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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빌보드 직원들이 록 밴드의 리드 싱어 50위를 선정했다. 따라서 솔로 아티스트는 포함되지 않았다.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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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 재거 | 스티비 닉스 | 프레디 머큐리 | 로버트 플랜트 | 커트 코베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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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번 | 데비 해리 | 조지 클린턴 | 보노 | 액슬 로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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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스미스 | 로저 달트리 | 헤일리 윌리엄스 | 스티븐 타일러 | 크리시 힌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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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스타이프 | 크리스 코넬 | 잭 화이트 | 캐슬린 한나 | 데이비드 리 로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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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모리슨 | 에디 베더 | 캐런 오 | 롭 핼포드 | 재니스 조플린 | |
<rowcolor=#fff>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톰 요크 | 루 리드 | 앤서니 키디스 | 앤 윌슨 | 스티브 페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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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제인 그레이스 | 오지 오스본 | 구스타보 세라티 | 체스터 베닝턴 | 그레이스 슬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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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스트러머 | 그웬 스테파니 | 이기 팝 | 폴 매카트니 | 브리트니 하워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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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 갤러거 | 세르이 탄키안 | 코트니 러브 | 제리 가르시아 | 코리 글로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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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티렌 | 폴 웨스터버그 | 데이브 그롤 | 루벤 알바란 | 잭 데 라 로차 | |
같이 보기: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 · 가장 위대한 록 가수 · 가장 위대한 알앤비 가수 · 가장 위대한 래퍼 | }}}}}}}}}}}} |
<colbgcolor=#999><colcolor=#fff> 코트니 러브 Courtney Lo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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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코트니 미셸 해리슨 Courtney Michelle Harrison |
출생 | 1964년 7월 9일 ([age(1964-07-09)]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8cm |
배우자 |
제임스 모어랜드 (1989년 결혼 - 1989년 무효화) 커트 코베인 (1992년 결혼 - 1994년 사별) |
자녀 | 프란시스 코베인 (1992년생) |
직업 | 배우, 가수 |
소속 | 밴드 ' 홀' (1984년~2002년) |
데뷔 | 1986년 영화 ' 시드와 낸시' |
종교 | 창가학회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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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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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홀(Hole)의 리더이자 가수, 배우.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악동이다. 음악적 성향은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 너바나의 리드싱어인 커트 코베인의 배우자로도 유명하다. 뮤지션으로서는 거친 펑크락 사운드,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 가사, 관중석 난입 같은 과격한 퍼포먼스가 아이덴티티이다.
전설적인 록스타였던 커트 코베인의 아내로 유명하기 때문에 커트 코베인의 팬 중 일부는 코트니를 그런지계의 악당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은 부당한 측면이 있는데, 너바나의 해체 자체에 코트니 러브 스스로가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며 너바나에 기여한 바가 작든 크든 있었기 때문이다. 코트니 러브의 예술적 재능과 실적이 매우 출중하기 때문에 빌리 코건과 커트 코베인과의 관계, 그리고 스스로가 만든 여러 가지 구설수가 없었더라면 음악으로 당대에 더 큰 인정을 받았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커트 코베인과 함께 락음악계 내의 성차별적인 문화에 대해 목소리를 많이 낸 대표적인 아티스트이며 성범죄 파문으로 몰락하기 전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던 하비 와인스틴을 오래 전에 공개 석상에서 저격하는 등 과거 행적이 꾸준히 발굴되며 재평가가 이루어진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와 활동
1964년 7월 9일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히피였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Grateful Dead( 그레이트풀 데드라는 전설적인 록 밴드의 매니저였으며, LSD 등 각종 마약에 중독된 상태였다. 이러한 부모의 영향을 받아 코트니도 어린 시절부터 술과 담배, 마약을 접했고 평범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청소년 시기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성사를 받았지만 성당에는 잘 나가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문제행동을 여러번 퇴학을 당했다. 급기야 1978년에는 한 쇼핑센터에서 친구들과 절도를 하다가 체포되어 소년원에 수감되기도 했다. 소년원에 출소한 뒤 코트니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록밴드를 결성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통해 돈을 벌었으며, 스트리퍼로도 일하며 삶을 이어나갔다. 일본에 잠깐 이주해 스트리퍼 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13세 때 반드시 락스타와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하는데, 21세 때 영화 <시드와 낸시>에 단역으로 데뷔하고[1] 24세 때 밴드 홀을 결성한다. 첫 번째 앨범인 'Pretty on the inside'는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밴드 활동을 시작하면서 코트니 러브는 많은 뮤지션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에서 코트니는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과 사귀게 되었고 스매싱 펌킨스의 월드 투어와 홀의 전미 투어가 끝나면 결혼식을 올리자는 약속을 할 정도로 깊은 관계가 되었다. 코트니 러브는 Gish 투어를 하고 있는 빌리 코건과 만나기 위해 홀로 영국행을 할 만큼 빌리와 사이가 좋았으나 동시에 빌리가 유럽으로 투어를 하기위해 출국하자마자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과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했다. 당시 코트니는 너바나가 Nevermind를 녹음 중이던 스튜디오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커트 코베인의 잘생긴 외모를 보고 코트니가 먼저 커트에게 접근했다고 한다. 커트 코베인은 처음에 코트니를 시니컬하게 대했으나[2] 얼마 후에는 푹 빠졌다고 한다.[3] 코트니도 커트와 친해지면서 당시 남자친구였던 빌리 코건과 달리 자신을 자상하게 챙겨주는 커트의 모습을 보고 반했다고 한다. 게다가 빌리는 마약을 하지 않았으나 커트는 자신처럼 마약을 했기에 더더욱 친해졌다고. 이후 코트니 러브는 자신이 커트 코베인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을 알게 되자 빌리 코건과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직후 1992년 2월 24일 커트 코베인과 결혼해 버린다.
1992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부터, 코트니 러브와 커트 코베인의 신변은 언제나 둘의 의도에 맞지 않게 언론에 과도하게 노출당하게 된다. 커트는 이에 대해 "언론은 사소한 것 하나를 놓치지 않고 물어뜯는다. 때문에 코트니는 다른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으려고 하고, 심지어는 밖에 나오려고도 하질 않는다. 단지 지역 여성 잡지에서 부탁한 인터뷰에 가볍게 응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심한 결과가 벌어지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이다. 우리 부부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 같은 부부[4]가 아니고 결코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라고 말했다. 중증의 마약 중독이었던 코트니 러브는 임신 이후 재활 치료에 들어가서 마약을 끊었다.
1994년 남편 커트 코베인의 자살 소식과 거의 동시에 발표된 ' Live Through This'[6]는 1994년 거의 모든 비평단 투표의 톱을 기록, 미국에서 160만 장이 팔린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 106위로 선정되는 등 그런지 락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홀의 멤버 크리스틴 파프의 죽음에 대해 코트니 러브에게 온갖 억측과 비난이 쏟아지면서 코트니 러브의 삶은 더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코트니가 남편 커트 코베인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악성 루머는 지금도 여러 권의 책이나 주위의 지인들을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는 코트니 러브의 아버지 행크 해리슨조차 딸에 대한 루머를 퍼뜨리고 팔아먹을 정도. 행크 해리슨은 러브와 어린 시절부터 떨어져 지냈고 사이가 좋지 않을 뿐더러 어렸을 때 양육권 소송에서 졌던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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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ve Through This'의 수록곡 'Violet'[7] |
1996년엔 아마데우스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거장 감독 밀로스 포먼의 영화 ' 래리 플린트'에 출연했는데, 단역 출연 경험이 전부였고 마약 중독자인 코트니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는 데 제작사가 고심이 많았다고 한다. 매주 마약 검사를 실시하고 보험까지 들어야 했다고(...)
밀로스 포먼은 경험이 부족한 배우는 연기 테크닉은 떨어지지만, 감정 연기가 잘 나올 수 있다는 이유로 캐스팅했다고 한다. 코트니도 배역을 위해 2주 만에 16kg를 감량하는 노력을 보였다. 밀로스 포먼의 말처럼 비교적 일상적인 배경의 영화 초반보다 마약 중독과 법정 공방이 오가는 후반부에서 높은 몰입도를 보여준다.
영화가 공개되고 평론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베를린 영화제 대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한다. 코트니의 연기 또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베를린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으로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줄리엣 비노쉬가 호명되자 관객들의 야유가[8] 쏟아졌다고 한다. 이 영화로 코트니는 새틀라이트 어워즈를 비롯한 5개의 시상식에서 '여우 조연상'을 수상했고[9], 골든 글로브에선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 시카고 트리뷴과 인디펜던트 지에선 아카데미 수상 가능성을 점쳤지만 후보로 지명되지 않았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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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아카데미 시상식 시상자로 참석한 코트니 러브[11] |
이때의 인연으로 밀로스 포먼의 후속작 ' 맨 온 더 문'에서 짐 캐리의 상대역으로 출연한다.
1998년, 포스트 그런지 풍의 홀의 3집 'Celebrity Skin'[12]은 평단의 찬사와 함께 미국에서 140만 장이 팔렸고, 그래미상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1999년에는 글라스톤베리 페스티벌의 메인 무대인 피라미드 스테이지에서 공연해 파격적인 시스루 의상을 선보였다. 이 앨범은 2005년에 전작 ' Live Through This'와 함께 '죽기 전에 들어야 할 앨범 1001'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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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보드 모던락 트랙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 'Celebrity Sk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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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던 'Malibu' |
홀은 2002년에 해체하지만, 코트니 러브는 그 와중에도 맹렬하게 영화와 음악 활동을 전개한다. 2004년에는 펑크 풍의 솔로 앨범 'America's Sweetheart'를 발매한다.[13] 평단에서는 상당한 호평이었다. 단, 이 시기가 마약 복용의 절정기(...)여서 제대로 된 활동은 하지 못했고, 본인도 나중에 당시 마약 때문에 레코딩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솔로 앨범에선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락밴드 스트록스의 리더이며 미남으로 유명한 줄리안 카사블랑카스를 겨냥한 가사를 쓰기도 했다. 제목은 "But Julian, I'm a little older than you". 이 밖에도 재능 있거나 미남이고 핫한 남자들에게 지나치게 집적거려 남성 편력이 심했다. 오죽하면 커트 코베인이 이런 아내 때문에 화병으로 죽었다는 말도 있었을 정도.
2009년부터 새 멤버를 모집해 홀을 재결성하고, 6년이나 질질 끌었던 새 솔로 앨범 'Nobody's Daughter'도 홀 이름으로 변경해 2010년 발표했다. 커버 아트는 마리 앙투아네트. 다만 평은 좋지 않다. 롤링스톤에서는 그 해의 음악 재앙 1위로 홀의 컴백을 뽑았다(...)
약도 끊고 최근들어 여러 방면으로 재기에 힘쓰고 있다. 2014년 너바나의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정식에 참여해 데이브 그롤과 포옹하는 모습을 보이고[14] 드라마 엠파이어, 리벤지에 게스트로 출연했으며, 라나 델 레이의 월드 투어에 게스트로 공연하기도 했다. 앞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계속 출연 예정이라고 한다.
종교는 불교다. 2006년 마약 중독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로 개종했으며 매일 아침 염불을 하며 심신을 달랜다고 한다.
2.1. 기행
Riot Grrrl Movement를 대표한다고 여겨지기도 하나 실은 라이엇 걸 내부에서도 비판을 많이 받고, 본인도 라이엇 걸 측을 비난한 바 있다. 반항적이고 도발적이지만 천진함이 느껴지는 록 아이콘이기도 하다. 도발적인 패션은 항상 가십지의 베스트 드레서와 워스트 드레서 사이를 오가며 1999년 우드스탁에서의 'Celebrity Skin' 공연에서는 가슴을 노출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아티스트로서나 배우로서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주위의 이목을 끌기 위한 자극적 발언, 또는 성적이거나 도발적인 행동을 자주 해서 관심병자라고 불리기도 한다.[15]
1995년엔 MTV의 VMA에서 리포터와 야외 인터뷰를 하던 마돈나의 머리 위로 메이크업 콤팩트를 집어던지고선 무대 위로 올라와 인터뷰에 참여했다.[16] 딱 봐도 술에 취한 상태여서 인터뷰 내내 횡설수설했으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마돈나 역시 만만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톱스타답게 의연하게 대처하고 자리를 피했으나, 인터뷰 내내 코트니가 무슨 망언을 내뱉을지 몰라 불안해하는 기색이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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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4년 후 2009년 MTV VMA에서 비슷한 해프닝이 또 일어난다(...)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과거 드루 배리모어가 레터맨의 데스크에 올라가 레터맨을 향해 가슴을 노출했던 장면을 똑같이 재현했다(...) 드루와는 90년대에 절친이었다. 훗날 드루 배리모어가 위에 언급된 VMA 해프닝에 대해 회고한 인터뷰가 있다. 아무튼 당시의 인연으로 드루는 홀의 기타리스트와 교제한 적도 있고, 코트니의 딸 프란시스 코베인의 대모가 되어 주기도 했다.
마약 중독으로 딸 프란시스를 빼앗겼다가 양육권 분쟁에서 겨우 승소했으나 딸과의 관계도 좋지 못했다. 지금은 관계를 회복하고 잘 지내는 것으로 보이나 딸이 어렸을 시기에 그다지 좋은 부모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17]
관중석에 대부분 남자만 있다고 여자들은 어디에 있냐고 소리치며 마이크 거치대를 던져서 남성 관객의 이마가 찢어지는 바람에 공연 중 경찰에 잡혀간 전적이 있다.
2.2. 지성과 선행
스트리퍼였고 평생 마약 상용자에 아무 데서나 옷을 벗어제끼는 등 막장 이미지의 소유자지만,음악 레이블 기업들이 어떤 방식으로 아티스트들에게서 수익을 빼앗아 폭리를 취하는지에 대해 상세한 장문의 기사를 기고한 적이 있다. 링크 단순히 코트니 러브를 할리우드의 악동으로만 치부했던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할 정도로 해박한 논리와 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코트니 러브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사람 중 한명으로 트렌트 레즈너가 있다. 정말 짜증 나는 사람이라고 디스한 적도 있으나 90년대 당시 인터뷰를 보면 술에 취해 기행을 벌이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뮤지션으로서 리스펙했던 것은 분명하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선행을 하여 매스컴을 탄 적도 있었다. 1999년 공연을 하러 가는 길에 뒤집힌 승용차에 갇혀있던 두 여성을 발견하고 구조한 것이다. 당시 사고를 담당한 경찰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 대화를 나눌 때 너무 소박한 느낌이라 유명 스타인 코트니 러브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만난 러브와 홀 멤버들은 모두 남을 생각하고 도울 줄 아는 훌륭한 사람들이었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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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미국을 발칵 뒤짚은 하비 와인스틴 성범죄 파문을 계기로 발언이 재조명되고 있다. 해당 문서에도 나오지만, 2005년에 이미 기자가 "할리우드로 가는 젊은 여성들에게 해 줄 조언이 있는가"를 묻자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지는 모르겠는데.."라고 운을 떼며 ' 하비 와인스틴이 여는 비공개 파티에 참석하지 말라'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발언한 것이 방송을 탔다. 방송에서 이 발언을 한 이후 CAA 에이전시로부터 12년간 영구 제명을 당했다고 SNS에서 언급했다.[19]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하비 와인스틴은 영국의 지미 새빌 못지않게 악명높은 인물이다. 상대적으로 지미 새빌의 죄질이 더 심하긴 하겠지만 하비 와인스틴은 영화감독들과 영화배우들의 꿈을 뺏어서 자기 욕심을 채우면서 할리우드의 안 좋은 풍토를 만든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지미 새빌 못지않은 악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코트니 러브가 자신이 처음 헤로인을 접한 것이 말리부에서 찰리 신이 열었던 비밀 파티에서였다고 폭로하였다. 톰 크루즈, 마돈나 등이 참석했었던 그 파티에 코트니도 그녀의 친구인 제니퍼 핀치의 초대로 참석하였는데 파티 도중 친구가
2020년에는 헤로인 중독에 빠졌던 동료 뮤지션의 재활을 도운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그런지계에서 나름 이름을 떨쳤던 마크 레니건[20]이란 뮤지션이 집필한 회고록에 언급되는데, 오랜 헤로인 중독으로 길거리에서 폐인 생활을 하던 1997년에 코트니의 도움으로 재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재활 비용은 코트니가 모두 지불했다고 밝혔다. 링크 결국 오랜 투병 끝에 헤로인 중독을 극복한 마크 레니건은 음악계에서 인정 받는 뮤지션으로 자리 잡았고 행복한 가정도 꾸렸으며, 말년에 펴낸 회고록을 통해 코트니의 선행을 널리 알렸다.
3. 앨범
3.1. 홀
정규 앨범은 볼드 처리.- Pretty on the Inside(1991)
- Live Through This(1994) 2020년에 롤링 스톤에서 새로 발표한 롤링스톤지 선정 500대 명반에서 106위로 들어갔다. 링크
- Ask for It(1995)
- My Body, the Hand Grenade(1997)
- The First Session (1997)
- Celebrity Skin(1998)
- Nobody's Daughter (2010)
3.2. 솔로
- America's Sweetheart (2004)
- How Dirty Girls Get Clean (2006)
4. 출연작
4.1. 영화
- 시드와 낸시 (1986)
- 지옥특급 (1987)
- 비디오테이프 대소동 (1988)
- 1991: The Year Punk Broke (1992)(다큐)
- 바스키아 (1996)
- 필링 미네소타 (1996)
- 래리 플린트 (1996)
- Not Bad for a Girl (1996)(다큐)(공동제작자)
- 체이스 식당의 마지막 나날들 (1997)(다큐)
- Kurt & Courtney (1998)(다큐)
- 비포 뉴 이어 (1999)
- 맨 온 더 문 (1999)
- 비트 (2000)
- Bounce: Behind the Velvet Rope (2000)(다큐)
- 줄리 존슨 (2001)
- Last Party 2000 (2001)(다큐)
- 트랩트 (2002)
- 메이어 오브 더 선셋 스트립 (2003)(다큐)
- 스트레이트 투 헬 리턴즈 (2010)
- 힛 소 하드 (2012)(다큐)
- 커트 코베인: 몽타주 오브 헥 (2015)(다큐)
- 피의 형제: 메넨데즈 부모 살인사건 (2017)(TV 영화)
- 제이티 르로이 (2018)
4.2. 드라마
- 썬즈 오브 아나키 (2014)
- 엠파이어 (2015)
- 리벤지 (2015)
5. 여담
- 1994년 롤링 스톤지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경증의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았다고 말했다. #
- 과거 심각한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 증세에 시달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대마초 뿐 아니라 LSD, 필로폰, 아프레제탐 등 각종 약물을 복용했으며 술도 심각한 수준으로 마셨다. 딸인 프렌시스가 밝히길 한창 알콜과 마약에 중독되어 있던 시절에는 식사도 거의 하지 않은 체 술과 마약을 복용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술이나 마약에 취한 상태로 여러 사고를 쳐서 법정에 밥 먹듯 드나들기도 했다. 다행히도 2010년대에 들어서는 마약도 끊고 술도 자제하면서 건강을 회복한 상태.
- 딸 프란시스와는 애증의 관계로, 프란시스가 엄마의 알콜/마약 중독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한 때 의절하기도 했었다. 2009년 코트니의 양육권 재판 때 프란시스는 직접 증인으로 나와 엄마가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전화기로 소리를 질러대며, 화가 나면 집안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발로 바닥을 걷어찬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 아이코닉한 세기의 락스타 커플로 노래 가사나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서 언급이 자주 되는 편이다.
- 게이와 여성 팬들이 유독 많은 아티스트이다. 본인도 이에 대해 인정하였다.
5.1. 커트 코베인 사망 배후 음모론
워낙 망나니스런 행적으로 유명한 코트니 러브다보니 커트 코베인과의 수상한 관계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많았고 코베인을 이용하기 위해 결혼으로 접근한 것이다라는 낭설과 급기야 커트 코베인은 자살로 위장된 것이며 실제 사망의 배후는 코트니 러브라는 악성 음모론까지 팬보이들 사이에서 끊이질 않았다. 코베인의 죽음 직후 "Courtney Did It"이라고 쓰인 티셔츠도 팔린 적이 있을 정도. #이런 음모론을 담은 출판물과 다큐가 그 시초인데, 커트 코베인 사후 발간된 전기 작가 이안 헬퍼린의 책이었다. 국내에서는 순화된 제목으로 번안했으나, 애초부터 원제가 'Who killed kurt Cobain?'로 대놓고 어그로를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작가 자체가 원래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21]
제법 자세한 정황과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개 물증이 아닌 심증으로 점철되었거나 출처 불분명 자료들 투성이라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으며,[22][23] 실제로 살인 정황이 있었다면 미국 경찰이 정식으로 기소해 재판을 받았을 것이다.[24] 대단한 빽이나 권력도 없는 데다 폭행이나 약물로 여러 차례 법원을 출두한 경력을 지닌 코트니 러브가 살인이란 중범죄를 저질렀다면 경찰에서도 그냥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며, 만에 하나 실제로 그런 짓을 했더라도 마약 중독자에 입이 가볍기로 유명한 코트니 러브가 오랜 세월 동안 비밀을 지키기도 힘들었을 터이다. 물론 오노 요코처럼 세계적인 스타의 반려는 구설수에 오르기 마련이지만, 코트니 러브 자신이 여러 구설수를 몰고 다니는 악동이었던 데다 커트 코베인의 자살이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루머가 오랫동안 수그러들지 않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코트니와 커트 둘은 향간에 도는 소문대로 마냥 험악하기만 하던 사이는 아니었고 딸을 출산한 뒤 단란한 가정을 막 꾸리던 상태였다. 마냥 무책임하게 낳은 딸만은 아니었기에 출산 전에 스스로 재활원에 들어가는 등 마약을 끊기 위한 노력들을 기울였고[25] 애당초 재활원에 들어가라고 설득한게 코트니였다.[26] 정황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게 많다. 오히려 코트니는 커트의 사망 이후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조금 다른 버전으로 빌리 코건과 짜고 죽였다는 설도 있다. 이 삼각관계에서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빌리 코건은 커트 코베인에게 약혼녀를 빼앗긴 피해자에 가깝다.[27] 한 마디로 피해자더러 '원한 관계가 있으니까 당연히 죽이고 싶었을 것 아니냐'라고 몰아붙인 거나 다를 게 없다. 당사자가 이런 루머를 알았다면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커트 코베인의 주변 사람들을 심층 취재한 새로운 평전이 나오면서 대다수 음모론도 불식되었다.
[1]
원래 코트니 러브는 주연 '낸시'의 오디션에 "내가 바로 낸시다!"라고 패기 있게 참가하였으나, 클로이 웹이 주연을 따내고 코트니 러브는 낸시의 친구 '그래천' 역으로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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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커트의 시니컬한 반응을 본 후 만든 곡이 바로 Doll Parts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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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노보셀릭은 훗날 밝히기를 커트와 코트니의 관계는 연인 사이보다는 섹스 파트너에 가까웠다고 한다. 너바나의 멤버들은 어느 날 LA의 한 카지노에 놀러갔는데 커트와 코트니가 마주치자 너바나의 다른 멤버들이 있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둘이 격정적으로 스킨쉽을 하기 시작했다고... 커트 코베인은 영국의 방송에 출연하면서 "나는 이곳에 계신 분들께 락 그룹
홀 멤버인 코트니 러브가 세상에서 가장 섹스를 잘한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어요"라는 멘트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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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오히려 언론에 자신들을 노출시키는 것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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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잡지에서 임신 중에
헤로인을 사용했다는 발언을 했다. 주변 사람들은
낙태를 권유했지만,
커트는
딸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코트니에게 제발 낙태를 하지 말라고 애원하였다. 다들
프란시스가 기형아이거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을 거라고 예상했으나 다행히도 모두의 걱정과 달리 프란시스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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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에 실린 모든 곡들을 커트 코베인이 썼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몇 개의 트랙에서 커트 코베인이 백킹 보컬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곡의 작사는 코트니 러브가, 작곡은 코트니 러브, 홀의 기타리스트 에릭 얼랜드슨,
노이즈 록 밴드 Janitor Joe 출신인 홀의 베이시스트
크리스틴 파프가 공동 작업한 합작품이었다. 안타깝게도 크리스틴 파프 역시 커트 코베인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94년 6월 16일 욕조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은 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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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은 홀의 대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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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비노쉬가 못했던 건 아니다. 다만 코트니가 너무 강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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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선 영화사에서 수상에 유리하도록 주연을 조연 부분으로 바꿔서 시상식에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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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니가 수상한 5개의 시상식들은 모두 평론가들이 심사하는 시상식이었고 아카데미의 경우는 감독, 작가, 배우 같은 영화계 종사자들이 심사하므로 연령대가 높고 보수적인 성향을 띈다. 악동 락스타인 코트니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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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후보로 오르지 못했지만 래리 플린트가 감독상과 남우 주연상 후보였기에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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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의 주요 프로듀서는 코트니의 전 남자친구이자
스매싱 펌킨스의 리더로 유명한
빌리 코건이다. 빌리 코건은 코트니 러브에게 홀의 2집을 녹음할 스튜디오로 Triclops Sound Studios를 추천하거나 크리스틴 파프 사후 공석이 된 홀의 베이시스트 자리에 새 여성 베이시스트로 자신의 여사친인 멜리사 아우프 델 마우어를 소개시켜 주는 등 코트니 러브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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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연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미가 증오하는
커트 코베인의 마녀 코트니 러브의 솔로 앨범인데, 코트니 러브 특유의 냉소적 조크가 넘치는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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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하고 서로 문자도 주고받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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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국 언론은 이것을 "Attention Deficit Disorder(
주의력 결핍 장애)" 라고 비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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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터가 코트니에게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했을 때 마돈나 왈, "코트니 러브한테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할 거예요? 오, 제발 그러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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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엄마의 심각한 마약 중독과 기행으로 상당히 괴로워했다. 자꾸 집에 불을 질러서 불안해서 잠들지 못한 밤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때문에 결혼식에도 초대받지 못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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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커트 코베인과 연애 초반 코트니가 밴드의 불합리한 인세 문제를 두고 "곡은 주로 너 혼자 쓰는데 인세는 왜 똑같이 받아?" 하고 항의하자, 커트가 밴드의 인세 중 자신이 50%로 차지하는 것으로 내용을 바꿨고(이로 인해 크리스 노브셀릭은 코트니를 극혐하게 되었으며 커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커트에게 인문학 서적 등을 빌려주며 가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단, 커트 생전 인터뷰에서 "커트는 자신이 없으면 운동화 신발끈도 못 맬 사람"이라고 말하였고, 커트 사후 "너바나의 곡은 커트가 단독으로 썼으니 너바나의 곡에 대한 권한은 너바나가 아니라 커트의 미망인인 자신이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잉 발언을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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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앞서 언급되었듯이 평소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발언을 자주하다 취소하는 버릇이 있는 인물이다 보니 당시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발언은 진짜였다! 그리고 이 발언만큼은 취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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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마크 레니건은 대중적인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음악계에서는 나름 거장으로 인정받는 뮤지션이다.
2022년에 향년 57세로 숨졌다.
2021년에 코로나19에 걸려 크게 고생했다 회복된 적은 있으나 사망 원인이 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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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헬퍼린은 마이클 잭슨, 산드라 블록을 대상으로도 어그로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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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에 심각히 중독된 상태라면 스스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총 드는것 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총과 유서, 펜에는 커트 코베인 본인의 지문이 검출되지 않았으며 커트의 필체가 잠정되지 않는 문맥이 유서에 적혀있다. 경찰의 수사와는 다르게 발코니에 통행로가 하나 더 있었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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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전에 코트니에게 불리하게 작성된 결혼 계약서가 있어 이혼시 재산을 가져갈수가 없으니, 커트의 죽음으로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죽였다는 소설도 등장하곤 한다. 사실 코트니는 유명 작가인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많아서 굳이 돈 때문에 커트 코베인에게 접근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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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J. 심슨 사건처럼 재판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게 아니라 애초에 기소를 받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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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커트가 자살했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진다면, 치료에 불응하고 재활원 탈출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마약중독자 정도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커트가 입원한 재활원은 유명인들이 재활에 성공한 곳으로 결코 허접한 곳이 아니다. 심지어, 수차례 재활에 실패하여
심정지까지 왔던 막장 중독자였던
디페시 모드의 보컬 Dave Gahan마저도 재활에 성공했고, 그 덕분에
디페시 모드 기사엔 이 재활원의 이름이 계속 거론될 정도다. 아직도 커트 코베인 살해 음모론이 도는 것은 커트가 받을 비난에 방어하려는 심리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커트는 생전에 딸인
프란시스 코베인을 지극히 사랑했기에 나름 마약을 끊으려는 의지도 있었지만 끝까지 재활원 프로그램을 따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도중에 몰래 재활원에서 탈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굳이 누굴 비난하기보다는 그만큼 마약중독이 무서운 질병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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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커트가 탈출했던 재활원인 Exodus recovery center는 80년대에
제임스 칸이 코카인 중독 치료를 위해 입원했던 곳인데, 그는 재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82세까지 장수했다. 커트 이후에는
디페시 모드의 보컬 Dave Gahan이 이곳에서 재활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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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니는
커트 코베인이 죽은 뒤로도 빌리 코건과의 염문설이 퍼돌 정도로 별별 찌라시들의 먹잇감이 되어버리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