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4 09:48:29

오무르타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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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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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무르타그.jpg
이름 오무르타그
(영어: Omurtag, 불가리아어: Омуртаг)
출생 미상
사망 831년
직위 불가리아 제1제국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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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1제국 15대 칸. 동로마 제국과 30년 평화 협약을 맺은 뒤 불가리아의 내정을 닦고 외적과 내부의 불만 세력을 모조리 정리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린 명군이다.

2. 생애

크룸 칸의 아들이었지만 814년 4월 13일 동로마 제국으로 대대적인 원정을 떠나려던 부친이 갑작스러운 발작과 토혈 후 사망한 뒤 곧바로 칸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문헌에는 814년에서 816년 사이에 두쿰(Дукум), 디츠쟁(Диценг), 그리고 토그(Цог) 등 세 귀족이 통치자로 언급되어 있다. 이 귀족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선 아직 어린 오무르타그의 섭정이라는 설, 칸 직을 찬탈했다는 설, 불가리아 각지의 지배자였다는 설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지만, 어떤 게 맞는지는 불분명하다.

815년 말에서 816년 초,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온 5세가 파견한 제국 함대가 불가리아의 후방 지대인 네세바르 요새를 공략했다. 여기에 동로마군이 동부 트라키아의 여러 요새를 공략하였고, 프랑크 왕국과 연합하여 불가리아를 협공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결국 불가리아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결의했고, 81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30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양측의 국경지대, 특히 트라키아의 경계가 정해졌고, 동로마 제국 내 슬라브인들의 거취는 개개인의 의사에 맡기기로 했으며,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의 이교 신앙을 용인하고 불가리아는 자국 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 않기로 했다.

818년, 다뉴브 강 중부 지역에 거주하는 슬라브계 티모차니 부족이 프랑크 왕국에 합류하려고 경건왕 루트비히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들은 이듬해 크로아티아 공국의 일부로서 불가리아에 남았지만, 루트비히의 통치를 계속 따르려 하였다. 823년,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슬라브인 토마스의 반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오무르타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오무르타그는 헬라클케아 부근 케둑토스 평원에서 반란군을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다. 토마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디아바시스로 후퇴하였지만, 결국 토벌대에게 패배하고 몰락하였다.

오무르타그는 824~826년까지 티모차니 부족의 거취 문제를 놓고 경건왕 루트비히에게 사절을 잇달아 보내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군대를 파견하여 판노니아 남동부에 사는 슬라브족을 복속하였다. 프랑크군은 이에 맞서 군대를 파견했지만, 양군은 큰 충돌을 벌이지 않았다. 이후 양측이 서로 인질을 교환하기로 하면서, 분쟁은 해결되었다. 양측은 도나우 강과 타자 강 사이에 펼쳐진 평야 지대에 슬라브인들의 자치국가 카자르사그를 세워서 완충지로 삼기로 하였다.

오무르타그는 슬라브인들의 분리운동을 모조리 제압한 뒤, 슬라브 족자들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직접 통치를 받게 하였다. 또한 전국을 코미타티(comitati)라 불리는 큰 지방으로 나누어, 각 코미타티마다 카나수비기(Kanasubigi)라 불리는 관리의 통치를 받게 했다. 코미타티는 다시 주피(zhupi)라 불리는 더 작은 지역으로 나뉘었고, 수도 플리스카 주변 지역은 특별한 지위를 가졌다. 또한 더이상 슬라브 보병과 불가르족 기병으로 분리되던 관행을 파기하여 전군을 여러 민족이 뒤섞인 통합군으로 개편하였다.

오무르타그는 811년 니키포로스 1세에 의해 파괴된 플리스카를 재건하면서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였다. 그는 이때 다음과 같은 비문을 세웠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언젠가 죽고 또다른 사람이 태어난다. 나중에 태어난 사람이 이 비문을 보고 이 궁전을 만든 사람을 기억하리라. 군주의 이름은 오무르타크 칸 슈비기(Омортаг хан ювиги)이다. 신께서 그가 100년간 존귀하게 살도록 해주시기를 바라노라.

그는 뒤이어 이교도 사원을 짓고 플리스카를 지킬 요새도 건설했다. 또한 다뉴브 강 인근에 새로운 궁전을 세웠는데, 기둥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겼다.
옛 집에 살고 있는 오무르타그 칸 슈비기는 다뉴브 강에 새로운 영광스러운 집을 짓고, 두 집 사이의 거리를 재고 중간에 봉분을 쌓았노라. 봉분의 중간에서 옛 궁전까지는 2만 개의 봉분이 있고, 다뉴브 강 까지는 2만 개의 봉분이 있다. 땅을 잰 뒤 이렇게 비문을 세우노라. 사람이 잘 살아도 죽고 또 다른 사람이 태어난다. 나중에 태어난 사람이 이 비문을 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을 기억하게 하라. 군주의 이름은 오무르타크 칸 슈비이기다. 그가 백년을 살도록 신께서 영광으로 여기시기를.

또한 투카 다리에 또다른 비문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오무르타그 칸은 그가 태어난 땅에서 신의 왕자이니라. 플리스카에서 궁전을 건설하고 그리스와 슬라브에 대한 그의 힘을 늘렸노라. 그리고 궁전 뒤에 투카 다리를 능숙하게 건설했노라. 그는 요새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 2개의 놋 사자를 세웠노라. 칸께서 많은 불가리아의 적들을 발로 짓누르고, 100년간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살도록 신께서 은총을 베푸시길 바라노라.

오무르타그 칸의 통치 기간 동안, 기독교를 믿는 많은 슬라브인이 불가리아 영내에 귀속되었다. 평화 협약에는 기독교인을 박해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암암리에 박해가 이어졌다. 이는 이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장차 동로마 제국과 충돌할 때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흐리드의 테오필락트가 저술한 <테베르폴의 순교자 15인>에 따르면, 오무르타그의 장남 엔라보타가 기독교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고, 이로 인해 왕위 계승권을 잃었다고 한다. 동시대의 역사가 테오도로스 수투디토스에 따르면, 많은 슬라브인이 기독교 박해에 불만을 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고 한다.

오무르타그는 831년경 사망하였다. 장남 엔라보타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고, 둘째 아들 즈빈니카는 일찍 죽었기에, 셋째 아들 말라미르가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