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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불가리아의 국영방송 BNT 1이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불가리아인 100명을 선정했다.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바실 레프스키 | 페터르 더노프 | 아스파루흐 | 시메온 대제 | 흐리스토 보테프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보리스 1세 |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 스테판 스탐볼로프 | 이반 바조프 | 파이시 힐렌다르스키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존 아타나소프 |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 바바 반가 | 토도르 지프코프 | 게오르기 아스파루호프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칼로얀 | 크룸 | 이반 아센 2세 | 블라디미르 디미트로프 | 이반 릴스키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아지스 | 이반 코스토프 | 알레코 콘스탄티노프 | 볼렌 시데로프 | 게오르기 벤코브스키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네노 유루코프 | 슬라비 트리포노프 | 니콜라 밥차로프 | 보이코 보리소프 | 릴리 이바노바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댄 콜로프 | 쿠브라트 | 톤카 오브레테노바 | 게오르기 라코브스키 | 페트코 보이보다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레이냐 크나기냐 | 발야 발칸스카 |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 알베나 덴코바 | 게나 디미트로바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에블로기 | 아타나스 부로프 | 콜류 피체토 | 에밀 디미트로프 | 타르노보의 에우티미우스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사무일 |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 게오르기 파트살레프 | 자하리 스토야노프 | 니콜라이 하이토프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오흐리드의 클레멘트 | 베셀린 토팔로프 | 요르단 요프코프 | 고체 델체프 | 페요 야보로프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라이나 카바이반스카 | 테르벨 | 아흐메드 도간 | 하지 디미타르 | 보리스 3세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네슈카 로베바 | 네베나 코카노바 | 보리스 크리스토프 | 요르단 라디치코브 | 야네 산단스키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디미타르 페셰프 | 엘린 페린 | 바질 아프릴로프 | 아포스톨 카라미테브 | 게오르기 퍼르파노프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딤초 데벨랴노프 | 자하리 조그라프 | 파나요트 볼로브 | 세르게이 스타니셰프 | 시메온 2세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루드밀라 지브코바 | 밀라디노프 형제 | 스테판 카라자 | 니콜라이 기아우로프 | 스토얀카 무타포바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디미타르 스피사네브스키 | 류벤 카라벨로프 | 스테프카 코스타디노바 | 흐리스토 스미르넨스키 | 게오르기 이바노프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페터르 베론 | 발레리 페트로프 | 게오르기 칼로얀체프 | 게오 밀레브 | 브라트사의 소프로니우스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에카테리나 다보프스카 | 디미타르 탈레프 | 토도르 알렉산드로프 | 펜초 슬라베이코프 | 필립 쿠테프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페르니크의 크라크라 | 이벳 라로바 | 파나욧 히토프 | 오무르타그 | 아센 즐라타로브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d01c1f><colcolor=#fff>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제6대 국무회의 주석
토도르 지프코프 Тодор Живков | Todor Zhivkov |
|||
본명 |
토도르 흐리스토프 지프코프 Тодор Христов Живков Todor Hristov Zhivkov |
||
출생 | 1911년 9월 7일 | ||
불가리아 왕국 프라베츠 주 프라베츠 | |||
사망 | 1998년 8월 5일 (향년 86세) | ||
불가리아 공화국 소피아 주 소피아 | |||
재임기간 | 제5대 서기장 | ||
1954년 3월 4일 ~ 1989년 11월 10일 | |||
제36대 총리 | |||
1962년 11월 19일 ~ 1971년 7월 7일 | |||
제6대 국무회의 주석 | |||
1971년 7월 7일 ~ 1989년 11월 17일 | |||
서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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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01c1f><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흐리스토 지프코프 어머니 마루차 지프코바 |
|
배우자 | 마라 말레바지프코바[1] | ||
자녀 |
딸 루드밀라 토도로바 지프코바[2] 아들 블라디미르 토도로프 지프코프[3] |
||
정당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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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3년 동독 동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전당 대회에 참가한 지프코프. | 1972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찍은 사진. |
1954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35년간 장기 집권한 인물이며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의 역사는 사실상 그와 같은 길을 걸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정권 붕괴 후 총살당한 이웃나라 루마니아의 전 독재자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는 달리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축출된 후에도 부정부패 혐의로 인한 재판 참석과 가택 연금 이외에는 커다란 처벌을 받지는 않았으며 실권한 후인 1998년 5월 노환으로 자연사했다.
2. 생애
1911년 소피아 근교의 한 마을인 프라베츠(Правец, Pravets)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난한 가정 사정으로 인해 대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채 고등학교 졸업 학력[4]으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1928년 공산주의 청년 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친 소련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공로로 종전 직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Георги Димитров)에 의해 불가리아가 공산화되자 공산당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어 농업 집단화를 이끌었다.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자 강경한 스탈린주의자였던 벌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Червенков)가 소련의 압력으로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자신은 수상에만 남았으며 온건주의자였던 그가 1954년 3월 4일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니키타 흐루쇼프를 적극 지지하며 불가리아 내에서 탈 스탈린 움직임을 주도하던 그는 권력을 서서히 강화하면서 1956년에 수상직을 차지하고 여전히 권세를 휘두르던 체르벤코프를 개인숭배자로 비판하여 실각시키는 데 성공해 마침내 집권했다. 1962년에 이르면 1인 지배 체제를 사실상 굳혔다. 1인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나서 1964년 흐루쇼프의 축출 후에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 일어나자 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원국으로서 진압군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친소 노선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1965년 마오쩌둥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반 토도로프고루냐(Иван Тодоров-Горуня)와 촐로 크러스테프(Цоло Кръстев)[5]를 위시한 불가리아의 몇몇 정치인들이 온건파 지프코프를 몰아내고 민족주의, 스탈린주의 정권을 설립하고자 했으나[6]발각되기도 했다. 주동자 토도로프고루냐는 4월 8일 자택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고 크러스테프는 시민권 박탈과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8년을 복역했다.
경제 면에서 농업 집중 육성과 산업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시장 경제 요소를 어느 정도 도입하여 코카콜라의 불가리아 진출도 허용하는 등 개방적인 면모를 취했지만 동시에 불가리아 인구의 약 1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던 튀르키예인에게 재생과정(Възродителен процес)이라는 가혹한 동화정책을 실시하는 불가리아 민족 중심의 민족주의적 정책을 펼쳤고 정치 민주화를 억압하는 등 독재자로서의 면모도 드러내기도 했었다. 이 때의 탄압으로 불가리아를 떠난 터키인 중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역도 선수 나임 쉴레이마노을루(Naim Süleymanoğlu, 1967~2017)가 있었는데, 원래 이름은 나움 슐레이마노프(Наим Сюлейманов)였으나 1985년 성씨가 터키풍이라 하여 나움 샬라마노프(Наум Шаламанов)로 개명당했다가 이듬해 터키로 망명하여 불가리아식 성인 샬라마노프를 다시 터키식인 쉴레이마노을루로 바꿨다. 실제로 구 공산권 국가들의 공산주의 독재자들 중 의외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은 말 할 것도 없고 불가리아와 인접한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도 공산권의 맹주였던 소련의 간섭을 거부하고 제3세계의 지도국을 자처하면서 독자적인 사회주의, 민족주의 체제를 구축하며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고 북한의 김일성이 정치적 지지를 위해 주체사상이라는 명분 하에 민족주의를 이용한 전례도 있었다.
3. 몰락
그러나 이 같은 개방 정책은 폴란드,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말에 이르면 석유 파동에 따른 스태그플레이션이 동구권을 덮치면서 한계에 다다르고 불가리아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시행한 개혁 개방 정책의 영향으로 불가리아도 난국을 타개하려고 했지만 지프코프는 고르바초프식 전면 개방 및 정치 개혁에는 매우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특히 정치 개혁은 극도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결국 1989년 들어 민주화 바람이 전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을 강타하자 지프코프의 힘도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날 불가리아 공산당이 지프코프를 공산당 서기장과 총리직에서 해임시키고 후임으로 페터르 믈라데노프를 임명함으로서 지프코프는 35년 간의 독재자 생활을 끝내게 되었다. 1990년 1월에는 당에서도 제명당하고 사기와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1992년 법원은 그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으나 이미 노령인 데다 건강 악화를 이유로 실제로 집행되지는 않았고 대신 가택 연금 상태에 놓여 자서전 집필에 열을 올렸다.
4. 사망
지프코프의 장례식, 소피아, 1998년 8월 9일 |
[1]
Mara Maleeva-Žhivkova,
1936년-
1971년
[2]
Lyudmila Todorova Žhivkova,
1942년
7월 26일-
1981년
7월 21일
[3]
Vladimir Todorov Živkov,
1952년
6월 5일-
2021년
7월 21일
[4]
하지만 당시 불가리아에서
고졸은 결코 저학력이 아니었다. 1925년 불가리아 문해율이 60.3%, 1935년 문해율이 68.6%였다. 고등학교 졸업만 해도 지식청년 취급받던
8.15 광복 직후의 한국을 생각하면 된다.
[5]
전직 주
북한 불가리아대사
[6]
참고로 이들이 롤모델로 삼은 대상이 무려
김일성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