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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4794><colcolor=#fff> 윌리엄 앨리슨 "빌" 앤더스 William Alison "Bill" And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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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3년 10월 17일 |
영국령 홍콩 | |
사망 | 2024년 6월 7일 (향년 90세) |
미국 워싱턴 주 산후안 카운티 | |
학력 | 미국해군사관학교 (전문학사) |
군사 경력 | |
임관 | 미합중국 공군 |
최종계급 | 소장(미합중국 공군예비역사령부 : AFRC)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군인, 우주 비행사. 아폴로 계획 시절 활동했다.2. 생애
1933년 10월 17일생. 태어난 곳이 당시 영국 영토인 홍콩이다. 아버지가 미 해군 함정을 타고 다니던 해군이고 당시 홍콩은 영국의 영토라서 문제 없이 홍콩에서 태어난 것. 이 때문에 중국의 양리웨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우주비행사일지언정 최초의 중국 영토 태생 우주비행사라는 타이틀은 달 수 없다,[1] 미국에 와서는 보이스카웃을 하다가 1951년에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955년에 미합중국 공군으로 임관했다. 토머스 스태퍼드도 같은 코스를 밟았다. 공군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로 근무했다. 총 비행시간은 6천 시간.1963년에 NASA의 우주 비행사 선발에 뽑혔다. 1968년 크리스마스에는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달 착륙선을 완성하고 로켓 개발에 착수한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달 착륙선이 완성되기도 전에 최신형이지만 유인 우주 개발에서 단 한번도 테스트된적 없던 새턴 V 로켓으로 발사된 아폴로 8호를 타고 달을 갔다왔다. 직위는 달 착륙선 조종사였지만 정작 달 착륙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에[2] 실질적으로 달 착륙선을 만질 일은 없었다. 게다가 8호에서는 안 그래도 테스트 된 적 없는 새턴 V 로켓을 써야 했고, 달에서 지구 쪽으로 쓸 수 있는 부스터도 딱 하나 뿐이라 실패하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몹시 위험한 미션이었지만 무사히 귀환했고, 로버트 F. 케네디가 암살되고 68운동이 벌어지고 베트남 전쟁이 격해지며 혼란스러운 사회상이 빚어지던 미국과 세계의 1968년을 미국 패권주의의 승리로 마무리하였다.
당시 지구돋이(Earthrise)[3]을 보고 감명받았다고. 지구에서 달까지 드라마에서 이 장면이 매우 벅찬 감동을 선사하는 명장면으로 연출된다. 위 영상의 제목은 Moon Rise지만 잘 쓰이지 않는 단어라 올린 이가 혼동한 모양. 또한 성경 창세기를 프랭크 보먼, 짐 러블과 돌아가며 읽으며 전 지구의 크리스마스를 따뜻하게 했다.
아이슬란드에서 달 착륙에 대비해 지질학 교육을 받던 시절의 사진. 1967년에 찍힌 것이다. 2010년대에 찍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패션센스들이 두드러진다.
1969년에는 아폴로 11호의 백업 사령선 조종사로서 근무[4]한 뒤 NASA에서 대통령과 내각에게 자문을 하는 항공우주평의회(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Council)[5]로 전속되었다. 아무래도 원자력 관련 전공[6]을 가진 인물이며 국민적으로도 유명했기 때문에 백악관에서 가까이 두려고 했던 듯. 사실 본인도 달을 한 번 비행했는데 이번에도 착륙할 기회가 없다는 점에 대해 섭섭하게 여겨서 디크 슬레이튼에게 로테이션 제외를 요청했던 모양.[*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아폴로 우주선의 인원 서열은 사령선 조종사가 달 착륙선 조종사보다 위였다. 때문에 n회의 사령관은 이후 새 팀원을 받거나 차기 프로그램으로 전속되고, n+3회 백업 겸 n+6회 사령관은 사령선 조종사가 되며 달 착륙선 조종사는 그 미션의 사령선 조종사가 되는 식이었다. 이런 로테이션은 제미니 시절부터 이어진 것을 적절히 수정한 것이라 웬만큼 잘 돌아갔으나 앤더스처럼 달에 두번이나 갔는데 왜 착륙을 안 시켜주냐는 불만을 갖게 되는 사례가 나올 수 있었다. 비슷한 사례는 아폴로 16호 사령선 조종사 자리를 거절했다가 [[마이클 콜린스(우주비행사)|마이클 콜린스]에게 17호 사령관 자리를 양보받은 유진 서넌이 있다.][7] 노르웨이 대사로 임명되기도 했고 1977년에 공직을 떠났다. 최종 계급은 공군 소장이었다.
최초로 달 궤도에 진입했던 아폴로 8호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달의 한 크레이터에 이름이 남겨졌고, 오늘날에도 NASA의 각종 행사에 함께하고 있다. 2003년 STS-107 컬럼비아 우주왕복선 폭발사고에서 사후대책 마련 연구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각종 에어쇼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이고 있다.
참고로 2023년 11월까지 아폴로 8호크루 전원 생존 중이었다.[8] 그리고 유독 이혼율이 높은 우주비행사들 중에 유일하게 모든 크루가 이혼하지않고 2024년 현재까지 결혼생활을 유지중인 우주인으로도 역대급이고 가정적으로도 대단한 멤버들이다.
2024년 6월 7일 운전하던 비행기가 워싱턴주의 샌환 제도 근처 푸젯사운드로 추락해 사망했다.
[1]
물론 본토 출신으로는 최초이지만 NASA에 중국계 혼혈인 우주비행사들이 많아서 크게 의미가 있지는 않다. 대만 출신도 상당히 많고.
[2]
착륙선의 테스트는 9호에서 처음 이뤄졌다. 9호는 착륙선 테스트를 지구 궤도에서 하느라 달에 가지 않았고, 10호는 착륙선을 달 궤도에서 분리하여 달 상공에 접근하는 테스트를 실시하였으며(아직 월면에서의 이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착륙하지 못했다), 11호가 달에 진짜 착륙한 미션이 되었다.
[3]
달에서
지구가 떠오르는 일을 말한다. 이는 정작 지구와 한 면만 바라보고 있는 달 표면에 착륙해서는 목격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아폴로 8호가 달 뒷면에서 앞면으로 넘어오면서 생생히 목격되었다. 이 광경은 NASA의 역사에서 불멸의 기록으로 남게 되며, 1968년 말에도
소련한테 지는거 아닌가,
존 F. 케네디의 유훈이 실천되지 못하는가 하며 초조해하던 미국인들에게 달 착륙이 머지 않았음을 체감하게 하였다.
[4]
아폴로 8호의 백업이 암스트롱의 팀이었고 11호의 백업이 아폴로 8호 사령선 조종사
짐 러블의 팀이었다. 이런저런 인원 교체가 있기야 했다만, 대체로 n회 미션의 백업은 n+3회 미션의 정규 팀이 되는 시스템이 이 시절 NASA의 일반적인 로테이션이었다.
[5]
1973년 이후로는 이름이 우주평의회(National Space Council)로 바뀌었다.
[6]
다른 우주비행사들은 대부분 항공공학 석사학위를 가졌지만 앤더스의 공군과학기술원(Air Force Institute of Technology) 시절 전공은 원자력공학이었다.
[7]
이 때 앤더스의 자리에 대신 들어온 우주비행사는
켄 매팅리였다. 물론 매팅리는 홍역 소동으로 이탈했다.
[8]
2023년 11월 7일 사령관인
프랭크 보먼이 사망하면서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