때의 디크 슬레이튼.
[8]
보통 이 직위는 1~3년 정도씩을 맡지만 존 영은 13년 가까이 맡았다.
[9]
흔히 선장이라고 번역되지만, 영문 명칭은 Captain이 아니라 Commander라고 부른다. 사실 인류의 우주선 발사는 이 시절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바다로의 출항, 항해'보다는 '미션'에 가깝다.
[10]
여기서의 '파일럿'는 실제로는 정조종사가 아니라 부조종사에 가깝다.
EVA는 이들의 몫이었다.
[11]
즉, 짬밥으로 사령관 다음이지만 정작 달을 밟는 영광은 초짜에게 돌아갔다.
버즈 올드린 역시 원래는 사령선 파일럿이었다가 11호의 중요도를 감안한 상부에서 올드린 같은 전문가를 착륙선에 배치한 것. 11호 이후 미션들의 달 착륙선 조종사는 모두 신참들이 맡았고, 대신 아폴로 15~17호에서 추가된 심우주
EVA는 사령선 조종사들의 몫이 되었다.
[12]
Skylab 자체가 수십일 장기 체류 미션이었기 때문에 이 미션에서는 사령관 외의 승무원들은 전문 과학자들도 있었다.
[13]
정치인(...)을 우주에 올려보내기도 하고, 다른 나라의 첫 우주비행사 배출에 협조하기도 하고, 민간 기업이나
펜타곤이 미션 수행을 감독하기 위해 따라 올라가기도 했다.
[14]
일회성인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 직급이었지만 미국 우주 개발사의 레전드이자 현역 상원의원인 존 글렌을 감히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다.
[15]
당시 레전드급 테스트 파일럿들이 NASA로 옮기는 와중에도 척 예거는 그러지 않았는데, 정확히는 고졸 학력이 발목을 잡아 도전하지 못한 것.
[16]
이 기록이 정말 흠좀무한데, 아폴로 시절의 막바지에 선발된 우주 비행사들이 Skylab과 우주왕복선 시대 초창기를 주도하는 대세 속에서 제미니 시절의 올드보이가 계속해서 현역 우주비행사로 버틴 것이다! 제미니의 첫 유인 미션이었던 제미니 3호의 발사가 1965년이었는데 우주왕복선 미션 STS-9는 1983년이다. 게다가 NASA의 역사와도 같은 이들 우주선을 모두 파일럿과 사령관으로서 조종했다. 이 양반은 계속해서 NASA에서 일하면서 2004년까지 근무했다. 자서전 제목이 괜히 Forever Young이 아니다.
[17]
나머지 둘은
존 영과
유진 서넌
[18]
이 시기의 우주 비행사들은 은퇴 후 이혼이 일상일 정도로 흔한데 러블 부부는
가장 못 볼 꼴을 겪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백년해로하고 있다.
[19]
아폴로 1호의 세명과
STS-51-L,
STS-107 사고의 각각 7명.
[20]
다만 동성애자였음은 사후에 알려졌다.
[21]
애나는 60대 중반이 된 2014년 현재도 명예직에 가깝게나마 현역이다. 게다가 남편은 9기에서 배출된 의사 출신 우주 비행사 빌 피셔. 당연히 우주비행사의 배우자가 우주비행사로 뽑힌 진기록도 갖게 되었다.
[22]
우주 비행사로 선발된 인물 중에는 1967년 MOL 3기에서 선발되었던 로버트 헨리 로렌스가 있다. 그러나 1967년 12월
F-104 비행교관으로 활동하던 중 사고로 순직했다. 흑인 최초로 우주에 올라간 인물은
쿠바 출신의 아르날도 타마요(Arnaldo Tamayo Méndez)로, 1980년 9월 18일
소유즈 38 미션에서 우주에 나가게 된다.
[23]
William McMichael Shepherd.
앨런 셰퍼드(Alan Shepard)와는 무관.
[24]
당시 Task Unit Bruiser에서 함께 파병 근무했던 전우로는 조코 윌링크(Jocko Willink) 소령,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주인공인 크리스 카일(Chris Kyle, 2013년 사망) 중사, 마크 알란 리(Marc Alan Lee, 2006년 전사) 병장, 케빈 랙츠(Kevin Lacz) 하사,
명예 훈장 수훈자인 마이클 A. 몬소어(Michael A. Monsoor, 2006년 전사) 병장 등 쟁쟁한 인물들과 함께 근무했다.
[25]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LOP-G 사업에 참여하여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에 간접 참여하게 된다면 순수 한국인 우주비행사도 곧 탄생할 수 있겠지만, 아직 확정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기대할 수 없다.
[26]
달에 갔다오면 대통령이 쿨하게(!) 대령 계급을 쏘고 군에서는 원하는 보직 아무거나 말하면 다 시켜줄테니 NASA 그만두고 돌아오라는 식이었다.(그런데도 많은 우주비행사들은 NASA에 계속 있겠다고 뻗댔다!) 이들은 1970년대 전후에 대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의 나이였는데, 인사적체가 심하지 않았던 시대라곤 해도 일반적으로 이 나이는 장성은커녕 대령 달기도 빠른 편이다.
[27]
다만 통계가 아주 정확하진 못하다. NASA가 우주비행사들의 NASA 퇴직 이후의 커리어에는 너무 민감한 사항이 아니면 크게 터치하지 않는 편인데다 우주비행사를 하도 많이 뽑아놔서(...) 한 예로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의 승무원이었던
밴스 브랜드는 해병대에서의 최종 계급이 밝혀지지 않았다(...)
[28]
부자로는 오웬 개리엇과
리처드 개리엇도 있지만 리처드 개리엇은 전문 우주비행사가 아니라 우주비행 참가자였으니 실질적인 혈연관계 우주인으로는 이 둘이 유일하다.
[29]
제임스 켈리. 이 쌍둥이들과 달리 공군 출신이다.
[30]
이 쌍둥이들 자체가 원래는 파일럿이 아니라 상선사관을 하려다가 모종의 계기로 삘을 받아 조종사가 되고 우주까지 간 것.
[31]
머나먼 우주로 날아간 것은 아니고, 지구 중력 때문에 얼마 후 대기권에 돌입하여 다 타버렸다.
[32]
STS-132, STS-133. STS-133 미션의 원래 승무원 중에 자전거 사고로 부상자가 나오면서 대타로 들어간 것. 셔틀 시대의 말년이라 차기 셔틀 미션을 보장받을 수 없음에 다른 우주비행사들은 백업으로 고생하려고 들질 않아서 결국 근래 미션에서 뛰었던 멤버들이 다음 미션의 백업으로도 뛰어야 했다. 이런 개말년 사례는 옛날
아폴로 17호 시절에도 있었다.
[33]
여담으로 제미니 시절에 최초의 EVA를 했던 에드 화이트는 당시 장갑을 잃어버렸고... 그게 TV카메라에 찍혔다.
[34]
또 하나의 여담으로 마이클 콜린스는 제미니 10호 비행 때 EVA를 하다 카메라를 분실했다. 다만 그 일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는지 전설적인
아폴로 11호의 사령선 조종사로 다시 한번 우주에 갔다.
[35]
여러 대학에서 학위를 딴 경우 중복으로 집계된다.
[36]
퍼듀 자체가 공학, 특히 항공우주공학 분야에서 전미에서 손꼽히는 명문 대학이다.
[37]
다만 이쪽은 현역일 당시부터 이미
불륜으로 말이 많았고, 이러한 사생활 문제는 그가 현역 우주인 생활을 오래 이어가지 못한 중대한 이유가 되었다.
[38]
사실 존 글렌-애니 글렌 부부 역시 굴곡이 많았다. 이들 부부는 타계할 때 까지 백년해로했지만, 애니 글렌이 말더듬이 장애를 안고 있어 사회 생활이 쉽지 않았기에 아내를 지키기 위해 남편인 존이 고군분투했다. '아내 좀 그만 괴롭히라'며 NASA 홍보부와 싸우는 것은 일상다반사. 존 글렌 본인이 정치에 뜻이 있기도 했고 NASA도 정계에 자신들을 대변할 존재가 필요했기에 Win-Win하며 정계 진출을 한 것이지 정치인에 뜻을 두지 않았다면 계속 싸우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NASA의 문을 박차고 나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이들 부부는 NASA 우주인단의 모범 부부로 손꼽히는 짐-마릴린 러블 부부 이상으로 오래 교제한 사이다.
[39]
추가로 소유즈 대신 ISS 택시 노릇을 해줄
스페이스X,
보잉의
드래곤 V2,
CST-100까지... 물론 이들은 민간 기업이 개발하는 거지만, 이것도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NASA가 빵셔틀 노릇을 해줘야 한다.
[40]
아폴로 시대와 셔틀 시대가 마지막 발사(
ASTP)/첫 발사(STS-1) 기준으로 6년의 간극이 있었는데 그 기간에 달이나 Skylab에 갔다온 우주비행사들은 대부분 지상근무만 하다가 은퇴하였다. 셔틀과 드래곤V2, CST-100, 오리온의 시대에도 그 간극은 최소 6년으로 예정되어 있는데,
STS-107 컬럼비아 참사 이전의 세대는 아마 극소수만이 오리온 미션에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대 중반 기준으로는 일단 우주선 만드는 민간 기업체들에서 모셔가기도 하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