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과 소련의 유인 우주진출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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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주 정책 Space policy of the United Stat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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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계획 1958~1963 |
제미니 계획 1964~1966 |
아폴로 계획 1961~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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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우주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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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토크 계획 1958~1963 |
보스호드 계획 1964~1965 |
소유즈 계획 1960~현재 |
1. 개요
제미니 미션 패치 | 타이탄 II GLV 로켓[1] |
제미니 계획은 인간이 달에 착륙했다가 귀환하는 아폴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각종 우주 비행 기술을 개발, 습득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구체적으로 지구 궤도상에서 자유로운 비행, 인간의 우주 유영 활동, 두 개의 우주선간의 궤도상 근접 비행(랑데부) 및 도킹 실증이 제미니 계획의 주요한 목표였다.
2. 배경 및 목적
제미니 계획(Project Gemini)은 1961년부터 1966년까지 미국항공우주국( NASA)에 의해 이루어진 미국의 유인 우주 진출 계획으로, 인간이 달에 착륙했다가 귀환하는 아폴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각종 우주 비행 기술을 개발, 습득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구체적으로 지구 궤도상에서 자유로운 비행, 인간의 우주 유영 활동, 두 개의 우주선간의 근접 비행(랑데부) 및 도킹이 제미니 계획의 주요한 목표였다.1957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 성공시키면서 촉발된 우주 경쟁은 이후에도 소련이 최초로 개를 우주 비행하는데 성공시킴으로써 일찌감치 미국을 크게 따돌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미국은 급히 미 항공우주국(NASA)를 출범시키고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을 소련보다 먼저 성공시키기 위해 머큐리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 역시 1961년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성공하고 말았다. 미국도 뒤늦게 머큐리 계획을 성공시켰지만 미국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머큐리 계획으로 막 인간을 우주로 보낸 직후, 1961년 5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사람을 달에 보내겠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NASA는 아폴로 계획을 수립했다.
아폴로 계획을 성공하려면, 우주선의 사령선과 달 착륙선이 여러차례 도킹과 분리를 반복해야 했다. 정확히 얘기하면 달에 착륙하는 미션 한번 당, 지구 궤도에서의 도킹 1번, 달 궤도에서의 도킹 1번, 그리고 달 궤도에서의 해제 2번이 필요했다. 그런데 1960년대 초의 미국 우주 기술로는 과연 우주에서 우주선이 어떻게 움직여야 서로 근접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판국이었다. 소련은 이미 보스토크 계획에서 두 우주선의 근접까지는 성공한 상황이었다.
사실 인간을 달로 보내고 귀환시키기 위한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그중에 세간에서 진지하게 고려되던 방안은 인간을 식량과 함께 먼저 달에 보낸 후 몇 년 후에 귀환 기술이 개발되면 그때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제미니 계획이 시작되던 60년대 중반에 언론에서 가장 진지하게 얘기되고 있던 방안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기술로도 인간을 달에 보내는 것까지는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NASA는 인간을 귀환시킬 수 있는 방법이 확실하게 개발될 때까지는 인간을 달로 보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인간을 달로 보내고 귀환시키기 위한 아폴로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해결되어야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크게 두 가지 범주였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3인승에다가 달착륙선까지 포함된 엄청난 무게를 지구 궤도로 올릴 수 있는 막강한 추진력을 가진 로켓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두번째로는 우주 공간에서 랑데뷰, 도킹, 분리 등의 갖가지 비행 기술을 실행, 발전시킬 필요도 있었다. 이 두 가지를 순차적으로 진행하기에는 존 F. 케네디가 제시한 60년대 안이라는 기간은 너무나 촉박했다. 이에 NASA는 투 트랙 전략을 병행하기로 하였다. 아폴로 계획 실현을 위한 새턴 V 로켓 개발을 진행함과 동시에 선결조건인 우주에서의 도킹과 분리를 실제로 실행해 볼 프로그램을 병행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머큐리 계획을 변경해서 활용할 생각도 해보았으나 애초에 1인승으로 지구 궤도를 돌기 위해 설계된 머큐리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이에 NASA는 두 명의 조종사가 탑승하며 우주상에서 정교한 조작이 가능한 새로운 우주선을 설계하여 새로운 프로젝트를 실시하기로 했고 그렇게 1961년 12월 NASA는 제미니 계획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3. 우주선 및 발사체
3.1. 우주선 (사령선)
제미니 우주선은 2인승으로 제작되었다. 명칭인 제미니(쌍둥이자리)도 2인승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머큐리와 외견상 비슷해 보이고 머큐리의 기술을 바탕으로한 후계기이지만, 기술적으로 머큐리보다 훨씬 복잡했고, 훨씬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목적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머큐리는 유인 인공위성이 목적이었다면 제미니는 아폴로 계획에 필요한 우주 비행기술을 습득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무게도 2배나 차이가 났고 실제 크기도 머큐리보다 훨씬 컸다. 구조상으로는 2인승이며 선외 활동을 위해 해치가 조종사 별로 각각 개방된다.이전의 머큐리 계획 및 이후의 아폴로 계획에서는 로켓이 발사대에서 폭발할 경우 사령선 위에 달린 탈출로켓이 점화되어 사령선을 폭발 반경에서 멀찍이 떼어놓는 구조였으나, 제미니 우주선은 탈출로켓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전투기용 사출좌석을 설치하여 로켓 폭발시 우주비행사가 사출좌석으로 탈출하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이 사출 시스템도 실제 쓸 일이 다행히 없었기에 망정이지 문제가 좀 많은게 아니었다. 탈출을 결정하면 우주선의 해치가 열리고 승무원이 튕겨나가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 같다면 그것은 오산이었다. 두 승무원이 동시에 탈출해야 하는 순간에 한 명이라도 어정쩡하게 된다면 그 남은 사람은 바베큐가 되고,[3] 만약 사출은 제대로 되는데 그 순간 해치가 안 열리면(...)
제미니 우주선은 기계선, 역추진선, 재진입 모둘 3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기계선에는 산소, 수소, 연료전지, 라디에이터, 추진기, 연료가 실려 있었고 역추진선에는 궤도를 낮추기 위한 4기의 고체 역추진 로켓이 있었다. 재진입 모듈은 승무원이 탑승하는 부분으로써 배터리, 컴퓨터, 유도장치, 환경 조절 장치가 있었다. 재진입 모듈의 꼭대기에는 재진입용 자세제어 로켓과 연료, 낙하산, 랑데뷰 레이더 및 도킹 장치가 있었다.
제미니에는 OBC(On-Board Computer)라고 불리는 IBM에서 제작한 컴퓨터가 탑재되어 있었는데, 7.143KHz의 클럭으로 작동하였으며 테이프 저장장치를 이용하여 프로그램을 저장하였다.[4] 컴퓨터는 오른쪽 계기판에 있는 키보드로 조작하며 기계식 7자리의 디스플레이가 회전하며 데이터를 표시하는 방식이다.
제미니는 1대의 관성 측정장치와 수평선 스캐너가 장착되어 있어 선체의 자세와 가속도를 측정하여 컴퓨터에 제공하였다. 제미니 우주선에 장착된 관성 측정장치는 4축 짐벌로 구성되어 있어 아폴로와 다르게 짐벌락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다. 또한 제미니 우주선은 처음으로 동체가 재진입 중 양력을 발생시키도록 설계된 우주선으로써,[5] 재진입 시 12G씩이나 걸리던 머큐리와 달리 4G 내외로 재진입 G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착수 지점 또한 조절할 수 있었다. 이 기술을 이용하여 추후에 아폴로 우주선이 달 궤도에서 안전하게 재진입 할 수 있었다.
3.2. 발사체 - 타이탄 로켓
제미니는 앞선 머큐리와 달리 2인승이었는데다가 여러 추가적인 여러 장비를 탑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훨씬 큰 중량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NASA는 발사체 개발역량을 모조리 3인승 아폴로 계획을 위한 새턴 로켓 개발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제미니를 위한 별도의 발사체를 개발하는 대신 미 공군의 ICBM인 타이탄 로켓을 이용하여 발사하기로 했다. 그러나 비록 타이탄이 미국의 ICBM 중 가장 큰 로켓이었지만[6] 2인승 우주선을 발사시키기엔 다소 부족한 출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미니 우주선은 불필요한 중량을 최대한 줄이는 방식로 제작되었다. 탈출용 로켓이 부착되지 못한 것도 비용 절감 때문이 아니라 발사 중량 문제 때문이었다.
4. 머큐리 계획 종료 후 소강기
1961년 4월 유리 가가린이 최초로 지구 궤도로 선회하는데 성공하여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미 정부와 NASA는 아폴로 계획에 모든 역량을 투입하기로 하고, 가가린에게 최초를 빼앗기면서 그 의미가 크게 퇴색된 머큐리 계획을 축소, 조기 종료하기로 하였다.이에 1961년 제미니 계획과 아폴로 계획이 시작되었고, 머큐리 계획은 1963년 5월 조기 종료되었다. 그러나 제미니 계획이 시작된 후 실제 우주선, 발사체를 설계, 제작하고 미션 계획을 정교화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으며, 또 병행 추진되는 아폴로 계획과 보조를 맞추어야 했다. 그래서 최초로 제미니가 발사된 1965년 3월까지 2년간 미국은 아무런 우주선도 발사하지 않았다. 그렇게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 기간 중에 소련은 보스토크, 보스호드 계획을 연이어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소련은 최초로 여자를 우주로 보냈고, 3인승 우주선의 발사를 성공시켰고, 우주유영( EVA)에 성공하는 등 미국과의 격차를 크게 벌려나가고 있었다.
소련이 눈에 보이는 여러 업적 등을 달성하며 앞서나가는 동안, 미국도 착실히 다음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언론에서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폰 브라운과 NASA는 여론과 언론의 이러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60년대 안에 달에 갔다온다는 목표에 집중하면서 이러한 여론에 흔들리지 않았고,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제미니 계획이 시작되고 나서도 대중들의 흥미를 끌만한 미션 구성을 배격하고 오로지 달 착륙을 위한 선결 기술 습득이라는 목표에 따라 미션을 구성하고 준비가 완료되자 그야말로 숨쉴 틈도 없이 제미니 계획 미션들을 연이어 추진했다.
5. 미션
제미니 계획으로 발사 된 12호기까지의 로켓들
머큐리 계획 종료 이후 2년간의 공백 끝에 1965년 제미니 계획이 일단 시작되자 숨돌릴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미션들이 진행되었다.
승무원들의 배정을 보면 대체로 이후의 아폴로 미션들과 싱크로가 맞는 편인데, 이는 디크 슬레이튼이 제시한 3+3교대 로테이션에 의한 것이다. 때문에 제미니에서 함께 활동한 우주비행사들은 아폴로에서도 같이 활동하거나 비록 다른 미션이라도 정규팀/백업으로 한 훈련을 거치며 호흡을 맞추게 된다.
5.1. 제미니 1호
우주선 시험을 위해 무인으로 발사되었으며, 1964년 4월 8일 발사되어 4일간 궤도를 돈 후 대기권에 재진입 시 열차폐 시스템 고장으로 파괴되었다.
5.2. 제미니 2호
제미니 1호의 실패를 반영하여 열차폐 시스템을 개량하여 시험용으로 1965년 1월 19일 무인 발사되어 탄도비행 후 재진입에 성공하였다.5.3. 제미니 3호
제미니 3호는 인간이 처음으로 탑승한 유인 제미니 계획으로, 앞서 두번의 무인 비행은 시험적인 성격이었고, 3호부터 제미니 계획의 본격적인 시작에 해당한다. NASA는 1965년 3월 23일 이후에 유인 제미니 우주선(제미니 3호)이 발사될 것이라 미리 예고했는데, 역시 우려대로 소련은 제미니 3호 발사 일주일 전에 보스호드 2호를 발사시켰다. 이 비행에서 소련의 우주비행사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우주개발사에 길이 남은 최초의 우주유영( EVA)을 성공시켜 전세계에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다. 당시 레오노프의 우주유영 모습은 TV로 전세계로 중계되며 세계인을 열광시켰다. 보스호드 2호의 우주유영 성공으로 제미니 계획은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우스운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제미니 3호에는 머큐리 계획에서 리버티벨 7호의 조종사였던 거스 그리섬과, 신입 우주비행사 존 영이 탑승했다. 제미니 3호는 1965년 3월 23일 발사되어 지구를 3바퀴 돌면서 각종 기능 테스트 후 당일 귀환하였다. 비행 자체는 나무랄 데 없었다. 다만 존 영이 우주복에 몰래 숨겨간 샌드위치를 궤도 위에서 처묵처묵하다가 NASA에 들켰고, 귀환 이후에 사정없이 털렸던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에는 나름 심각하게 받아들여진 문제로서, 미 의회까지 진상규명에 나섰을 정도였다. 샌드위치 사건의 전말은 존 영 문서에 있다.
거스 그리섬은 후일 아폴로 1호의 사령관이 되나 화재사고로 순직하였다. 존 영은 후일 아폴로 16호 사령관으로 달 착륙에 성공하였고, 우주왕복선의 시대를 여는 STS-1의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제미니 시절의 멤버들 중 가장 오랫동안 NASA에서 근무하며 통산 우주비행 6회라는 대위업을 달성했다. 예정대로라면 앨런 셰퍼드와 토머스 스태퍼드가 올라가야 했지만, 셰퍼드의 귓병크리가 뜨며 셰퍼드는 물론 스태퍼드도 함께 잘렸다. 지못미. 그래도 스태퍼드는 팀을 바꿔서나마 계속 참여할 수 있었지만 셰퍼드는 그 후로 오랫동안 행정직을 전전하며 마음고생을 하다 시험적인 수술을 받은 것이 성공하여 아폴로 14호의 사령관으로 달에 가게 된다.
5.4. 제미니 4호
1965년 6월 3일 발사되어 6월 7일 귀환했다. 탑승자는 제임스 맥디비트, 에드워드 화이트
이 비행 도중 에드워드 화이트는 미국 최초의 우주유영( EVA)을 22분간 시행했다. 인류 전체로도 소련의 알렉세이 레오노프에 이어서 2번째 우주유영(EVA)이었다. 사실 미국의 우주비행사들도 레오노프의 EVA가 성공하기 전부터 우주유영(EVA)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NASA는 1966년경 실제로 우주유영을 실시할 계획이었는데, 소련이 이에 먼저 성공한 후 제미니 4호의 승무원들이 자신들도 우주유영을 시도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결국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어 계획에 포함되게 되었다.
제미니 4호의 우주유영(EVA)은 이동 보조 기구인 ' 우주 총'을 사용하여 레오노프보다 더 원활한 EVA이 가능했다...만 화이트가 얼쑤 좋다면서 일찍 다 써버렸다(...) 그리고 레오노프의 기록을 넘어섰으니 그만 들어오라고 휴스턴에서 잔소리를 하자 두 사람 모두 수신이 안되는 척하면서 우주유영(EVA)을 즐겼다. 다시 통신을 재개하고 나서도 이런저런 핑계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으려다가 결국 들어왔는데, 그때 화이트가 남긴 말이 "평생 제일 슬픈 순간이구만..." 이 말은 정지위성의 생중계를 타고 전세계로 생중계되었다. 이 EVA의 성공으로 제미니 4호는 제미니 계획 중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미션이 되었다.
제미니 4호의 또다른 중요한 임무는 랑데부였다. EVA가 큰 주목을 받긴 했지만 그것은 곁다리 계획이었고 랑데부가 제미니 4호의 본 목적이었다. 랑데부는 도킹을 위해 해결되어야 할 선결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제미니 4호는 발사되어 타이탄 로켓에서 분리된 직후 자신을 궤도에 올려놓은 타이탄의 2단계 로켓과 랑데부를 실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미니 4호의 랑데부는 성공하지 못했다. 조종사 맥디비트는 타이탄 2단계 로켓과 접근을 시도했지만 약100미터 거리까지 접근한 후 어찌된 영문인지 더이상의 접근은 커녕 오히려 멀어져만 갔다. 비록 제미니 4호는 랑데부에 실패했지만 이어진 인상적인 우주유영(EVA) 미션에 성공하면서 그 실패는 쉽게 잊혀지게 되었다.
제미니 4호의 랑데부 실패에 대해 언론은 제미니에 더 강력한 추진로켓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NASA의 한 공학자가 궤도역학에서 실패의 원인을 밝혀내었다. 즉 궤도상에서 앞선 물체를 따라 잡기 위해 속도를 높이면 궤도가 높아지게 되고 그 결과 비행거리가 저궤도 표적보다 상대적으로 길어지며, 결과적으로 고궤도 우주선이 저궤도의 표적보다 더 느려지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 발견은 향후 NASA의 우주궤도 비행에 큰 교훈을 주었다.[7]
제미니 4호 발사 전인 4월에 세계최초의 상업 정지위성인 인텔셋 1호(Intelsat I, 별칭은 얼리버드(Early Bird))가 소어-델타 로켓으로 발사되었다. 이로써 영국의 SF 작가 아서 C. 클라크가 상상했던 구상이 현실화되었다. 인텔셋 1호 덕분에 제미니 4호의 발사 및 우주유영은 전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제임스 맥디비트는 후일 아폴로 9호 사령관이 되어 달착륙선을 테스트했다. 후일 에드워드 화이트는 아폴로 1호 승무원으로 선발되었다가, 거스 그리섬과 함께 화재사고로 순직하였다.
5.5. 제미니 5호
1965년 8월 21일 발사, 8월 27일 귀환했다. 탑승자는 고든 쿠퍼, 피트 콘래드
함께 발사된 표적 위성과의 랑데부를 시도했으나 기기 고장으로 잘 이뤄지지는 않았다.
고든 쿠퍼는 머큐리 계획의 'Faith 7' 조종사였던 고참으로, 이 비행이 마지막 비행이었다. 원래 아폴로 13호( 짐 러블의 14호 팀과 교체되는 앨런 셰퍼드의 팀)의 사령관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훈련 불성실을 이유로 잘렸다(...) 피트 콘래드는 제미니 11호, 아폴로 12호, 스카이랩 2호 등 이후 3회에 걸쳐 성공적인 미션을 수행하였다.
5.6. 제미니 6A호
1965년 12월 15일 발사, 12월 16일 귀환했다. 월리 시라, 토머스 스태퍼드 탑승.
아제나 위성
제미니 6호 미션의 목표는 표적 위성인 ATV(동음이의어)(아제나, Agena Target Vehicle) 위성과 랑데부를 하는 것이었다. 1965년 10월 26일 발사 예정이었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아제나가 먼저 발사되어 궤도에 진입한 직후 제미니 6호가 발사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먼저 발사된 아제나는 발사 도중 폭발해 버렸고, 이미 발사 준비에 들어갔던 제미니 6호는 긴급히 카운트 다운을 중단하였고 발사는 잠정 연기되었다.
아제나 위성은 이미 여러 차례 발사되어 안정성이 검증된 위성이었지만 제미니 계획을 위해 추가적인 개조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그것이 폭발의 원인이 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결국 NASA의 거듭된 회의 끝에 아제나를 또 발사시켜 랑데부하는 대신 아예 다음에 발사될 제미니 7호와 함께 랑데부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이에 따라 제미니 6호의 미션 명칭도 제미니 6A로 변경되었다. 우주에서 장기 체류를 테스트하는 미션을 수행하기로 되어있는 제미니 7호가 먼저 발사되고 나서 며칠 후에 제미니 6A호가 뒤이어 발사되어 두 우주선간에 랑데부를 시행하기로 했다.
제미니 7호가 1965년 12월 4일 먼저 발사되었고, 제미니 6A호는 12일에 발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발사 당일 카운트 다운 10초에서 제로까지 쫙 세고도 엔진이 발사 직전
제미니 7호는 우주에서 14일간이나 지나야했기 때문에 연료를 아껴야 해서 궤도를 도는 표적 역할을 했고 실질적인 랑데부 임무는 제미니 6A가 수행했다. 제미니 6A호의 조종사들은 제미니 7호 주위에서 선체를 이리저리 조종해가면서 랑데부 임무를 수행했고, 최대 30cm 거리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제미니 6A호는 제미니 7호와의 랑데부 미션을 성공 후 바로 지구로 귀환하였다. 아제나가 없으니 딱히 더 할 일도 없었으니... 대신 이 미션에서 월리 시라는 뭐라도 해보려는 생각이었는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다고 하모니카를 들고가서 캐럴을 연주했다.
이 때의 하모니카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에서 연주된 악기가 되었다. 현재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미니 6A호의 성공적인 랑데부 임무 수행으로, NASA는 우주에서 도킹이 가능한 수준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제미니 8호에서 도킹 미션을 테스트하게 된다.
월리 시라는 아폴로 계획의 첫 유인비행인 아폴로 7호 사령관으로 비행하고 은퇴했다. 다만 마지막 미션에서 우주에서 감기에 걸리는 충공깽한 쫑파티를 치렀고, 그것이 동료 돈 아이즐리와 월터 커닝햄에게 옮아서 셋 다 콜록콜록. 그러다 스트레스가 심해져 관제팀과 고성이 오가는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지구로 귀환한 뒤 은퇴하는 시라는 물론 나머지 둘까지 비행자격이 박탈당했다(...) 토머스 스태퍼드는 이후 아폴로 10호 사령관,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의 아폴로 측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5.7. 제미니 7호
1965년 12월 4일 발사, 12월 18일 귀환했다. 탑승자는 프랭크 보먼, 짐 러블
제미니 7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폴로 계획에서 요구되는 1주일 이상의 우주 체류가 가능한지 실험하는 것이었다. 제미니 7호는 총 14일간 우주에 체류하였다. 중간에 제미니 6A호와의 랑데부 임무도 추가되었다. 또한 경량형 신형 우주복의 시험 임무도 있었으나 이 미션에서 사용한 결과가 기대에 못미쳐 신형 우주복 계획은 폐기되었다.
제미니 6A호에서 바라본 제미니 7호
2주간 우주에서 버티는 미션은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하고 중요한 미션이었다. 당시 의료계와 생리학계에서는 4일 이상의 장기 우주 체류는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주일의 우주 체류도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사흘로 줄여야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판에 제미니 7호가 실시한 2주간의 우주 체류는 큰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제미니 7호가 세운 2주간의 우주 비행 기록은 1970년 러시아의 소유즈 9호가 18일 동안 비행을 하고 나서야 깨졌다.
12월 15일 제미니 6A호와 랑데부를 시도하여 최근접거리 30cm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하였다. 랑데부 임무에서 제미니 7호는 14일간의 우주 체류를 위해 연료를 아껴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동적인 표적 임무를 맡았고, 제미니 6A호가 7호 주변에서 선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랑데부 임무를 수행했다. 임무 도중 제미니 6A는 최대 0.3미터의 가까운 거리까지 제미니 7호에 접근하기도 했고, 제미니 7호와 기수를 마주하도록 하며 두 우주선의 조종사들이 서로 육안으로 얼굴을 마주하기도 했다. 랑데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제미니 6A호는 제미니 7호를 뒤로 남겨둔 채 곧바로 지구로 귀환했고, 제미니 7호는 이후로도 사흘을 우주에서 더 머물다가 귀환해야 했다. 먼저 우주에 갔던 조종사들이 긴 시간을 버티기 위해 책을 가져갈 것을 권유했지만 표지만 슬적 보는 정도에 그쳤다고.
귀환시 제미니 7호 비행사들은 2주 동안 씼지도 못하여 수염이 덥수룩하고 꾀죄죄하고 쩔어있는 모습으로 지구로 귀환했다. 참고로 미디어를 통한 방송에 상당히 집착했던 NASA는 아폴로 계획 때 우주비행사가 방송에 깔끔한 모습으로 등장하기 위해 전기면도기를 사용하는 것을 계획했지만 무중력 상태에서 수염 잔여물이 선체에 떠다니다가 민감한 장비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1965년초 우주비행사의 전기면도기 사용 계획을 전면 폐기했었다. NASA는 장기 비행시 수염이 자라면서 우주복 착용시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아예 1주일간 수염을 기른 상태에서 우주선을 타도록 했고, 제미니 7호 비행사들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하지만 이후 우주비행사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면도를 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제미니 7호를 제외하면 수염이 자란 모습으로 귀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제미니 7호 미션의 성공으로 아폴로 계획에 필요한 일주일 이상의 장기 우주체류에 대한 우려는 불식되었다. 프랭크 보먼과 짐 러블은 이후 처음으로 달을 돌고 온 아폴로 8호에서 함께 했으며, 짐 러블은 이후 아폴로 13호의 사령관으로 다시 달로 향한다.
5.8. 제미니 8호
1966년 3월 16일 발사, 3월 17일 귀환했다. 닐 암스트롱, 데이비드 스콧 탑승.
닐 암스트롱은 우주에 간 미국인 중 두번째의 민간인 우주비행사이다. 단순 기록상으로는 조셉 워커가 첫번째이나, 궤도비행 여부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닐 암스트롱이 첫번째 민간인 우주비행사로 받아들여진다.[9] 암스트롱은 머큐리 계획 이전부터 MISS 등 여러 실험기 테스트 비행과 우주 프로그램에서 활동하여 이미 업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제미니 8호 미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세계 최초로 지구 궤도상에서 우주선끼리 도킹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는 제미니 계획 자체의 목적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미션이었다. 당시 확정된 아폴로 계획의 프로파일에 따르면, 사령선과 기계선(CSM)은 지구 궤도에서 달착륙선(LM)과 도킹하여야 하고, 그 상태로 달까지 간 다음에 달 궤도에서 달착륙선을 분리하여 달 표면 착륙, 그리고 달 표면 임무를 마치고 다시 달 궤도로 올라온 달착륙선과 도킹하여 지구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즉 달까지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총 2번의 궤도상 도킹(지구궤도 도킹 1번, 달 궤도 도킹 1번)을 성공시켜야 했다. 따라서 궤도상에서 도킹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아폴로 계획이고 뭐고 말짱 꽝이 되는 것이었다. 궤도상에서의 도킹은 스페이스 레이스에서 미국을 한참 앞서가고 있던 소련조차도 당시까지 성공시키지 못한 기술이었다.
제미니 8호는 아제나 표적 위성과의 도킹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그 밖에도 부조종사인 스콧이 우주 유영을 실시하면서 선체의 표면에 붙어 후미까지 이동하고 우주상에서 직접 선체를 가상 수리하는 미션이 실행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스콧은 우주에서 스핀에 빠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면서 나사를 돌리기 위한 훈련을 지상에서 수개월 동안 반복해서 수행했다.[10] 또 새로 개발된 우주 총이 스콧의 우주 유영에 사용될 계획이었다. 우주 총이란 간단한 형태의 추진 기관으로, 총의 반동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원리이다.
1966년 3월 16일 아제나 위성이 먼저 발사되었고, 41분 후 제미니 8호가 뒤이어 발사되었다. 약 5시간 43분간의 조종 끝에 발사 6시간 33분 후 제미니 8호는 아제나 표적 위성에 도달하였다. 36분 후 지상 관제센터로 부터 도킹 명령이 떨어졌고, 암스트롱은 아제나와 도킹을 수행했다. 암스트롱이 미동도 느끼기 힘들었다고 보고할 정도로 성공적인 도킹이었다. 문 레이스 역사상 손꼽힐 만한 역사적인 순간 중 하나였으며 통제센터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로서 미국은 문 레이스에서 소련을 본격적으로 앞서가기 시작하였다.[11]
실제 제미니 8호와 아제나 표적위성의 도킹 직전 장면. 제미니 8호에서 촬영 |
추진기 이상으로 회전하는 제미니 8호. |
해상에 착수한 제미니 8호, 우측이 암스트롱, 좌측이 스콧 |
아무튼 엘리엇 시, 찰스 바셋의 사망 외에는 거침없이 순항하던 미국의 우주 계획은 이 제미니 8호에서 처음으로 우주에서 중대한 사고를 겪었고, 제미니 8호는 우주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고들을 해결하는 노하우의 밑바탕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미션이 인명사고로 이어졌더라면 발사 몇주 전 발생한 9호 팀의 사망사고까지 겹치며 미국의 문 레이스는 끝장날 수 있었는데, 이런 사고가 터졌음에도 기민한 대처로 미션을 적절히 마무리한 것이었다.
이때의 위기대처 능력을 인정받아 닐 암스트롱은 아폴로 11호의 사령관이 되어 달에 맨 처음 내린 사람이 된다.
데이비드 스콧은 아폴로 9호의 사령선 조종사로 활동하고 아폴로 15호 사령관이 되어 역시 달에 가게 된다.
5.9. 제미니 9A호
1966년 6월 3일 발사, 6월 6일 귀환했다. 토머스 스태퍼드, 유진 서넌 탑승.
원래 엘리엇 시, 찰스 바셋이 탑승할 승무원이었고, 스태퍼드와 서넌은 백업 승무원이었으나, 발사를 앞둔 1966년 2월 28일에 비행 훈련 중이던 시와 바셋이 T-38 훈련기 추락사고[16]로 모두 사망하는 바람에 백업팀이 탑승하게 되었고 미션 번호도 9호에서 9A호로 변경되었다. 원래 임무는 제미니 8호에서 고장으로 인해 제대로 테스트되지 않은 아제나 표적 로켓과의 도킹-분리-재도킹 시험이었으나...
아제나 표적의 페어링이 분리되지 않아
우주비행사들은 제미니의 앞부분으로 약간 밀어서 덮개를 제거해보겠다고 했으나 지상통제센터는 그랬다가 선체에 금이라도 가서 사고나면 어쩌려고 라고 하며 불허했다. 그러자 유진 서넌은 우주유영을 하여 철사줄을 잘라보겠다고 했으나 역시 지상통제센터는 그러다가 우주복에 구멍이라도 나서 죽으면 어쩔려고 라고 하며 역시 불허했다.
대신 유진 서넌이 2시간 동안의 EVA를 실시하는 등 다른 테스트 후 귀환했다. 그런데 유주유영 도중 헬멧에 김이 서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 상태에서 우주선 외부에서 움직이다가 제미니의 안테나를 부러뜨려 날려먹기도 했다.... 다행히 메인 통신 안테나는 아니고 테스트용 안테나라서 통신이 두절되지는 않았다.
또 이 당시 서넌은 (하술할) 공군의 유인 우주 프로그램 MOL에서 써먹을 무선 EVA 장치(Astronaut Maneuvering Unit, AMU)를 테스트할 예정이었지만 피곤에 쩔어있었고 고열 증세도 보였던지라 테스트가 미뤄졌는데, AMU는 제미니 12호에도 탑승하지 못한 뒤 MOL이 끝내 취소되며 우주에서 써먹지 못했다.[17][18]
유진 서넌은 이후 아폴로 10호의 달 착륙선 조종사로 배정되어 스태퍼드와 함께 달 궤도에서의 달 착륙선 비행을 테스트했다. 후일 마지막 달 착륙 미션인 아폴로 17호의 사령관이 되어 마지막으로 달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으로 기록된다.
5.10. 제미니 10호
1966년 6월 18일 발사, 6월 21일 귀환했다. 존 영, 마이클 콜린스 탑승.
함께 발사된 아제나 표적과 랑데부 후 도킹에 성공했으며, 도킹에서 분리한 후 궤도를 상승하여, 지난번에 제미니 8호가 도킹했었던 아제나 8호 위성(제미니 8호와의 도킹 후 여전히 지구 궤도를 돌고 있었다.)에 접근하여 랑데부 후 도킹 시도를 했으나 도킹에는 실패하였다.
콜린스는 비행 중 2회의 EVA를 수행했다. 콜린스는 이 우주유영 중 생명유지 호스가 엉켰으나 존 영의 도움으로 돌아왔고, 카메라를 분실했다.
마이클 콜린스는 아폴로 11호의 사령선 조종사가 된다.
존 영은 후에 아폴로 16호와 컬럼비아 우주왕복선에 탑승하게 된다.
5.11. 제미니 11호
1966년 9월 12일 발사, 9월 15일 귀환했다. 피트 콘래드, 리처드 고든 탑승.
아제나 표적 로켓과 랑데부 및 도킹에 성공하였으며, 제미니와 아제나를 로프로 연결한 후 회전시켜 인공중력을 만드는 실험에도 성공했다.
콘래드와 고든은 아폴로 12호에서도 다시 한 팀이 된다.(콘래드-사령관, 고든-사령선 조종사)
5.12. 제미니 12호
1966년 11월 11일 발사, 11월 15일 귀환했다. 짐 러블, 버즈 올드린 탑승.
아제나 표적과 도킹한 후 궤도를 740 km 까지 올린 다음, 다시 300 km로 회복시켜 아폴로 계획에서 요구되는 궤도의 자유로운 변경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MIT에서 EVA 관련 논문으로 학위를 땄던 올드린은 자신의 첫 미션에서 3회에 걸쳐 EVA를 수행한 뒤 누적 최장시간 EVA 기록을 찍었으며, 러블은 최장시간 우주비행 기록을 썼다.
버즈 올드린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선 조종사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사진 중 하나를 남겼다.
6. 취소된 추가 계획
6.1. 공군 블루 제미니
MOL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일본의 해운업체 상선미쓰이의 합병 후 기업에 대한 내용은
ONE 문서, 덴마크 밴드에 대한 내용은
MØL
문서
참고하십시오.공군의 제미니 프로젝트를 '블루 제미니' 혹은 '제미니B'라 부른다. 블루 제미니라는 별명은 실제로 우주선이 청색이어서가 아니라 미 공군의 상징색인 청색을 일컫는 것이다.
NASA가 제미니 계획을 종료하고 아폴로 계획으로 넘어갈 무렵, 미 국방부( 펜타곤)은 소련이 살류트 우주 정거장을 계획 중이며 이는 군사적 목적(알마즈 프로그램)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었다. 펜타곤이 내린 결론은 미국이 먼저 군사용 우주 정거장을 발사하자는 것이었고, 여기에 NASA에서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제미니 우주선을 사용하자는 결론이 났다. 제미니의 발사체가 공군의 ICBM인 타이탄 로켓이었기에 공군 입장에서 제미니는 이용하기에 딱이었다.
펜타곤과 미 공군은 최종적으로 ' 키홀-10'이라고 명명한 '유인 궤도 실험실(Manned Orbiting Laboratory, MOL)'이라는 군사용 우주 정거장을 계획했고, 제미니 우주선은 이 정거장까지의 왕복 수단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이를 약칭 USAF MOL(미공군 유인 궤도 실험실) 프로젝트라 한다.
키홀-10, 미공군 유인 궤도 실험실 (USAF MOL)
한편 NASA의 제미니 계획의 최종 목표는 도킹 기술의 성공이었고, 애초에 NASA가 제미니 계획을 수립할 때는 중간에 몇 차례 실패할 경우를 상정하고 12호까지 계획을 세워두었지만, 막상 제미니를 실제 발사하기 시작되자 프로젝트는 예상보다 성공적으로 흘러가 제미니 8호에서 이미 도킹에 성공해 버렸다. 이후 굳이 12호까지 다 날릴 필요가 있나, 11호, 12호는 취소하는게 어떠냐는 의견이 떠오르고 있었다. 실제로 NASA 수뇌부는 제미니 11호, 12호를 취소하려고 했다.
이렇게 NASA와 공군의 이해 관계가 맞으면서 만약 NASA가 제미니 11호, 12호 계획을 취소한다면 공군이 이를 넘겨받겠다는 비밀계획이 수립되었다. 펜타곤과 공군은 자기들이 스스로 돈을 들여 제미니 12호에 수동 조종장치를 만들어 탑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NASA는 제미니 계획을 중도 종료하지 않고 예정된 12호까지 다 쏘아 올렸고, 공군이 제미니 11, 12호를 넘겨받는다는 비밀계획은 이행되지 못했다. NASA 수뇌부는 제미니를 10호에서 종료하려 했지만 비행사들과 휴스턴에서 반대했고 결국 12호까지 다 날리게 되었다. 공군이 테스트라도 해주길 바랬던 제미니 12호의 수동 조종장치 역시 NASA가 조종사 올드린에게 건들지 말라고 지시하여 테스트가 불발되었다. 위에도 나오지만 NASA는 매사에 혹시 사고라도 날까봐 모든 일에 노심초사하고 있었기에 결국 공군이 애써서 만들어준 수동 조종장치 테스트를 불허했다.
1966년 11월 3일 발사 테스트
NASA로부터 제미니 11호, 12호를 인수받으려는 계획은 불발되었지만 어쨌거나 미 공군은 '블루 제미니'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하여 1966년 11월 3일 제미니 목업을 타이탄-3C 로켓에 실어 실제로 발사했다. 여기에 실린 무인 제미니 우주선은 제미니 2호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모델이었다. 또 공군은 블루 제미니에 탑승할 공군 자체의 우주비행사까지 선발[19]하고 전용 우주복[20]까지 개발했을 정도로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결국 제미니를 날려 우주 정거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예산이 문제였다. 결국 공군의 제미니 계획은 백지화되었고, 공군이 선발했던 우주비행사 일부는 NASA로 파견되어 NASA 우주인단에 합류, 나머지는 원대 복귀 되었다.[21]
6.2. 빅 제미니
1969년, 제미니 제작사인 맥도넬-더글러스는 12인승 '빅 제미니'라는 것을 제안했다. 우주 정거장까지 왕복을 위한 용도였다. 70년대초 나사 예산이 삭감되고 스페이스 셔틀 개발까지 취소될 위기에 처하자 빅 제미니가 대안으로 고려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빅 제미니를 만드느니 재사용 가능한 스페이스 셔틀을 만드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이르러 빅 제미니는 폐기되고 스페이스 셔틀 개발이 진행되었다.
7. 매체에서 등장
7.1. 제미니 8호
7.1.1. 인터스텔라
이 사건은 영화 인터스텔라 중 인듀어런스 도킹 장면의 모티브가 되었다.7.1.2. 퍼스트맨
영화 퍼스트맨에서 제미니 8호의 스핀 사건을 실감나게 묘사한다.[22]7.1.3. 도미네이션즈
장갑과 헬멧이 전설 유물로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전설 유물/제미니 8호 장갑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전설 유물/제미니 8호 헬멧 문서 참고하십시오.
7.2. 제미니 12호
7.2.1. 지구에서 달까지
아폴로 계획을 다룬 드라마 지구에서 달까지에서의 연출이 좀 약을 빨았는데, 버즈 올드린이 EVA를 하다가 우주선에 올라타(?)서 달을 바라보고 우주선의 비행 방향은 달이 보이는 쪽의 구도다.8. 관련 문서
[1]
ICBM 발사체인 타이탄을 활용한 로켓이다.
[2]
현대 영어에서 'Gemini'의 발음은 /ˈdʒem.ɪ.naɪ/이나, 당시 NASA에선 /ˈdʒem.ɪ.niː/로 발음했다.
#
[3]
이러한 문제 때문에, 보통 좌석이 앞뒤로 배치되는 2인승 전투기의 경우에는 뒷좌석이 먼저 사출되고, 그 뒤에 앞좌석이 사출되도록 한다. 만약 앞좌석이 먼저 사출되면 뒷좌석 승무원이 노릇노릇 바베큐가 되기 때문(...)
[4]
덕분에 프로그램을 로딩하려면 약 10분의 시간이 걸렸다.
[5]
동체의 질량 중심이 하단으로 치우쳐 있어 재진입 시 동체가 기울어지게 되는데, 이로 인해 받음각이 생기게 되어 양력이 발생하는 원리이다. 동체의 롤을 제어하므로써 양력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6]
ICBM 기준 전장 31.4m 지름 3.05m, 무게 154t. 머큐리 계획에 사용된 아틀라스랑 비교해봐도 거의 1.5배의 중량을 가진 로켓이다. 출력 차이는 그보다 좀 적어서 아틀라스는 부스터단계에서 1600kN, 타이탄 II는 1단에서 1900kN.
[7]
닐 암스트롱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퍼스트맨에서, NASA에서 궤도역학 수업을 듣고 온 암스트롱이 부인에게 이 이론을 즐겁게(...) 설명해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걸 또 기꺼이 들어주는 암스트롱 부인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장면. 이러니 이혼했지
[8]
3일을 더 미룬 것은 안자랑. 그래도 불붙고 땅에서 뜨기 전에 일찍 꺼져서 가만히 있었던 터라 사출좌석 억지로 쓸 일도 없었다는게 자랑. 만약
떠오르다가 갑자기 꺼졌다면 더 큰일날 뻔했다.
[9]
조셉 워커(일명 조 워커)는 실험기 X-15를 타고 1963년 7월 19일 flight 90 미션, 1963년 8월 22일 flight 91 미션으로 두차례 고도 100km를 돌파하여 우주비행을 한 것으로 인정된다. 일반적으로 지구와 우주의 경계는 고도 100km의 카르만 라인이지만, 미 공군 등은 고도 80km 이상을 통과했을 경우 우주비행으로 보고 있다. 다만 조셉 워커는 X-15를 타고 잠깐 고도를 통과한 것에 불과하고 궤도비행을 한 것은 아니며, NASA의 우주계획에 따라 선발된 공식 우주비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의 인지도는 많이 떨어진다. 조셉 워커는 X-15 프로그램에서 닐 암스트롱과 함께 했으며, 상사이자 친구로서 아주 친한 관계였다. 영화
퍼스트맨에서 실험기 사고로 임시 비행금지 조치(그라운딩)를 당한 암스트롱이 '저 그라운딩 당한건가요?'라고 따지자 '보고서 잘 써서 내'라며 달래는 인물이 바로 조셉 워커이다. 여담으로 저 유명한
XB-70 추락 사고에서
F-104에 타고 있다가 기체 충돌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조셉 워커이며, 그는 이 사고로 사망했다. 하여간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많은 미국인들은 암스트롱을 최초의 민간인 우주비행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닐 암스트롱은 정확히 말하자면 NASA 소속 미국 연방공무원 신분이었다.
[10]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기술인데, 무중력 우주공간에서 드라이버로 나사를 돌리면 나사가 돌아가는 방향으로 힘을 받아 우주비행사도 돌게 된다. 따라서 몸을 지지하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다.
[11]
닐 암스트롱의 전기 영화
퍼스트맨에서 암스트롱이 도킹을 성공시킨 후, 휴스턴 관제센터 요원들이 "CBS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에게 전화해서 "소련 엿먹으라고 전해"라고 환호하는건 바로 소련을 앞섰다 라는 기쁨에서 나온 것이었다.
[12]
궤도 이동 및 자세제어 시스템, 기계선에 부착되어 있으며 기계선 분리 전까지 자세 제어와 궤도 이동에 사용된다.
[13]
사실 관제 센터에서는 아제나의 자세 제어 프로그램의 문제를 의심하여 문제가 생길 경우 미션을 중단하라고 당부하긴 하였다. 문제가 아제나가 아닌 제미니에 있었을 뿐.
[14]
당시 회전 속도가 초당 300도에 근접하였다. 즉 1초에 거의 한바퀴씩 돈 것이다.
[15]
이 회전을 멈추기 위해 무려 75%의 재진입 자세제어 연료가 소모되었다. 회전이 멈춘 후 승무원이 확인 차 잠시 OAMS를 재작동 시키자 선체가 다시 회전하여 결국 OAMS의 사용을 중단하였다.
[16]
맥도널의 공장을 방문하려고 T-38에 탑승하여 함께 비행하다가 활주로를 잘못 보고 헤매다가 추락했는데, 둘이 방문하려던 우주선 만들던 공장(!) 지붕에 떨어졌다.
[17]
대신 이런 무선 EVA라는 아이디어는 NASA에서 받아들여서 Manned Maneuvering Unit(MMU)를 개발하고, 이는 우주왕복선 미션에서 몇번 써먹는다.
[18]
디크 슬레이튼은 자서전에서 이 무선 EVA 장치에 대해 언급하며 공군 측에서는 AMU가 적국의 인공위성을 관찰/감시하는 데에 용이할거라 여겨서 개발했을 것이라 회고했다.
[19]
실제로 이 프로그램을 계획한 것은 펜타곤이었기 때문에 공군 뿐만 아니라 해군에서도 적지 않은 인원을 데려왔다.
[20]
영화
아폴로 13에서 살짝 등장한다. 우주선 내에 있는 물건들만으로 휴스턴에서 이산화탄소 필터를 만드는 처절한
공밀레의 현장 장면에서 웬놈의 푸른색 우주복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이다.
[21]
이때 원대복귀한 인원 중
로버트 헤레스는 공군에서 4성을 달고
NORAD사령관과
합동참모차장까지 지낸다. 그리고
제임스 앨런 에이브러햄슨은
우주왕복선 개발의 책임자로 활약한 뒤
SDI라는 희대의 돈지랄을 주도했다. 그리고 NASA로 편입된 인원 중에는 최초의
우주왕복선 미션에서 조종사로 우주에 올라갔던 로버트 크리펜(위 사진의 인물)과 NASA 국장을 지낸
리처드 트룰리가 있다. 이들을 포함해 공군에서 보내진 인원들은 아폴로 시절 선발된 인원들과 함께 아폴로 이후의 우주정거장 스카이랩과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22]
다만 우주선의 스핀 장면은 약간 과장되어 있다. 실제로는 초당 300도, 그러니까 1초에 1바퀴 조금 안되게 스핀한 것인데, 영화상으로는 1초에 3~4번은 스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