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1:31:07

한양대학교/서울캠퍼스/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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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대생들의 ENDLESS PAIN
1.1. 공업수학과 F학점1.2. 미적분학과 F학점
2. 공업수학 경시대회3. 풍수지리4. 학생운동과 대학문화5. 행당캠퍼스의 유래6. 사랑의 실천

1. 공대생들의 ENDLESS PAIN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학생들 사이에서 미적분학1,2와 공업수학1,2 중에서 F를 한번도 안맞고 한번에 통과하는 이들은 주변에서 괴물 혹은 미친놈이라고 불린다. 한학기마다 수강인원의 30퍼센트가 의무적으로 F를 맞게 되므로 4학기 연속 F를 맞지 않고 한번에 통과하는 확률을 단순히 계산해 보면 0.7^4=0.2401=24%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대다수인 76%는 한번이라도 F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통과한 24%에는 C학점을 맞는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미적분학1,2나 공업수학1,2를 한번도 재수강 없이 졸업하는 학생은 더더욱 적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원래 학점은 F받는 사람들은 고시 준비를 하거나, 공기업 준비를 하는 사람 같이 어느정도 정해져 있어서 실제로 저 비율만큼 높지는 않다.

공과대학에서는 F융단폭격 뿐만 아니라 전문 교수진, 공업수학 경시대회를 통해 미적분학과 공업수학에 대한 교육의 열의를 보인다. 실제로 미적분학과 공업수학을 가르치는 정식으로 임용된 교수님들이 계시며 정선영 교수님 강의노트는 고등학교 시절 수학의 정석처럼 한양대학교 공대생들 사이에서는 절대적인 공업수학 바이블로 불린다. 책 내용을 한글자도 보지 않고 정선영 교수님 강의노트로만 열심히 공부하고도 A를 맞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있다.

1.1. 공업수학과 F학점

거의 모든 공대생들이 2학년 때 들어야하는 필수 과목인 공업수학 1, 2도 당연히 미적분학 1, 2처럼 하위 30% 학생들에게 매 학기 무자비한 F를 부여한다. A와 B의 비율도 다른 상대평가 과목과 달리 A는 상위 20%까지, B는 상위 20% ~ 50%까지다. B만 맞아도 중간안에는 들어간 셈이다. 영어전용강의도 별도의 기준없이 국문강의와 동일한 평가쳬계로 성적을 준다.

반별 평가가 아닌 공대의 모든 학과가 같은 시간에 같은 시험지로 시험을 본다. 당연히 성적은 반별 퍼센티지가 아닌 전체 수강생 기준 퍼센티지로 나간다. 다만 계절학기는 반별 자체시험 및 자체평가다. 시험유형은 증명 등의 유형은 거의 없고 문제를 열심히 풀면 된다. 6문제만 막힘없이 풀면 된다. 여기까지만 듣고 별거아니네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제한시간은 50분으로 6문제를 풀기에는 다소 빠듯한 시간이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적급간을 타이트하게 잡아서 많은 공대생에게 부담과 공포를 주는 시험이다.

1.2. 미적분학과 F학점

공과대학 1학년 때 수강하게 되는 필수 과목들 중 미적분학 과목[1]은 열심히 공부하는게 좋다. 타 공과대학 과목의 권장기준인 A + B=30 + 40% 상대평가를 과감히 씹어버리고 매우 무자비한 평점을 자랑하며 약 30%의 학생들이 F를 맞는 무시무시한 기초필수 수업이다.[2] 다시 말하지만 필수과목이기 때문에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이 불가능하다. 시험의 난이도는 매년 상당히 달라지며, 2010년 이전의 족보를 보는 것은 거의 무의미할 정도로 최근엔 매우 어렵게 출제된다. 2014학년도부터는 F학점도 성적기록에 남기 때문인지 미적분학1을 F를 받더라도 2를 이수할 수는 있다. 따라서 열심히 해서 잘 해두자. 정 수학에 자신이 없다면 정규학기에 듣기보다는 계절학기때 듣는 것을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정규학기보다 훨씬 학점을 따기가 수월하다.

2. 공업수학 경시대회

공과대학에서는 매년 공업수학 경시대회를 개최하며 우승자들에게 현금으로 수십만원씩 꽂아준다.[3] 혹시 학자금대출이 있어도 한국장학재단에서 안 뺏어간다. 간혹 수학과 대학원과정을 씹어먹는 무시무시한 난이도가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백점을 맞고 상금을 쓸어가는 괴수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증명보다는 혹독한 계산을 요구하는 테크닉이 중요시되는데 인간계산기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자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외부(연구원이나 기업)에서 한양대생들은 수학을 잘한다'는 소문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으며(물론 편차가 존재한다.) 혹독한 교육으로 갈고 닦은 공업수학 실력에 대한 졸업생들의 자부심이 상당하다.

또한 이 대회는 교내 공모전의 성격[4]과 유사하며 수상 실적은 전공과 연계가 매우 강력하여 취업 및 대학원 진학시 이력서에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중요 실적이다.

3. 풍수지리

한양대학교는 서울 시내 대학들 중 풍수지리적으로 최고의 입지에 위치해 있다. 왕십리가 조선의 도읍지가 되었다고 가정하면[5], 풍수지리로 볼 때 내산(뒷산)이 되는 행당산 위에 위치해 있는지라, 한양대에서 제일 높은 인문대 옥상[6]에서 보면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용마산), 관악산, 청계산, 남산 등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산들이 병풍처럼 서울을 감싸고 있는 모습과 청계천, 중랑천[7] 그리고 한강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풍수지리적 위치로 인해, 무학대사 궁궐을 현 한양대 부지에 지으려고 했다.[8]

현재 백남학술정보관(속칭 중도)이 위치한 자리는 조선시대 마조단이 위치한 자리였으며 마조신은 조선시대에 전쟁의 신이자 군마의 신이었으며 종묘와 사직단 다음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이는 이 일대가 대규모 목장이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군마 등을 양성하는 곳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는 백남학술정보관 근처에 마조단이 있었다는 흔적과 작은 비석이 남아있다.

한양대학교 서울은 주변의 너른 평지 한 복판에 우뚝 서있는 돌 산위에 조성돼 있다보니 양기(陽氣)가 굉장히 강해 남학생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돌 산 가장 높은 곳에 시계탑이 딱 하니 박혀 있으니... 아시다시피 시계탑은 제주도의 돌하르방처럼 양기를 불러모으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그 양기를 억누르고자 사범대 앞에는 여성의 성기 모양을 한 조형물을 배치해 기를 맞추려 했다는 이 있다.(사범대 H모 교수님 증언) 또 한나라 한(漢)자와 볕 양(陽)자도 음양오행의 관점에서 보면 양기에 해당하는 글자이고, 성명학에서도 여성의 이름에는 거의 쓰지 않는 글자다.

4. 학생운동과 대학문화

과거 한양대는 전국조직에서 네임드[9]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5기 한총련 이적단체 판결 이후 한총련이 쇠락을 길을 걷기 전까지[10] 10명의 의장중 3명이 한양대 출신이다.[11] 구체적으로 전대협 3기의장 임종석(무기재료 86), 5기의장 김종식(사회 87), 한총련 1기의장 김재용(정외 88) 등,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학생운동의 파급력이 대단했던 8-90년대 사회 상황을 가정해본다면 의장을 배출한 학교가 주목 받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다. 덕분에 8-90년대 학번 일반 학생들이 전의경에 들어가서 학교가 한양대라고 하면 그 이유만으로 엄청난 비난과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이는 이 학번대 한양대를 나온 자교 출신 교수들의 공통된 증언이다.[12]
특히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워낙 경찰에 안잡혀 별명이 임길동이었는데, 인문대 올라가는 계단에 비밀 공간을 파고 일주일간 숨어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13]

파일:external/pds20.egloos.com/a0106196_4e0d7107864c0.jpg
(1989년 6월 평양 세계학생축전 남한측 집회 참가 행렬.[14])
뭐 당연한 이야기 겠지만, 네임드들이 많아서 전국적 행사 무슨 무슨 출범식, 무슨 무슨 대회가 계획대로 잘 안된다 싶으면 한양대를 배경으로이었다. 참고로 한양대 사수대 이름은 행당불패[15]였다. 학생운동 역사상 가장 유명한 tac도 한양대를 배경으로 시위 학생들을 가득실은 전철이 학생들이 한양대역에 내릴 것을 우려해서 정차하지 않고 바로 뚝섬역으로 직행하자 뚝섬역에서 학생들이 모두 내린다음 지하철 철로를 뛰어내려 한양대역으로, 그다음 한양대에서 미리 만들어둔 사다리를 내려주자 그걸 타고 한양대 입성했다. 당시 성동경찰서 정보과에서 오늘은 우리가 졌다. 고 총학생회에 전화가 걸려왔다는 이야기 때문에 당시 군대 자대에서 한양대 출신이라고 하면 중대장의 의심어린 눈초리와 함께 면담을 한번 더 해야했다는 웃지못할 선배들의 얘기도 전해진다.

대학문화의 쇠퇴와 더불어 지금은 FM이라고 불리는 각 단위 꾸밈말[16][17]을 통한 자기 소개는 봄만 되면 캠퍼스 곳곳과 왕십리 술집과 한양부페에서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심지어 자기 이름 앞에다도 붙였다.

90년대에는 학생들이 주옥같은 한양대의 지리적 특징들을 이용해서 시위진압 중인 경찰들에게 어느새 고지점령전을 선물해주는 상황이 자주 벌어지게 되어 캠퍼스 자체가 한양요새라는 별칭으로 불렸다.[18][19]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예비역 복학생들이 길에 마음먹고 바리케이트를 쌓은 후 군대에서 배운 각종 전술들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백골단도 쉽게 손대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96년도 연대사태 시절 한양대 고지[20]를 점령한 학생 시위대가 화단 등의 벽돌을 떼어내 투척하는 바람에 학교 내 벽돌들이 흉물스러운 몰골이 되었던 일도 있었다. 사족으로 예나 지금이나 한양대의 건축공학과토목공학과는 국내에서 톱의 위치를 달리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학교 지도 한장 펴들고 전략요지에 바리케이트를 쌓았다면? 심지어 인문대 옥상에는 투석기가 있었다는 80년대 90년대 학번의 증언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으며 사거리는 대략 한마당까지였던 걸로 기억되고 있다. 1997년도에는 한양대에서 개최된 한총련 행사에서 경찰 프락치 오인 사건이 발생했다. 구체적 내용은 이석 치사 사건 문서 참조.

과거 한양대는 운동권 이미지가 강했으나 2002년에 소리 없는 명예혁명(약칭 소명) 학생회가 등장하여 무려 5년간 이어간다. 그렇게 2002년~2006년 비운동권 학생회가 집권했으나, 이후 비운동권과 운동권이 번갈아 총학생회를 집권해오고 있다. 2008년에는 체인지 포유(Change4U) 총학생회 한총련 사건, 이정희 한양대 강연 취소 사건 기사, 나꼼수의 김용민 한양대 강연은 파리를 날리기도 하는 등 기사 시간이 지나면서 운동권의 색채를 많이 벗어내고 있다.[21] 하지만 19대 대선 때는 대선 후보 초청을 한양대 총학생회가 총대를 매는 등, 여전히 사회정치적 참여는 활발한 편이다.

5. 행당캠퍼스의 유래

예전에는 서울캠퍼스라는 명칭 외에 행당캠퍼스라는 명칭도 간혹 불려지곤 했는데, 이 명칭은 서울캠퍼스가 위치하는 동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즉 서울캠퍼스가 위치하는 행정구역이 바로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학교 캠퍼스의 이름을 짓는 것은 반드시 특정 행정구역과 연계를 지어야 할 필요가 없고, 자신들이 불러주길 원하는 이름으로 불러줘야 하기 때문에 엄연히 잘못된 명칭이다. 학칙에서도 서울캠퍼스라고 명명하고 있다.

6. 사랑의 실천

2018년 이전에는 'HELP'라고 불렸다
Hanyang Entrepreneurial Leadership Plus[22]

교육공학과 송영수교수의 주도로 한양리더십센터에서 진행하는 필수 교양인 온라인 강의이다. 재학 중인 서울 한양인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는 과목이기도 하다. 05~08 교육과정부터 적용되었다. HELP1 ~ HELP4까지 4개의 강의를 매년 하나씩 들어야한다. 각 강좌들은 '휴먼리더십', '글로벌리더십', '비즈니스리더십', '셀프리더십'을 주제로 한학기동안 진행되며, 교과서에서 접하기 힘든 지식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정치편향적인 내용이 일부 있다는 이유로 매년 논란이 되는 수업이다.

2009년까지는 온라인으로 시험을 실시하였으나, 워낙에 많은 인원이 응시하는 시험인 탓에 서버가 버티지 못하여 시험이 시작조차 되지 못하고 취소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고, 결국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오프라인 기말고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오프라인 시험으로 인하여 학생들에게 학업부담을 가중시키는 과목이라는 비판이 많았고, 결국 2015년부터는 매주 온라인퀴즈와 기말과제로 대체되어 불만이 다소 줄어들었다.

2016년 1학기 9주차 강의에 사용된 자료에서 여성혐오 및 편견을 조장할 여지가 있는 사진이 사용되어 논란이 되었다. 해당 자료는 '마음을 훔쳐라! 욕망을 자극하라! 꿈을 팔아라!'라는 소주제 하에서 이루어진 수업에 사용되었는데, 다리를 꼬고 앉은 여성에게 남성이 반지를 내밀자 여성이 다리를 벌리는 사진이 연달아 게재된 것. 총학생회에서는 "(해당 사진 자료가) 강의 목적과는 전혀 무관한데다가 내용 자체가 심각한 혐오와 차별을 조장한다"는 입장을 내놓았고, 수업자료에 포함된 사진의 삭제와 리더십센터의 사과를 요구했다.

파일:daejabo1.png
파일:daejabo2.png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재학생들의 HELP에 대한 불만이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사진은 2016년 6월 9일에 사회대 앞에 붙은 대자보이다. 이후 2016년 10월에는 총학생회에서 HELP 필수수업 제외 운동을 벌이기도 했고, HELP 3의 과제에서 시장경제적 측면을 옹호하는 내용을 정답으로 요구하는 과제를 낸 데에 반발하는 내용의 대자보가 붙기도 했다.

결국 2016년 11월, 학교 측이 총학생회의 안건을 받아들여 다음 학기부터 HELP4를 필수과목에서 제외한다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2017년 1학기, HELP1은 온라인 기말시험으로 되돌아왔다. 국문은 20분에 30문제, 영문은 20분에 25문제로 출제되었고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난이도로 학생들의 원성을 샀다. 2019학년도부터 HELP과목은 성적 평가방식이 P/F로 전환되었다.
[1] 미적분학 1과 미적분학 2라는 이름하에 2개 학기 과정으로 나누어져 있다. [2] 2002년 월드컵 4강 광풍이 불어닥치던 당시에는 시험을 보러 들어가기만 해도 C를 받았다고 한다. [3] 2000년대에는 100만원이나 줬다. [4] 경쟁을 통해 우열을 가려 별도의 참가비 없이 학교 예산으로 상금을 수여함. [5] 무학대사가 왕십리에 도읍을 세우려다 10리를 더 갔다는 이야기 자체는 사실이다.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의 뜻을 생각해 보자. [6] 엄밀히 말해 백남학술정보관(중앙도서관)이 제일 높지만, 옥상에 갈 수 없다. [7] 이 일대가 청계천이 중랑천에 합류하는 곳이다. [8] 10리를 더 가지 않았더라면 경복궁은 이곳에 세워졌을 것이고, 북악산은 행당산이 되었을 것이며, 서울의 중심지는 지금의 종로구 일대가 아닌 성동구였을 것이다. [9] 전대협 한총련 의장 [10] 한총련 4기 이전이다. [11] 고려대 3명 전남대 3명, 나머지는 서울대 한 명 [12] 단, 이 서술은 198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의 이야기이다. 1980년대 초중반까지는 공대가 중심인 학교 답게 이른바 문과 중심인 타 대학에 비해 학생운동의 세가 약했다. 당시 학생운동가에서 말한 이른바 "메이저 캠"은 서연고서성 5개 대학이고 한양대는 80년대 후반이나 되어야 메이저 캠으로 대접받았다. 여담으로 한양대는 1992년 마지막 전대협 발대식을 자교 캠퍼스에서 개최했다. (이듬해 최초 한총련 발대식은 고려대학교) [13] 덤으로 워낙 수려한 외모로 당시 여고생 인기투표에서 연예인을 제치고 1위를 할 정도였다. 당시 잡혔을때 인터뷰가 MBC 뉴스데스크 메인뉴스가 될 정도다. [14]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택이 있었던 이 집회는 불법 집회로 간주하여 원천봉쇄 했으나 위 사진과 아래 서술처럼 학생들은 들어왔다. 물론 이후 경찰이 학내로 진입, 대거 검거작전을 수행했으며 당시 임종석 전대협 의장은 인문대 배수로를 이용, 학교를 빠져나갔다. [15] 전남대는 오월대, 조선대는 녹두대 [16] 90년대 선배들 왈 '사실 한양대에서는 FM이라는 국적 불명의 말 쓰지도 않았다. 고대애들이나 되도않게 FM 이라 불렀지, 우린 언제나 아지라 그랬다.' 참고로, 아지는 agitation의 준말 [17] 아직 인문대는 다 아지라고 한다. [18] 고지대도 고지대지만 학교 건물들이 구름다리 등으로 곳곳이 연결되어 있는 것 등은 외부인들이 알긴 알아도 쉽게 익숙해 질 수 없다. 당연 배수로 같은 시설물은 말할 것도 없다. [19] 게다가 웃긴 것 중 하나가, 1989년 당시 학생회관 건물은 5층 건물로 불렸는데 이게 서점 있는 곳이 1층, 로비와 식당 두개 층이 모두 2층(그래서 2층 로비, 2층 식당으로 부름), 이후부터 3층 강당 4층 학생회 5층 식당이였다. 초행자는 헷갈릴 수밖에 없다. 심지어 5층에서 잘 모르는 계단을 올라가면 옥상이 있는데 이곳에도 몇개 동아리방 가건물이 존재했다. 은닉하기에 최적일 수밖에. [20] 사회교육원 앞 주차장. 한양대역 지붕과 그 옆의 왕십리로를 내려다보는 곳이라서 말 그대로 요새처럼 느껴진다. [21] 그러나 김용민 강연은 총학생회가 아니라 한대련 계열이었던 당시 공대 학생회에서, 이정희 강연은 같은 계열의 동아리에서 독단적으로 진행했던 일이다. [22] 전에는 E가 Essential이었으나, 2017-2학기 HELP2 한국어 강의자료에서 확인한 결과, Entrepreneurial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