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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90401><colcolor=#fff> 클라라 슈만 Clara Schuman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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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클라라 요제핀 슈만 Clara Josephine Schumann |
출생 | 1819년 9월 13일 |
[[작센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라이프치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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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6년 5월 20일 (향년 76세)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헤센 대공국| ]][[틀:국기| ]][[틀:국기| ]] 프랑크푸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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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피아니스트, 작곡가, 음악 해설가 |
배우자 | 로베르트 슈만 (1840년 결혼) |
자녀 | 4남 4녀[1] |
[clearfix]
1. 개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음악 교육자이며 본명은 클라라 요제핀 슈만(Clara Josephine Schumann)[2]이다. 독일의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 피아니스트로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로서, 또 요하네스 브람스와의 친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결혼 당시에는 로베르트가 클라라의 남편으로 유명했을 정도로 당대에 이미 유명한 연주자였다.2. 생애
2.1. 초기
클라라 슈만은 독일 연방 작센 왕국의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피아노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5세부터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일찌감치 음악적 재능을 보여서 10살이 되기도 전에 소녀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였다. 11살때인 1830년부터 서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떠났는데, 가는 곳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연주여행 당시 파리에서 바이올린의 대명사 니콜로 파가니니를 만나서 그와 협연을 하기도 했으며 프레데리크 쇼팽은 그녀의 연주를 듣고 감탄해서 친구였던 프란츠 리스트에게 클라라 비크를 극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4]연주뿐만 아니라 작곡에서도 능력을 보였는데, 17세인 1836년에는 그녀가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이 당시 최고의 음악가중 한명이었던 펠릭스 멘델스존의 지휘(피아노는 물론 클라라 본인)로 초연되기도 했다.
클라라의 인기에는 빼어난 미모와 우아하고 기품있는 태도도 한몫했다. 하지만 일찌감치 14살경부터 9살 연상의 로베르트 슈만과 사귀기 시작했으며 평생동안 슈만에게 충실했기 때문에 다른 연애를 할 기회는 없었다. 클라라는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슈만과 연인으로 지냈으며 결국 1840년 21살의 나이에 슈만과 결혼을 하게 된다.[5] 결혼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슈만 항목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결혼한 후 슈만 부부는 서로 음악적 동반자로서 큰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특히 클라라는 남편이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결혼 당시 클라라가 이미 유럽 전역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유명인사였던 반면, 슈만은 북독일 지역에서만 좀 알려진 무명 작곡가에 가까웠으며 출판 사업 등을 벌이느라 나이 30이 될때까지 벌어놓은 돈도 거의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문란한 사생활로도 악명이 높았다.[6]
사정이 이렇다 보니 클라라의 부모 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 결혼이 제대로 유지가 될수 있을지 걱정을 했는데, 실제로도 결혼 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슈만은 결혼 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본인에게 말한 후 대놓고 바람을 피우고 다녔으며, 게다가 더 재능이 뛰어난 클라라를 질투하여 집에서 피아노를 못 치게 하였다. 그나마 자신의 곡은 연주를 허락했는데 이때도 본인의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지 못했다며 훈수를 두고, 호통을 치다 피아노 덮개를 닫아버려 손가락을 다치게 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클라라가 자신의 유명세를 활용해서 유럽 각지에서 남편의 작품을 연주했고, 덕분에 슈만의 음악성이 본격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슈만은 부인에 버금가는 유명인사가 될 수 있었다.
클라라는 음악적인 동반자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작곡 활동을 도왔다. 특히 슈만은 작곡할 때에 굉장히 예민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집안일은 모조리 그녀의 몫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집안일을 떠맡은 상황에서도 연주활동과 작곡활동도 하는 대단한 모습을 보였다. 결혼 전에 엄친딸이었다가 결혼 후에는 성격 나쁜 남편과 함께 살며 슈퍼맘의 삶을 살았던 것인데, 똑똑했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건강체질이었기 때문에 이런 삶이 가능했다.
1844년에는 당시 13살의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을 만났으며 이후 클라라는 평생동안 요아힘과 자주 협연을 하였다. 또 1853년에는 당시 20살이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났으며,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재능과 열정을 간파하고 그를 유럽각지에 소개했다.
(남편 슈만과 함께)
2.2. 남편 사후
하지만 남편 로베르트 슈만이 1854년 2월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서 자살을 시도했으며,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1856년 사망할 때까지 정신병원에 있어야 했다. 그녀는 가장 역할을 할 수 없는 남편을 보살피는 한편 아직 어린 7남매를 길러야 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남편이 쓰러진 이후에는 더 이상 작곡활동을 하지 않았다.대신 연주활동은 상당히 활발히 했는데, 죽기 5년전인 1891년까지 유럽 각지에서 연주회를 개최했으며 1874년에는 미국에서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클라라의 연주회 횟수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1830년부터 계산하면 무려 1300회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남편의 피아노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초연을 했으며 남편이 사망한 후부터는 전술한 요아힘과 함께 자주 콘서트 투어를 다녔는데, 특히 요아힘과는 240회에 달하는 콘서트 횟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의 작품을 비롯해서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고전파 작곡가들과 슈베르트, 멘델스존, 쇼팽 등 낭만파 초기 거장들의 작품을 주로 연주하였으며 제자이자 친구였던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도 자주 연주하였다.[7] 반면 프란츠 리스트 등의 작품은 자신과 음악적 경향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주하지 않았다.
1875년경 클라라는 오른팔에 신경통 증상이 생겨서 약 2년정도 연주활동을 쉬어야 했다. 한동안은 글씨도 쓰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는데, 이후에도 이 증상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고 평생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77년 베를린 복귀연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에도 왕성한 연주활동을 했다.
1878년에는 프랑크푸르트의 호흐 콘세르바토리(Hoch Conservatory)의 교수로 부임했으며 1892년 은퇴할 때까지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뛰어난 음악 교육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교수가 된 이후 그녀는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해서 여생을 보냈다.
한편 브람스와의 관계도 상당히 많이 알려져 있다. 로베르트 슈만이 정신병 증세로 자살하려고 투신했을 때 슈만 부부를 적극적으로 도운 것이 바로 브람스였다. 특히 클라라는 이 때 막내 펠릭스를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는데, 브람스가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는 클라라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덕분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이후 두 사람은 평생지기가 되었다. 브람스는 계속 클라라와 슈만의 아이들을 도와주면서 그녀에 대한 감정을 키워갔으며 이러한 그의 감정은 당시에 작곡된 작품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클라라는 14세 연하의 브람스와 친분은 소중히 여기면서도 연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1896년 클라라는 프랑크푸르트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향년 77세. 남편이 죽은지 40년만의 일이었다. 그녀의 유해는 본(Bohn)의 알터 프라이도프(Alter Friedhof) 묘지에 묻혀 있는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클라라를 연모했던 브람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 클라라가 죽은 다음 해 생을 마감하였다.
(말년의 모습)
3. 연주자로서 클라라 슈만
21세기 이후 클라라의 작품들이 발굴돼서 종종 연주되고 있다. 클라라가 남긴 작품은 그리 많지 않고 주로 생에 초반에 작곡된 것들이지만 나름 작곡가로서의 클라라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피아니스트 측면에서 클라라는 기교와 힘도 뛰어난 연주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클라라 비크 시절인 16세경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들어보면 3악장 내내 옥타브가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강한 손가락 힘이 필요하다. 또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이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2번같은 작품들이 자신의 주요 레퍼토리중 하나였다.
연주경력 초기에는 나름 비르투오조 경향을 보였던 것 같지만 성장한 이후에는 리스트나 탈베르크로 대표되는 기교주의를 배격하는 대신 감성과 표현력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주자가 되었으며 이와 같은 클라라의 연주성향은 자신의 작품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클라라의 연주는 가급적 악보에 충실하고 절제된 연주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자기 색채를 많이 가미하고 상황에 따라 폭주하는 당대의 기교파 피아니스트들과는 분명 구별되는 점이며 이런 측면에서 당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그녀가 나이 70이 넘어서도 연주활동을 하고, 평생 1,300번이 넘는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되었다.
또한 자신을 과도하게 내세우지 않는 클라라의 연주법은 협연이나 실내악 연주에 이상적이었기 때문에 실내악 연주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1300회의 연주회 가운데 절반 가까운 연주회가 협연이었으며 특히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과는 약 240회에 달하는 협연을 했다.
한편으로 클라라는 피아노 독주자가 악보를 보지 않고 외워서 치는 '암보(暗譜) 연주'를 본격 도입한 연주자이기도 하다. 클라라가 최초의 암보 연주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암보 연주를 매우 이례적인 일로 보도하고 있고 이후 암보 연주가 유행한 것을 보면 클라라가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진정한 천재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
3.1. 연주 성향
기본적으로 클라라는 보수적인 음악성향을 가진 음악가였는데 남편 사후 이 보수성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클라라는 소녀 피아니스트 시절에 나름 리스트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지만 클라라 슈만이 된 이후 리스트를 멀리했으며 나중에는 그를 굉장히 싫어했다. 클라라는 악보에 충실하지 않고 자기식으로 연주하는 리스트의 연주 스타일을 경멸했으며 화려한 기교와 장식음으로 점철된 그의 작품성향도 싫어했다. 심지어 남편이 리스트와 친교를 맺는 것을 반기지 않았고 슈만이 리스트에게 자신의 C장조 환타지(op. 17)를 헌정하려는 것을 반대한 적도 있었다(결국 헌정하기는 했다). 1870년에는 리스트의 주도로 성대하게 거행된 빈 베토벤 페스티벌[8]에 초청을 받았으나 참석하지 않았다.또한 클라라는 바그너를 리스트보다 더 싫어했다. 바그너에 대한 태도는 단순히 싫어하는 수준을 넘어 거의 증오에 가까왔는데, 바그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해 '내가 이제까지 들었던 음악 중에 가장 역겨운 음악'이라는 저주를 했을 정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오페라에 대해 끔찍하다거나 타락했다는 표현을 쓰면서 비난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안톤 브루크너를 비롯한 친바그너 성향의 음악가들도 도매금으로 싫어했고 당시 많은 젊은 음악가들이 '바그너의 타락한 음악'을 추종하는 현상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이와 같은 클라라 슈만의 보수적인 음악성향은 클라라를 연모했던 브람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9] 브람스가 리스트나 바그너의 음악성향을 따르지 않고 고전파 시기의 음악에 심취했던 것도 클라라 슈만의 영향이 많이 작용했다.
정리하자면 클라라는 단순히 명 작곡가 슈만의 아내, 당대의 유명 연주자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 슈만의 사후에도 브람스를 비롯한 고전적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버팀목이자 대모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19세기 내내 지속된 바그너, 리스트 등 후기 낭만파 진영과의 경쟁에도 보이지 않는 주역이 되었다. 이 점에서 클래식 음악사에서 그의 영향력은 세간의 인식보다 대단했다고 평할 수 있다.
4. 작품
클라라 슈만의 작품 목록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링크 대부분이 피아노 곡이며, Opus 번호가 붙은 작품은 총 23개까지 있다. Opus 번호가 붙지 않은 미발표곡이나 습작들은 훨씬 많은데, 이 중 상당수가 소실되었다. 다행히도 Opus 번호가 붙은 작품들은 모두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남은 소수의 작품만 살펴봐도 작곡에 대한 그의 재능과 잠재성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많은 클래식 팬들과 전문가들은 클라라가 가족을 뒷바라지하느라 작곡에 대한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하고 있다.4.1. 작곡 성향
현존하는 클라라의 작품을 보면 전형적인 독일 낭만주의의 경향을 따르고 있다.4.1.1. 초기 작품
클라라 슈만의 초기 작품들은 쇼팽이나 멘델스존처럼 상대적으로 동시대 비르투오소 피아노 음악들을 많이 참고한 면이 보인다. 대표적으로 그가 12살에 작곡한 4개의 폴로네이즈(Op. 1)이나, 15살 때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Op. 7)에서 그런 성향이 보인다.[10] 클라라가 1834년경에 작곡한(출판은 1837년) 벨리니 주제에 의한 콘서트용 변주곡(op. 8)를 보면, 당대의 유명한 작품이나 유행가/민요 등의 선율을 주제로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는 변주곡이나 환타지 등을 작곡했던 당대 1급 피아니스트들의 작곡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벨리니 주제에 의한 콘서트용 변주곡(op.8) |
4.1.2. 후기 작품
하지만 '클라라 슈만'이 된 후에는 이런 기교주의적인 성향을 버리고 좀더 구성과 표현력을 중시하게 되는데, 이는 당연히 남편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결혼하기 2년전에 작곡된 d단조 스케르초(op. 10)에서 이미 슈만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결혼 이듬해에 작곡된 c단조 스케르초(op. 14)에서는 좀더 명확하게 슈만 풍의 스타일이 드러나고 있다. 남편이 쓰러지기 1년전인 1853년에 작곡한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op. 20)을 위의 벨리니 변주곡과 비교해서 들어 보면 음악성향의 변화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현주의적 성향은 그의 거의 마지막 작품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3개의 로망스(Op. 22)에서 정점을 찍는다. 클라라 슈만은 이 작품을 당대의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에게 헌정했는데, 이 둘이 같이 떠난 연주여행에서 하노버의 왕 게오르크 5세가 이 곡에 대해 "극도로 황홀하다"라고 격찬한 일화는 유명하다.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3개의 로망스(op.22) |
로베르트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op.20) |
당연하겠지만 슈만 부부는 음악적으로 정말 밀접했다. 단적인 예로 위에 인용된 슈만 변주곡의 제 6변주에 사용된 부점 리듬 등에서는 남편의 영향이 그대로 느껴진다. 또 1845년에는 클라라가 대위법을 활용한 작품(3개의 전주곡과 푸가 op. 15)을 썼는데, 똑같은 시기에 남편도 오르간을 위한 6개의 푸가(op. 60)[11]나 피아노를 위한 4개의 푸가(op. 72)와 같은 대위법을 이용한 작품을 남겼으며 같은 사람이 썼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작곡 스타일도 매우 유사하다. 분명 함께 대위법을 공부하고 함께 작품을 썼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이처럼 클라라 슈만의 작품은 훌륭한 작곡가였던 남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지만 남편의 아바타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고 나름 자신만의 음악적 특징도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인지 음악적 표현에 치중했던 남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피아니즘이 두드러진다.[12] 클라라는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40년을 더 살았으며 브람스같은 대작곡가들과 지속적으로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계속 작곡을 했다면 남편과 확실히 구별되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남편이 쓰러진 후 작곡을 중단해 버렸으니 아쉬울 따름.
5. 가족 관계
남편 로베르트 슈만과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낳았다.1. 마리 슈만(Marie Schumann, 1841–1929)
2. 엘리제 슈만(Elise Schumann, 1843–1928)
3. 율리 슈만(Julie Schumann, 1845–1872)
4. 에밀 슈만(Emil Schumann, 1846, 몇달만에 사망)
5. 루트비히 슈만(Ludwig Schumann, 1848–1899)
6. 페르디난트 슈만(Ferdinand Schumann, 1849–1891)
7. 오이게니 슈만(Eugenie Schumann,1851–1938)
8. 펠릭스 슈만(Felix Schumann, 1854–1879).
아들들은 모두 불우한 생을 살았으며 20세기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큰 아들 에밀 슈만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단명했으며 차남 루트비히 슈만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정신병 증상이 나타나서 이후 여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13] 삼남 페르디난트 슈만은 그래도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결혼도 하고 직장인으로 열심히 살았으나 말년에 마약 중독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14] 막내 펠릭스 슈만은 나름 똑똑해서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으며 결국 24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15]
그나마 네 딸들은 비교적 무난한 삶을 살았다. 다만 셋째 율리 슈만은 예외인데, 한때 브람스가 그녀를 좋아했으나 율리는 이탈리아에 머물때 사귀었던 이탈리아의 귀족과 결혼해 버렸다.[16] 율리는 결혼 후 세 번째 아이를 낳다가 27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오늘날 관점에서 클라라의 일생은 결과적으로 보면 가장인 슈만을 위해 일방적인 희생해야 됐다는 듯한 뉘앙스를 떨치기 어렵다. 클라라는 가정일에 무관심한 슈만 때문에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경력을 상당 부분 희생해야 한 것이다.[17] 슈만의 죽음 이후에도 그와의 사이에서 생긴 자녀들을 오랫동안 돌봐야 했다보니, 전성기를 기준으로도 테크닉적인 발전에 있어서는 당대의 어지간한 남연주가에 비해서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받았다. 비록 그녀가 기꺼이 선택한 일이긴 하지만 일생동안 자신의 음악 대신 남편인 슈만 음악 해석의 권위자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시대상의 한계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나마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파니 멘델스존[18] 등 보다는 나은 편이었이었지만, 동시기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 출신으로 맹활약하던 소피 멘터, 아라벨라 고다드와 같은 여류 피아니스트들의 행적을 보면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6. 기타
- 만년에 브람스와 주고받은 편지를 태워버리려고 했는데, 다행히 장녀 마리가 극구 말려서 이 편지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편지를 없애려고 했던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 2019년은 그녀의 탄생 200주년이었으며 이를 맞이하여 모국인 독일을 비롯한 세계 음악계에서 여러 기념 행사와 연주가 열렸다. 한국에서도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6월에 클라라를 기념하는 전국 순회 연주회를 여는 것을 비롯하여 다수의 관련 연주들이 있었다.
- 클라라 슈만에 관한 책으로는 지난 1985년 낸시 라이히가 쓴 평전이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도 그녀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2019년 <클라라 슈만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1]
이들 중 한 명이 요절.
[2]
결혼 전 본명은 클라라 요제핀 비크(Clara Josephine Wieck).
[3]
생애 초반에는 피아노 협주곡 등을 작곡하면서 다양한 작곡활동을 보였지만 후술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사정때문에 많은 작품을 남기진 못했다.
[4]
이 때는 슈만과 결혼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클라라 비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5]
두 사람은 9월 12일에 결혼했는데, 흥미롭게도 이날은 클라라의 생일(9월 13일) 바로 전날이다.
[6]
슈만 항목에도 있지만 슈만은 이미 20살경에 매독에 걸린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그의 정신병도 매독에 의한 합병증으로 보고 있다.
[7]
클라라가 생애 마지막 연주회에서 연주한 곡도 브람스의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원래 관현악곡인데 2대의 피아노용으로 편곡)이었다.
[8]
베토벤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
[9]
정확하게는 클라라 슈만이 아니라 슈만 부부라고 해야겠지만 로베르트 슈만은 브람스를 만난지 6개월만에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바그너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기 전에 사망했다. 슈만도 리스트나 바그너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아내만큼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10]
물론 어디까지나 후기 작품들에 비해서라는 것이지, 현대의 초등~중학생 정도 나이의 청소년이 이 정도의 곡을 작곡한 것 자체가 대단한 건 맞다.
[11]
엄밀히 말하면 오르간이 아니라 페달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다. 다만 오늘날 페달피아노가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주로 오르간으로 연주한다.
[12]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당대의 다른 기교파 피아니스트들보다는 표현주의적 성향이 짙다.
[13]
루트비히의 출생년도는 전 유럽이 정치 불안에 휘말릴 때였다.
[14]
그나마 페르디난트는 슈만의 아들 중 유일하게 결혼해서 자식을 얻었으며, 덕분에 슈만 가문의 혈통이 이어질 수 있었다.
[15]
펠릭스의 출생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슈만이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할 당시 클라라는 펠릭스를 임신중이었다. 이 때 모친이 받은 충격 때문에 펠릭스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16]
이때 상심한 브람스가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작품 알토랩소디(op. 53)를 작곡하기도 했다.
[17]
그래도 제정신일 때의 슈만은 음악인으로서 클라라의 재능을 온전히 인정하고 있었으며, 이런 상황에 처하도록 만듦에 대하여 미안해하던 기록들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자신의 음악을 더욱 중요시한 것이 사실이다.
[18]
남편 슈만의 친구이자 당대의 명작곡가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도 음악에 재능이 있었지만 좀처럼 활동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뒤늦게 자신의 곡을 발표하면서 독자적인 작곡 활동을 시작하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클라라는 1847년 자신보다 열살 이상 많은 파니와 처음 만날 기회를 얻었고, 자신이 작곡하고 있던 피아노 삼중주를 파니에게 헌정할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같은 해에 파니가 죽으면서 무산되었다.