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20:26:32

풋볼

풋볼 파생 종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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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
국제 규칙 축구
(1967)
게일식 축구
(1887)
*: 축구에서 파생된 구기 종목이지만 사이클을 이용해 경기하기 때문에 국제축구연맹이 아닌 국제사이클연맹에서 경기를 주관한다.


1. 개요2. 퍼블릭 스쿨 풋볼
2.1. 이튼 칼리지 (Eton College)2.2. 럭비 스쿨 (Rugby School)2.3. 윈체스터 칼리지 (Winchester College)2.4. 해로우 스쿨 (Harrow School)2.5. 차터하우스(Charterhouse) & 웨스트민스터 스쿨(Westminster School)2.6. 슈류스버리 스쿨 (Shrewsbury School)
3. 역사
3.1. 분화 이전3.2. 럭비의 시작3.3. 축구와 럭비의 분열 ( FA 창설)3.4. 럭비의 체계화3.5. 축구의 프로화3.6. 미식축구의 분화3.7. 게일릭 풋볼과 오스트레일리안 풋볼3.8. 럭비의 남북 분단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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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ootball[1] / Fútbol[2] / Futebol[3] / Fußball[4] / Voetbal[5] / Футбол[6]

풋볼엔 다음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각각의 풋볼 종목은 서로 다른 풋볼 코드(Football Code)를 따른다. 후술할 테지만, Football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스포츠는 나라마다 다 다르다.

2. 퍼블릭 스쿨 풋볼

19세기 영국에서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 이라고 불리는 전통 명문 사립학교에서는 다양한 풋볼 규칙들이 성문화되었다. 전통적 의미로는 1868년 퍼블릭 스쿨법을 통해 자율권을 얻은 잉글랜드 웨일스의 7개 사립 학교를 칭한다.
  • 이튼 칼리지 (Eton College)
  • 해로우 스쿨 (Harrow School)
  • 차터하우스 (Charterhouse)
  • 럭비 스쿨 (Rugby School)
  • 슈류스버리 스쿨 (Shrewsbury School)
  • 웨스트민스터 스쿨 (Westminster School)
  • 윈체스터 칼리지 (Winchester College)

근대 초기에는 영국 사립학교들의 학생들과 그 출신들, 그리고 교사들은 여러가지 풋볼의 형태를 개발하고 기록했는데, 1815년 이튼 칼리지의 이튼 필드 게임(Eton Field Game)과 1825년의 알덴햄 스쿨(Aldenham School) 풋볼 규칙이 있다. 하지만 이튼 필드 게임의 경우, 일부 자료들에서는 1815년부터 쓰여졌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최초 규칙들의 날짜가 1847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진술하는 학교의 기록 보관인을 포함하여 다른 자료들의 기록으로부터 모순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845년 럭비 스쿨(Rugby School)의 럭비 풋볼이다.

2.1. 이튼 칼리지 (Eton College)

  • 이튼 월 게임 (Eton Wall Game) : 이튼 월 게임은 이튼 칼리지에서 1717년에 처음으로 시작된 게임이며, 지금까지도 이튼 칼리지에서 진행되고 있다. 1717년에 세워진 벽돌담 옆에 가로 5미터, 세로 110미터의 그라운드에서 경기가 진행되어지며, 이는 이튼 칼리지에서 진행하고 있는 두 가지 풋볼 코드 중 하나이며, 나머지 풋볼 코드 하나는 이튼 필드 게임(Eton Field Game)이다.

    파일:Eton College Wall Game.png


    이튼 월 게임 (Eton Wall Game)


  • 이튼 필드 게임 (Eton Field Game) : 이튼 필드 게임 역시 이튼 칼리지에서 1847년에 고안되어 진행되고 있는 두 가지 풋볼 코드 중 하나이다. 이 게임은 일부 어떤 면에서는 협회 축구(Association football)와 비슷하지만, 오프사이드 규칙인 'Sneaking'은 럭비와 더 관련있기도 하다. 또한, 각 6명 또는 7명으로 구성되는 스크럼 또는 "불리(Bully)"가 있기도 하다. 이 게임은 이튼 칼리지에서 사실상 모든 소년이 최소한 3년 동안 플레이하는 유일한 게임이며, 사순절 내내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튼 필드 게임 (Eton Field Game)

2.2. 럭비 스쿨 (Rugby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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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럭비 풋볼 (Rugby football) : 럭비 풋볼은 영국 워릭셔 럭비에 있는 럭비 스쿨에서 시작되었는데, 럭비 풋볼의 규칙은 1845년에 처음 성문화되었다. 1823년, 럭비 스쿨에서 풋볼 경기 중 윌리엄 웹 엘리스(William Webb Ellis)라는 소년이 공을 들고 상대 팀 골 라인을 목표로 달리기 시작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어 현재 이것을 럭비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럭비 풋볼은 19세기에 영국의 다른 사립 학교들까지도 빠르게 퍼졌으며, 학생들이 계속 럭비를 하면서 대영제국 전역으로 퍼졌다. 1871년에는 럭비 풋볼 유니언이 결성되었고, 같은 해 1871년 3월 27일에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래이번 플레이스(Raeburn Place)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세계 최초 국제 럭비 경기가 치러지기도 하였다. 현재 대다수의 영국 사립학교들은 럭비를 주요 스포츠로 하고 있고, 또한 럭비는 현재 영국 4개 구성국(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을 포함한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등의 영연방 국가에서 뿐만 아니라, 프랑스, 아르헨티나 등 세계 여러 나라들로 퍼져 인기있는 스포츠로 자리잡고 있다.

    파일:England v Ireland.jpg


    럭비 풋볼 (Rugby football)

2.3. 윈체스터 칼리지 (Winchester College)

  • 윈체스터 칼리지 풋볼 (Winchester College football) : 윈체스터 칼리지 풋볼은 윈체스터 칼리지에서 진행되는 풋볼 코드이며, 1825년에 규칙이 표준화 되어졌다. 각각 20명의 "Hot"( 스크럼(Scrum))과 2명의 "Behinds"( 백스(Backs))로 구성된 22명이 한팀을 이루어, College팀과 Commoners팀 간의 경기가 치러진다. 윈체스터 칼리지와 직접 연결된 지역사회 밖에서는 경기가 치러지지 않으며, 경기 시즌은 2학기인 Common Time (1월~3월) 기간에 진행된다. 이 게임은 선수들이 공을 차거나 공을 가지고 달릴 수 있기 때문에 럭비와 다소 유사하다.

    파일:Winchester College Football.jpg


    윈체스터 칼리지 풋볼 (Winchester College football)

2.4. 해로우 스쿨 (Harrow School)

  • 해로우 풋볼 (Harrow Football) : 해로우 풋볼은 해로우 스쿨에서 1858년에 고안되어진 풋볼 코드이며, 11명의 선수로 구성된 두 팀 간에 경기가 치러진다. 해로우 풋볼은 주로 발로 경기가 진행되어지지만, 선수들은 특정 상황에서 손과 팔을 포함한 신체의 모든 부분을 사용하여, 공을 전진시킬 수도 있다. 해로우 풋볼은 협회 축구(Association football)와 오스트레일리안 풋볼(Australian football)을 포함한 다른 몇몇 풋볼 규칙의 조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해로우 풋볼 (Harrow Football)[8]

2.5. 차터하우스(Charterhouse) & 웨스트민스터 스쿨(Westminster School)

올드 차터하우스(Old Charterhouse)에서 진행된 풋볼 경기는 가능한 한 많은 선수들이 참여하는 전형적인 "몹(mob)" 경기였다. 이는 공을 드리블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런어바웃(runabout)"이라고 알려진 실외 경기였다. 실내 경기로는 회랑에서 진행되었는데, 두 팀의 학생들이 대규모의 스크럼 안에서 돌바닥과 벽으로 둘러싸인 복도의 양쪽 끝에 있는 문 쪽으로 공을 밀어넣는 경기였다. 이 경기는 회랑에서 경기가 진행되므로 참가 학생들에게 큰 부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기도 하였다. 1840년대 차터하우스와 웨스트민스터 스쿨 학생들이 풋볼을 할 수 있는 환경은 회랑에서 풋볼을 하는 것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럭비 스쿨과 같은 다른 사립학교들에서 발전중이었던 핸들링 게임의 매우 거칠고 넘어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새로운 규칙이 필요했다. 1860년 대에 협회 축구(Association football) 규칙이 제정되어지는 동안, 차터하우스와 웨스트민스터 학교의 대표들은 패스 게임, 특히 "전진 패스(Passing on)"를 허용하는 규칙들을 추진하였다. 1867년까지 축구 협회는 차터하우스와 웨스트민스터 게임을 지지했고 전진 패스를 허용하는 "Loose" 오프사이드 규칙을 채택하였다. 그러므로 현대의 전진 패스 게임은 차터하우스와 웨스트민스터 풋볼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2.6. 슈류스버리 스쿨 (Shrewsbury School)

  • Shrewsbury School football : 1830년대까지 슈루즈버리에서 했던 풋볼은 그리스어로 노예를 뜻하는 단어인 "douling"으로 알려져 있고, 골은 크로스바가 없었고, 드리블을 선호했으며,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할만큼 의무였다고 한다.
슈루즈버리 학생들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만들어진 풋볼 게임의 초기 역사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830년대 말~1840년대 초에는 자신들만의 풋볼 클럽을 만들었지만, 1846년 "캠브리지 대학 풋볼 클럽"에 흡수되었다. 슈루즈버리 스쿨에는 1863년의 FA(축구 협회)의 규칙보다 앞선 1856년 Cambridge 풋볼 규칙 사본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3. 역사

3.1. 분화 이전


고대의 풋볼은 지금과는 달리 룰이 통일돼 있지 않고 난립해 있었다. 그에 따라 경기 양상 또한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풋볼이 영국 아일랜드 전역에서 행해졌다. 이윽고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풋볼 경기는 지속되어갔다. 단 중간중간 탄압을 겪기도 해서, 1310년경부터 1840년경까지 약 530년 중에 42차례나 풋볼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9]

19세기 초반까지도 지역과 학교별로 룰이 제각각이라 풋볼의 형태는 매우 다양했다. 또한 오늘날의 축구와 럭비, 미식축구 등 모든 풋볼 계열 종목에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라 명문화되어 있는 규칙인 전진 패스 가능 여부와 손 사용 가능 여부인 핸들링(Handling) 가능 여부 등 규칙이 명문화되어 있지 않아 경기 양상이 매우 다양했다. 그에 따라 종목의 명칭 또한 오늘날처럼 축구/럭비 이렇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그냥 '풋볼'이라고 불렸다. 이유인즉슨 규칙이 모두 제각각인 데다 시합의 형태 또한 다양했으니 종목의 정체성이란 게 없었고, 또한 이때는 아직 풋볼이 근대 스포츠로서 종목들의 분화가 이뤄지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근대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태동하는, 다시 말해 초기 풋볼이 오늘날의 축구나 럭비 같은 풋볼 종목들로 분화하기 시작하는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3.2. 럭비의 시작

그러던 1823년 영국 잉글랜드 워릭셔 주 럭비 지역의 럭비 스쿨(Rugby School)에서[10] 풋볼 시합 도중 윌리엄 웹 엘리스(William Webb Ellis)라는 학생이 기존의 방식대로 손과 발을 번갈아가며 공을 드리블하지 않고, 오직 손으로만 공을 들고 질주해 골 라인을 돌파하는 일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오늘날 럭비의 모태가 탄생했고,[11] 손과 발을 번갈아가며 공을 드리블해야 했던 기존의 풋볼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830년대는 공을 손으로 들고 달리는 것은 럭비 스쿨에서 흔한 일이기도 하였다.

허나, 영국 각지 학교에서의 풋볼 규칙은 서로 달랐고, 1845년, 럭비 스쿨 3명의 학생들로부터 가장 유명한 럭비 스쿨(Rugby School)의 ' 럭비 풋볼(Rugby football)'의 규칙이 성문화되었다. 2년 뒤인 1847년에 이튼 칼리지(Eton College) 규칙의 'Eton Field Game'이 만들어졌고, 1848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FA의 규칙 제정에 영향을 준 케임브리지 규칙이 그 뒤를 이었다.[12] 그러므로 공식적인 규칙이 제정된 방면으로 볼 때 럭비가 축구보다 먼저 탄생한 셈이다. Rugby came first

특히, 럭비 풋볼은 1850년대와 1860년대에 영국 전역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잉글랜드에서 부유층 자제들이 다니던 퍼블릭 스쿨에서 발전되고 분명한 규칙을 갖추게 된 풋볼 유형들만이 사회적 인정을 받아 학교 밖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었다. 하여 많은 풋볼 유형들 중 윌리엄 웹 엘리스의 일화와 세계 최초의 풋볼 규칙을 퍼블릭 스쿨에서 만들었다는[13] 전통과 정통성을 모두 갖춘 럭비 풋볼이 영국 전역에서 유행할 수 있었고, 자기 학교 밖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럭비 풋볼뿐이었다.

3.3. 축구와 럭비의 분열 ( FA 창설)

184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이튼 칼리지, 해로우 스쿨, 럭비 스쿨, 윈체스터 및 슈루즈베리 스쿨 졸업생 출신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케임브리지 규칙이 작성되어졌다. 하지만 이 규칙은 널리 채택되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1850년대에 많은 클럽들이 학교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거나 대학교들은 다양한 형태의 풋볼을 하는 영어권 국가들을 통해 형성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14]

이후 반스(Barnes) 풋볼 클럽의 주장이였던 에베니저 콥 몰리(Ebenezer Cobb Morley)는 1862년 벨스 라이프(Bell's Life) 신문에 경기 규정을 위해 명확한 규칙을 제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 기구를 제안하는 글을 실었고, 이 글로 인하여 1863년, 향후 두 종목을 완전히 가르게 될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경기 중 '손으로 공을 들고 다녀도 되느냐라는 핸들링(Handling)의 문제뿐 아니라, '상대편 선수가 자유롭게 공을 빼앗기 위해 넘어뜨리거나, 붙잡거나, 저지하거나, 상대방의 정강이를 차서 넘어뜨리는 해킹(Hacking)을 해도 되느냐'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고 관계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논쟁이 발생한 두 가지 규칙은 다음과 같다:
  • IX. 만약 선수가 정당하게 공을 잡았거나 첫 번째 바운드에 공을 잡았으면 그 선수는 상대편의 골문을 향해 공을 가지고 뛸 수 있다. 그러나 정당하게 공을 잡았을 경우에도 만약 그 선수를 수비가 마크 중이라면 달릴 수 없다.
  • X. 어느 선수든지 공을 가지고 상대편의 골문을 향해 달려간다면 상대편의 어떤 선수라도 저지하고, 붙잡고, 발을 걸거나 정강이를 차거나 공을 빼앗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어느 선수든지 간에 붙잡고 정강이를 차는 행위를 동시에 해선 안 된다.

이 회의에서 핸들링과 해킹에 반대한 자들끼리 모여 만든 게 바로 오늘날 축구계 최초의 협회인 Football Association, 즉 잉글랜드의 FA다. 1863년 창설된 FA(Football Association)는 그들의 경기를 럭비 풋볼(Rugby Football)과 구분하기 위해 어소시에이션 풋볼(Association Football, 협회식 축구)이라 명명했고, 이는 나중에 영국에서 축구를 뜻하는 영단어 사커(Soccer)로 발전한다.

이로써 '축구'와 '럭비' 사이의 분열은 공식화되었고, 회의에 참석했던 럭비 스쿨 졸업생들이 창설한 블랙히스 클럽(Blackheath Club)의 대표 프랜시스 캠벨(F.W.Campbell)은 해킹(Hacking)은 풋볼의 필수 요소라며 풋볼이 완전하게 여성화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상대방을 차는 것을 금지한다면 풋볼의 본질이 파괴될 것이라는 입장을 흔들림 없이 고수했다. 그는 또한 신체적 위험으로 뛰어드는 용기를 잉글랜드의 젠틀맨의 덕목에 있어 가장 본질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캠벨은 해킹(Hacking)에 대한 반대는 고등교육기관에서 양성하는 시민의 용기와 극기라는 이상을 지닌 젠틀맨의 윤리에 대한 반대이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자들이 이러한 반대를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에베니저 콥 몰리(Ebenezer Cobb Morley)를 직접 겨냥한 것이었고, FA 회장으로 선출된 킬번의 노 네임스 클럽(No Names Club)의 펨버(A. Pember)를 직접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은 퍼블릭 스쿨에 다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캠벨은 좋은 학교 교육을 받은 선수들도 해킹을 반대한다는 펨버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따라 캠벨이 이끄는 블랙히스 클럽은 해킹에 반대하는 규칙을 제정한 축구협회(FA)를 곧 탈퇴하였고, 다른 럭비 풋볼 클럽들도 이 선례를 따라 축구협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3.4. 럭비의 체계화

1870년 12월 4일, 리치몬드의 에드윈 애쉬(Edwin Ash)와 블랙히스의 벤자민 번스(Benjamin Burns)는 타임스에 "럭비 클럽들마다 조금씩 다른 규칙을 갖고 있기 때문에 럭비 형태의 경기를 하는 사람들은 공통의 연습 코드를 만들기 위해 만나야 한다."라고 제안하는 편지를 실었고, 결국 1871년 1월 26일, 런던의 Pall Mall 레스토랑에서 열린 회의에서 21개 클럽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럭비 풋볼 클럽들은 럭비 풋볼 유니온을 결성하게 되었다.

같은 해 1871년 3월 27일에는 에든버러에 있는 래번 플레이스(Raeburn Place)에서 세계 최초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간의 국제 럭비 경기가 치러졌으며, 다음 해인 1872년에는 영국 명문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럭비 팀이 최초의 대학 대항전( The Varsity Match)을 치르기도 하였다.

또한 1883년에는 영국의 구성국들인 4개의 홈 네이션스(Home Nations)에 해당하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15][16][17] 매년 서로 경쟁하는 국제 럭비 대회인 Home Nations Championship이 처음으로 열렸고, 1910년 프랑스가 합세하면서 파이브 네이션스 챔피언십, 2000년에 이탈리아가 합세하면서 오늘날의 식스 네이션스 챔피언십이 되었다.

타임스에 따르면, 럭비 경기는 1880년까지도 축구(Association Football)보다 줄잡아 두 배나 많은 선수들을 끌어모았다고 한다. 그것도 잉글랜드 남부의 젠틀맨 팀들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점점 늘어나는 북부의 노동자 클럽에서도 그러했다고 한다. 가령 맨체스터 리버풀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럭비만 했었다. 1866년에도 FA 회원은 겨우 10개 클럽에 불과했다. 문제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두 종목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핵심은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적용이었다. 19세기 유럽 신사 사회에서 스포츠는 순수하게 취미로 즐기는 아마추어를 숭상했고 돈을 받고 뛰는 프로페셔널은 하층민이나 하는 매우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 후로도 럭비 유니온은 1995년 이전까지 엄격히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해왔지만[18], 결국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1995년에 비로소 완전한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전환하였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는 럭비 유니온이 인기가 많고 보편화되어 있지만, 럭비 유니온이 인기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럭비 리그도 같이 활성화돼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럭비라고 부르는 스포츠는 럭비 유니온이고, 럭비 리그는 럭비 리그 혹은 간단히 리그라고 부른다. 하지만, 두 코드의 스포츠는 전세계 대부분에서 간단히 "럭비"로 알려져 있다.

3.5. 축구의 프로화

축구는 공장 노동자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클럽의 노동자 선수들에게 FA를 중심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프로페셔널리즘을 일찍 허용했다. 그 예로 다른 종목의 프로화에 비하면[19] 매우 빨리 시작된 격인 1871년의 프로 대회인 FA컵이랄지, 세계 최초의 프로 축구 리그인 1888년의 잉글리시 풋볼 리그 등이 있다. 여기에 몸싸움이 격하고 부상이 심한데다가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여 상류층들만이 즐겨 세계적으로 잘 퍼지지 않았던 럭비와는 반대로 룰도 비교적 간단하고 훨씬 덜 위험했던 축구는 세계 각지로 널리 퍼져 세계 곳곳에서 프로 리그가 열리는 등 프로화가 삽시간에 진행되었다. 이러한 프로화의 기세에 힘입어 20세기 초반 이후 럭비가 아예 축구를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다.

한편, Soccer라는 단어의 유래를 좀 더 살펴보면 영국에서 Association Football을 하는 사람들을 Assoccer라고 부른 것이 Soccer로 변형된 게 그 시초다. 그러나 축구의 종주국인 잉글랜드에선 축구가 발을 뜻하는 영단어 Foot과 공을 뜻하는 영단어 Ball이 합쳐져 탄생한 단어이므로 지금까지도 축구는 거의 대부분 Football이라고 칭한다. 반대로 미국에서 Football이라고 하면 본인들 나라에서 새롭게 개발한 축구, 즉 미식축구를 뜻하고, 우리가 흔히 축구라고 하는 종목은 보통 Soccer로 칭한다. 때문에 축구의 인기가 높은 유럽 사람들, 특히 종주국인 잉글랜드 축구 팬들 중 일부는 Soccer라는 단어에 대해 불쾌해한다. 우습게도 정작 그 Soccer란 단어 또한 상술했듯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먼저 만들어진 단어임에도.

하지만 그 단어의 유래를 알게 된 축구팬이라면 매우 불쾌할 수밖에 없다. 럭비 스쿨 졸업생들이 창설한 블랙히스 클럽(Blackheath Club)의 대표 프랜시스 캠벨(F.W.Campbell)은 해킹(Hacking)은 풋볼의 필수 요소라며 풋볼이 완전하게 여성화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상대방을 차는 것을 금지한다면 풋볼의 본질이 파괴될 것이라는 입장을 흔들림 없이 고수했다. 해킹을 금지하자는 입장인 Association Football 하는 사람들을 이들은 남자답지 못한 겁쟁이 취급한 셈이다. 이런 배경에서 자신들이 진정한 Football을 한다고 믿는 자들이 Association football 하는 사람들을 Soccer라고 칭하는 것에 비하적 의도가 없을수가 없다. 축구를 Soccer라고 부르는 미국이나 호주에서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축구에 대한 온갖 편견과 비하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3.6. 미식축구의 분화

한편, 대서양을 건너 미국 럭비가 수입되어 이를 드릴(Drill)이라는 군사 훈련과 접목시켜 탄생한 스포츠가 바로 미식축구다. 럭비의 손 사용과[20] 격한 몸싸움, 축구의 전진 패스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종목인 미식축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축구와 럭비의 활동성과는 완전히 다른 첨예한 전선 공방식 스포츠가 되었다. 풋볼 계열 중 형식적으로 가장 높은 자유도를 가진 스포츠가 아이러니하게도 10야드어치의 한 블록을 밀어내려고 사력을 다하는 스포츠가 되었다.

여담으로, 미식축구와 캐나다식 미식축구인 캐나디안 풋볼의 5야드 간격으로 세로줄이 빼곡히 그어진 필드의 모습이 마치 고기를 구울 때 쓰는 석쇠를 연상시킨다 하여 두 종목을 석쇠를 뜻하는 영단어 그리드아이언(Gridiron)을 갖다붙여 그리드아이언 풋볼이라고도 한다.

3.7. 게일릭 풋볼과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마지막으로 럭비에서 무제한으로 손을 쓰는 걸 막기 위해 농구마냥 일정 걸음마다 공을 바닥에다 튕기도록 하는 규칙(바운드)을 만든 게 바로 아일랜드의 토종 스포츠이자 국민 스포츠인 게일릭 풋볼이다. 이러한 규칙 탓에 게일릭 풋볼은 손발을 번갈아가며 공을 드리블하는 경기 양상을 띄는데, 이 때문에 손발을 모두 사용해 공을 드리블했던 고대~근대 초(19세기 초)의 풋볼의 형태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그리고 공을 패스할 때도 농구처럼 그냥 패스하면 반칙으로 처리하고, 핸드볼처럼 주먹으로 공을 치거나(핸드볼) 손바닥으로만 치게끔(태핑) 해서 패스하도록 만든 게 바로 게일릭 풋볼과 호주의 토종 스포츠이자 국민 스포츠인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이다. 둘은 서로 공통점이 많아 매년 시즌 종료 후 인터내셔널 혼합 룰로 국가대표팀끼리 친선 경기를 갖는다.

3.8. 럭비의 남북 분단

럭비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철두철미한 고수는 내부 분열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대다수 선수들이 중·상류층이라 굳이 럭비를 통해 임금을 받지 않아도 되는 잉글랜드 남부 지역 럭비 클럽들과 달리, 북부 지역 럭비 클럽 선수들은 대부분이 공장에서 일하지 못하고 럭비 경기를 뛴 시간만큼 금전적 보상을 받아야 생계가 유지되는 노동자 계층들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럭비 선수들은 손실된 소득을 보상받기 위해 '브로큰 타임(Broken time)'에[21] 대한 지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에 반발한 잉글랜드 북부 럭비 클럽들은 1895년, 아마추어리즘을 엄격히 고수하던 럭비 풋볼 유니온에서 나와 노던 럭비 풋볼 유니온(Northern Rugby Football Union, NRFU)을 결성하였고, 이것이 럭비 리그의 시초다. 비록 노던 럭비 풋볼 유니온(NRFU)이 초기에 즉각적으로 규칙을 수정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조직 모두 처음에는 같은 규칙으로 경기를 치렀었다. 그리고 노던 럭비 풋볼 유니온은 1922년 럭비 풋볼 리그(Rugby Football League, RFL)로 해당 단체의 이름을 바꾸었다. 분단되기 전까지 '럭비 풋볼(Rugby Football)'이라고 알려져있던 럭비 유니온은 분단으로 인해 럭비 리그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럭비 유니온(Rugby Union)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4. 기타

풋볼이라는 같은 기원을 가진 축구, 럭비, 미식축구의 차이와 각각의 핵심 가치는 다음과 같다.
[[틀:풋볼파생비교
풋볼 파생 종목간의 비교]]| 종목 손 사용 전진 패스 핵심 가치
축구 X1) O2) 발을 사용한 볼 컨트롤
럭비 O X3) 공을 든 상태에서의 질주와 돌파
미식축구 O O4) 땅따먹기, 대치, 침투, 저지
1) 단, 골키퍼는 특정상황하에 손을 사용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축구/규칙 참고.
2) 단, 극단적인 전진 패스를 막기 위해 오프사이드로 금지된다. 자세한 사항은 축구/규칙 참고.
3) 공격 팀 선수는 키킹시에도 공 앞에 자리잡을 수 없기 때문에 킥으로 공을 앞으로 보내는 것은 전진 패스라고 볼 수 없다.
4) 스크리미지 라인 내에서 한 다운당 한 번씩 가능하다.

보통 구기 종목 전체에서 가장 많은 관중을 동원하는 그 지역의 최고 인기 종목들이 바로 이 풋볼 계열이다. 아래는 그 예시다.
  • 영국 - 축구(Association Football), 럭비 풋볼(Rugby Union, Rugby League)[22]
  • 미국 - 미식축구(American Football)
  • 캐나다 - 캐나디안 풋볼(Canadian Football)
  • 아일랜드 - 게일릭 풋볼(Gaelic Football), 럭비 유니온(Rugby Union), 축구(Association Football)
  • 호주 - 오스트레일리안 풋볼(Australian Football), 럭비 풋볼(Rugby Union, Rugby League)
  • 뉴질랜드 - 럭비 풋볼(Rugby Union, Rugby League)
  • 남아프리카 공화국 - 럭비 유니온(Rugby Union)[23], 축구(Association Football)
풋볼 계열 종목들 중 세계적으로는 축구의 인기가 제일 많지만, 다른 풋볼 계열 종목들도 홈그라운드 지역을 하나씩은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목할 만한 점은 영국과 아일랜드, 남아공을[24] 제외한 대부분의 영어권 국가들 및 영연방 회원국들에서 축구의 인기가 낮다는 점이다.


[1] 영어, 프랑스어: 풋볼, 프랑스어로는 Foot이라고도 한다. 혹은 관사를 붙여 Le Foot. [2] 스페인어: 풋볼. [3] 포르투갈어: /fu.tɨˈbɔl/ 푸트볼, 브라질 포르투갈어: /fu.t͡ʃiˈbɔw/ 푸치보우 [4] 독일어: 푸스발, 에스체트(ß)가 사라지는 추세기에 Fussball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5] 네덜란드어: 포트발. [6] 러시아어: 풋볼, 실제 발음할 때는 т(t)가 유성음화되어 д(d)로 발음된다. [7] 보통 영국에서 풋볼이라 말하면 축구를, 미국에서 풋볼이라 말하면 미식축구를 말한다. [8] 영상 1분 52초부터 해로우 풋볼 [9]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오프사이드 문서의 2. 오프사이드 규칙 중 5번째 문단 [10] 부유층 자제들이 다니는 퍼블릭 스쿨 럭비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1] 지금도 국제 럭비 최고 기구인 월드 럭비에선 '웹 엘리스'의 질주를 럭비의 모체로 보아 그의 이름을 딴 '웹 엘리스 컵'을 럭비 분야 최고의 대회인 럭비 월드컵의 우승컵으로 지정해 놓았다. [12] 케임브리지 규칙은 FA 창립 초 여러 룰 제정에 영향을 끼쳤지만, 그중에서도 오늘날 축구계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인 오프사이드 룰 제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오프사이드 문서의 1. 오프사이드 규칙은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중 1번째 문단 [13] 1845년 럭비 스쿨에서 만든 럭비 풋볼 규칙. [14] 특히, 케임브리지 규칙은 오스트레일리안 풋볼(Australian football)과 협회 축구(Association football)를 포함한 후속 풋볼 코드들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여겨진다. [15] 이 시절엔 아일랜드섬 전체가 영국의 식민지였기에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구분 없이 아일랜드 자체가 영국의 구성국 중 하나였다. [16] 물론 지금도 서로 으르렁대 단일팀으로는 절대 출전하지 않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축구와 달리 럭비나 크리켓에선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가 럭비와 크리켓이라는 매개체로 단합해 아일랜드 단일팀으로 출전하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17] 여담으로 유독 럭비 경기 시에만 아일랜드는 친영(?)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 북아일랜드와 단일팀을 이루는 크리켓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크리켓엔 영국 구성국 전체가 단합해서 하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에 이런 게 잘 드러나지 않는 반면, 럭비에는 식스 네이션스 챔피언십이랄지, Autumn Nations Cup, British & lrish Lions Tour처럼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가 단합하거나, 아일랜드 단일팀과 영국이 서로 경쟁하거나 아니면 British & Irish Lions Tour에서처럼 영국과 아일랜드 단일팀이 아예 한 팀을 꾸려(!) 다른 국가대표팀들과 대결하는 등 이렇게 나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영국 간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대회가 많다. 가령 매년 치러지는 식스 네이션스 챔피언십이나 Autumn Nations Cup에선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가 단일팀을 이루어 시합에 나서며, British & Irish Lions Tour에선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영국과 아일랜드의 혼합 팀(!)이 4년마다 남반구의 남아공, 호주, 뉴질랜드를 순회 공연하며 저 팀들과 맞붙는다. 이런 대회들 때마다 아일랜드인과 북아일랜드인, 그리고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사이의 그간의 케케묵은 감정의 골이 누그러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아무튼 럭비가 큰 일을 하고 있다. [18] 1900년도 초반에 잉글랜드 럭비 풋볼 협회의 회장직을 역임하고 럭비인으로는 최초로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던 조지 힐 경은 럭비의 아마추어리즘을 외쳤다. 그는“나는 프로페셔널리즘에 굴복하느니, 럭비 협회 조직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을 선택할 것”이라며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럭비 협회는 그들이 다른 스포츠에 결핍돼있는 순결함의 상징인 아마추어리즘을 유지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100년 가까이 아마추어로 남았다. [19] 럭비는 무려 1995년, 럭비 리그는 1895년에 프로화가 진행되었다. [20] 대신 럭비와는 달리 발 사용이 극히 한정돼 있다. [21] 평소 다른 업무에 종사하던 아마추어 선수가 국제 대회나 기타 경기 대회에 참가한 기간 중의 보수나 수당 지급이 중단된 시간을 말한다. [22] 럭비의 정식 명칭은 럭비 풋볼이다. 그러므로 잉글랜드의 럭비 유니온 협회와 럭비 리그 협회의 정식 명칭은 각각 럭비 풋볼 유니온(Rugby Football Union)과 럭비 풋볼 리그(Rugby Football League)다. [23] 과거에 남아공에서 럭비는 우월감을 나타내는 인종차별의 도구로서 백인들에게만 인기가 많았고, 국가대표팀 역시 백인 선수들로만 구성이 되었지만 현재는 남아공 럭비 대표팀 내에 많은 흑인 선수들이 선출되어 경기에 나서고 있으며,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과 함께 흑인 선수가 대표팀의 주장을 맡기도 하는 등 흑인들에게도 많은 지지와 인기를 얻고 있다. [24] 남아공에서 축구는 주로 흑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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